신데렐라 콤플렉스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현대여성들은 신데렐라 스토리에 많이 비판적이다. 보통 사랑과 결혼에 인생을 걸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대신 남자가 자신을 떠맡아 주기를 기대하는 것,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한 남자의 품으로 도망가고자 하는 것, 이것을 보통 신데렐라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가진 여자는 항상 백마탄 왕자님을 기다린다. 그는 아주 완벽한 조건의 남자에다 용기도 있는 남자여야 한다. 그렇다면 이 신데렐라가 남자에게 자신을 맡기는 무기는 재투성이 인생인 자신의 비참함을 견딘 착함,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외모이다. 왕자에게서도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과 대등한 한 인간이거나, 그녀의 내면세계, 그녀의 능력이 아니라 그녀의 비참함과 그녀의 외모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결혼이 일어나기가 쉽지 않고 일어난다 하더라도 불행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무기가 착함이나 외모만이었을 경우, 여자의 역할은 남자의 부수적인 역할 더 나쁘게 말해서 종속적인 역할에 머물고 더 나아가 소유물로서 취급받기가 쉽다. 처음에 외모에 반한다 하나 남자도 자신에게 의존만 하는 여성을 어느 순간엔 존중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 사랑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도 자기를 소유물로 취급하는 남자에게 더 이상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어하고 독립을 말하는 때가 오게 된다는 것이다.

여성의 외모, 착함은 남자가 여자의 모든 것을 영원히 캐어해줄 만큼 중요한 무기가 되지 못한지 오래다. 나이가 들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생이 깊어진다. 그러면 여자도 남자도 한 순간 불타는 사랑이 아니라 동등한 인간으로서 인간애를 가진 존재로 변해가야 한다.

그러나 신데렐라 증후군에서 빨리 깨어나오지 못한 사람, 그 의존성을 탈피하지 못한 사람은 남자의 본성에 학을 띠고 어느 새 남자가 적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도 남자의 본성을 깨닫고 현실의 인정을 통해서 자기를 빨리 깨우치고 독립적으로 진취적으로 삶을 살아갈 때 이젠 남성과 동등하게 연애의 감정뿐만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로서 인간애를 나누며 성숙하고 원숙한 삶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여자 자신이 여자 자신을 축소시키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비참함, 자신이 고난을 견딘 정도의 보상으로 백마탄 왕자를 기대한다는 것은 안일한 생각이다. 외모만 믿는 것은 더 안일한 생각이다. 이런 여성은 자기 연민이나 의존성에 빠지기 쉽다. 현실은 이런 여성에 더 매몰차다. 여성 자신이 여성의 세계를 한 남자의 세계안으로 축소시키지 말아야 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마음먹을 때 남자에게 더 존중받고 사랑받는 여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랑받는이 단어에 한 없이 집착하지 말고 사랑을 주는 더 없이 넓은 여자가 되는 것도 고려해 볼 일이다. 그렇다면 이 여성의 세계는 한 없이 넓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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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불편의 법칙

 

 

책을 읽다 평등 반발 현상이라는 타이틀을 보고 나는 언뜻 이 말을 떠올렸다. 평등 반발이 아니라 평등 불편의 법칙이라고.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같은 업종의 사람끼리가 너무 차이가 나는 사람보다는 친하게 지내기 쉽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사람의 심리는 그렇지 않다. 예쁜 여자들끼리는 서로 어울려 다니지 않고 친구가 되기 쉽지 않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 이유는 비슷한 조건이 묘한 비교와 경쟁으로 서로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아예 상하관계, 종적인 관계에서 더 편함을 누리고 안정감을 누린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비해 미국만 하더라도 비슷한 조건의 사람끼리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고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 으로 보인다.

그래서 니체도 친구는 서로 향상심을 돕는 친구가 좋다고 했다. 즉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친구가 그냥 편안함만 주는 친구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들은 말로는 니체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말년에 외롭게 죽었다고 한다.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평등한 사람끼리 만났을 때 이런 묘한 불편함을 느낀 적이 모두 있을 것이다. 나도 나와 성향이 같고, 비슷한 나이대의 나와 같은 싱글 여성을 친구로 사귀었는데, 그녀는 일적인 부분에서도 나와 같은 업종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성이 형통하고 잘 나가고 의기양양했을 때, 나는 묘한 주눅이 들고 마음이 상하는 것을 느꼈다. 그 뒤로 그 여성이 불편했다.

그 여성과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관계가 끝났을까. 난 어찌 어찌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갔다. 그 해결방법을 잠간 소개하겠다.

나는 내가 불편을 느낀 이유를 상대방의 문제로 여기지 않고 나의 문제로 여겼다. 내가 교만했거나 그녀를 나보다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 불편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내 마음을 바꿔 이 세상에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고 내 마음을 넓혀 버렸다. 성경에도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란 말이 있다(빌립보서 2:3). 내가 겸손해지는 것이 한 방법이다. 이것은 주눅이 드는 것과는 다르다. 겸손한 생각으로 내 마음을 넓혔으면 다른 한 면으로는 나만의 특성, 자아존중감(self-esteem), 특별함의 정체성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상기시켜야 한다. 여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열심히 정진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진짜로 비슷한 사람끼리 친구가 되었는데 그 친구가 항상 불편하게 한다면 친구로서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의 문제로 여기고 겸손으로 마음을 넓히고 자기가 특별하다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항상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정진한다면 친구도 잃지 않고 본인 스스로도 성장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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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이 인생의 고백이 될 수 있는가?

 

 

궁극적인 철학적 명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그 이외의 것, 세계는 차원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정신은 아홉게 혹은 열 두 개의 범주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

자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마치 멜로 드라마에 있어서처럼, 그것은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에 패배했다는 것, 혹은 인생을 이해하지 못한 고백을 하는 것이다.”

      알베르까뮈 <인생은 부조리에 잠겨져 있다> 중에서.

 


자살은 인생의 고백이다, 이 말은 자살이 많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양 자살을 미화한 것 같다. 분명 자살은 자살을 한 사람의 인생의 고백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백에 얼마나 관심하는가? 차라리 살아있는 사람의 회고록이나 철학자의 인생철학이 아니더라도 인생의 수많은 역경과 굴곡을 이겨낸 작은 영웅(이건 어디까지나 내 표현-소시민일지라도 난 인생의 절망을 극복한 사람을 다 영웅이라고 표현하고 싶다)들의 이야기에 관심한다.

알베르 까뮈의 말처럼 자살은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의 인생고백은 너무나 허무한 것이다. 자살한 사람에게는 그 결정이 정말 치열하였을지 모르지만 타인에게는 그 인생이 비록 어떤 절망에 있었던들 허무감을 줄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예화 중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한 사상가들의 전설 이야기가 나오는 데 참 재미있다. 뻬레그리노는 견유학파의 철학자로서 올림픽 경기 때 사람들이 말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불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소리치며 뛰어들었으나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어서 그대로 불에 타 죽었다. 쥘르 르끼에는 19세기 중엽의 프랑스 철학자로서 모든 지식의 근원에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하고 바다 한가운데로 헤엄쳐 나가다 죽었다고 한다. 이 일련의 예화들은 아무리 지식이 많은 철학자라도 참 어리석다 라는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모든 인간은 어리석다. 그 중 자살하는 사람은 더 어리석다.” 이것이 내 결론이다. 머리가 좋아 세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요리하며 살 수 있는 재간이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미래의 한치 앞도 알지 못한다. (자신은 아는 것처럼 장담하나...). 인생의 어떤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훌륭하고 덕망 있는 사람이라도 그 순간이후의 시간은 알지 못한다.

모든 인간은 알지 못하지만 삶을 살아간다. 주어진 인생,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 거기에는 희망도 있고 절망도 있다. 밑바닥을 구르기도 하고 어떤 땐 뛰어다니기도 하며 어떤 땐 아무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막을 정처 없이 걷기도 하며 그 속에서 인생의 희로애락. 인내와 용기, 절제 등을 배워가지 않는가. 이런 사람만이 나중에 인생이 무엇인지 고백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 자살은 인생의 고백이 될 수 없다. 인생의 고백은 자살을 통하지 않아야 한다. 자살은 인생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포기, 허무만 남기는 것, 자살한 사람은 인생을 고백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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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MOM과의 수상한 데이트

 

제목이 이상하지요. SAEMOM이 무슨 뜻일까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SAE는 한글로 입니다. “new”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SAE라는 한글의 영어 뜻과 MOM의 영어의 원래 뜻을 조합하여, SAEMOM새엄마란 뜻입니다. 그리고 영어 뜻과 한글소리를 조합하여 새로운 맘이란 뜻도 있습니다. 슬슬 더 궁금하시지요. 새엄마, 새로운 마음, 이 두가지 의미를 다 던져주는 분들이 저에겐 있습니다. 그분들은 한 교회의 권사님 들입니다. 저는 목사이고요. 어떻게 한목사에게 권사님들이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다들 궁금하실 텐데, 이것은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수상한일까. 궁금하시지요. 그 이유는 교회 내부에 알려지지 않게 우리들 만의 비밀로 지켜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데이트일까. 그 이유는 목사가 여지 껏 시집 못간 여자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까지 오셨으면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기존 교회에서 기대할 수 있는 권사님들의 이미지, 목사의 이미지가 다 깨어지지요. 권사님들이 딱한 싱글 여목사의 데이트 상대를 해주다가 그만 엄마가 되어버렸어요. 제가 엄마 엄마하고 쫓아 다녔거든요. 저는 이 엄마들 때문에 교회에 대한 저의 순수한 자리를 놓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하실텐데. 교회는 저만의 순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순수의 자리가 깨어지는 아픔을 못내 겪어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을 보듬어 준 분들이 이 새엄마들입니다. 경쟁에 치이고 온갖 가치 폄하와 시기와 질투에 상처입고 그 오랫동안 정들었던 나만의 자리를 내어놓게 되기까지 여러 사연들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그 교회를 나왔지만 교회도 어쩔 수 없다 하며, 끝내 사람을 미워했던 저의 못남을 위로해 주시기도 하고 또한 저를 다그쳐 주시기도 한 분들이 이 새엄마 들입니다. 한마디로 저에게 새로운 마음을 가지도록 격려와 위로를 해 주신 분들입니다. 저에게 맛있는 것들을 제공해주시면서요. 저는 그저 그분들을 모시고 운전 만하면 됩니다.

하지만 못내 아쉬운 것은 아직도 권위를 중시하는 교회내 조직에서는 이 만남이 수상하고 수상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크릿입니다. 하지만 이 데이트는 계속될 것입니다. 이 새엄마들의 따뜻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저의 가슴속에는 항상 순수의 자리가 남겨져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 교회는 다시 아니 영영 못 간다 할지라도 저는 그 자리를 지켜갈 것입니다.  

새엄마들의 사진을 올리고 싶지만 그분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아 저는 오늘 그 분 들과의 데이트 장소였던 강화도풍물시장 벤댕이회무침집 사진을 올리는 것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이런 권사님들과 목사와의 사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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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천진한 친구 이야기

 

오늘 동탄 신도시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대학교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레스토랑은 이 친구가 직접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레스토랑을 소개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친구를 소개하고 싶어서 이 글을 씁니다.

이 친구를 대학교 입학하고 처음 보았을 때 말 걸기도 힘들고 굉장히 시크한 성격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 제 마음이 열린 순간이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이 친구를 아는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친구들이 전철을 같이 타고 왔는데 이 친구가 갑자기 펑펑 울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연인 즉, 그녀의 엄마가 강아지한테 너무 몰입한다고 다른 곳에 보냈는데, 그게 서러워, 그 강아지한테 너무 정이 들어 보고 싶어서 엉엉 울음을 터뜨린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대학생 때 참 어리게 보이고 순진해 보일 수 있지만 그녀에겐 그것이 매력입니다. 저는 그 때 자기가 기르는 강아지를 떼어놓고 그렇게 울 정도면 정말 착하디 착한 사람, 본성에 악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녀를 새롭게 보고 제 마음속에 선입견을 지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우리는 각자 바쁜 사회생활로 뜸하게 소식만 듣고 지냈는데, 어느 날 그녀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을 같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그녀가 신부님을 짝사랑하고 있다고 화두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 번 그녀의 천진성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우리 또래의 여대생들은 남편감은 어떤 조건이면 좋겠다가 대화거리였고 목회자는 당연히 남편감으론 제외되었지요. 당연히 신부님은 거론도 안 되었지요. 그런데 결혼 혼기가 꽉 찬 여자가 신부님을 짝사랑하니 제 눈엔 그게 참 천진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 친구에 대한 선입견을 지워버리고 참 편안한 친구로 마음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와 저에게 공통점이 많이 생긴 저의 생애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제가 갑자기 신앙을 가지고 남편은 꼭 크리스천이어야만 된다고 작정하고 심지어 목사여야 된다고 까지 결심하고 목사님들을 쫓아다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콧대 높던 여대생이 사모가 되겠다고 목사님들만 눈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싱글입니다. 사모도 안 되었고 제가 직접 목사님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생은 한번 바뀌고 두 번 바뀌고 몇 번에 걸쳐 바뀔지 모르는 구나, 내 인생에 굴곡이 있었듯이 그녀의 인생에도 많은 굴곡이 있었고 힘든 일도 많이 있었구나, 라고 그녀와 대화하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의 위로가 되어주고 싶습니다. 그녀의 인생이 다시 활짝 피기를 빕니다. 그 천진성을 알아 줄 멋진 남자도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녀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소개하고 싶습니다. 레스토랑 밖은 5월의 햇살을 눈부시게 받은 수풀림들이 빛나고 안은 현대적인 조명들이 그 밝기를 더해줍니다. 음식도 맛있고, 연회도 결혼식도 소규모로 여기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글은 상업성 글이 아닙니다. 그녀를 파이팅 해주기 위한 제 작은 노력입니다. 이 곳을 그녀를 위해서 알려주고 싶어요. <라피올라>를 검색하시면 주소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많은 연인들이 소개팅도 하고 마침내 커플로 이어져 다시 찾아오는 손님이 많다고 합니다. 요즘 세상에 이렇게 멋진 친구, 멋진 레스토랑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소개합니다.

 

 

 

 

밥에 얽힌 나만의 이야기

 

 

한국 사람들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밥을 먹지 않고는 못 베깁니다. 우리 어머니들의 사명은 옛날부터 남편, 자식 밥 먹이는 거였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자식 4명을 기르시면서 밥 먹이는데 목숨 거셨습니다. 도시락은 하루에 열 개씩 싸고 밥 안 먹는다고 떼쓰면 달래면서 먹이고, 그래도 반찬투정하면 때리기까지 하시고, 그래도 말 안 들으면 돈까지 주시면서 밥 먹으라고 사정하셨습니다. 아니 떠먹여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어떻게 잊고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땐 같은 여자로서 그런 어머니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같은 여자지만 다른 시대의 가치관과 다른 시대의 흐름을 타고 사는 여성으로서 어머니의 가치관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 어머니 뿐 만 아니라 나의 어머니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 엄마에겐 왜 그렇게 밥이 중요할까. 여자의 사명은 단지 밥으로 대표되는 가사노동, 돌봄뿐인가. 여성의 자아실현, 즉 여자로서 조직사회에서 리더로서 서기 위해서는 어떤 땐 돌봄과 배려의 정신이 거침돌이 된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지.

우리네 엄마들은 왜 여자는 밥을 차려주고 안 차려주고, 밥을 해주고 안 해주고, 밥을 먹이고 안 먹이고, 이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까.

집안에서도 나는 오빠가 둘 있지만 나는 같은 여자로서 시누이들이 용서가 되고 이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엄마는 호통을 치면서 내 아들이 불쌍하다고. 며느리가 밥도 안 해준다고... 판단의 근거가 밥입니다.

나는 박사까지 공부하고 결혼해서도 내 자아가 실현되길 바랐는데, 엄마의 신신당부는, 여자가 박사까지 공부해도 결혼해서는 남편 밥은 꼭 차려줘야 한다. 시어머니한테 잘해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충고가 몸에 밴 저는 조직사회에서 당하기에 딱 좋은 여자이고 남성들의 밥이 되기에 딱 좋은 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직도 우리 세대의 어머니들의 그런 사고방식들이 젊은 여성들을 얼마나 눌리고 기죽이고 여성으로서 리더가 되는데 큰 거침돌이 되는지를,

저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조직사회에서 여성들은 항상 남성리더들의 밥이나 챙기는, 비유적 표현이지만, 그런 일들밖에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서도 아무 이유 없이 쫓겨나면, “저 여자가 순종하지 않아서, 나대서, 드세서, 뭐 잘났다고 고개 숙이고 다녀야지,”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이 우리네 어머니들, 우리네 여성들입니다. 그래서 여성들의 적은 여성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특히 겸손과 순종을 미덕으로 가르치는 교회에서 그런 일들은 더 자주 발생합니다. 여성 권사님들의 가치관은 항상 여자들은 남자 목사한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 스텝이나 여자 전도사, 여자 목사 아니 그 사모까지도.

목사와 사모가 부부싸움을 해서 폭력이 일어나면 당연히 여자가 더 힘센 남자한테 당하지요. 그래도 사모가 못 돼서, 라며 온갖 사모 욕을 합니다.

힘센 남자에게 당하는 우리네 여성, 어디서 위로를 받을 수 있나요. 폭력을 당하고도 고작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요.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네 여성들은 같은 여성인데도 왜 남성한테만 굽을까요. 하나님은 왜 그렇게 여성을 창조하셨을까요. 내가 우리 어머니 나이가 되면 이해가 될까요.

이젠 여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밥이라는 함축적인 의미를 다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밥을 대신하는 기능이 현대사회에선 무수히 발전했습니다. 옛날 우리 여성들은 사회진출을 할 수 없었어요. 집안에서 밥을 챙기는 것이 사명이었고 그게 경제적인 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은 능력과 재능이 있음에도 그 밥 때문에 그것을 썩혀가며 참고 살고 순종하며 살아갈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이젠 여성들이 경제적인 능력을 사회에서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젠 같은 여성들이 서로 도와야 그런 여성들이 좀 더 당당하게 좀 더 자유롭게 사회에서 설 수가 있습니다. 남편과 아이를 돌보고 가사노동을 하고 일터에서 야간근무를 하고 그러다 과로사로 쓰러져 죽은 여성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뉴스에서 보았습니다.

우리네 어머니들이여, 아니 여성들이여, 여성의 자리를 가정에서만 국한시켜 제발 으로 여성을 판단하지 말고, 이 사회에서 아니 이 세계에서의 여성의 자리를 넓혀 가는데 동참해 주는 여성이 되길 바랍니다. 여성의 자리를 더 키워나가도록 여성이 여성을 돕는 이 시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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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놓지 말자

 

 

인간이 성인이 되면 그 사람에게는 훈장처럼, 아니면 지울 수 없는 아픔처럼, 가슴마다 칼을 품고 사는 것 같다. 또한 인간은 그 칼로 망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한다. 아니면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무기, 때론 숙청의 무기란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칼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칼은 쇠로 된 무기이다. 인간의 실력, 능력, 또는 재능들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기라 할 수 있다. 이 무기들을 잘 다룬다면 그는 최고의 실력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칼은 갈지 않으면 무뎌지는 법, 그 무기를 갈고 닦지 않으면 무디어지며 쇠퇴하고 만다.

또 하나의 칼의 의미는, 인간은 성숙의 과정 속에서 겪는 많은 아픔이다. 다른 사람의 무기에 찔려 상하고 다치게 된다. 그러나 그런 다침의 과정은 칼을 갈고 닦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각한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무기로서의 칼, 숙청의 의미로서의 칼은 정말 위험하다. 화합과 통합의 시대에 배신, 배반은 이제 구시대적 언어이다. 그러나 요즘 인터넷에 문재인 정부의 숙청이라는 말이 떠돈다. 제발 문재인 정부가 그런 이미지로 가지 않길 바란다. 사유가 부족한 추종자의 말실수겠지 하며 가벼이 여겼지만 혹시 누가 알랴. 권력의 속성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는데...

오늘 아침 문득 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나는 남이 아닌 나를 돌아다보았다. 지난 시간동안 나를 회상해 보았다.

나는 피 묻은 칼로 내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살아왔다. 그 칼로 다른 사람을 찌른 것이 아니라 계속 나를 찌르며 아파했었다.

이런 사람은 정말 바보 중의 바보인 것 같다. 착해 보이나 진정 저 내부는 악으로 가득하여 나를 조금이라도 해한 수많은 사람을 죽인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칼을 휘두를 수 없는 용기 없는 인간이다. 진정 나를 돌아보며 판단해 볼 때...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칼마저 무뎌져 그 칼의 필요를 점점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를 찔렀던 많은 아픔은 사라져 가지만 그만큼 나의 칼은 무디어져 가는 것이 아닐까?

 

칼을 놓지 말자, 그러나 이젠 그 칼로 나를 찌르는 것도 다른 사람을 찌르는 것도 아니다. 칼은 나에게서 나를 방어하는 무기, 나를 높이는 무기,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무기이다. 칼은 나의 핵무기이다!”

 

그 칼을 놓지 말자

다시 나를 긴장시켜본다. 그리고 지난시간동안의 나의 아픔들을 떠올려 본다. 피 묻은 아픔을...

 

 

 

 

친구가 되는 방법, 셀프디스

 

 

관계와 우정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관계라는 말에 익숙할 것입니다. 관계와 공감이라는 말에 수긍하지만 그러나 우정이라는 말에는 왠지 낯설음을 느낍니다. 우정이라는 단어가 이미 고리타분한 언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런지요. 우정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맺는 관계가 더 이 시대에 맞는 세련된 언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SNS로 자신을 알려 관계망을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자신을 알려 그물망처럼 얻은 관계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지언정, 여기에는 정이라는 것이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갈 때 느끼는 정. 그 정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그러고 보면 진정한 인간관계는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식 방법에서 더 강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친구를 어찌 대면 불식하는 인터넷 관계망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자신을 희생하면서 얻은 우정, 이젠 다시 이야기해야할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친구가 되는 방법, 셀프디스

랄프 왈도 에머슨이란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친구를 얻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먼저 친구가 되는 것이다.”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지만 말고 먼저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친구가 되려면 좀 모자란 듯 보여야 합니다. 이 말이 수긍이 가지 않으실 분들도 계실텐데, 좀 잘 나 보이고 가진 게 많아 보이고, 아는 게 많아보여야 사람들이 몰려들고 친구가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전 좀 반대의 생각입니다.

친구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셀프디스하는 것입니다. 셀프디스라는 말을 아실 것입니다. 자신을 깎아 내리는 것입니다. 요즘에 정치인들도 자신의 이미지를 쇄신시키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하는 방법으로 셀프디스를 행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실수나 결점을 인정하면 더욱 인간미를 느껴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실수나 약점이 약이 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을 얻게 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경영에서도 이러한 셀프디스의 방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진짜 있었던 일입니다. 북부 캘리포니아에 라구니타스라는 맥주 회사가 있습니다. 그렇게 유명한 회사는 아니었습니다. 한 번은 이 맥주회사가 공장의 잘못으로 인기 제품인 크리스마스 시즌에 나오는 맥주상품을 제대로 생산할 수 없었습니다. 회사로서는 시즌 예약을 했던 고객들 항의가 예상되는 상황이었고 품질 면에서도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맥주 회사는 그 크리스마스 시즌에 나올 맥주상품의 맛이 별로일 것이라는 사실을 고객들에게 자진해서 알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맥주광고에 아예 라구니타스가 홀리데이 에일을 망침: brown Shugga 대체품 판매고 써놓고 우린들 기쁘겠습니까? 이번 시즌을 이렇게 망치는 게 민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우린 참 별로입니다(we suck)"라는 사과문을 붙였습니다. 그 당시 소수만 알고 있던 라구니타스 맥주회사가 그 후 기사로 검색될 정도로 알려져 유명한 브랜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적이고 진솔한 방법이 사람들을 끈 것입니다.(인터브랜드 지음, <의미부여의 기술>(서울:엔트리, 2014). p.101-102.)

 

셀프디스의 전형, 예수님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셀프디스의 전형이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것, 이것 자체가 셀프디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셀프디스에 거부감을 갖는 분도 계실텐데, 자기 자랑만 하고 자기 지위 내세우고 자기의 우위를 조금이라도 내세운다면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김치 냄새가 나도 흉보지 않을 친구, 외로울 때 따뜻한 차 한 잔 하며 인생을 나누고 싶은 친구, 남의 말을 해도 서로 흉보지 않고 비밀이 샐까 두려워 안 해도 되는 친구, 서로 성공을 빌어주며 영원한 것을 꿈꾸도록 돕는 친구로는 남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니체는 향상심을 돕는 친구, 서로 발전시킬 수 있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느 정도 경쟁관계에 있는 친구가 좋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체는 실제로 친구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들은 바로는 외롭게 죽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친구의 조건은 자기의 우위를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인 것처럼 우리가 자신의 출신, 학벌, 인종, 사회에서의 지위, 부유함의 정도에 상관없이 일터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친구로 접근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서로 친구가 되는 것, 예수님이 좋아하지 않으실까요. 저의 철없는 생각일까요?

제가 오늘 친구해드릴까요. 저랑 커피한잔 하실래요.’ 하고 한번 먼저 다가가세요. 예수님만큼이나 인생의 멋진 친구를 사귀게 될 지 누가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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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얽힌 나만의 이야기

 

 

저는 산을 싫어합니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산하면 많은 안좋은 기억들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몇 개월 동안 산을 내내 오른 적이 있습니다. 한 교회의 프로그램에 자연심방이란 것이 있었는데. 별 생각 없이 젊은 날 남자친구도 없는데 건강까지 없으면 억울하다, 무조건 그 생각으로 산에 오를 것을 다짐했습니다.

제가 산을 싫어하는 이유는 저는 산만 보면 어질어질합니다. 계단 숨 막힙니다. 자연을 심방하고 사랑하기엔 제게 자연이 너무 험난합니다.

저의 자연심방 전적은,

동네 뒷산에도 올라본 경험 없음, 친구와 안산오르다 계단에서 어질어질해서 쓰러지고 중간에 내려옴, 교회의 자연 심방 때 신발이 불편하단 이유로 올라가지 않고 개울가에서 발 담그다 놀다 옴.

이것이 저의 화려한 전적입니다.

아차, 또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쯤 다닐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극기 훈련시킨다고 저의 큰오빠, 작은 오빠, , 이렇게 셋을 데리고 산을 올라갔습니다. 큰언니는 왜 안 따라갔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버지와 우리 셋은 택시를 타고 산 근처까지 가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름도 아차산 입니다. 당연히 저는 어린 초등학생이었고 남자 셋을 따라잡기가 버거웠습니다. 그런데 그 현실의 버거움이 뒤처짐, 드디어 길을 잃음이란 비참함으로 되어버려 저는 울고불고 산을 헤맸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비참함에 무서움까지 있다는 것을 그때 더 느꼈던 것은 한 나이든 아저씨가 저의 손을 붙들고 데려다 주겠다 라고 하면서 저를 이끌고 가는 거였습니다. 저는 따라가다가 직감적으로 나쁜 생각이 들어 뿌리치고 울며불며 표지판을 보았는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저 혼자 어렵게 어렵게 산을 내려와 드디어 아버지를 상봉했는데 어린 마음에 가슴만 멍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을 제일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를 겁쟁이, 의지 박약아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제가 산을 올랐습니다. 북한산 대성문, 인왕산 정상, 팔각정, 탕춘대까지 끝까지 완주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제가 건강해서, 아닙니다. 제 의지가 강해서, 아닙니다. 제가 아직 젊어서, 아닙니다.

그 이유는 첫째,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산을 오래 탄 베테랑들이 나와 함께 하고, 이끌어주고, 손을 잡아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혼자 였으면 금방 내려왔습니다. 조금 숨차면 중간에서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산을 올라가는 길이 참 지루합니다. 올려다보면 오르막길 숨이 막힙니다. 산의 경치를 훤히 내려다보고 즐길 수 있으려면 정상까지 올라야 하기 때문에 올라야 하는 과정의 길은 볼 것도 많지 않고 힘들기만 한 지루한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험한 꼭대기까지 너 쉬지 않고 올라가야 해 그래야지 건강해져 그래야지 정상을 빨리 볼 수 있어, 조금이라도 빨리 보는 사람이 승리하는 거야이래서 죽어라 올라갔으면 저는 쓰러져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쉼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쉬면서 물도 한잔 마시고, 가지고 온 떡도 먹고, 초콜릿도 먹고 그래서 또 힘을 내서 그 오르막길을 한계단 한계단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보다 조금 더 빨라야 이긴다고 재촉하고 서두르면, 즉 쉼과 여유가 없으면 우리는 잃는 게 더 많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연도 잃고 함께하는 사람도 잃고 건강도 잃을 것입니다.

셋째로 응원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제가 조금 지치고 힘들어하면, 함께한 분들이 조금만 올라가면 정상입니다. 힘을 내십시오하고 기다려주고 응원해주었기 때문에 제가 정상까지 가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아이고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힘들어하면 어떡해. 그것도 못해서 어떡할려고하고 빈정대시는 분이 계셨다면 오기로 올라갈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랬다면 그 다음 주에는 자연심방을 따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산을 잘 타시네요.. 이러다 히말라야 가시겠습니다.’ 이런 칭찬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산에 오르는 것을 인생길에 비유하기도 하는 데, 우리 인생길에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고, 쉼이 있고, 응원과 격려가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인생길을 산에 오르는 것에 비유한다면, 인생의 산을 오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상을 탈환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한 사람들, 특히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에 배려라는 가치가 새롭게 부상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약한 사람도 있고 강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산을 오른 기억이 아직도 소름끼치게 저에게 기억되는 것은 왜 산을 오르는 것을 극기 훈련이라는 목적으로 밖에 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왜 목적을 정상을 보는 것, 체력을 기르는 것, 거기에만 가치를 두었느냐는 것이죠. 그 어릴 적이 40년 전이었으니까. 그 시절 그 때의 가치관이 얼마나 여유가 없었는지, 특히 우리나라의 독재군사문화에서 비롯된 스파르타식 훈련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고 성공의 조건으로 여겼던 풍조가 한 어린 초등학생의 기억에 끔찍한 흔적을 남겨놓았습니다. 그때에 왜 나의 가족이지만, 남성들은 왜 함께 한 약한 사람을 배려해주지 않았을까요. 의미를 크게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실수라고 할 수도 있으나, 이제 나이가 먹어 현실이 그와 같음을 알아버린 한 여성으로서의 아픈 경험 때문에 그 기억이 저의 가슴에 또 한 흔적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뒤쳐져도 손을 잡아주지 않고,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혼자 이겨 내야한다고 말하며, 심지어 길을 잃은 사람을 오히려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까지 있으니 세상은 정말 무섭기까지 합니다. 산을 오르는 것은 즐거운 일만은 아닙니다. 힘들고 무서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좀 더 배려하고 기다려 준다면 약한 사람도 그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는데, 무섭고 힘든 일 이겨내라고만 재촉하는 현실이 아직 아쉽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고, 저같이 의지 박약아도 있고, 정신이 약한 사람도 있고, 육체가 약한 사람이 있고, 물질이 약한 사람,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약자와 함께 해주고 재촉하지 않고 함께 쉬어 주고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면 그런 약자도 튼튼해지고 정상까지 느리지만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정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희열을 같이 느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요. 이렇게만 된다면 약육강식의 정글같은 무서운 세상이 정말아름다워질 것이라 믿습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 저는 산에 오름을 통해 정말 중요한 가치임을 깨달았습니다.

 

 

 

40대 싱글녀의 비애, 때론 여자이고만 싶다.

 

 

난 여자이고 싶다. 아니 여성이고 싶다.

때론 남자들과 차별받고 성적으로 모욕을 당하기도 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여자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정말 때론 우아한 여자이고만 싶다.

무거운 노트북을 뒤에 짊어지고 굽 없는 신발을 신으며 스커트를 입은 기억은 손을 꼽아야 하니.

점점 나의 여성성이 사라져 가는 것이 서글퍼진다.

여성들이 사회 현실 속에서 성적으로 차별받고 성적모욕을 당할 때, 전통적인 여성들 그리고 남성들은 그 여성이 어떻게 하고 다녔 길래, 또는 어떻게 행동 했길래, 하면서 비난의 화살을 여성들에게 꽂는 경우가 많다. 정말 여성들은 이중의 상처를 입는 셈이다. 그러나 요즘 현대여성들은 많이 똑똑해져서 여간해선 당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들은 남성들이 성폭행을 당한다나(?)

그래도 옛날의 나처럼 멍청한(그렇다고 지금도 많이 똑똑해졌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여성들이 아직도 많다. 그런 여성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니 말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오래 전일이다. TV에서 제목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스토리를 재미있게 엮어 그 사람의 인터뷰와 같이 내보내는 프로그램을 시청한 적이 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성공한 조성아라는 여성의 이야기였는데 키도 조그맣고 뚱뚱한 그 여자가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것도 의외였지만 그 여자의 그 일에 대한 집념과 자부심 또한 놀라왔다. 인터뷰 중 인상 깊었던 것은 조성아라는 여성이 직원 몇 명을 데리고 조그만 뷰티숍을 경영할 당시 자신의 사업을 홍보할 양이었는지 몇몇 남성들과 여직원들과 술자리를 갖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한국의 남자들 술만 먹으면 여자알기를 뭐 같이 아는지. 짖굳게 부르스를 추면서 엉덩이로 손이 내려가는데. 참다못한 조성아란 여성이 거기에 차려진 술상(?)을 확 뒤집어 업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서 그녀 왈, “정말 확 뒤집어엎었습니다. 여자도 실력만 있으면 이렇게 하지 않고도(영업이니 홍보니 하면서 술대접하는 것)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나는 그 말에 그래 맞아동감의 박수를 보냈다. 그래도 아직도 나는 의심 많은 여성인지 혹시 저 여자가 못생겨서, 거의 남자 같은 모습, 여성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모습, 괜한 열등감을 가진 여성의 영웅적인 과시가 아니었나 ? 이렇게 되물어 보았다.

그러나 또 한 번 놀라게 되었는데. 과거 그 여성의 모습은 연예인 뺨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 여자는 웃으면서 내가 이렇게 된 것은(내가 보기엔 작은 돼지 한 마리로 보이는데) 직업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때고 일을 해야 하니까 불규칙하게 먹다보니까 이렇게...하고 이야기하는 데 정말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다.

나는 그 여자의 시종일관 당당한 모습이 정말 부럽기까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내 마음에 자꾸 실력”, “실력”, “실력이라는 말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 때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진작 나도 나의 일, 나의 전문 분야, 특기를 찾아 실력을 키울걸, 더 많은 집착과 노력을 할 걸, 많은 성공한 사람들의 노력에 비해 하잘 것 없는 노력으로 세상이 불공평하다며 세상을 한탄하며 가부장적 사고를 가진 남자들은 죽일 듯이 미워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반성해보았다. 그 때 당시 나는 그 실력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서 남성들의 쾌쾌한 냄새가 나는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여성성(여기서의 여성성은 여성으로서의 매력에 국한됨)을 잃어가는 것을 한탄하기도 했다.

도대체 이건 무슨 모순인지? 일반적인 여성들이 라면 모두 다 가지는 딜레마일 것이다.

그러나 40대 후반의 싱글녀가 된 지금, 노력으로도 되지 않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여성에게는 있음을 실감한다. 현실의 벽은 그렇게 높고도 높다. 실력, 노력만으로 이 세상의 모든 성공을 다 해석해 낼 수 없다. 나이가 먹어 그걸 알아갔다. 노력의 노력, 그러나 실패의 실패. 그러나 그 뼈아픔이 또 다른 나를 만들어가고, 또 다른 열심에로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생사 일희일비, 새옹지마, 전화위복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이보다 더 나쁠 순 없으랴 하면서 오늘도 나를 세워가기 위해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가고 있다. 잃어가는 여성성을 서글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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