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는 여자

사무엘상 1: 1-18

 

사무엘상 11절은 엘가나라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한나요, 또 한 사람은 브닌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처로 보이는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첩으로 보이는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가족이 매년 실로에 올라가서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사장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였습니다. 엘리는 그때당시 90세로 늙고 영력이 쇠하여진 상태였고 두 아들들은 부패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였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훌륭한 제사장이었던 엘리제사장도 말년에 좋지 못하였습니다. 사무엘상 4장에 보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하고 엘리는 그 소리를 듣자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포커스가 엘가나의 가족입니다. 엘가나가 이 예배를 드리러 갈 때면 제물의 분 깃을 즉 지금의 감사헌금이라 쳐봅시다. 그것을 그의 아내와 모든 자녀에게 주었다고 했는데 한나는 더욱 사랑해서 갑절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첩인 브닌나가 남편의 한나에 대한 사랑이 노골적이니까, 분했는지 그 예배드리는 중에 이 한나를 심히 격분하게 하고 괴롭게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격분시키고 괴롭게 할 정도 면, 애 못났는 여자라고 비웃는 정도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나한테 예배드리면 뭐해, 헌금 드리면 뭐해, 기도드리면 뭐해, 애도 못 낳는데, 너는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거야, 너의 신앙은 거짓이야, 저주받은 거야 저주”. 이렇게 말하면서 긁어댔을 것입니다.

애 못 낳는 것이 한나의 지금까지 쌓아온 신앙과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흔들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한나가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애를 못 낳는다는 것은 여성에게는 심한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도 여자 싱글이 많은데 결혼은 안 해도 애는 낳겠다는 여자가 많아요. 저도 여자라서 아는데 그것이 본능과도 같은 것이어서 애를 낳아 길러보고 싶은 마음이 여성에게는 다 있습니다. 한나 당시 때는 자녀의 출산이 복의 기준이 될 만큼 중요한 것이었고 여성의 역할은 이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 번도 아니고 예배드리러 갈 때마다 브닌나가 염장을 지르는 거예요. 그래서 한나가 울고 먹지를 않습니다. 한나를 사랑하는 남편 엘가나가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아니하고 어찌하여 슬퍼하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이렇게 위로하나 이럴 때는 남편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어찌하여가 성경에 세 번이나 나옵니다. 자신의 아내를 지극히 걱정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남편이 있다는 것도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남편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엘가나는 아내 한나에게 자기를 아들이라고 여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엘가나는 한나에게 권위적인 남편이 아니라 지극히 자상한 남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말이 한나에겐 위로가 안 됩니다. 이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였던 거예요.

그런데 저 같았으면 남편 엘가나에게 브닌나가 내 염장을 지르고 나를 괴롭힌다라고 말을 해서 즉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걸 이용해서 브닌나에게 복수라도 하고 싶었을 텐데..... 한나는 성숙한 여자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남편한테 했다는 말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보통여자 같으면 남편의 사랑을 이용하여 복수라도 하고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겠죠... 그런데 그러면 가정에 분란만 일어나고 가정이 깨지고 남편마저 괴롭게 하는 일이 됩니다. 윗사람에게 자꾸 일러바치는 것을 참소하고 하죠. 참소는 참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직장생활에서 중간상사가 아랫사람을 윗사람에게 참소하고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 엄마가 자식의 잘못된 점만 아버지에게 이르고 이런 일들은 부지기수로 당연히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잘못했으니까, 그 사람을 고치려고 그랬다 하면서, 합리화하는데 이렇게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 마땅합니까. 그렇다면 그 조직이 잘되고 그 가정이 잘 되야 하는데 제가 살면서 잘되는 집, 잘되는 조직 못 봤습니다. 깨지고 분열되고 나가고 가출하고. 경험해봐서 다 아실 거예요. 참소는 하나님의 방법은 아닙니다.

한나는 아무 말 안하고 참았어요. 그리고 하나님께 갑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남편이 날 사랑하나 저는 참 서럽습니다. 애를 못 낳는 것이 무슨 죄라고 제 한평생 쌓아온 신앙생활도 시험받고 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받은 것이라고 저를 폄하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 정말 서럽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여종임을 증명하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아주시옵소서 한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을까요. 마침 엘리 제사장이 와서 한나를 보았는데, 속으로 말하고 입술만 움직이므로 술에 취한 줄 알고 술을 끊으라고 충고를 합니다. 이 한나가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당대의 최고의 제사장이 이제 나이도 먹고 영력도 떨어져서 기도하는 것과 술 취한 것도 분간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은 그 예배드리는 곳에 술 취한 사람도 종종 온다는 것이고, 아니면 목회자가 술을 먹고 그래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분간을 못하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의 교회가 어땠는지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한나는 그때당시 점점 타락해가는 교회에 더 심정이 동해서 정말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서원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한나는 엘리를 무시하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요새 같으면 점점 타락해가고 자식들도 부패하고 망해가는 목사 존경이나 하겠습니까.

한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마음이 너무 슬퍼서 하나님께 제 심정을 토로한 것 뿐입니다. 저를 악한 여자로 보지 마세요. 제가 원통함과 한이 많아서 그럽니다. 목사님. 목사님 어떡하면 좋아요.

그 엘리에게도 한나의 진심과 비장한 마음이 통했는지 엘리가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래도 목사님에게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 엘리 목사님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엘리에게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하고 마음이 환해져서 돌아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이 없었더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한나의 위대함은 자신의 억울함을 남편의 사랑, 사람에 힘입어 해결하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아 기도한데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를 존중했습니다. 그 당시 그 목회자가 타락해간다는 소문도 있고 자식들도 엉망이다라는 소문이 있어도 목회자를 존중하고 당신의 여종이라 고백하면서 은혜받기를 원했어요. 그리고 정말 믿음에, 신앙에 욕심이 많은 여자였어요. 자신의 자존심은 건드려도 자신의 신앙을 건드리는 건 용납을 못했어요. 그래서 한나는 자식을 하나 주세요이렇게 기도 하지 않고 이 자식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서원까지 한 거예요.

우리는 한나는 간절히 기도해서 자식을 못 낳았다가 자식을 낳았다 라는 정도로만 한나의 이야기를 기억하는데 좀 더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을 참 사랑했어요. 자식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폄하되는 것을 자존심이 상하는 것보다 더 못견뎌한 여자예요. 그래서 그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자식을 하나님께 드린 겁니다. 그래서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을 낳고 젖 뗀 후 바로 하나님께 바로 드립니다. 독한 모성이예요.

간절히 기도하면 한나 처럼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단순히 기억할 것이 아니라 한나의 인격, 믿음, 신앙을 다 두루 살펴보아야지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한 잔꾀를 사용하지 않고 오래 참았다는 것, 해결방법을 하나님께 기도로 찾았다는 것.,, 목회자가 어떤 평을 듣던지 간에 목회자를 존중했다는 것, 기도의 목적을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보다 하나님 편에서 유익을 찾았다는 것. 신앙에 있어선 누구보다 자존심이 센 여자였다는 것.

이것이 제가 바라 본 한나라는 여자입니다.


제가 부탁드리는 것은 자식이 있고 없고, 부자가 아니고 부자고, 이런 겉모습, 현상으로 한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 사람의 신앙마저 평가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복이고 저주고 이런 말은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상에 나타나는 모습으로 그 사람이 복을 받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성공과 행복은 개인의 기준에 달려있고 하나님의 복은 물질적인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즉 눈에 보이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축복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 브닌나가 되지 마세요. 혹시 여러분 주위에 브닌나 같은 사람이 많더라도 한나같은 사람이 되세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오래 참고 기도하고, 남편 사랑보다 하나님 사랑을 더욱 찾는 사람이 되세요. 목회자를 존중하세요. 그런 어머니가 사무엘 같은 이 시대의 위대한 지도자를 만들어 낸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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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밧 과부, 무엇이 특별했길래

(누가복음 4:25-26/열왕기상 17:8-24)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예수님이 자라신 곳 나사렛에서도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그 땅에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다. 이렇게 말씀하신다음에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이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선택된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을 것입니다. 흉년 중에 과부살이하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고 모두 불쌍한 지경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그 과부 중에서도 오직 한 사람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만 일어납니다. 엘리사 때에도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나 하나님의 역사는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만 일어납니다.

 

오늘 날도 많은 불쌍한 사람이 있으나 그 불쌍한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 옛날 엘리야 시대 때 한 과부, 그 과부에게 어떤 특별한 점이 있었길래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을까. 물질의 회복뿐만 아니라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기적까지 경험하는 그 큰 역사를 본 그 과부에게 어떤 다른 점이 있었을까. 물론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고 우리가 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였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저는 오늘 그 과부를 연구해 보았습니다.

그 과부의 이름은 사르밧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과부를 점찍어 놓으시고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엘리야야 이 사르밧과부에게 가라 그러면 이 과부로 하여금 네게 음식을 주게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과부의 상황이 어떠한 상황인지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삼년이상 흉년이 들어 있었고 그때당시 여자는 경제적 능력이 없었고 더군다나 과부여서 아들하나 데리고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었을 거라는 것이 상상이 가실 것입니다.

그 때 그 과부는 마지막으로 먹을 것을 찾고 이제 죽자,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한 제사장이 나타나서 지금시대의 목사라고 해봅시다. 그 목사라는 사람이 물을 좀 주시오, 그러는 거예요. 그 정도까지는 참을 수 있습니다. 그 과부는 물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떡 한조각을 가져다 주시오, 그러는 거예요. 그 과부 속으로 기가 찼을 것입니다. 나도 먹고 죽으려고 하는 이런 형편 다 알면서 목사라는 사람이 물 바쳐라 떡 바쳐라 저 사람이 주의 종일까. 사이비는 아닐까. 벼룩의 간을 빼먹는 좀도둑일까. 저 같으면 이런 생각을 다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 과부는 자기의 사정을 말합니다.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통의 가루, 기름 조금뿐인데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마지막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내 아들과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 제사장이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는 날까지 통의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 그러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은 어떤 행동을 하시겠습니까. 없는 형편이지만 주의 종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라야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마음이 더욱 강퍅해져서 나도 죽을지경인데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하면서 사이비 목사의 말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의심이 생겼을 수도 있었으나 믿음을 택했고 순종을 택했습니다. 예전이나 이 시대나 자기가 극심한 상황에 주의 종의 황당한 요구에 순종하는 거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쉽습니다. 어차피 죽으려고 했던 것 주의 종에게나 드리고 죽자 이렇게 마음먹으면 쉽습니다. 그러나 주의 종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요즘 시대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순종의 역사로 그 과부의 집에는 통의 가루와 기름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신기한 물질의 축복입니다. 정말 자신도 어려운 지경에 주의 종도 지금 제대로 못 먹고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그 주의 종을 도운 것이 그렇게 축복을 받을 것이라곤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어려운 지경에도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 특히 주의 종을 돕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축복만 계속되면 좋으련만 물질의 축복을 받고 주의 종을 모시고 있어도 시련은 또 찾아오고 고난은 또 찾아옵니다.

이 과부에게는 정말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라는 것이 짐작하고 도 남음이 있는 과부의 아들이 죽습니다. 이 과부에게는 청천벽력이었겠죠. 이런 일을 당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의 목사에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람마다 이건 만은 절대 안돼요. 하나님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이건 만은 안되요,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자존심, 어떤 사람은 돈, 어떤 사람은 자식, 어떤 사람은 애인, 어떤 사람은 자신의 외모, 건드리면 바로 뚜껑 열려 버리는 자신만의 성벽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너졌을 때 아무리 자기에게 신기한 물질의 축복을 준 주의 종이라도 원망하게 됩니다.

이 여인이 바로 엘리야에게 한탄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이 여인이 엘리야를 원망합니다. 왜 내게 오셨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자기를 도와준 것은 깡그리 잊어버린 채,

왜냐하면 엘리야로 인해서 자신의 죄가 생각나서 내가 너무 괴롭다는 것입니다. 내 죄 때문에 아들이 죽은 것은 아닐까, 그 죄책감 때문에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내 아들을 죽게 한 것은 아닐까, 이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워서 결국 엘리야에게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왔냐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합니다. 예수 믿지 않았으면 내가 이렇게 괴롭지 않았을 텐데 예수 믿지 않았으면 이런 고난도 받지 않았을 텐데 예수 믿고 나서 내 죄가 생각나고 조금만 잘못되면 내 죄 때문이다 라는 죄책감 때문에 너무 괴롭다. 누구는 나보다 더 큰 죄를 지어도 잘만 살던데... 예수 믿지 않고도 잘만 살던데... 하면서 조금만 고난이 닥쳐오면 오히려 이런 원망을 합니다. 내 죄를 상기시키는 주의 종이 미웁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깊어지지 않고 극복과 승화가 되면 오히려 축복이 됩니다. 자기의 죄를 기억하는 심령, 가난한 심령이 축복의 조건이 됩니다.

만약에 이 과부가 엘리야에게 너 때문에 이런 재앙이 일어났다. 다 너 때문이다. 했다면 적반하장이었겠죠. 엘리야 덕에 물질의 축복을 받은 것은 기억 못하고 다 원망했다면 이 과부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는 내 죄가 생각나서라는 말을 합니다. 아들이 죽은 것을 바로 엘리야랑 연관시키지 않고 자기의 죄와 연관시킵니다.

내 죄 때문에..... 내 죄 때문에 ..... 이것이 구원받는 조건입니다.

그러자 주의 종 엘리야는 책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했고 아들은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고백합니다. 엘리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는 말씀이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위대한 엘리야 제사장, 능력 있는 주의 종을 들여다 본 것이 아니라 흔하디흔한 존재, 주목받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인 존재인 한 과부를 들여다 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 믿음이 충만한 사람도 아니고, 그저 가난한 한 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먼저 하나님이 선택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과부는 어려운 지경에도 강퍅한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주의 종의 말을 들었고, 재앙과 고난에 자기 죄를 기억하는 가난한 심령이 있었기에 이것이 구원의 조건, 축복의 조건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믿게 된 것을 되돌아보면 이 과부의 행동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 믿은 것 예수님이 이미 선택하시고 나를 찾아와 주신 것이고, 내가 주의 종의 말을 들을만한 믿음이 있었기에, 세상 속에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크리스천이 되었고, 내가 고난을 만나도 내 죄가 기억나기 때문에 괴롭고, 괴롭기 때문에 회개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더 나아가고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고 기적입니다.

 

이 사르밧 과부, 무엇이 특별했는지 이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특별한 것 우리 모두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예배드리는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이 사르밧 과부의 특별한 축복을 누리는 사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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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경직성과 유연성

 

마가복음 3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가를 가지고 시비를 걸고 예수님을 고발하려 한다. 이에 예수님은 아주 통쾌한 말씀을 하신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사람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보시고 탄식하셨다고 한다. 그들은 결국 회개치 못하고 오히려 이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죽일 것을 의논한다.

 

이 이야기를 다 알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문자에, 형식에, 외연에 매달려 예수님을 죽이려는 빌미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의 성취시기 때문에 율법의 외연을 넘어 내면과 그 정신의 실천에 관심이 있으셨다. 즉 예수님은 거룩한 안식일에도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이 우선순위로도 따질 수 없는 가장 값진 일임을 몸소 보여주셨고,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천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의 외연에 매달리는 신앙의 모습을 현대인의 신앙생활에도 볼 수 있다. 주일 성수를 목숨 걸고 지키는 한 극 보수의 신앙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자기가 지금 눈이 나빠 안경을 끼는 것은 어렸을 적에 딱 한 번 주일 성수를 어긴 적이 있는 데 그것 때문에 벌을 받아서 그런 거라고.

왜 그 사람은 그런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 안식일 즉 주일까지도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주신 것인데 주일 성수를 한 번 어길 때 마다 벌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면 살아남아 있을 신앙인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런 신앙은 율법의 정신이 아니라 문자에 매달리는,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이어지기 쉽고 자신도 쉽게 죄책감에 빠지고 남도 쉽게 정죄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위해 오셨다. 이것만 깨달아도 남을 쉽게 정죄하거나 자신을 부끄러워하거나 죄책감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거나, 축복보다는 벌을 먼저 말하고, 사랑보다는 회개를 먼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 친구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녀는 나를 전도했다. 그 때 나는 문제를 안고 있었고 절망과 실연의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회개하여야 한다. 기도하여야 한다. 안 그러면 지옥 간다. 그런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고 자기가 대단한 영성을 가진 해결사인 듯 어떤 대책도 내게 말하지 않았다. ‘교회 와볼래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그녀의 따뜻한 인도에 의해 교회에 와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라는 자양분속에서 예수님을 알아갔다.

율법부터, 당위부터 강조하면 신앙은 경직되고 정죄,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자유함과 따뜻함 그 속에 넘치는 사랑이 있으면 그 신앙은 유연성을 가지게 된다. 정죄,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죄를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도 찾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형식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다. 형식으로 사랑을 이루려고 하지 말고 사랑이라는 자유함 속에서 형식을 이뤄나가는 것이다.

사랑을 먼저 하면 율법을 지키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그 외연을 자연스럽게 성취해 나간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할 때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는가.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몇 시간 마다 아기에게 밥을 주어야 하고 몇 개월마다 아기에게 예방주사를 놓아야 하고... 이것은 원칙이 아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면 안하려야 안할 수 없는 일들이다. 사랑이 먼저 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성취하는 행동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먹고 자란다.

신앙의 유연성을 가지자, 사랑에서 오는 자유함이 먼저다. 이럴 때 남을 정죄하고 자신도 정죄하는 가장 사악한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약속을 할 때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약속자체가 큰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약속을 지켜내려 애쓴다.

형식이면의 내면, 그 알맹이를 숭고히 지키려 하면 외연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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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기적의 조건

 

한 자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코맹맹이 소리였다. 감기라도 걸렸나 걱정을 했더니 찬양을 듣다가 울었다고 한다. 그 소리가 얼마나 귀하게 느껴지던지. 그 자매는 지금도 하나님을 붙들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찬양을 듣거나 부르거나 할 때 눈물을 흘린다는 것, 기도할 때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가 얼마나 간절한지 알게 해준다. 그 눈물에 간절함이 묻어나오는 것이다. 그 눈물 속에서 그 사람의 감성과 만나고 결국 그 사람의 영성을 엿보게 된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불도저처럼 밀어 붙이는 영성이 아니라 절망과 만나고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영성이 눈물의 영성이 아닐까. 하나님은 그 영성을 사랑하신다. 그러니까 히스기야가 병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신 것이다. 그 증거로 해시계를 10도 뒤로 물러나게 하는 자연의 순리까지 움직여서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에 온 맘과 온 정성과 온 힘을 다해 그 증거를 보여주셨다. 병이 낫는 기적을 베풀어주신 것은 물론이고.

히스기야는 기적의 주인공이었고 조건은 기도의 날 수도 아니고 기도의 시간도 아니고 금식기도도 아니고 안찰기도도 아니고 방언기도도 아니고 단지 눈물의 기도였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낫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무리를 먹이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베푸시기 전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위해 우시는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기적을 베푸시기 전에 박수치고 북치면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불 받아라 하는 식의 제스처, 퍼포먼스도 보이시지 않았다. 그는 눈물을 보이셨다. 그것은 허망해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불쌍함, 그 이유에서 나오는 애틋함, 그것이 하나님께 상달되기 원하는 간절함, 그것이 어우러져 눈물로 승화되고 결국 눈물의 역사가 기적의 역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눈물은 허망함,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기대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애절한 표현, 하나님의 애간장까지 녹일 수 있는 절실하고 간절한 표현의 양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여인

(마태복음 1:17)

 

마태복음 첫 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온다. 그 족보에 여성의 이름이 4명이 오르는데,

첫 번째는, 자신의 시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다말, 두 번째는 창녀출신으로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도와주었던 라합, 세 번째는 우리야의 아내, 즉 밧세바,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셉의 아내 마리아.

 

이 여성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를 만큼 위대한 영웅들로 칭송받을 만하지 않다. 그리고 너무나 정숙한 여자들도 아니다. 다말은 자신의 시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애를 낳아 자신의 생존, 가계의 보존을 위해서 소극적이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쟁취하고자 도모했던 여인이다.

라합도 마찬가지로, 정숙한 여인이 아니라 창녀출신이었으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도운 여인이었다. 세 번째 우리야의 아내, 즉 밧세바는 장군의 아내로서 정숙하였을지 모르나, 다윗에게 강간을 당하다시피하여 임신을 하게 된 경우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셉의 아내 마리아는 남자를 가까이 한 적이 없으나 동침하지 않고 임신을 한다. 그래서 결국 예수를 낳는다. 이것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믿기지 않을 만큼 괴이하다.

이에 보듯이 하나님의 방법은 세상의 방법과 다르다. 세상의 방법은 높은 집안일수록 자신의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엄격하고 엄격한 조건으로 정숙한 여자를 집안에 들이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여성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엉망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공통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 그 신앙심은 투철했다. 모두 상식적으로 믿기지 않는 방법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으나 그들의 신분이 어떠했든지 간에, 어떠한 방법으로 임신을 하였든지 간에 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 그 믿음은 투철했고 모두 그 하나님에게 순종한 여인들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성경은 여성에게 정숙만 가르치는 도덕교과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여인들은 그 방법이 어떠하던지 간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여인들이었다. 어떤 일을 당하던지 간에 그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 결국, 믿음과 순종이 답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개인의 믿음의 선택으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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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품꾼이야기(마태 20:8-14)

 

 

성경에는 포도원 주인과 품꾼들의 비유가 나온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불러서 일을 시키는데 오전에 온 사람이나 오후에 온 사람이나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다 같은 품삯을 주었다. 그러자 먼저 와서 일한 일꾼들이 불평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받은 몫은 정당하지만 다른 사람이 받은 몫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교에서 나온 불평이었다. 자신의 의로 포도원 주인의 은혜를 판단하고 불평한 것이다.

교회를 떠났다가 돌아온 어느 분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학창 시절 교회에서 이 이야기에 대한 설교를 들었을 때 의심을 넘어서 분노가 일어났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나와 교회를 섬긴 사람과 느지막하게 주님을 믿은 사람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 다면 그처럼 불공평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불공평한 분이라면 믿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교회를 떠났다. 그리고 지극히 세상적인 삶을 살다가 나중에 나이 들고 어려울 때 다시 하나님께 돌아왔다. 그런 다음 생각해보니 자신이야말로 포도원에 가장 늦은 시간에 일하러 온 농부지만 먼저 와서 일한 일꾼들과 똑같은 은혜를 받은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의 공로는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는 모두 포도원에 마지막으로 불려와 품삯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의 값싼 노력으로 큰 은혜를 받은 것이다. 거저 받은 것이다. ‘은혜그 자체가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없는 자들에게는 불공평함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불공평함이라는 그 은혜 때문에 내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적 시각에서 욥이 영웅인 이유

 

 

 

 

욥이 영웅인가? 기독교인들은 욥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지만 영웅으로 부르지 않는다. 영웅이란 말 자체가 지극히 기독교적 시각이 아닌 인간의 입장에서 생성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에게 시작된 불운(여기서는 하나님의 허락하에 사단이 한 시험)에 그저 포기와 방관으로 있었을 뿐이다. 단지 그가 다른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없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 그리고 자신마저도 하나님의 것이며 철저히 하나님의 임의대로 할 수 있음을 고백한다.

 

“Naked I came from my mother's womb,

and naked I will depart."

The Lord gave and the Lord has taken away;

may the name of the Lord be praised."(Job 1: 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욥은 자신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자신이 태어남을 저주하였다. 욥도 지극히 약한 인간임에 불과했다. 욥의 고백대로라면 주시는 자 취하시는 자도 모두 여호와다. 그렇다면 왜 욥은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했는가? 생명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저주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보면 욥은 고난에 직면하여 지극히 약할 수 밖에 없는 연약성을 가진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축복을 받았다. 그가 축복을 받은 경위를 살펴보자.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기 전에는 항상 고난이 있었다. 보통 인간의 고난의 원인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둔갑한 인간의 실수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욥의 고난의 경우는 욥의 잘못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단이 직접 개입하는 것으로 언급된다. 이 점에서 욥 자체의 인간의 캐릭터가 어떠한지를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욥이 흠이 없는 순전한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해, 즉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착한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단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것이 욥의 고난의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욥의 고난은 더 처절하고 잔인해 보인다. 그러한 고난속에서 욥은 여느 인간처럼 원망도 하고 저주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그 원망과 저주 두려움을 모두 하나님과 함께 하였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저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나온 다른 인물 예를 들자면, 모세, 야곱이나 요셉이 축복을 받은 경위와 같다. 그는 하나님을 잊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

예를 들어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와 싸워 이겨 축복을 받은 경우이다. 이 경우는 적극적으로 축복을 쟁취한 경우이나 욥은 아니었다. 욥은 앉아서 당했지만 그 당함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욥의 캐릭터는 야곱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야곱처럼 약거나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욥은 착한 사람들이 당할 수 있는 고난을 대변해준다.

욥을 영웅이라 표현하는 것은 왠지 어색하지만 어쨌든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욥은 잘못이 없는 흠이 없는 순전한 사람이었고, 고난속에서 느낄수 있는 인간의 모든 감정을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즉 교류속에서 해결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축복에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다. 성경에 다른 인물들의 기록과는 달리 욥은 하나님께서(하나님이 직접 언급이 됨) 복을 주셨다 라고 기억되어 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the lord made him prosperous again and gave him twice as much as he had before (Job 42:11)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The Lord blessed the latter part of Job's life more than the first. (Job 42:12)

여호와께서 복을 주사 처음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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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에서 드러난 God

 

 

한 민족의 탈출을 계획하고 주도하는 역사의 하나님. 인간사의 사소한 일들, 사랑, 질투, 배반들에 세세히 엮여있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의 이미지가 아니라 구약의 하나님은 너무나 웅대하다. 그 웅대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략과 계략으로 구체화되어 드러난다. 구약의 하나님은 전적으로 모든 일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이고 인간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믿음뿐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영웅스러움은 축소된다. 인간에 대한 평가는 신앙 즉 믿음으로 되어질 뿐이다. 즉 모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것뿐, 자신에게 보여진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것뿐이다. 모세는 자신의 연약함과 단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우발적이었지만 사람을 죽였고 피신하여 아주 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구약의 하나님은 완전하지 못한 자를 하나님의 계획에 중대한 인물로 사용하셔서 마침내 출애굽의 역사적인 사건을 이루어 내었다. 모세는 대변자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계획하고 바로 왕에게 이를 통보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출애굽 속에서는 하나님이 등장하여 직접 말하고 직접지시를 하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사람에게 미리 예견하여 주신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의 위대한 지도자, 또는 영웅으로 칭송받는 모세의 역할은 축소되어진다. 그 당시 왕이라는 대단한 존재에게 감히 노예란 소수민족의 해방을 지시하였으니 인간 편으로 볼 때 대단한 용기의 사람이기도 하지만 실지 그의 역할은 말을 한 것뿐이다. 그것도 말이 둔하여 대변자 아론을 대동해서 이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모세의 배경을 보면 이미 이러한 일이 가능하도록 짜여져 있었다. 모세는 억압과 천시를 받는 노예민족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왕과 같은 왕족으로 키워져 자랐기 때문이다. 그의 출생배경까지 독특한 것도 이러한 일이 가능하도록 계획하신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속의 일부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에서 하나님은 이미 계획하신 자요 그 결과도 아시는 자요, 하나님의 사람을 택하여 일일이 교통하며 지략을 내리시는 자이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구약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선택과 약속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과 약속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즉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일방적인 약속이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기만 하면 된다. 반면 그리스 신화는 어떤가? 그리스 신이 어떤 특정한 인물, 어떤 특정한 민족을 선택하여 관계 맺지 않는다. 차라리 인간 편에서 신을 선택한다. 신편에서의 일방적인 약속도 없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도 있고 파기될 수도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약속을 인간 편에서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관계가 형성된다. 반면 그리스 신화에서 신과 인과의 관계는 신이 인간을 취사선택할 수 있고, 인간도 다일신 중에 하나를 취사선택할 수 있다. 즉 구약의 하나님은 gods중의 어떤 한 god 이 아니라 God 이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능력의 하나님, God이다. 구약에서의 영웅들은, 예를 들면, 모세, 요셉, 야곱 등은 단지 이러한 하나님을 믿은 믿음의 사람들일 뿐이다.

  

 

 

 

 

가나안 여인의 현실 직시의 영성

(마태복음 15: 21-28, 마가 7:24-30)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실 때, 한 여인, 그 당시 이방인이었던 가나안 여인을 만나게 된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서 그를 만나기만을 학수 고대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녀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정말 놓칠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며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린다. 그리고 절박하게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들렸음을 예수님께 아뢰고 그의 동정을 바란다. 이 여인의 간절함이 그녀의 말과 행동으로 분명히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로 차가우셨다.

그녀는 다시 한번 매달려 주여 저를 도우소서하고 사정을 해 보았으나 예수님의 반응은 더욱 냉담하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예수님은 이런 여자를 불쌍히 여기심은 커녕 개취급을 하시면서 싹둑 잘라 거절하신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께선 이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고 싶으셨다. 예수님께선 그 당시 이방인과 여성들이 약자로서 온갖 천시와 따돌림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과 그래서 더욱 딸의 병으로 예수께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다. 또한 예수님은 다짜고짜 매달리는 그 여인의 용기가 가상타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 앞에 나온 그녀의 의지와 자긍심, 그리고 당신을 믿는 믿음을 시험해 보고 싶으셨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은 이 여인이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지 확인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공중에 뜬 허상이 아니라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이 여인이 현실직시의 영성을 가지고 있는지 테스트 하신 것이다.

이 여인의 반응은 예수님의 기대이상이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의 사정을 들어주시고 자신의 딸을 고쳐줄 것을 한껏 기대하고 나왔으나 예수님의 반응이 차가운 것에 지극히 놀라고 실망하고 당황했다.

내가 들은 예수님은 이런 분이 아닌데, 따뜻하고 자상하신 분으로 나의 처지를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해 주실거라 믿었는데..., 다른 사람한테 멸시받는 것도 서러운데 예수님까지 나를 개취급하시다니 난 정말 개만도 못하단 말인가? 여기서 물러날까?’

보통 사람 같으면 이렇게 생각하고 좌절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물러남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래 나 개만도 못하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말란 법 있냐? 어딨냐? 내가 이렇게 나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내가 그 말에 물러날 것 같애?’

이 여인은 예수님께 속으로 이렇게 대들면서 그러나 겉으론 동정을 바라는 자세를 흐트러 뜨리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에 주님께선 이 여인의 말과 태도에 대단히 흡족해 하셨다. 기대이상의 말에 감동하셨다. 요즘말로 넌 나의 시험에 합격이다. 그것도 수석 합격에 A+!’-“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 여인의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한 사건 속에서 예수님께선 현실을 직시하도록 우리를 시험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여인의 물러설 줄 모르는 의지와 그에 대응하는 처세술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대처해가야 할 믿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준다.

 

 

 

 

 

 

 

 

 

 

 

 

 

 

 

 

 

 

 

 

 

 

 

 

 

 

 

 

 

 

 

 

 

바울의 in&out 체험

 

바울서신의 권면의 내용을 살펴보면, ‘주안에서라는 큰 틀이 전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바울의 권면의 주요 틀, 즉 바울윤리의 틀이라고 할 수 있는 주안에서는 바울 서신에 전반적으로 여러 곳에서 드러나지만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1:1, 2:14), 주안에서 어려움을 이기고 다시 사는 삶(3:8, 4:1, 14, 16, 5:12), 기쁨/기도/감사(5:16~19)등이다.

기쁨/감사/기도는 기독교 신앙인들의 중요한 윤리적 규범이지만 삶 속에서 항상 실현(구현)하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 윤리적 규범앞에 주안에서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주 안에서(in Christ)'라는 바울윤리의 큰 틀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는 바울 자신의 신앙 체험속에서 우러나온 것임에 분명하므로 이와 연결될 수 있는(직접적인 연결은 불가능할 것이라도 추론 할 수 있는) 그의 체험을 살펴보려 한다.

 

 

안과 밖(inout)

 

우선 in & out 이 말로 인식되는 것보다 더 넓은 차원의 공간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을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이 그림으로 나타내 보았다.

’(in)이라는 말은 '(out)이라는 말과는 반대의 의미로서 보통 공간적 개념을 표현할 때 쓰인다. 그림에서처럼,

 

 

주안에서 (In Christ)

 

바울의 주안에서라는 가치기준은 예수님의 삶과 행위와 말씀에 근거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10-20) 라고 말씀하신다.

이 때 ‘In’의 개념을 물리적, 공간적 개념으로 받아들인 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좀 더 쉬운 비유로 이 말씀을 설명해 주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 15:5) 즉 주님 내 안에(주 안에)거한다는 말은 내 말에 거한다. 또 나의 사랑 안에 거한다. 내 능력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Hardware & Software)

 

이에 필자는 더욱 구체적으로 이것을(‘내 안에 거한다라는 말씀) 설명해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를 하였지만 필자는 이것을 컴퓨터의 본체와 소프트웨어와의 관계로 비유하여 현대인들에게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접근 방법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주 그리스도는 컴퓨터의 본체, 즉 하드웨어(hardware)이며 우리들은 컴퓨터의 소프트웨어인 것이다. 소프트웨어는 자체의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하나의 객체이다. 그러나 컴퓨터 기계자체가 없다면, 즉 하드웨어가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 하드웨어는 중앙처리 장치, 기억 장치, 입출력 장치를 갖고 있어 그 자체 내의 기계로(전자회로로) 모든 알고리즘(문제를 푸는 방식)을 구현한다(다시말해, 윤리적 규범을 구현한다). 소프트웨어도 알고리즘을 구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지만 하드웨어 없이는(하드웨어의 기억장치, 처리장치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에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에 내장되어야 하며(‘주안에 거한다’) 내장되어 있지 않는 경우에는 하드웨어의 보조장치를 통해서 하드웨어와 연결되어야만 그 기능이 가능하다. 이것을 그림을 통해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주 안에서라는 말씀이 비유와 그림을 통해서 더 쉽게 전달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즉 우리는 컴퓨터의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 안에 있거나 연결되어 있을 때 그 프로그램이 작동하여 각종 공장의 기계들을 움직이거나 사회과학에서 필요한 계산, 그 외에 모든 전문가적인 일을 구현해 내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을 때 혹은 그와 연결되어있을 때 윤리적 규범들은 자연히 구현된다는 것이다.

 

 

바울의 In&out 체험

 

 

필자는 주안에서라는 바울 윤리의 큰 틀이 유출될 수 있는 그 근거를 사도행전에서 찾아 윤리적 규범과 사건을 적용시켜보려 하였다. 그 결과 바울이 주 안에서라는 말을 수 없이 반복하여 그것이 바울 윤리의 큰 맥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바울 특유의 신앙체험이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 바울이 inout개념을 사용하여 주안에서를 반복, 강조한 것은 바울 특유의 변화체험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의 'in & out'의 확실한 대조 구조를 이루는 체험.(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신앙사건-9:1~19, 22:3~16, 26:12~18):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하시니라”(사도행전9:3~6).

그가 주 예수를 만나지 않았을 때(변화체험을 하지 않았을 때), 이것은 주 안이 아닌 주 밖의 상태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주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사울이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만났을 때(변화체험을 했을 때) , ‘주 밖에서 주 안에 거하게 되었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다.

바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직접 체험으로 체득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실현하기 어려운 윤리적 규범도 주안에 거할 때 가능하며, 자연스레 구현될 수 있음을 몸소 체험에서 깨달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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