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 필 프리티>

며칠 전 <아이 필 프리티>(2018)라는 영화를 극장에서 보게 되었다. 나의 주요관심사인 자존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였다. 영화의 여주인공은 뚱뚱하고 못생긴 거에 가까운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만큼 자존감도 높지 않았다. 거리의 아름답고 날씬한 여성들은 그녀의 동경의 대상이었고 그녀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워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뻐지기 위해 스피닝을 하는 도중 격하게 하다 도구가 부러지고 그녀는 자빠져서 머리를 부딪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녀의 외모는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그녀의 눈에 뭐가 쓰인 것처럼 그녀는 자신을 너무나 아름답다고 여긴다. 그러자 그녀의 자존감은 하늘을 찌를 듯하고 그녀의 말도 행동도 멋지고 유머러스하고 자신감 있게 변한다. 그러면서 남자 친구도 생기고 직장에서도 승승장구하는 너무나 매력적인 여자로 변하는데 어느 날 목욕탕 투명한 유리에 머리를 부딪쳐 또 다시 자신의 본래 자아로 돌아온 그녀. 자신의 외모를 보고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 남자친구도 피하고 직장도 다 피하게 된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본래 그녀로 돌아왔지만 마지막 용기를 내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옛날의 그녀와 자존감이 높아진 상태의 그녀의 사진을 놓고 비교를 해 보는데 그녀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눈에 뭐가 씌워 자신을 아름답게 보고 자신만만했을 때의 외모랑 옛날의 그녀의 외모는 변한 게 없었다. 달라진 것은 그녀 자체였다. 외모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러면서 영화는 다시 열심히 스피닝을 하는 여주인공과 분위기를 업시키려는 강사의 외침으로 끝난다. “영적인 변화든 신체적인 변화든 감정적인 변화든. 기적은 일어난다.”

그 기적은 무슨 변화로 일어난 걸까. 외모의 변화는 아니니까 신체적인 변화는 아니고 그녀가 기분이 업되서 이뻐 보인 것도 아니니까 감정적인 변화도 아니고 분명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영적인 변화일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자존감의 상승은 영적인 변화로 가능

자존감은 감정의 문제도 아니고 이성의 문제도 아니다. 단지 신체가 변했다고 생기는 문제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자존감 때문에 심리학책, 자기계발서를 읽는데 책 몇 권 읽는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나는 자존감의 문제가 필시 영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존감은 내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생기는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나의 자존감을 바꾼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몸소 체험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실연의 아픔으로 자존감이 낮을 때로 낮아져 있던 내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나의 자아에 대한 확신, 자존감이 얼마나 높아졌었는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당시 영화의 주인공처럼 눈에 뭐가 씌워진 경험까지 했는데 영화에서처럼 머리가 부딪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기도를 열심히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내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과 환경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을 비롯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일류 옷을 입고 잘생긴 연예인들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 마치 천사처럼.

그러나 인생의 굴곡을 겪다보니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나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칠 때도 있고 다시 나아질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내 인생을 다시 표현하자면 자존감의 상승과 하락의 반복의 역사라고 표현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자존감은 내가 영적인 존재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그것도 하나님이 너무 사랑해서 독생자까지 희생시켜 구원해 낸 그분의 자녀이다라는 믿음, 단순히 내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뭐라 표현할 수 없어도 그분과 관계되어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우리의 자존감은 기적이라 할 만치 상승한다. 우리의 외모, 환경, 세상은 달라진 게 없어도.

오늘도 심리학책을 뒤지며, 자기계발서를 뒤지며 나를 분석하고 위로를 찾고 변화를 찾는 이들에게 한마디 외치고 싶다. “하나님을 만나라


 

 

 

 

특별시민, 진정한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물음을 묻다.

 

 

영화 제목이 <특별시민>이다. 영화를 보면서 특별시민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 특별시민의 정체, 그리고 그 내용인 정체성을 어떻게 그려낼까 궁금했다.

처음에 특별시민은 영화의 주인공, 서울시장으로 나오는 변종구(최민식 역)인 줄 알았다. 그는 온갖 방법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홍보해 정말 좋은 시장의 이미지를 주었다. 그는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기 위해 토크쇼 같은 데도 출연해 우스갯소리, 유머도 서슴지 않으며 매력적인 이미지를 발산한다. 그런데 그 토크쇼에서 젊디 젊고 패기가 넘치는 여기자가 한 마디 그 시장에게 던진다. “시장님의 행보는 가식으로 보인다. 진정한 소통이 안 되면 고통이 온다뼈아픈 이야기인데도 그 시장은 그 위기를 웃음으로 잘 넘긴다. 그런 연유로 그 젊고 어린 여기자는 그 시장의 캠프에 픽업이 되어 시장의 오른팔격인 시장의 참모와 손을 잡고 그 시장을 위해 충성 껏 일한다. 그녀의 반짝 반짝 튀는 아이디어는 참신하고 신선해 시장의 이미지를 한껏 높여주고 당선의 승산을 높여준다. 그것을 보면서 한 마디로 정치판은 이미지 전쟁이구나, 정책, 공약을 밤새고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상대편의 이미지를 깎고 자기 진영의 사람의 이미지를 높이는가. 이미지를 위한 아이디어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시장은 그 이미지를 위해서 철저히 가식을 유지한다. 그 가식이 진정성이라고 느껴질 만큼 그는 철저히 프로답게 자신의 이미지를 연출할 줄 아는 머리 좋은, 직관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기편의 진영 내부에도 적이 있었고 서로 믿지 못해 핸드폰, 노트북으로 도청, 감청을 하는데. 결국 그 시장의 결정적인 잘못이 내부에서 약점이 잡히고, 약점을 잡은 시장의 오른팔격인 사람은 살해당한 것은 아니지만 배반한 이유로 의심을 받고 어쨌든 죽음을 맞게 된다.

그 시장의 결정적인 잘못은 음주운전단속까지 그가 가진 권력으로 피하고, 계속 음주운전을 하다가 빗길에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는데 그 때 보초를 서고 있던 군인이 죽은 것이다. 그 때 차량은 시장의 딸의 것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딸이 한 것으로 위장할 만큼 철저히 자신의 잘못을 감추었다. 모두 시장이란 권력의 타이틀을 또 한 번 쥐기 위해 그리고 더 나아가서 대통령이라는 거대 권력을 쥐기 위해.

아직 어리고 순진한 여기자는 시장의 철저한 가식위의 가식을 진정성으로 믿어가며 그를 따랐지만 결국 도청된 USB를 발견하고 그 시장의 잘못을 알아낸 후, 그 여기자는 모든 것을 내어놓고 그 시장을 떠나려고 한다.

그녀는 시장에게 자수하라고 권하지만 시장은 비웃는다. 그녀를 그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취급하며, 그렇게 하는 것은 또 한 사람의 희생자를 낳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제 시장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 유권자로 돌아가겠다고 당당히 말하고 떠난다.

떠나며 그녀의 손에는 또 하나의 USB가 들려있었는데, 그녀는 희미한 웃음을 웃는다. 나는 이 장면을 보고 이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그녀는 성공의 길을 갈 수 있었는데 엄청난 권력을 가진 자와 갈라진 후, 한 유권자의 길을 가는 것. 이를 통해 영화는 무엇을 말하려고 한 걸까?

혹시 특별시민은 권력과 영합한 한 여기자에서 평범한 유권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 그녀를 말한 것은 아닐까? 특별시민은 가식에 가식을 씌운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정말 소통을 원하고 진실을 원하고 진정성이 있길 바라는 한 평범한 시민이 된 그녀가 이 도시의 특별시민이 아닐까?

한 유권자가 된 그녀는 어떤 행보를 걸을까? 그녀의 길은 평판할까? 많은 상상을 해보았지만 유권자로서 투쟁하고 저항하는 방법, 혹은 망각하고 묻어두는 방법. 어느 길을 가든 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것. 그 시장의 잘못은 언젠가는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이 평범한 시민으로서 사는 나에게 남아있다.

영화의 마지막장면, 그 시장은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운전기자에게 고기에다 상추쌈을 싸 입에 꾹꾹 쳐 넣는다. 그리고 자기 입에 다도 한 쌈 크게 쳐 넣는다. 그리고 영화는 끝나지만 나에게 여운을 주는 것은 고기 몇 점에 상추 한 쌈 크게 싸먹듯이 권력도 그렇게 쉽게 쳐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언젠가는 그로 인해 배탈이 나며 나락으로 떨어질 날도 올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나는 진실이 이긴다고 믿으며 자막이 흐르는 영화를 뒤로 하고 얼른 발걸음을 돌렸다.

 

 

<미녀와 야수>, 비스트가 뷰티의 마음을 얻는 법

 

 

외모 지상주의에 빠져 저주 받은 한 왕자, 비스트

프랑스의 한 성에 미녀를 좋아하고 밤새 미녀와 파티를 즐기는 잘생긴 왕자가 있었다. 어느 날 파티 때 늙은 노파가 찾아오는데, 그 왕자는 무참히 그 노파를 박대한다.  그러나 그 노파는 요정이었고, 이 요정은 그 왕자와 성에 저주를 내린다.  잘생긴 왕자는 짐승의 얼굴을 가지게 되고 성의 사람들은 모두 기물들로 변했다.  이 저주를 푸는 방법은 이 비스트가 진정한 사랑을 찾아야 한다는 것.

영화는 처음부터 진정한 사랑은 외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다는 어린아이들의 도덕 공식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비스트가 어떻게 해야 진정한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모험과 도전을 좋아하고 두려움이 없는 여자, 뷰티

저주받은 성에 여자 주인공 뷰티의 아버지가 찾아와 장미를 꺾다가 성에 갇힌 신세가 된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뷰티는 아버지를 찾아 나서다가 성에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아버지를 탈출시키고 자기가 대신 성 안에 갇힌다.

이 뷰티는 조그만 마을, 시골 출신이다. 그러나 그녀는 모험심이 강했고, 항상 책을 읽으며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을 꾸고 자기는 특별하다고 생각한 여자였다.

그래서 이 여자는 비스트를 대면하고도 놀라지도 눌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성의 저주와 그 성의 모든 기물들의 마법의 매력에 그녀도 빠지게 된다.

그리고 점점 비스트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데...

 

 

비스트가 뷰티의 마음을 열게 하기까지.

1. 목숨도 구해주는 용기

뷰티는 성에 갇혀 비스트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서로 다투고 성을 도망쳐 나오는데, 늑대들한테 싸여 위험에 몰린다.  이 때 비스트가 나타나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고 그는 부상을 입는다.

 

2. 공통적인 소통의 매개,

그녀는 비스트를 간병하다가 우연히 그와 소통이 됨을 발견한다.  그것은 문학이었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야기였다. 그리고 비스트의 숨겨진 서재, 그 안에는 많은 책들이 있었고 뷰티는 비스트를 다시 보게 된다.

 

3. 자기 이익보단 상대방의 가족까지 위하는 마음

이제는 뷰티가 비스트에게 마음을 열 무렵, 비스트는 그녀에게 이 성에서 행복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 그녀는 자유가 없는 이 성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냐고 말한다. 그리고 아버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낸다. 비스트는 마법을 사용해 뷰티의 어린 시절 장소로 데려가고 그녀는 어머니가 흑사병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어린 자기를 구하기 위해 어머니를 두고 떠났던 사실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아버지를 더욱 이해하게 된 그녀는 아버지를 더욱 그리워하고 비스트는 마법 거울을 통해 아버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아버지는 위험에 처해 있었다.  비스트에겐 진정한 사랑을 찾을 기회였지만 그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그녀를 보내준다.  그녀가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외모 지상주의와 지나친 나르시시트에 빠진 또 한 남자, 캐스톤

영화에 또한 미녀들을 좋아하고 지독한 나르시시트인 한 남자, 캐스톤이 있다.  그는 뷰티를 따라다녔고 그러나 그게 여의치 않고 그녀의 아버지마저 그를 반대하자 그녀의 아버지를 곤궁으로 몰아넣어 위험에 빠뜨린다. 아버지를 찾아온 뷰티가 비스트 이야기를 하자 그녀마저 정신병자로 몰아 갇아 두려한다.  그리고 마을의 사람들과 그 성에 비스트를 죽이러 쳐들어간다.

결국 비스트 마저 위험에 빠지고 캐스톤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데...

가까스로 탈출하여 달려온 뷰티, 비스트의 죽어가는 모습에 눈물 흘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키스를 하는데...

그러자 모든 죽어가는 것, 멈춰가는 것이 생기를 찾고, 성의 기물들은 마법에 풀리고, 비스트는 사람이 되어, 그것도 잘생긴 왕자로 변해 그녀 앞에 서있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를 보고 비스트임을 확인하고 결국 영화는 헤피엔딩을 맞는다.

 

비스트 안의 잘 생긴 왕자를 기대하기 보다 비스트 자체를...

영화는 외면보단 내면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지만, 영화 끝 장면에 비스트가 멋지고 반질반질하게 잘생긴 왕자로 변한 것이 결국은 '외모이다'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아쉽게 한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도 위해주는 사람이라면 비스트라도 어떠랴.  진짜 중요한 것은 마음을 얻는 것이다.  요즘은 남자도 여자도 모두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있다.  외면은 진짜 헛헛함만 남는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는다.  정말 소중한 것은 비스트 안의 잘 생긴 왕자님이 아니라 뷰티의 마음을 얻은 비스트 자체인 것을 모든 여자들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내 남자가 어느 날 저주에 풀려 백마 탄 잘생긴 남자로 변할 것이라는 것은 기대는 아예 갖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파도가 지나 간 자리>, 인생의 두 얼굴, 야누스

 

 

야누스의 문, 행운의 시작

극한 서부전선에서 살아남은 남자주인공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고독한 섬, 이름이 야누스인 섬에 등대지기로 지원한다. 야누스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을 지키는 행운의 신을 뜻한다. 그러나 이 야누스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중인격을 가진 야누스의 섬, 여기서 운명의 장난은 일어난다.

이 운명을 예감하지 못한 남자 주인공은 사랑하는 아내를 맞이하고 둘이는 행복한 섬 생활을 한다. 그리고 사랑하고 애를 갖고 그런데 그렇게 갖은 애가 두 번이나 유산이 된다.  절망과 비참에 빠진 두 부부에게 행운의 시작인 듯,  불행의 시작인 듯,  찾아온 것이 나룻배 한 조각이었다.  거기에는 아빠로 보이는 사람이 죽어 있었고 갓 태어난 아기가 울고 있었다.  예쁜 여자아기를 본 아내는 기르고 싶어 하고 남자 주인공은 "그럴 수 없다,  보고해야 한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지만 아내의 끈질긴 설득에 그 남자는 모든 걸 깜쪽 같이 숨기고 아내가 낳은 아기처럼 숨겨서 그 아이를 기르기 시작한다.  모두 그 아이에게 빠져 아빠가 된 기쁨, 엄마가 된 기쁨을 만끽하고 살아가는데...

 

야누스의 이면의 문, 불행의 시작

어느 날, 남자 주인공은 이 아이를 낳은 실제 엄마를 알게 된다.  남편과 딸이 죽은 줄로 알고 그 묘 앞에서 슬퍼하고 있는 아이의 실제 엄마, 그 때부터 남자주인공은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낳은 엄마에게 '애는 잘 있다'는 편지를 보내는데...  이 낳은 실제 엄마는 대부호의 딸이었고 그때부터 그 편지를 실마리로 딸을 찾으려고 경사들을 동원하고 상금까지 동원한다.

주인공 남편은 아기와 함께 조각배에서 발견했던 조그만 장난감까지도 그 실제 낳은 부인에게 보내고...  사건은 좁혀지고 배상금은 높아지고...

결국 주인공 남편은 자신이 예감한 대로, 경사한테 끌려 간다.  그의 아내는 아이를 빼앗긴 채 절규를 한다. 남편은 부인은 모르고 다 자기가 꾸며낸 짓이며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쓰려한다.  조각배의 남자는 죽어있었으나 남자 주인공이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이기에 경사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살인죄까지 덮어씌우려 하는데...

 

행복이란 이면의 죄책감이 부른 불행, 모성을 선택하느냐, 남편의 사랑을 선택하느냐

조각배에서 살아남은 아이는 실제 낳아준 엄마를 만났는데도 키워준 엄마를 못 잊어 울고 가출까지 하는데... 그 낳은 엄마는 그 충격으로 길러 준 엄마에게 찾아가 남편의 살인죄를 인정하면 아이를 키우도록 해주겠다고 말한다.

아이를 키우고 싶은 모성과 남편에 대한 사랑사이에서의 갈등, 남편이 실마리를 준 일 때문에 자신의 모든 행복을 빼앗겨 버렸다고 생각하는 아내는 남편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아내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남편에게로 달려간다. 그리고 경사에게 외친다. 남편은 죽이지 않았다고.  내가 우겨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남편과 아내는 같이 감옥에 가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이를 낳은 실제 엄마는 죽은 남편의 착한 성품을 생각하며, 그 두 사람을 용서하고 선처를 말한다. 몇 개월만 징역살고 벌금으로 나올 수 있도록...

 

인생은 다시 제 자리에...

장면은 바뀌어 세월은 흐른 듯, 언덕위의 조그만 집, 주인공 남편은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고...

어느 날, 한 손님이 찾아온다. 예쁜 아가씨와 아기.  그녀는 섬에서 그가 길러준 딸 루시 였다.

모든 이해와 용서가 일어난 순간,  그녀는 그를 아빠로 여긴 것일까? 자주 찾아와봐도 되냐고 묻는다.

그는 아내를 잃었지만 그의 길러준 딸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모든 운명의 장난은 제자리를 찾았다.  죄책감은 해결되고 아내는 죽었지만, 그는 딸을 찾았다.

 

가슴 아픈 이야기다. 선한 사람들의 사랑과 용서가 있는 이야기, 거기에 여자로서 낳아준 사람이나 길러준 사람이나 모성으로 괴로워하는 모습까지 보기 가슴 아프다.

이 영화가 가르쳐 준 것은 행운의 여신의 미소에 금방 좋아할 것이 없다는 것, 그 이면은 우리를 따라 다니며 괴롭힌다. 

남편의 죄책감으로 부터 생긴 운명의 뒤바뀜, 이것을 야뉴스의 장난으로만 보아야 할까.

우리 내면의 이중성은 우리를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한다.

주인공 남편은 영화 첫부분부터 고립을 택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죄책을 느끼며... 

또 한 번의 행운에 대한 죄책감, 그 양심에 박수를 칠 수가 없다. 그 남편의 아내를 보면.

그의 아내는 모든 행복(기른 딸)을 빼앗기고 시름시름 죽어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우리는 우연한 행운에 자유롭지 못하다. 죄책의 양심의 소리가 따라다니므로.

사람이 뭔가, 인생이 뭔가에 대해 더 성찰하게 해준 영화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존엄한 죽음인가, 살인인가

 

 

밑바닥 인생에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되기까지.

이 영화는 시골깡촌 출신으로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며 프로 복싱선수를 꿈꾸는 한 여자가 유명한 노 트레이너, 매니저를 만나면서 성공의 기회를 갖게 된다는 줄거리인데,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영화다. 일단 주인공 여자 매기는 여자라는 것 때문에 거부하는 노 트레이너를 설득하기 위해 식당에서 남은 음식을 먹고,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체육관에 등록하여 열심히 연습을 한다. 그녀의 끈질긴 투지, 노력은 결국 노 트레이너를 설득하게 되고, 그녀는 그에게 훈련받을 기회를 갖게 된다. 그녀의 투지와 재능, 노신사의 노련한 코칭이 더해져 그녀는 하는 시합마다 KO패로 승리의 승리를 거두는데...

그녀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가난한 가족을 위해 집을 사 주기까지 하는데 가족들은 냉랭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게 그녀는 유명해져서 사람들에게 "모쿠슈라", "모쿠슈라"라는 환호를 듣는다. 그 뜻은 영화 마지막에 밝혀지는 데...

그녀에게 드디어 백 만 달러를 받을 수 있는 챔피언 타이틀전이라는 기회가 찾아온다.

 

인행의 단 한번 뿐인 행운의 기회가 비참한 불행의 단초로

그 영화에서 많은 복싱선수들이 나오고, 노 트레이너도, 체육관에서 일하는 노 트레이너의 친구도 복싱선수였다. 그러나 그네들은 한 때 화려한 복싱선수들이었지만 지금은 어려운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다. 화려함 뒤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려오기도 하고,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아예 기회조차 얻지 못하기도 하고... 그렇게 행운이라는 것은 찾아오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여자 주인공에게 멋진 기회가 찾아오는데, 그러나 상대는 반칙으로 유명한 선수중에 악질중의 악질인, 창녀출신 복싱선수였다. 그러나 챔피언 타이틀전이었고, 상금은 백만 달러였다.

여자 주인공은 자신만만하게 "모쿠슈라"라는 환호를 받으며 시합을 하게 되는데...

반전의 반전, 여자주인공이 노 트레이너의 코칭으로 상대선수에게 연타를 때림으로, 거의 KO패까지 가는 승리를 확신하며, 뒤로 돌아서는 순간, 반칙의 여왕인 상대선수가 뒤에서 주인공 매기의 뒤통수를 때리고, 매기는 쓰러져 의자에 목을 부딪치는데...

다음 장면은 병원이다. 목 이하 신체부위는 마비, 얼굴근육과 말만 할 수 있고, 식물인간이 된 주인공, 매기가 누워있다. 그 때부터 불행의 불행, 비참의 비참...

노 트레이너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병원을 찾아보고, 결국 재활병원까지 와서 그녀 옆에서 가족같이 그녀를 돌본다.

그녀의 친 가족은 그녀를 돌볼 생각은 전혀 안하고, 그녀의 남은 재산을 법적으로 자기들한테 돌리기 위해, 변호사를 대동하고 병원을 방문하는데...

그녀는 그들의 속내를 알고 가족들을 거부한다.

노 트레이너의 돌봄은 계속되는데 나아질 기미가 없고, 그녀는 욕창으로 다리가 썩어 다리까지 절단을 해야 했다.

 

존엄한 죽음을 선택한 자기결정권을 옳은 것인가

어느 날, 주인공 매기는 노 트레이너에게 은유적으로 자기를 안락사 시켜 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남이 갖지 못한 기회도 가져 봤고, 환호 소리도 들어봤고, 그 환호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나는 후회 없다고...

노 트레이너의 대답은 "I can't" 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녀가 혀를 깨물어 자살을 기도했다고.  정신이 들면 또 혀를 깨물고.  결국 재갈을 물리기까지 해서 그녀의 목숨은 건졌으나...

노 트레이너는 그 때 진지한 고민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2018년부터 웰다잉법이 시행되는데,  웰다잉법 제1조가 "환자의 자기 결정을 존중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제는 생명권보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사법부의 결정이라고 한다.

 

안락사, 존엄한 죽음인가, 살인인가

노 트레이너는 23년간 다녔던 교회의 신부를 찾아간다. 그리고 고민을 털어놓는다. 신부의 대답은 "빠지세요,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런 일에 당신은 죄책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노 트레이너는 결국 그녀가 누워있는 병원 침실에 찾아가 산소호흡기를 떼고 영원히 잠들 주사를 놔준다. 그리고 그러기 전, 그녀에게 키스하며 모쿠슈라의 뜻을 말해준다. "모쿠슈라는 나의 소중한 혈육"이라는 뜻이라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수긍하는데...

 

이 영화는 안락사가 존엄한 죽음인가, 살인인가. 그리고 제3자가 관여했을 경우, 여러 가지 이슈거리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많은 여지를 남겨 두었다. 그녀의 가족은 그녀를 버리고 그녀를 돌보지 않았다. 그녀의 노 트레이너만이 그녀를 사랑하고 가족처럼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환자가 연명치료를 중단해 달라고 의사를 밝힌 경우다. 이런 경우 사법적으로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종교를 가진 그는 신부의 말대로 죄책감에서 못 벗어났을까? 자유함 속에서 살았을까? 의문을 많이 남기지만...

 

이 영화는 10여년 전에도 개봉이 되었던 영화이고 필자도 이 영화를 보고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과 많은 토론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때 당시 정서는 이것은 살인이고 그 사람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의견들이 많았다.

 

그러나 시대의 생각은 변하고 있다. 웰다잉법은 2018년부터 시행된다. 이것에 관한 저서 <존엄한 죽음>(최철주 지음>이라는 책도 있다. 이 책을 보면서 존엄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것이 또한 자살을 권하는 사회로 바뀌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져보았지만, 웰다잉법의 취지는 그것이 아니다. 존엄한 죽음은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자살을 방조하는 것이 아니다.

 

2009521일 대법원이 선고한 최초의 존엄사 판결문의 요점을 상기하는 것, 알아두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 152페이지에 나온다.

 

"생명권이 가장 중요한 기본권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 역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가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보호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미 의식의 회복 가능성을 상실하여 더 이상 인격체로서의 활동을 기대할 수 없고 자연적으로는 이미 죽음의 과정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른 후에는,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신체 침해 행위에 해당하는 연명치료를 환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하게 되므로, 이와 같은 예외적인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하려는 환자의 의사결정을 존중하여 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을 보호하는 것이 사회 상규에 부합되고 헌법 정신에도 어긋나지 아니하다고 할 것이다. (중략) 환자가 (중략)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연명치료의 중단이 허용될 수 있다"

 

 

 

자유에 대한 두 영화이야기, <브레이브 하트>, <프리덤>

 

 

<브레이브 하트>, 용기의 동력은 자유를 위한 저항정신

자유에 관련한 영화 중 두 영화가 기억난다. 하나는 20년도 전에 본 것 같은 데 <브레이브 하트>라는 영화이고, 하나는 2015년에 본 <프리덤>이라는 영화이다.

<브레이브하트>는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로, 아카데미 5개 부문에서 상을 탄 영화이다. 이 영화는 영국 왕 에드워드 1세에 저항해 민중반란을 일으킨 스코틀랜드의 지도자 윌리엄 윌리스 이야기이다. 영화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스코틀랜드가 무참히 짓밟히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의 연인이 주인공이 보는 앞에서 살해를 당한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남자 주인공, 스코틀랜드의 민중지도자 윌리엄 윌리스는 반군을 형성하여 영국에 저항을 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느낀 것은 어쩜 저렇게 용감할 수 있을까? 그야 말로 브레이브하트의 원동력은 뭘까? 그것은 저항정신이 아닐까.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했을 때 그 저항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저항군이 영국군에 비하여 턱없이 수적으로 열악하고 무기도 열악했지만, 그 저항정신만은 정말로 충천했다. 민중 반란군들이 대치되어있던 영국군을 향하여 모두 자신들의 엉덩이를 모두 까고-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하지만, 약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모든 반란군들이 일제히 그런 행동을 했는데 가관이었다. 그런데 그 엉덩이로 화살이 날라들고... 그래도 처절히 저항을 한다.  심지어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 있는데, 이 남자 주인공, 민중지도자가 결국에 반란에 실패하고 잡혀서 처형을 당한다.  사지가 말에 묶여 사방으로 떨어져 나가 죽어가는 그 상황에서도 이 주인공은 "프리덤"이라는 말을 소리친다. 그 장면이 아직도 기억이 남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그 남자 주인공의 저항정신, 그 브레이브하트의 근본 동력은 그렇게 추구했던, 그렇게 가지고자 했던 자유에 있었던 것이다.  자유에의 의지가 용기를 일으킨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의 자유의 추구는 본능적인 것과도 같은 것이어서 이것을 억압했을 때 엄청난 저항정신이 나온다는 것을 이 영화가 증명해 주고 있었다.

 

<프리덤>, 사랑과 용서를 통해 오는 영혼의 자유를 말하다

또 한편의 영화는 자유를 찾아서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또 하나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결국 더 큰 자유, 진정한 자유를 얻는 주인공의 이야기인데 가슴속에 잔잔한 물결을 일게 한 영화이다. 제목자체가 <프리덤>이라는 영화인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1856년 아직 흑인 노예가 있던 시절, 흑인 노예인 사무엘 가족이 흑인들의 탈출을 돕는 백인비밀조직의 도움으로 캐나다로 도망을 치는 데, 그 과정에서 악명 높은 노예사냥꾼의 추적으로 많은 위기를 겪게 된다. 그 도망치는 중에 주인공 사무엘은 자기 어머니로부터 100년 전 자기 조상과 관련된 하나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이 바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사한 존뉴턴이란 악명 높았던 흑인노예선장이야기이다. 존뉴턴은 회심하여 흑인노예해방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자세한 줄거리는 중략하고 영화의 핵심만 말하자면 사무엘이라는 흑인은 자유를 찾아 도망치지만, 그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희망이 보이는 데도, 바로 앞에 탈출구가 보이는데도, 불안 해 하고, 도망에 성공하면 뭐하나, 결국은 도망자 신세인데,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백인을 증오한다. 자유를 찾아 한 발 한 발 가고 있었지만, 더 가증되는 불안과 증오와 하나님에 대한 원망뿐이었다.

영화마지막에 사무엘과 그 가족은 거의 탈출 직전에, 그들을 끈질기게 쫓아온 백인들과 마주치는데, 그 백인들 중에서도 그들을 죽이려는 사람과 죽이지 않으려는 사람이 나뉘고, 결국 백인끼리 총질이 일어나, 사무엘과 가족을 살리려고 했던 백인이 끝내 죽고 만다. 그 때 이 주인공 사무엘이 눈물을 흘리면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른다. 그리고 사랑과 용서의 소망이 우리를 자유케하고 라는 자막이 흘러 나온다.

사무엘은 자신을 죽이지 않으려했던 백인의 죽음을 보고 진정 백인을 용서하게 되고, 자기를 살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모든 불안, 원망, 증오에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가 할 일, 한 편은 용기와 투쟁으로, 또 한 편은 사랑과 용서로

자유는 저항정신을 불러일으키고 용기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자유는 물리적인 행동으로 나타나 반란, 민란을 일으켜 실제 자유를 쟁취하게 위해 싸우게 하는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브레이브 하트>라는 영화에서 이 사실을 볼 수 있다.

<프리덤>이라는 영화는 좀 소극적인 면에서의 자유를 말한다. 물리적인 자유를 누릴지언정 우리는 항상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미움과 증오로 정신은 피폐되어간다.

이 정신적 자유, 마음에서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사랑과 용서를 통해 오는 영혼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프리덤>에서 말해주고 있다.

<프리덤>이라는 영화에 보면 주인공 사무엘 가족의 탈출을 도운 연극배우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이런 말을 한다. 우리들은 비평가의 노예이다. 그렇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뭔가에 매여 노예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돈의 노예, 습관의 노예, 모든 중독증상의 노예,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는 자유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

이처럼 자유는 중요한 가치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가치.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인권유린, 감시 사회, 폭력, 그리고 정신적인 불안으로부터 우리는 자유가 필요하다.

그 자유를 위해 우리가 뭘 해야 되는지, 이 두 영화는 답을 제시한다. 한 편은 용기와 투쟁으로, 또 한편은 사랑과 용서로...

자유, 난 그 자유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쓰고 있다.

 

영화 <사일런스>, 하나님 침묵의 답, '나를 밟아라'

 

 

하나님, 우리의 고통에 왜 침묵하십니까?

영화<사일런스>17세기를 배경으로 그때당시 포루투갈의 천주교가 일본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신부들이 그리고 일본의 크리스천들이 박해를 받는 모습 그리고 순교도 하고 배교도 하는 그런 모습들을 그린다. 페레라이 신부는 자신 때문에 다른 크리스천이 고통 받고, 신음하며, 죽어가는 것을 견디다 못해 배교하고 불교도가 된다. 이 소식을 들은 페레라이 신부의 제자 두 명이 이 소식을 믿을 수 없다며 사명을 가지고 일본으로 포교를 온다.

그 중 로드리게스라는 신부는 많은 일본의 크리스천들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신앙마저 흔들리고, 신은 왜 이 고통 중에 침묵하십니까 라고 끊임없이 묻는다.

그러나 일본의 크리스천들은 십자가에 달려 파도에 맞는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고, 화형을 당하기도 하고, 목이 베어 죽기도 하고, 물에 빠져 죽기도 하고, 유황 온천의 뜨거운 물에 점점 데워져 고통 속에 죽어간다.

 

나를 밟아라

끝내 로드리게스도 일본의 수령에게 잡히고 배교하라고 회유와 협박을 당한다. 그리고 그가 보는 앞에서 예수의 상을 밟지 않은 자들, 배교하지 않는 자들은 점점 죽어 간다.

로드리게스는 그들의 고통을 보며 미칠 지경까지 고통을 받는데...

수령의 회유와 협박은 끝나지 않는다. 결국 그의 스승, 배교한 페레라이 신부를 만난다.

페레라이 신부는 그에게 일본의 크리스천은 주님의 개념을 모른다. 그들의 믿는 신앙은 다이니치, 태양의 신이다. 그들은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거는 순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 너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다. 로드리게스 너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어간다. 그렇게 페레라이 신부는 배교를 권한다. 자신도 거꾸로 매달려 칼로 난 상처에서 피가 한 두 방울 떨어지는 고통, 그 피가 다 떨어질 때까지 죽어가는 고통, 그 고통까지 당해 보았고, 나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고.

로드리게스는 신앙과 고통사이에서 괴로워하고, 결국 그에게 시험이 다가온다. 예수의 상을 밟아라. 그는 그 상에 다가가려 할 때, 이런 음성을 듣는다.

"나를 밟아라, 내가 너를 위해 대신 십자가의 고통을 지었다. 나를 밟아라"

예수님의 음성과 함께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고 로드리게스는 마침내 예수님의 얼굴을 밟게 된다.

그리고 그는 불교도가 되고 상인들이 가져오는 물건 중에 성물이 있는지 확인하고 알려주는 일을 한다. 그런 식으로 성물을 가져온 상인들은 핍박을 받고, 결국 일본은 기독교가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악랄한 작업을 한다.

로드리게스는 핍박을 받아 처형을 당한 크리스천 일본인 아내와 자식을 두고 살아간다. 그러나 로드리게스와 일본인 아내 등, 크리스천으로 의심받았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또 시험을 받는다. 끊임없이 예수의 얼굴을 짓밟은 시험, 그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나도 네 곁에서 괴로웠단다.

기치지로 라는 일본인 크리스천이 있었다. 이 크리스천은 로드리게스를 일본으로 오게끔 도와준 장본인이지만, 로드리게스를 일본수령에게 팔아넘긴 사람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시험당할 때, 예수의 상을 밟고 침을 뱉고 한 사람, 그러나 끊임없이 그것이 죄로 느껴져 이 로드리게스에게 고해성사를 하며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던 사람이다.  로드리게스는 이 사람에게서 역겨움을 느낀다. 끊임없이 배교하고 그러나 또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고...

로드리게스가 불교도가 되고 이 기치지로는 로드리게스의 종이 된다. 이 기치지로는 불교도가 된 이 신부에게, 신부님 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면서 신부님이라는 말을 다시 부른다.

그는 갈등하며 '나는 더 이상 신부가 아니다' 하면서도 그는 본능적으로 그의 머리에 손을 대고 주님의 용서를 빈다. 그리고 주님께 고통을 호소한다. 그러자 주님의 음성이 들린다.

"나도 네 곁에서 괴로웠단다."

 

그리고 이 로드리게스는 일본에서 불교도로 죽고, 불교도로 장례를 치르고, 기도도 한 마디 없었고, 끝내 주님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 말미에 죽은 시체의 손에 십자가가 감추어져 있었고...

하나님만이 진실을 아신다 라는 자막이 나온다.

그는 진정 배교한 것인가. 답은 하나님만이 진실을 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침묵의 답

예수님의 한마디, "나를 밟아라" 속에 하나님의 침묵의 답이 있다. 예수님은 밟히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우리의 고통을 위해서 죽기 위해 오신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셨다. 그리고 같이 짓밟히시고 고통당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고통당하시고, 고통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다.

로드리게스는 이것을 깨닫지 않았을까. 성물을 밟은 것 자체로 주님을 버렸다고 우리가 쉽게 판단하는 것, 이것도 신앙의 오류이다. 주님은 각자의 마음안에 계신분이다. 로드리게스가 배교한 것인지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생각해 보게 하고 끝난다.

그가 끝내 자유함을 얻었을지 못얻었을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헥소 고지, 신념은 위대한 일을 낳는다.

 

 

신념, 위대한 일을 낳다

헥소 고지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의무병으로 총도 소지 하지 않은 채 혼자서 포탄이 쏟아지는 불길과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는 험한 상황에서 부상당한 전우들을 76명이나 구해낸 데스몬드 도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전쟁 중에 자신을 보호할 총도 소지 하지 않은 채 홀홀 단신으로 그는 한 명의 생명이라도 구하겠다고, 온 몸을 불살라 불길로 뛰어 뜬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명의 생명이라도 귀한 것이고 살인이라는 것은 절대 안 된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이 그가 가진 종교에서 나온 신념이긴 하나, 그는 그 신념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그는 그가 가진 종교가 어떤 경우든 살인은 거부하므로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의무병으로라도 사람을 살리는 일을 위해 전쟁에 참가한다. 그러나 그는 훈련 중 총 소지를 거부하여 많은 사람의 업신여김을 받고, 불이익을 받고, 결국 군사재판까지 가지만 그는 신념을 꺾지 않는다.

그는 결국 전쟁에서 자신을 보호할 유일한 무기 없이 맨 몸으로 전쟁에 뛰어든다. 아무리 의무병이라 하나 상식적으로 이해가지 않는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고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전우들이 철수한 상황에서도 부상병을 구하기 위해 자신은 피범벅이 되고 자신의 손은 닳아 피가 솟아도 매번 '주님, 한명만 더요', 기도하면서 또 다시 그 잔인한 구덩이로 뛰어든다.

그가 한 일은 기적이다. 신념에서 나온 기적. 그는 결국 명예공로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신념이 생성되는 배경은 종교와 어머니의 교육의 영향

그러나 개인이 가진 신념이 항상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히틀러 같은 악마도 나올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이 주인공이 건전한 신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종교적 진리 때문이었고,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 주인공의 아버지도 전쟁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그 휴유증 으로 술주정꾼이 되어 자식들을 해가 뜬다고 패고, 해가 진다고 패는 폭군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 밑에서 그는 폭력을 배웠으나 그의 신실한 어머니는 그에게 종교적 진리를 가르쳐 주었고, 항상 따뜻했다. 그렇게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종교적 신념, 건전한 신념이 몸에 배게 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

영화 끝에 실제 주인공이 살려 낸 살아남은 전우가 인터뷰 속에 이런 말을 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고. 정말 그는 브레이브 하트를 가진 사람이다. 그 전장에 맨 몸으로 뛰어든 것. 그것도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어느 누가 감히 해낼 수 있을까.

자기가 가진 신념, 자기가 믿은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도 실천을 못하고 아니면 잘못된 신념과 진리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겸손히 이렇게 말한다. 전장에서 어느 한 부상병이 앞이 안보일 때 자기가 가진 수통과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자, 그 부상병이 이제는 보인다고 웃음을 띠었을 때, 그는 그때 가장 기뻤고, 그것이 나의 희생의 모든 것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라고.

 

뒷이야기

이 영화는 멜 깁슨이 감독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주인공의 종교는 영화에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안식교도라고 나온다. 기독교인들은 안식교도라는 말을 들으면 선입견을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단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과 구원의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가 이단이든 삼단이든 그가 한 행동, 그 행동이 나온 신념은 옳았기 때문이다. 폭력과 살인 거부, 생명존중은 인간이라면 지켜야할 보편적인 가치이고, 신념이다. 그가 한 행동은 종교적 편견을 떠나서 박수 받아야 한다.

이 영화를 감독한 멜 깁슨도 종교인이다. 카톨릭 신자로 알고 있다. 그는 패션 오브크라이스트도 제작했고, 브레이브 하트라는 명화에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는 이 세상에 중요하고 지켜야할 신념을, 다른 말로 가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행동한 사람을 영웅으로 보는 것 같다. 그는 그 영웅을 그려내려고 하는 것 같다. 한 인터뷰에서 헥소 고지의 주인공을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멜 깁슨에게 있어서 영웅이란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다.

구원, 자유, 희생, 생명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람, 그 사람이 영웅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예수를, 브레이브 하트에선 스코틀랜드 독립을 위해 민중봉기를 하다 자유를 외치며 사지가 말에 찢기어 죽은 윌리엄 윌리스를,  헥소 고지에선 한 생명이라도 구하기 위해 전장에 뛰어든 데스몬드 도스를, 그런 실제 영웅들을 찾아 그는 영화에 담고 있다.  멜 깁슨이 또 찾아 그려내려는 사람, 이제 또 누가 나올지 궁금하다.

 

 

 

 

 

 

 

 

 

 

 

 

 

 

 

 

 

영화 <노트북>, 남녀 간에 완전한 사랑이 가능할까

 

 

 

사랑은 삶의 이유이다

노트북이란 영화는 2004년에 한번, 201611월에 재개봉되었고, 실화를 바탕 으로 한 베스트셀러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인데 무척 감동적이었다. 한 남자는 상식적인 보통 남자이다. 그런데 한 여자를 평생 사랑하는 것을 사명으로 아는 사람이다. 여자는 부잣집 딸이었고 여름휴가차 시골에 왔다가 그 남자를 만나 서로 열렬하게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로 헤어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 사랑의 결실을 이룬다. 그런데 그 여자는 자기가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고 한 남자를 사랑했다는 것을 기억을 못한다. 노인성 치매에 걸린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된 그 남자가 치매에 걸린 여자에게 책을 읽어주겠다고 접근해 소설을 읽는 것처럼 자신과 치매를 앓는 부인의 사랑이야기를 들려준다. 잠깐 기억이 돌아왔다가 다시 기억을 잃는 자기 부인, 자기 부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지만 기억을 잃어 남이 되어 버린 그 장면들이 참 안타깝고 눈물겨웠다. 마지막 장면은 기억이 잠시 돌아온 그 여자와 남자주인공이 병원 한 침대에서 같이 잠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거였다.

 

나는 남녀 간에 지고지순한 사랑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영화를 보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렇게 평생 사랑을 할 수 있구나. 평생을 사랑하고 같이 죽음을 맞는다면... 그 사랑이 우리를 감동 시킨 것은 한 남자의 희생과 죽음마저 함께 한 축복 때문일 것이다. 치매를 앓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고 자식마저 남같이 되어 버린 것이 안타깝지만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노력이 사랑의 기억을 되돌리고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같이 죽음을 맞는 것. 너무 가슴 찡한 일이다. 실화에 있었다니 이런 사랑도 가능하다는 것에 나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사랑은 삶의 이유다. 누구나 완전한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인간이 하는 사랑에 완전한 사랑이 있을까. 이 영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랑이 삶의 이유이다. 사람은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웃기도 한다.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죽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곧 생명과도 같다. 인간은 사랑으로 태어나서 사랑하며 살다가 또 사랑하며 죽는다. 그래서 시와 노래, 문학의 주제는 대부분 사랑이다. 우리나라 가요의 가사내용도 대부분 사랑에 관한 것이다.

 

 

사랑이라고 해서 다 사랑은 아니다

그렇다고 사랑이라고 해서 다 사랑이 아니다. 동물의 사랑은 본능이라고 하지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도 여러 가지 사랑으로 분류될 수 있다.

20세기 기독교의 최고의 사상가라고 불리는 C.S.루이스라는 사람은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에서 사랑을 네 가지로 구분했다. 그것을 우리말로 애정(affection), 우정, 에로스, 자비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보편적인 사랑, 즉 가장 기본적인 사랑인, 필요를 채우기 위한 사랑을 애정이라고 말하고, 가장 덜 본능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같은 방향을 향하고 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을 우정이라고 했으며, 일반적으로 사랑에 빠지다 라고 표현되는 연인들 간의 사랑을 에로스로 나누었고, 마지막으로 위의 이 세 가지 사랑을 뛰어넘고, 가장 온전한 신의 사랑을 자비로 표현했다. 그는 애정과 우정 그리고 에로스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것들은 파괴적인 속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 파괴적인 속성들이 상대방을 구속하고 다른 이를 분리시키는 악한 이기적 집단이 되고 서로가 서로의 인격과 개별성을 무시하고 삼켜버리는 탐욕스러움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한다. "신이 되어 버린 사랑은 악마가 됩니다." 결국 애정, 에로스, 필리아 같은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으로 전락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그 사랑은 악마와 같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마지막으로 말한 자비는 모든 이전의 사랑이 끝까지 그 온전함을 잃지 않도록 만드는 것으로 오직 필요한 것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즉, 내가 고민했던 완전한 사랑은 인간의 사랑에선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완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성숙한다. 완전한 사랑으로

그렇다고 내가 절망을 느낀 것은 아니다. 남녀 간의 사랑, 인간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없다고 해서 실망한 것은 더욱 아니다. 분명히 인간들의 사랑은 이기적이고 파괴적이 될 수도 있다. 에로스의 사랑은 더욱 더.

그러나 얼마든지 성숙의 가능성이 있다. 사랑도 성숙한다. 에로스의 사랑이 완전한 사랑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다. 희생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나는 영화 <노트북>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영화 <벤허>, 용서의 미학

 

 

2016년 리메이크 된 영화 <벤허>

벤허, 2016년 작품이 나왔다. 작년 추석 때 영화관에서 보았는데 50년 전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많은 논란이 있으나 어쨌거나 아주 감명 깊게 보았다. 그리고 말하려는 주제가 용서와 화해였다는 것에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모두 다 대충 아실 것이다. 예루살렘의 귀족 가문의 왕자인 유다 벤허와 그 가문에 입양된 메살라, 이 배다른 형제가 그 당시 사회 정치 구조 속에 얽히면서 원수가 되어 복수를 하는 내용이다.  유다 벤허는 억울하게 로마에 반대하는 극우파 세력을 도왔다는 누명으로 가문이 몰락하고 노예 신세가 된다.  그렇게 된 데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성공만을 향해 달리는 메살라의 역할이 컸다.  유다 벤허는 배의 노를 젓는 노예생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채찍질 맞아가며, 쇠사슬에 묶인 채로 짐승보다도 못한 그 생활을 견디며 복수를 다짐한다.  중간 생략하고 어쨌든 살아남아 복수를 할 기회가 생기는 데 그것이 바로 전차 경주이다. 이 장면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모두 다 공감하는 명장면이다.  그런데 그 경주에서 유다 벤허는 결국 승리하여 명예를 회복하고 부도 얻게 되는 데...

중요한 것은 그와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벤허가 인생에서 살짝살짝 마주쳤던 예수님, 돌에 맞고 있는 사람을 보호하는 예수님, 벤허가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고 있을 때 물을 먹여 주셨던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하고 말씀하시고 돌아가신 장면을 보고 유다 벤허는 흐느껴운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메살라가 있는 곳이다. 전차 경주에 져서 다리가 불구가 된 메살라, 이제는 자기한테 분노하고 또 자신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메살라, 그는 그에게 말한다. 메살라, 네가 우리가 이렇게 되기 전, 옛날 청년시절에 내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 의식을 잃은 나를 엎고 그 먼 거리를 달려 집으로 갔던 것, 그리고 내가 낫기를 바라면서 네가 믿고 있는 신상을 보며 기도했던 것, 그 때 기억나니, 더 이상 살생은 안 돼, 하면서 자기를 죽이려는 메살라는 부둥켜안고 벤허는 운다.  메살라도 같이 운다.  예수님의 사랑처럼, 예수님의 용서처럼 사랑과 용서와 화해가 일어나고 영화는 가족도 찾고 다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용서의 미학

<용서의 미학>을 쓴 루이스 스미디스는 용서는 3단계에 걸쳐 일어난다고 한다.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의 인간다움을 재발견하고 보복할 권리를 포기하며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빈다."

일단 용서가 일어나려면 원수에게서 인간다움을 재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도 불쌍한 마음이 들어야 한다. 유다 벤허는 자기를 노예로 만든 메살라 였지만, 그와 친했던 기억, 그가 자기를 살리려고 부단히 애썼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지금은 부상을 당해 처참해진 그에게 불쌍한 마음이 인다. 이것이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는 중요한 키포인트인 것 같다. 그리고 나서 보복할 권리도 포기하고 그 사람이 도리어 행복하게 되기를 빈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이 마음이 들기는 쉽지 않다. 원수는 죽이고 싶도록 미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의 힘을 빈다. 용서하면 사랑의 예수님을 떠올린다. 벤허에게도 용서의 매개가 된 것은 예수님이었던 것이다. 자기를 죽인 아무에게도 보복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놓고 가신 예수님.

그러고 보면 우리의 원수는 우리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다. 가족, 친구, 친지...

그들에게서 인간다움을 발견할 수 없는 극악모두한 사람이라도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불쌍한 마음이 일 때가 있다. 이것은 아무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종교의 힘이 필요하다.  그 불쌍한 마음이 일 때 용서가 가능한 것이 아닐까.

용서,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미움은 자신을 좀 갉아먹는 해로운 독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쨌든 우리가 종교를 찾지 않더라도 용서가 답이다. 분노와 갈등이 아닌 화해와 통합이 답이다. 우리의 인간관계, 사회, 정치에서 이러한 일들이 가능하게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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