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찰나의 연속, ‘지금, 여기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자, <미움받을 용기>를 읽고.

 

 

<미움받을 용기>는 청년과 철학자의 대화 형식으로, 아들러의 사상을 들려준다. 한 청년의 질문과 거기에 대답하는 한 일본 철학자의 이야기로 아들러의 사상을 쉽게 해석해 해준다. 아들러는 다 알다시피 프로이트, 융과 함께 심리학의 3대 거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개인심리학의 창시자이다. 그의 사상의 특징을 책을 통해 정리해 보았다.

 

 

결정론의 부정

아들러는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다는 말을 부정한다. , 과거의 사건이 인간의 현재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대를 받은 트라우마가 있는 학생이 모두 똑같이 우울증에 걸린다거나, 집안에 틀어 박혀 지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결과를 과거의 원인에서 본다면 결정론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아들러는 원인이 아니라 현재의 목적에 중점을 둔다. 즉 아들러의 사상은 결정론이 아니라 목적론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고, 즉 성공과 실패가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부여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다. 불행도 의미부여하기 나름으로 나에게 선으로 작용할 수 있다. , 행복도 불행도 개인의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관계는 인생의 과제

아들러는 인간관계를 어렵게 하는 것은 개인의 열등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열등감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인 해석이라는 것이다. 키가 작아 열등감에 빠졌다면 자기에게 나름 이러한 해석을 부여하여 열등감을 극복 할 수 있다. 내 키가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위압감을 주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더 자연스럽게 해준다.’ 이러한 해석은 주관에 달린 것이고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또한 열등 콤플렉스나 자기를 자랑하는 우월 콤플렉스는 실상 뿌리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자신 있는 사람은 자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은 주변에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봐 겁이 나 자랑을 하고 우월 콤플렉스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또한 이런 열등감에서 비롯된 경쟁의식은 옳지 못하며, 건전한 열등감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다 다르고 차이가 있는데, 이 차이를 선악과 우열로 엮으면 안 된다는 것, 즉 차이를 인정하면 경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들이 인생의 과제인데, 인생의 과제는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 살고자 할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아들러는 이러한 과제를 회피하는 것이 인생의 거짓말을 낳는 것이며, 자신의 생활양식, 인생을 사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며 다른 사람에게 책임전가를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아들러는 인간이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는 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용기의 문제라고 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의해 좌지우지 될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향해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선택해 나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도입은 과제의 분리, 미움받을 용기도 필요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 즉 인정욕구를 부정한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내 과제에 타인을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되지 말 것. 이것이 인간관계의 기본 시작이다.

때로는 타인에게 미움받을 용기도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며 다른 사람에게 충성하며 사는 삶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포퓰리즘에 빠진 정치가처럼 결국 책임지지 못하고 거짓말을 반복해서 하여, 신용을 잃고 마침내 그 인생은 더욱 고달파진다는 것이다.

타인이 나를 미워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고 거기에 내가 개입할 필요가 없고 타인이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은 내 과제이므로 타인을 개입시킬 필요가 없다. 분리해서 생각하여야 한다. 아들러는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간관계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을 향하는 것

아들러는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지만 세계의 중심은 아니다. 즉 나는 공동체의 일원이자 전체의 일부라고 생각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나뿐만 아니라 타인도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그러나 내 발로 인간관계에 다가가,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여야 한다. 즉 인간관계의 목표는 공동체에 공헌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다시 요약하면, 인간관계의 입구에는 과제의 분리가 있고, 목적지에는 공동체 감각이 있다. 또한 이때 중요한 것은 눈앞의 작은 공동체에 집착하지 않고 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 보다 더 큰 공동체의 상식을 따라야 한다. 학교에서 교사가 절대 권력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지, ‘인간 사회라는 공동체로 생각하면, 학생도 같은 인간일 뿐, 교사가 부당한 요구를 하면 정면으로 이의 제기도 가능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인생의 의미를 지금, 여기에서 찾자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기에 대한 집착(self interest)을 타인에 대한 관심(social interest)으로 돌리고 공동체 감각을 길러야 하며 이 때 필요한 것이, 자기 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하다.

여기서 아들러는 자기긍정이 아니라 자기수용을 말하는데, 자기긍정은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강하다스스로 주문을 걸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방식으로 우월콤플렉스에 빠질 수 있다면, “자기 수용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때 자기 속임은 없다고 한다.

아들러가 말하는 타자신뢰는 신용과는 다르다. 다른 사람을 믿을 때 조건을 달지 않는 것, 비록 신용할 수 있을 만큼의 객관적 근거가 없더라도 믿는 것, 무조건 믿는 것이 신뢰다. 신뢰관계에 있어서 배신당할 것을 너무 두려워하면 결국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때 용기가 필요하다. 그럴 때 인간관계의 즐거움, 인생의 기쁨을 알게 된다.

아들러에 의하면, 타인이 나를 배신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타인의 과제로 분리시켜 생각하여 걱정할 것이 못된다. 중요한 것은 나를 수용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여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키워드, 타자공헌은 자기희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러는 타인을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는 사람을 보고 사회에 지나치게 적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타자공헌이란 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이다. 예를 들어 사회에 나가 돈을 버는 것, 집안일을 하는 것. , 노동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타인에게 공헌하고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감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받아들이게 되는 행위이다. 즉 일의 본질은 타자에 대한 공헌에 있다.

 

모든 사람은 특별해지길 원한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중요한 것은 평범해질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특별해지려고 산 정상에 오르려고 하는 데, 그 사람이 가령 사고나 병이 나서 오르지 못한다면 등산 자체가 실패로 끝나 길 위에 있는 채로, 가짜인 나인채로 인생이 중단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 인생을 선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점의 연속으로 보라는 것이다. 실재 실선을 확대경으로 보면 작은 점의 연속이다. 이 의미는 인생이란 찰나(순간)의 연속이므로, 정상에 오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이미 계획되어진 인생은 없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지금 이 찰나를 뱅글뱅글 춤추듯이 사는 찰나의 연속이며, 그러다 문득 주위를 돌아봤을 때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즉 어느 순간에 도달하려는 지점에 와있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이 의미는 인생은 여행자체를 즐기듯이, 과정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 인생은 과정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무의미성의 답은 아들러는 어떻게 해결할까. 그는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 나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생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때 목적지가 있는데, 그것은 길잡이 별이라는 것이다. 길잡이 별은 절대적인 이상향이며 이것은 아들러의 키워드인 바로 타자 공헌이다. 인생이 의미는 자신이 의미부여하는 것이며, 그 목적지는 타인에게 공헌하는 것이다. 그럴 때 인생을 헤매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들러의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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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기도>, 기도란 하나님과의 쌍방향 소통을 통한 인격의 변화

 

 

신앙생활하면서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작정기도 등 이런류의 기도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말 간절히 간구하면서 기도했을 때 모두 짠하고 응답받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런데 우리 모두 기도에 응답받지 못해서 하나님께 섭섭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새롭게 정의내리고 새롭게 인식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기도를 신비의 경지로 몰고 가는 사람이 있다. 기도는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 사이의 소통이다이렇게 생각해서 기도를 신비한 체험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팀 켈러는 기도를 신비로만 몰아가지 않는다. 기도를 통해서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는 신비주의에 포커스를 두지 않는다. 그는 기도에는 머리와 가슴이 다 필요한 것이며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빌어 기도는 이성적인 신비주의라고도 표현한다.

팀 켈러는 칼바르트의 기도를 하나님을 향한 불치의 향수병(incurable God-sickness)'이라는 표현을 인용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종교가 기도를 하고 믿지 않은 사람도 기도를 한다. 어떤 연구 논문에 보면 무신론자들 가운데 30퍼센트 정도는 기도를 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내면에는 기도하고자 하는 본능이 숨어 있는 것 같다. 기도는 이미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있다.

여기서는 팀 켈러가 말한 기도의 정의의 중요한 포인트를 제시하고자 한다.

 

1.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인격적으로 소통하는 반응이다.

인간이라면 저마다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믿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하나님이란 존재와 실재가 서로 닿고 소통하기를 추구하는 행위가 기도이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데 거기에 반응하는 것 즉 하나님께 드리는 답변이 기도이다. 거기에는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가 함께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으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풍성해질수록 기도도 풍성해지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알면 기도도 피상적으로 머물게 되고 본질에서 벗어난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2. 기도는 듣고 대화하고 만나는 일련의 과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듣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아까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언제든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기도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우리는 늘 무언가를 구하기보다 듣기가 먼저여야 한다.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신다. 우리 인간 편에서 먼저 찾아갈 방도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이 기도이다. 1차원적 기도, 즉 본능적인 기도는 내가 급할 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쏘아 올리는 일종의 구조 요청 신호탄이다.(주세요, 달라고 구하는 기도) 반면 그보다 더 고차원적인 기도 (영적인) 선물로서의 기도는 말로 표현된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시에 답하는 참되고 인격적인 대화다.(하나님과 관계 맺는 것이고 사귀는 것이다)

 

신학자인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어떻게 언어를 체득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제 힘과 의지로 말문이 트였으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고, 말해주는 이가 있기에 말을 배우는 것이고,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언어의 바다에 첨벙 빠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한 마디 한 마디 서서히 응답하는 능력을 체득하게 되어간다는 것이다. 인간의 말은 죄다 응답하는 말이며 남이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스스로 말하는 법이라고 설명한다.

피터슨이 이 글을 쓴 지 알마 안 돼서부터, 갓난쟁이 시절에서 아장아장 걸어 다닐 무렵까지 어린아이들이 노출되는 단어의 개수와 어휘의 폭에 따라 이해력과 소통 능력이 크게 달라진다는 연구결과들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인간은 들은 만큼 말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기도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까마득히 앞선 것이다. 말씀이 먼저 있었다. 이것을 유념하는 것이 기도 훈련에 필수적이다. 이 말은 우리가 기도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하고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듣는 것이 먼저이다.

 

3. 기도는 하나님과의 쌍방향 소통을 통한 우리의 인격적인 변화이다.

욥을 보자. 욥은 고난 중에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한다. 자기의 출생을 저주할 정도로 불평을 쏟아내기도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고난 중에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는다.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신다. 욥은 온 우주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함과 존엄 앞에 욥은 납작 엎드린다. 그리고 욥은 회개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된 욥은 불평과 하소연에서 하나님께 회개와 찬양으로 바뀌어 가게 된 것이다. 쌍방향 소통을 통해 하나님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하는 것이다. 우리의 됨됨이가 변하고 원망과 불평이 회개와 감사와 찬양으로 변하는 것이 기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에 반응하여 우리가 변화되는 것이 기도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거기에 대한 반응의 상호작용이 있었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한 것이다.

욥에게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런 소리를 음성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변화 되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결정적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예수님의 행적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드러내셨다. 우리가 태양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그 태양을 바라보려면 필터가 필요하다. 그 필터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수님이다. 성경에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인간본질의 필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소통이 가능하다. 그래서 기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이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됨됨이의 변화, 인격적인 변화까지도 기도의 영역이다.

 

 

<백년을 살아보니> 백세를 살아 온 이에게서 인생에 대해 듣다.(김형석 지음)

 

김형석 교수는 철학자이자 연세대 명예교수이다.  활발한 저서 활동을 했으며 우리나라 철학계의 거두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신간 <백년을 살아보니>에 그의 담백한 인생론이 담겨 있다.  그에게서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음이 오기를 바라며 책을 펴들어 읽었다.

 

1. 똑같은 행복은 없다(행복론)

행복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행복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주관적이라고 말한다.  돈 때문에 행복해지는 사람도 있으나 돈 때문에 불행해지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김형석 교수의 행복의 정의는 특별하다.  즉 행복은 삶의 일상적이며 정상적인 내용과 연결되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빈 그릇 속에 담아 넣고 싶은 것들의 대명사이다. 이것이 그의 행복에 대한 정의다.

그리고 그는 행복에도 차원이 있다고 말한다.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정신적 가치에서 오는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정신적 가치는 소유에서 오는 만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적 가치의 창조자는 사회에 주기 위한 책임을 감당했고, 우리는 그 가치를 공유한다. 공간을 넘어서, 시간을 초월해 인류가 공유하는 업적을 남긴다.  이러한 인류가 남긴 업적의 혜택을 누리는 일에 동참함으로써 우리는 행복을 누린다.  이것이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93세 되는 가을, 자다가 메모를 남기고 다시 잠들었다.  거기에 그의 인생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향한 그리움과

겨레를 위하는 마음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의 길과 달랐다면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의 답에 있다고 한다.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대답에는 부끄럽지만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에 대한 답은 있다는 것이다.  그 답은 바로 사랑하기 위해 살았다는 것.

 

2. 사랑 있는 고생이 기쁨이었네(결혼과 가정)

그는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어가고 있는 요즘 현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는 고독을 말한다.  노년기에 짝을 잃은 사람에게 아무리 자식이 효를 다해도 배우자를 찾아주는 것만 못하다 라는 일화를 남기면서 결혼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런데 너무 이기주의자들은 결혼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 사랑다운 사랑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결혼은 사랑의 출발이며 사랑의 성장은 정성스러운 반성과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사랑의 나무가 자라는 데는 3가지의 과정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과정은 애욕의 과정이다.  애욕은 소중한 본능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사랑의 전부도 아니며 목적도 아니다. 그렇다고 죄악도 아니다.

두 번째, 애욕은 사랑의 나무가 자라면서 애정으로 승화된다.  애정이 애욕을 포용해서 더 넓고 높은 사랑으로 이끌어 간다.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가정의 구성원이 부부에서 자녀에게까지 확대되면 사랑의 내용도 바뀌게 된다.

세 번째로, 애욕은 애정이 되고 인간애의 경지까지 이른다.  김형석 교수는 실제로 아내가 20여 년 병중에 있었다. 긴 투병과 간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간병을 하면서도 그 무거운 짐을 질 수 있었던 것은 수십 년의 애정과 가정의 사랑이 인간애로까지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또한 자녀들을 위한 부모의 희생만큼 고귀한 사랑이 없으며 그 베푼 사랑으로 그 자식들은 이웃과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애가 이루어지는 과정인 것이다.

 

 

3. 운명도 허무도 아닌 그 무엇(우정과 종교)

김형석 교수는 우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에게는 김태길, 안병욱라는 특별한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그와 함께 우리나라 철학계의 삼대거두이다. 철학계에서 모두 유명해, 라이벌 의식이 없었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고 한다.  그는 그때마다 우리의 경쟁은 사랑이 있는 경쟁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학문과 사회를 위해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서로 위해주는 노력이었다라고 그는 회고한다.

  그는 종교에 대해서 은총의 선택을 이야기 하고 섭리를 이야기한다.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보면 운명론도 허무주의도 아니다.  또 다른 차원의 인생관이 있는데 그것이 섭리이다.  수많은 신앙인들이 은총의 체험인 섭리 속에 살아가며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또 다른 질서인 은총의 질서, 섭리의 질서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선배교수의 일화를 든다.  그 선배 교수는 철학도로서 신앙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죽을 때 그는 신앙적 권고를 받고 마음의 문을 열고 새문안교회에 입문하여 그곳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장례식의 실질적 책임을 맡았던 제자 김태길 교수도 신앙을 모색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임종을 맞이했다고. 김형석 교수는 말한다.  신앙이 인생의 마지막 물음에 대한 해답이라고.

 

 

4.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돈과 성공, 명예)

그는 인생의 목적은 돈과 경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후진 사회에서는 경제 문제 해결이 무엇보다도 선결조건이다. 그 빈곤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과 경제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수단이며 과정이지 목적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는 슈바이처의 삶을 이야기한다.  슈바이처는 고통을 받는 이웃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는 자신의 것을 버렸다. 그것이 슈바이처에게 있어서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목표라고 했다.  슈바이처는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고 종교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학문과 종교는 인간을 위한 것이지 그것들이 삶의 목적은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슈바이처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생명성까지 존중히 여길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형석 교수는 말한다.  예술이나 학문적 업적은 남길 수 없어도 이웃에 대한 사랑의 봉사는 할 수 있고,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업적이나 경제적 유산은 남길 수 없어도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에게 따뜻한 정과 마음은 나누어 줄 수 있다.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의 대답은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삶이다.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그 사랑이 귀하기 때문에 더 높은 사랑은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다고.

 

5. 늙음은 말없이 찾아온다(노년의 삶)

그는 마지막까지 사랑을 이야기한다.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모두 사랑이다. 사랑이 있는 삶,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삶, 이웃을 위한 희생이 있는 사랑, 이것이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고 이 책이 말하는 인생론의 답이다.

김형석 교수와 두 딸의 '고생하며 돌아가신 엄마'를 이야기 하는 대화 속에 이런 말이 오고 간다.  "엄마는 엄마로 사시며 고생하신 것을 다시 하라면 하실 사람 같아요" "그 고생속에는 사랑이 있었거든. 너희들도 인생을 살다보면 사랑이 있는 고생이 가장 값진 행복한 인생인 것을 깨닫게 될 거다. 엄마는 이미 그 인생을 끝냈고."

 

그는 20113월 한림대학교에서 일송상을 받는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 그의 수상 소감을 밝혀 놓았다.  핵심은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라는 것.

 

"제가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90이 넘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아오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하고 살았습니다.  다시 한 번 교단에 설 수 있다면 정성껏 제자들을 위하고 사랑해주고 싶습니다. 여러 교수님들은 저와 같은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새출발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제 나이가 되면 여러분의 인생을 행복과 영광으로 이끌어주실 것으로 믿고 감사드립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마이클 샌델은 시장의 공정성이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그래서 모든 이에게 이롭다라는 시장지상주의로 흘러가는 세태에 반박하면서 이글을 썼다. 이 사회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과 살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시장에서 교환이 가능하다면 모든 진리라고 믿는 우리의 가치들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정과 사랑, 명예, 공공성, 도덕 등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효율성이 답이 아니다.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마이클 샌델은 던지고 있다.

 

 

시장지상주의 시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없다.

교도소 감방 업그레이드 182달러, 인도인 여성의 대리모 서비스 6250달러, 미국으로 이민하는 권리 50만 달러, 멸종 위기에 놓인 검은 코뿔소를 사냥할 권리 15만 달러, 의사의 휴대전화 번호 연간 1500달러, 자녀의 명문대 입학 허가, 대학마다 다름.

 

우리는 무엇이든 사고 팔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팔고, 자기의 장기까지 팔고 자신의 신체 일부를 상업용으로 게재해서 돈을 벌고...

이렇게 사고 판다는 논리가 물질적 재화의 영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삶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제는 시장의 효율성이 공정성을 이룰 것이라는 것이 의심받고 시장과 도덕이 분리되고 있다. 다시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말하고 있다.

 

 

사회관습, 인간관계, 일상의 것들까지 침범한 시장의 역할과 영향력

1. 예를 들자면 선착순의 개념이 희미해지고 있다. 약간의 돈만 더 내면 공안 보안검색대든 놀이 공원의 인기 놀이기구든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가 없다.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재화를 분배하는 시장의 논리가 선착순이라는 전통적 관행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제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는 줄서기 도덕에 대한 가치를 변질시킨다.

 

2. 결혼과 이혼의 개념도 시장의 논리로 해결한다. 예를 들면 결혼에서 내가 기대하는 효용이, 독신 때로 있을 때의 효용보다 더 높을 때 결혼하기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혼자는 독신이 되거나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에 기대하는 효용이, 자녀와의 물리적 별거, 공동 자산의 분리, 법률 비용 등 이별로 상실하는 효용을 초과할 때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 일어나는 일도 시장논리로 설명된다.  그렇다면 결혼과 이혼에 따르는 전통적 가치, 사랑, 부모로서 모성까지도 시장이 해석해준다.  이제는 결혼이 거래가 되어 버렸다.  마이클 샌델은 이러한 변화가 생겨난 한 가지 이유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금전적 인센티브의 사용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본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우리는 사람의 신장, 성, 학위는 돈으로 살 수 있지만 도덕적으로 불미스럽게 여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돈으로 사고 팔 때 분명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뭔가가 있다. 모든 것을 상품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친구를 돈으로 살 수 있지만 우정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노벨상 트로피를 살 수 있을지 언정 노벨상 자체를 살 수 없다.

또한 사람의 신장은 살 수 있지만 도덕적으로 논란거리가 된다.  리처드 포스너라는 사람은 아이를 입양할 때도 시장 논리에 맡겨 좀 더 바람직한 입양조건을 갖춘 아이를 다른 아이보다 비싸게 책정하여 경매에 부치자 라고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시장이 아무리 효율적이라도 아이들을 사고 팔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분명 돈으로 사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시장이 도덕을 껴안지 못한다. 시장은 도덕을 밀어내고 있다.

 

 

시장에 대한 신념을 둘러싼 두 가지 입장

시장에 대한 신념을 가진 첫 번째 입장은 어떤 재화나 활동을 상업화해도 그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돈은 결코 재화를 변질시키지 않고 시장이 도덕을 밀어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이 논리는 재화를 사고팔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해서 효용을 증가시키고, 자신이 그 재화를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거래를 중단하면 된다는 논리이다.

시장에 대한 신념, 두 번째 입장은 윤리적 행동은 아껴야 하는 상품이라는 것이다. 이타주의, 관용, 결속, 시민의 의무 같은 도덕적 정서는 사용하면 고갈되는 희소한 자원이므로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시장은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므로 미덕이라는 제한된 자원을 다 써버리지 않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타주의 감정을 무모하게 사용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곳에 더 온전히 쓸수 있게 해주는 것이 시장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경제학자이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제자인 데니슨 로버트슨은 <사랑의 경제화>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그는 처음부터 경제학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지, 인간의 숭고한 동기, 이타주의, 자선, 관용, 결속, 시민의 의무 같은 고차원적 미덕은 성직자의 몫이다 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의 성직자들의 임무를 돕는 방법은 이타주의나 도덕적 배려보다는 자기 이익에 의존하는 정책을 장려함으로써 사회가 희소한 미덕을 낭비하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버드대학교 총장이자 경제학자인 로렌스 서머스도 이와 같이 주장한다. "우리 내면에 누구나 이타심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나와 같은 경제학자들은 이타심을 우리가 보존해야 하는 소중하고 드문 재화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기적인 개개인이 모여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시스템을 설계하고 가족, 친구, 시장이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사회 문제에 대한 이타심을 아껴둠으로써 보존하는 것이 훨씬 낫다"

이 말은 이타주의를 무모하게 사용하면 공공 목적을 위해 써야할 공급량도 줄어들 뿐만 아니라 최소한 남겨두어야 할 가족, 친구를 위해 써야 할 이타심까지도 감소시킨다는 주장이다.

 

 

마이클 샌델의 반박

마이클 샌델은 위의 시장에 대한 신념과,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반박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베푸는 자선과 사랑의 양은 쓰면 쓸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용할수록 고갈되지 않고 오히려 커진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좀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해 좀 더 계산적으로 자기 이익에 치중해,  대한다면 그 사랑이 더 오래 보존될까. 평생 사랑하고 싶어서 그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면 그 사랑이 줄어들까.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정당하게 행동함으로써 정당해지고 절제함으로써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하게 행동함으로써 용감해진다.  이타주의, 관용, 결속, 시민 정신은 사용할수록 고갈되는 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하면 발달하고 더욱 강해지는 근육과 가깝다. 시장 지향 사회의 결함 중 하나는 이러한 미덕이 쇠약해지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우리의 공공 삶을 회복하려면 좀 더 부지런히 미덕을 행사해야한다는 것이 샌델의 주장이다.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도덕심, 이타심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희소한 것으로 보는 것이 특징이다.  인간은 이타심, 도덕심을 발휘하는 경우는 제한적이고 특정한 경우이기 때문에 여기에 기대거나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나는 샌델의 입장에 찬성한다.  우리의 도덕적 가치는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사랑, 이타심, 관용, 등은 도덕적으로 궁극적 가치이면서 희소성을 특징으로 하지만 그 속성은 고갈되지 않고 쓰면 쓸수록 계속 커지는 속성이 있다.

속성상 무한대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우리가 계기를 잘 만든다면 우리의 도덕적 가치를 무한대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본다. 차라리 개인의 이익에 의존하는 것이 더 한계가 있을 때가 있다. 경제학자들은 그것을 모른다.

 

 

 

 

 

 <콰이어트>, 이젠 내향성의 시대다, 외향성과 내향성의 상생을 말하자.

 

 

<콰이어트>라는 책은 나에게 자신감을 준 책이다. 왜냐하면 내가 어릴 적 가정통신문에 제일 많이 적혀져 있던 것이 "얌전하고 내성적인 아이입니다" 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버지가 읽어보시고 혼을 내셨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활동적이고 긍정적이어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한 것을 꾸짖으셨다. 그래서 나는 내심, '내성적인 것은 열등한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아직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미국사회에서도 있고, 모든 성공의 기준이 외향성에 두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 모두가 "외향성 이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향적인 사람들도 본래의 자기보다 더 외향적으로 보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외향성 이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중대한 실수를 하는 것이다 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 예술, 발명품 중 진화론과 반 고흐의 <해바라기>에서 개인용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것들이 내향적인 사람들에게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중력의 법칙, 상대성의 법칙, 구글, 해리 포터등 이 외에 수도 없이 많다. 이것들만 보아도 내향적인 사람이 더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갖고 있으며, 창의적임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외향성 지도자와 내향성 지도자의 리더십의 차이

그런데 아직도 사회는 내향성을 이류로 여기고 병적인 성향도 잘 갖는 성질로 여기고 이런 특성을 갖는 사람을 무시한다. 그래서 세상은 모두 외향성을 가지려고 하고 자신감을 가지려고 하는 강박증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리더십에서도 카리스마가 강조되어 내향성 기질의 사람은 리더가 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실제 내향성을 가진 리더들은 어떻게 일을 처리하나 보았더니 내향적인 사람들은 능동적인 사람들을 이끄는데 유달리 잘 맞고, 상대의 말을 잘 듣고 상황을 지배하는 데는 무관심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재능을 살리고 독려해준다는 것이다. 즉 내향적인 지도자들은 능동성이라는 선순환을 만들어내고 더 개방적이고 수용적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더 열심히 일하게 한다는 것이다.

반면 외향적인 리더들을 자기의 업적을 남기는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좋은 아이디어는 놓치고, 다른 사람들을 수동성에 빠지게 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외향적인 지도자들은 수동적인 일꾼들과 함께 할 때 더 나은 결과를 보여준다고 한다.

그렇다면 권위의식을 말하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 그리고 인권이 중요한 민주주의 시대에, 그리고 개인의 능력의 활용이 중요한 사이버 인터넷시대에, 내향적인 지도자상이 더 맞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저자는 가치 판단을 하지 않았지만 내향성 기질의 지도자가 요즘시대에 더 필요한 지도자상임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성격으로 지배하는 카리스마리더십이 아니라 인격으로 수용을 말하는 품성리더십이 필요한 시대다.

 

내향적인 사람들의 탁월한 문제해결력, 외향성과 내향성의 균형점 찾기

초등학교 때는 외향적인 사람이 내향적인 사람보다 성적이 좋지만 고등학교와 대학에서는 내향적인 사람이 뛰어나다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한 연구에 의하면 대학수준으로 가면 인지능력보다 내향성이 학업성과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141명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스무 개 과목의 지식을 테스트하였는데 내향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사람보다 거의 모든 과목에서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특히 내향적인 사람은 "통찰력이 필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두각을 나타낸다.  이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내향적인 사람들이 외향적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한 것은 아니고 지능은 비슷한데, 시간에 쫓기거나 사회적 압박을 받거나 멀티태스킹을 해야 할 경우 외향적인 사람들이 더 뛰어나다고 한다. 그런데 비해 내향적인 사람은 자기 반성에 상당부분 활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향적인 사람은 문제를 해결할 때 빠르고 간편한 접근법을 택하여 정확성과 속도를 맞바꾸며, 하는 도중에 실수를 많이 저지르고, 문제가 너무 어렵거나 뜻대로 안 되겠다 싶으면 아예 포기해버린다는 것이다.

반면 내향적인 사람은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고 정보를 철저히 소화하고 임무를 좀 더 오래 물고 늘어지며, 쉽게 포기하지 않고, 좀 더 정확하게 처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외향성이 롤 모델인 세상에 이젠 내향성의 사람이 우수함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내향성이 외향성과 조화를 이룰 때,  균형점을 찾을 때 더 시너지 효과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젠 내향성의 사람들 주눅 들지 말자. 이제 내향성의 사람들이 가치 폄하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조직에서 살아남기에 대한 제언, <악성 나르시시트와 그 희생자들>을 읽고

 

 

이 사회는 모두 조직을 이루고 있다. 작은 단위로 가정에서부터, 학교, 교회, 대학교, 대학원, 직장 등. 세분화하면 어머 어마한 크고 작은 조직들이 이 사회를 이룬다.

그러나 이 조직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사랑과 정이 베이스인 조직, 감정은 배제되고 경쟁과 효율성이 베이스인 조직.

가정과 학교는 그래도 정이 통하는 조직이다. 교회도 겉으로 보기에는 사랑이 있는 교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 목회자 조직은 엄격한 충성과 순종을 요구하는 경직된 조직이다. 대학원 조직도 마찬가지이다. 지도교수와 선배와 후배의 서열이 엄격한 그 사이에 온갖 평가와 비교와 경쟁이 있는 무서운 경쟁조직이다. 일반직장은 말해서 뭐하랴, 거기는 엄격한 능력과 효율성으로 평가되는 정글이다.

나는 40대의 여성으로서 많은 조직생활의 실패의 경험을 통해, 지금 사회에 처음 발을 들인, 특히 여성에게 몇 가지 제언하고 싶다.

 

첫째, 상사에게 절대 따뜻함을 기대하지 말라.

중앙일보에 이런 글이 실렸다. <왜 유명한 창업가들은 성격이 나쁜가>

이 글에서 창업가, CEO들은 성격이 다 나쁘다는 것이다. 아랫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것은 일상사고 불합리한 일로 쫓아내는 것은 다반사라는 것이다. 그 글에서 모진 말과 기이한 행동의 끝판왕으로 스티브 잡스를 들었다. 그는 1980년대 제록스에서 새 컴퓨터 기종을 출시했을 때, 그 엔지니어에게 "네가 평생 만든 것은 다 똥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픽사(Pixar)에서 일할 땐 직원을 해고하면서도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 퇴직금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잡스의 친구 조니 아니브는 잡스한테 '왜 그렇게 모질게 구는지' 물어봤다고 한다. 그의 대답은 '그래도 금방 사그라들지 않느냐'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뒤끝이 있다거나 한 사람을 계속 괴롭히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일이 안 풀리고 하면 남을 괴롭히는 것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쓴 저자는 회사가 잘되기 위해서는 못된 리더가 필요하다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생계를 잃고 자살까지 하는, 별별 사회문제가 일어나고 있는데...

사회적 대책, 개인의 조직생활에 대한 대책은 미리 마련되고 교육되어져야 한다.

경쟁구조가 덜한 우리나라의 공무원 조직에서도 상사의 모욕으로 자살한 사람이 있었다.

상사들은, CEO들은 아랫사람한테 모욕을 주고 모진 말을 할 자유와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사회생활의 룰이 자기한테는 해당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절대고 원칙이고 그것을 어겼을 땐 가차 없다. 이들이 합리화하는 것은 일의 효율성, 조직의 발전이다.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 사람의 인권이 무시되고 인격이 짓밣혀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는 것이 당연시 되는 사회, 이런 사회를 이루는 것이 목표인가.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조직의 우두머리들은 보통 악성 자기애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악성 나르시시트들과 그 희생자들>이란 책에서 악성자기애자들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악성 자기애자들은 자신은 죄책감을 모르나 타인에게는 가차 없이 죄책감을 안겨준다. 가치관, 감정, 태도는 그가 대하는 사람과 그를 둘러싼 환경에 따라 수시로 바뀌며 외면적으로 동정과 연민을 가장할 수 도 있다.

또한 그들은 유혹자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매우 친절하고 상냥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타인의 권리나 행복을 짓밟는 것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극도로 자기중심적이며, 상대에게 완벽을 요구한다.

또한 그들은 거짓말쟁이다. 대부분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는 달변가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타인의 도덕성과 가치관을 이용하기도 한다.

또한 그들은 질투가 많고 부정한 사람이다. 자신에 대한 비판은 못 받아들이는 반면 타인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비판한다. 상대방을 비하하면 할수록 자신이 더욱 강해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 악성자기애자들한테 당한 사람들은 극심한 자존감의 박탈, 자기애의 결핍으로 고통 받는다. 자신감이 부족해지고 부정적인 자기상으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므로 상사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거나 따뜻함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

 

둘째, 너무 열심히 일해 상사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내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실제 나도 경험한 일이고 책 속에 예화도 나오는데, 어떤 여성 대기업의 영업사원이 그녀의 팀장보다 더 나은 결과를 냈다. 그런데 그 팀장은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가 계약을 따오면 이를 본체만체했고,  근소한 차이로 지각을 한다든지 사소한 일을 까먹는 등의 작은 실수들에게 매섭게 꼬투리를 잡았다.  결국 그녀는 팀장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게 되자, 그 팀장 왈 "네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라고 비꼬았다고 한다. 그 여성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안 봐도 알만한 사실이다.

  악성 자기애자들은 희생양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드높이기만 할 뿐, 상대의 이미지를 높여주는 법은 결코 없다. 상대방을 끊임없이 비하하고 무시할 뿐이다.

 

셋째, 상사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 자체로, 그리고 은밀한 발설을 했을 경우 위험해 빠질 수 있다.

이 악성 자기애자들은 도착에 가까운 환자다. 이 악성 자기애자들은 제3자들을 이용하여 희생양을 괴롭히기도 한다.

책에 나온 예화이다. 이번에도 희생양은 여성이다. 어느 여성의 회사의 팀장은 회의 때마다 자신의 좋지 않은 기분을 풀기 위해 직원 중 한 사람을 지목하여 자기 희생양으로 만들곤 했는데, 그 팀장의 정서적 폭력을 지켜본 많은 직원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반대편에 서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 아침, 팀장은 또 직원들 앞에서 여직원 중 한 명을 '걸레'로 취급했다.  그 소리를 듣고 동료들은 시시덕거리며 웃었다. 그 여성의 상처는 더욱 심해졌다. 그녀는 모멸감과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틀이 지난 후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팀장을 찾아가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해고 되었다. 회사의 사장은 팀장의 만행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녀를 쫓아낸다.

필자의 경우엔 이런 경우도 있었다. 여자 동료끼리 친하게 직장생활을 했는데, 한 여자 직원이 남자상사의 바람 피고 그 아내를 폭행한 것까지, 또 물질 비리까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여자 직원은 일자리를 잃을 까봐 같은 여직원끼리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비밀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남자상사는 그 비밀을 발설할까봐 그 여자 직원이 눈엣 가시였다. 결국 그 여자 직원은 잔인하게 다른 빌미로 해고 되었고, 그 여자 직원이랑 친했던 다른 여자직원도 다른 이유로 하나씩 하나씩 해고되었다.

 

넷째, 자기가 피해자가 되기 쉬운 유형인지 자기를 체크하라

책에서는 희생양의 일반적인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희생양들은 대체로 인심이 후하고 진정성이 있으며 사랑스럽고 타인에게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 순진해보이며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는 점도 공통적이다.  누군가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완벽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관계를 바라며, 과도하게 감정이입을 잘하고 책임감이 강하다.  피해자들은 타인을 보호해주려 하며 사랑하고 위로하고 달래준다.  스스로 죄책감을 잘 느낀다.  비판을 포기하고 스스로 자율성과 존엄성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사람을 늘 기쁘게 하려 하며 현실을 직면하여 보기를 원치 않는다.

 

한 마디로 순수하고 순진하고 의존적이며 이타적인 사람이 희생양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자기가 이런 류의 사람이라면 현실에 대한 직시가 더 필요함을 깨닫고 대처해야 한다.

 

다섯째, 동료와는 거리를 두고 다른 객관적인 입장에 있는 제3자와 이야기하라.

희생양은 조직 내 동료들에게도 고립되기 쉽다. 그리고 조직내에 동료에게 자기 비밀을 이야기 하고 상의하는 것은 치명타가 될 수 있다. 동료들은 당신을 항상 배반할 준비가 되어있다.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승진을 위해서, 자신의 편익을 위해서, 인간애보다는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다. 조직 내 동료에겐 절대 자신의 이야기를 상의해서는 안된다. 이럴 때는 가족이나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한 친구 곁으로 가서 숨고르기를 하는 방법도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입장에 있는 제3자와 진실한 대화를 하라. 또 의존의 관계를 낳지 않도록 나 자신에 대해서 객관적이 되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여섯째, 악성자기애자와 완전 절연하라

이 책에서는 악성 자기애자도 심각한 자기애의 결함이 있는 존재로 이야기 한다. 그렇기에 악성 자기애자들은 자기상을 필사적으로 보호하려 한다. 그들은 '전능함'이라는 외적 모습 뒤에 극도로 유약한 내면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모욕하고 잘못을 비난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들은 또다른 희생양을 찾거나 이 절연을 통해서 자신을 반성할 기회도 될 수 있다. 그럴 확률은 적겠지만...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은 그들과 완전히 인연을 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큰 선물이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우선하는 일은 없다.

 

일곱 번째, 탄성력, 마음의 근육을 키워라

악성자기애자의 피해자들은 정신분열, 광기, 고립, 우울증, 등 심각한 정신병적 증상을 겪을 수 있다. 이럴 땐 이것을 자신의 마음의 근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심리적 탄성력은 심리 내외부적 압력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자신의 자기애, 자존감, 존엄성이 파괴되었더라도 다시 일어서라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탄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내적 자원을 기르고, 따뜻한 사람들과 만나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애를 기르고, 유머감각을 기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많은 불행을 겪은 사람들이 불우한 상황을 기회로 삼고 삶의 터닝 포인트가되어 더 훌륭한 일을 하게 된 경우도 많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여성으로서 악성 자기애자들에게 당한 억울함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겪은 적이 있지만, 그것을 통해 나의 장점을 발견하고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았다. 부디 피해자가 이 글을 읽는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악성 나르시시스트와 그 희생자들>이라는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행운은 여유로움에서 온다, <보이지 않는 차이>를 읽고

 

 

우리 집안의 직계가족에 아버지를 빼고 조카뻘은 빼고 3명의 남자가 있다. 40, 50대의 대한민국의 중년남자로 직장생활 열심히 해서 어느 정도 위치까지 오른 성실한 남자들이다. 그런데 이 세 남자가 공통적으로 한 주에 한 번씩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뭘까?

 복권, 로또 사는 거다. 나는 왜 사냐고 묻는다. 일확천금을 바라는 한탕주의를 꿈꾸는 사람들도 아닌데... 그런데 왜 돈 아깝게 복권을 사는지 모르겠다.  물으면 재미로 산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심리 밑바탕에는 나에게 행운이 왔으면 하고 하는 바람이 깔려 있는 것 같다.  현대인들의 심리에는 나에게 행운이 왔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얼마 전에 행운에 대한 책을 읽었다.  행운이 따라오는 사람과 행운이 따라오지 않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책 제목도 <보이지 않는 차이>이다.  재미있을 것 같아 다 읽었는데,  저자가 왜 누구에게는 운이 따르고 또 누구는 지지리도 운이 없는 것일까를 질문을 던지면서 많은 자료를 찾고 공부해서 운이 따르는 사람의 공통점을 몇 가지 우리에게 내놓는다.  그것을 요약하자면 첫째로 조급해 하지 않고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 행운이 따른다는 것이다.

 둘째로 남다른 안목, 즉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에게 덕을 베푸는 것 크게 이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공통점이 크게 특이한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종교인들도 다 강조하는 것들이다.

 

<보이지 않는 차이> 이 책의 저자가 운이 따르는 사람은 조급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다 라고 했는데, 이것을 실제 실험한 내용이 책에 나온다.

왜 어떤 사람에겐 운이 따르고 어떤 사람에겐 따르지 않는 것을 먼저 고민한 사람이 있었다. 영국의 심리학자 리처드 와이즈먼 박사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그 차이를 10년 넘게 고민하다가 BBC 방송과 함께 행운에 대한 실험 프로그램을 진행해보기로 했다. 신문광고를 내어 '행운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운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각각 100명을 선발하였다.  무슨 실험을 했냐면 그들에게 미리 준비한 신문을 주고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사진이 있는지 파악하라고 하고 신문의 중간쯤에 이런 글을 써놓았다.

"이 글을 발견한 사람은 내게 와서 돈을 달라고 조용히 말하시오"

'행운이 따른다'는 쪽의 사람들은 그 문구를 발견하고 와이즈먼 박사에게 다가와서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운이 없다'는 사람들은 그 글을 발견하지 못했다. 신문 중간쯤에 글이 있었는데도, 글은 발견하지 못한 채, 사진을 세는 데에만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이 박사는 "운이 없는 사람들은 긴장한 상태였고, 그런 긴장이 행운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로 막고 있었다" 이렇게 분석했다.

이 실험은 눈에 불을 켜는 사람에게는 도리어 행운이 따르지 않는다는 결과를 말해준다.  눈에 불을 켜고 사진만 찾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끝내 행운을 불러다주는 문구를 발견하지 못하고 운이 없다고 한탄만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완벽주의, 욕심, 이런 것들이 행운의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여유를 가지는 것, 자신을 돌아보고 살펴보는 것이, 행운을 부른다고 한다. 행운은 조급한 사람은 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결론이다.

많은 현대인들이 조급증에 시달린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노력을 하는데 이 책의 저자말대로 쉼이 없고 여유가 없다.

 

또한 이 책의 저자는 운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혜의 영역이기도 하다라고 표현한다. 지식이 지혜는 아니다. 가방끈이 길다고 해서 지혜로운 것도 아니다. 저자는 현실감각, 안목, 통찰력, 이런 것들이 운을 부르는데, 이것이 많이 배웠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말한 것은 '다른 이에게 마음을 쓰라' '남에게 좋은 일을 하라' 라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가 받아온 위대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관계의 바다 속에 산다. 나 혼자 살 수가 없다. 많은 자기계발서를 읽어보면 인생의 성공 비결은 인간관계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저자도 나는 남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 연결부분이 어느 순간에 행운의 통로가 되어 돌아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소수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크게 성공하고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들을 연구하고 그들의 공통점을 이야기했는데, 그들은 철저하게 남 좋은 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많은 금액을 기부하는데, 반면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고 한다. 워렌 버핏과 빌게이츠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거의 물려주지 않기로 했고 최소 생계비 수준만 남겨줄 것이라고 발표했다. 워렌 버핏의 딸은 부엌을 개조하려고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돈 한푼 안 도와주고 "은행돈을 빌려라" 그랬단다.  남 좋은 일을 잘하는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인척이 덕을 보려들면 무자비하게 털어내고 특히 품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욕도 많이 먹는 것 같다.

행운을 많이 받은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기를 최초의 행운은 남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고백한다.

 

 

 

 

 

 

 

<인간의 품격>, 자기과잉시대에서 겸양의 시대로

 

 

자기 낮춤과 겸손으로 돌아가자

이 메시지를 오늘날 팽창주의, 능력주의, 성과주의에 물든 이 시대가 다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솔직히 겸손과 자기낮춤은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메시지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세속화되어 이 메시지를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이 메시지를 다시 말하고 있음을 필자는 피부로 느낀다.  자기 과잉의 시대에 이제는 자기 낮춤과 겸손으로 돌아가자.  Big Me 가 아니라 Little me 로 돌아가자.  그래서 이제는 다른 사람을 제압하는 카리스마를 말하지 않고 인격을 말하고 품격을 말하고 품성을 말하자.  리더십에도 이런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류의 책들이 <인간의 품격> 외에 <인격론>, <콰이어트> 등 많은 베스트셀러들이 나오고 있다.  시대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과거에 비해서 오늘날의 문화가 이제는 자신을 낮추는 문화가 아니라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도록 권장하는 문하가 되어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섬김, 겸손, 자기 낮춤은 단어사용도 현격히 줄어들고 오히려 경시되어가고 있는 풍조이다.

<인간의 품격>이란 책에 보면 미국의 예가 잘 나오고 있다.  1948년부터 1954년까지 심리학자들은 1만 명이 넘는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에게 자신을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기는지 물었는데 12퍼센트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1989년 같은 질문을 받은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은 남학생 중 80퍼센트가 여학생 중에는 72퍼센트가 자신을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여긴다고 대답했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30,40년 상간에 수치가 12퍼센트에서 80퍼센트로 늘어난 것이다.

심리학에서도 자아도취테스트라는 것이 있는데 이 테스트에서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와 '나는 내 몸을 보는 것을 좋아 한다'라는 문장에서 지난 20년 사이 수치가 30퍼센트가 올라갔다고 한다.  조사에 의하면 자신에 대한 평가가 현격히 높아진 것과 더불어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구도 엄청나게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 중 명성은 우선순위가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1976년 사람들에게 인생의 목표를 나열하라는 질문을 했을 때 명성은 16개 항목 중 15위를 기록했는데 2007년에는 젊은 사람들 가운데 51퍼센트가 유명해지는 것이 자신의 가장 큰 개인적 목표라고 답했다.

 

나눔과 배려로

우리사회도 마찬가지다.  우리사회는 옛날부터 겸손과 희생을 강조하는 유교문화권 사회였다.  그러나 서구문화의 도입,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긍정의 심리학이 꽃피면서 "나"를 강조하는 문화, 그 다음에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기를 과시하는 풍조, 그리고 능력을 강조하는 경쟁이 너무 심한 사회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지적해주는 사회풍토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 요즘이다.  많은 출판물, 강의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세계적으로 볼 때 걸스카웃이 표방하는 캐치프레이즈가 달라진 것만 봐도 시대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나는 초등 6학년 때 걸스카웃을 했는데 그때는 자기희생, 겸손, 봉사 이런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 걸스카웃 매뉴얼을 보니까 <변화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 이런 제목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미국사회도 마찬가지 였다.  책의 내용에도 나온다.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중심, 세상의 중심은 바로 나라고 여기게 한 것 같다.  그래서 빅 미를 키워왔던 것이다.

요즘에는 걸스카웃이 어떤 것을 강조할까 찾아봤더니, <창의, 배려, 나눔> 이런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현실의 자기 낮춤, 겸손, 양심, 인격, 섬김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줄어들고 사회적으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증가하고 자살률이 증가하고 도덕성의 감소 등 살인, 학대, 폭력의 사회악의 현상이 말해주듯이, 사람들의 공허한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다. 이젠 빅 미에서 리틀 미로 가야 한다.  인간의 품격은 자기 자신을 리틀 미로 여기는 겸양에 있는 것이다.

 

 

자기 낮춤, 남을 높이는 칭찬에서부터

이것은 적용의 문제인데, 빅 미에서 리틀 미로 돌아가는 것, 자기 낮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한 가지라도 실천하는 방법이 있다. 자기 과잉, 경쟁, 자기 과시가 강한 사람은 약점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남을 칭찬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지 못하기 때문에 칭찬에 박하다. 칭찬은 남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기가 리틀 해진다고 생각해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칭찬을 잘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남을 깎아내려야 한다. 칭찬하는 것 이것도 자기 낮춤의 방법이다. 거대한 실천을 해야 할 것처럼 심각할 필요 없다. 남을 칭찬하기라도 한 번 실천해 보자. 자기를 깎아 내리고 남을 칭찬하는 것, 자기 낮춤, 겸손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격이 한층 성숙해 갈 것이다.

 

 

 

 

 

 

 

<승자의 뇌>, 진정한 승자의 정신

 

 

누구나 승자가 되고 싶어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승리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어떻게 해야 승자로 살 수 있는 걸까. 혹자는 유전자에 의해 승자 혹은 패자가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승자효과 winner effect라는 것이 있다 라고 주장하는 책이 있다.  바로 <승자의 뇌>라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동물실험을 통해서 한 번 싸움에서 이긴 경험이 다음 싸움에서 이길 확률을 높여준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승자효과이다. 한번 승리가 다음번의 승리도 보장해 준다는 것이다. 한번 승리한 경험은 뇌에서 테스토스테론을 분출하는데, 이 맛을 본 동물이 다음 번 대결에서도 승리를 거둘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다음 번 대결에서 이 테스토스테론이 보다 더 많이 분출된다. 그럼으로 인해서 그 동물은 덜 불안해지고 더 공격적으로 바뀌며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임계점도 더 높아진다. 즉 테스토스테론이 승리를 거두는 동물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바로 이 승리의 쾌감을 뇌가 기억하고 뇌가 다음번 싸움에 더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한번 이긴 경험을 맛본 사람은 다음번 경쟁에서도 이긴다는 논리이다.

 

승리감은 수명과도 관련이 있다

책에서 보면 이런 예가 있다. 아카데미상 수상 후보자로 지명된 성공한 배우들을 대상으로 해서 수명을 분석한 결과, 아카데미상 수상자들이 후보로만 지명만 되고 그 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서 평균적으로 4년 더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노벨 수상자들도 마찬가지인데 노벨상 수장자 들이 후보에 오르긴 했지만 결국 그 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서 평균적으로 1-2년을 더 오래 살았다는 보도가 있다. 저자는 이런 결과가 왜 나왔는지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아카데미상 수상이라는 경험이 세상에 대한 통제력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강화하기 때문에 이것이 스트레스의 해로운 효과를 차단해서 더 오래 산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승리의 경험은 승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한다고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 통제감은 승자를 스트레스로부터 막아주며 그가 보다 나은 성공을 거두고 보다 오래 살며 또 보다 행복해지게 해준다는 것이다.

어쨌든 승리의 경험은 우리에게 유익한다. 수명도 연장시켜준다.

 

끊임없는 승리는 부정적 결과를 만든다

부정적인 승리도취, 도박, 권력, 섹스를 생각해 보자. 승리는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높인다고 했다. 이 수치가 높아지면 승리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테스토스테론은 도파민,  즉 도박이나 모험의 전율이든 혹은 섹스의 전율이든 간에 전율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테스토스테론이 도파민 수치를 높여주고 이 많은 양의 도파민이 전율을 좇는 마음을 충돌질 한다. 그래서 억제할 수 없는 끊임없는 욕망으로 나아간다. 일정한 양의 도파민은 힘을 북돋우고 동기부여를 하며 보상과 인정에 따르는 행복감을 주지만, 도파민의 양이 통제되지 못할 때 위험이 따른다는 것이다.

권력자들이 끊임없는 섹스에 취하고 도박꾼들이 도박을 끊지 못하고 계속 도박을 하는 것도 이 이유에서 일 것이다.

 

진정한 승자는

저자는 진정한 승자는 자아가 늘 위험하고 사나운 개라는 사실을 알고 권력이라는 무거운 짐을 잘 사용하기 위해 그 개를 멀찍이 떼어놓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권력에 심취하면 권력 맛을 보면 개가 되기 쉽다. 저자는 이것을 경계하고 있다.

진정한 승자는 권력의 편익(예를 들면 똑똑함, 창조성, 목표 집중성 등)을 즐기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자원을 나누어줄 줄 아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승자는 삶을 스스로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이며, 이 통제감이 승자를 스트레스로부터 막아주며 부정적인 영향에서 막아주며, 보다 더 성공을 거두고 오래 살며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승자는 자신의 자아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나운 개라는 사실도 충분히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개라는 자아를 사회적인 원칙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목줄에 단단히 채워두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즉, 진정한 승자는 바로 자신을 통제하고 길들이는 사람이다.

   

우리에겐 이런 리더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이런 리더, 이런 정신을 가진 정치가가 필요하다. 리더는 권력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승리의 쾌감이, 권력의 맛이 자신의 자아를 개가 되지 않도록 늘 통제하고, 사회의 원칙을 늘 수호하려고 하는 리더, 이런 리더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돈과 섹스문제에 얽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도덕을 이야기하고, 보편타당한 가치를 이야기 하고, 상식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뇌를 연구했다. 그는 뇌를 연구하면서 승리의 맛도 권력의 맛도 통제가 됨을, 통제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승리는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러나 우리가 통제력을 잃으면, 그 승리의 쾌감은 우리를 언제나 짐승으로 만들 수 있음을 늘 상기해야 할 것이다.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결혼은 성장이다

 

 

다시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다

온갖 매체에서는 혼밥, 혼술, 이혼, 졸혼, 등 결혼과는 무관한, 결혼의 환상을 깨는 말들이 떠돈다. 20대 때 나에겐 결혼이란 인륜지대사였고 필수였다. 그만큼 간절했고 관심사였다. 그러나 30대에 와선 결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되었다. 결국 40대에 와서는, 하면 손해 보는 귀찮은 일이 되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싱글라이프를 즐기는 상황에선.  시대의 변화인가 내 개인적인 변화인가. 어쨌든 여러 요소 때문에 결혼은 나에게는 필수사항이 아니다.

그런데 후배들이랑 하는 독서 토론에서 팀 켈러의 <결혼을 말하다>란 책을 같이 읽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들은 아직도 결혼이 하고 싶은 싱글녀들이다.

어쨌든 나도 이 기회에 결혼에 대한 기대감을 다시 가져보며 책을 읽기로 했다.

 

결혼이 비관적이 된 근본 원인은 인간의 자기중심성 때문

팀 켈러는 영성가이고 목회자이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결혼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결혼에 대한 현실 감각도 무시하지 않은 채, 결혼에 대해서 배울만한 통찰력을 제시했다.

그는 결혼에 대해 부정적 시각이 만연해가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자기중심성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희생하지 않고 서로 순종하지 않고 서로 손해 보려하지 않는 마음,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혼은 성장이다

그는 결혼에 대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결혼은 성장이다"라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서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그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일단 결혼에는 '서로 책임지겠다는 공개적인 약속이다' 라는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로맨틱한 사랑, 성관계만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혼생활에 있어서 사랑은 언약이고 사랑과 법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 약속이 사랑을 지켜준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결혼제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약속의 개념, 법의 개념이 희미해져서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또한 결혼이 성장인 이유는 '결혼은 부부가 함께 한 목표를 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로맨틱한 사랑, 에로스한 사랑보다는 친구개념의 부부를 이야기한다.  결혼에 있어서 우선순위는 성이 아니라 우정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팀 켈러의 말에 크게 동의한다.  친구 같은 부부가 오래간다는 말을 결혼한 사람들로부터 많이 들었고, 평생 함께 할 사람이 성적인 매력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같이 라이프를 즐길 친구, 한 목표를 가지면 더욱 좋은 부부관계가 될 것이다.  그는 서로 콩깍지가 벗겨져도, 서로 결함이 있는, 허물이 많은 존재라는 것을 알아가도 사랑의 힘이 그 진실을 받아들이게 한다고 말한다. 이때의 사랑의 힘은 다른 개념의 사랑이다. 팀 켈러는 서로에게 빠져가는 사랑이 아니라 이젠 베푸는 사랑, 나누는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는 결혼생활에 있어서 성관계를 완전히 배제하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성생활은 결혼의 언약을 새롭게 하기 위한 것이며 결혼의 울타리 안에서 성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팀 켈러의 결혼에 대한 시각은 요즘 현대인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보수적으로 비쳐질 것이다. 그러나 많은 가정이 깨어져가고 있는 지금, 이 고리타분한 생각이 다시 논의 되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사람에게 중요한 가치를 지켜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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