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릿>, 성공의 비밀

 

 

이영표 축구선수가 들려준 <그릿> 이야기

이영표 축구 국가대표선수가 어느 한 동영상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의 키워드는 노력, 끈기, 요즘 뜨는 단어 그릿이었다.

이영표 선수는 체격조건이 축구선수로서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닌 선수였다고 한다.  근데 그는 중학교시절부터 축구가 좋았고 그래서 잘하기 위해서 남보다 노력해야 겠구나 이런 생각을 품었다고 한다.  그래서 중학교 3년 내내 밤잠을 덜자고 매일 밤마다 드리블 연습을 했다. 그리고 몸을 기민하게 하기위해 매일 줄넘기 2단을 천개씩하고 훈련시간외에 더 체력단련을 하기 위해 남 보다 더 일찍 새벽에 일어나 산을 뛰어 나녔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을 갔는데 대학교 3학년 때쯤 축구부 주장이긴 했지만 국가대표는 아니었는데, 그때 5명의 자신의 친구가 국가 대표가 되었고, 1명은 후배가 국가대표가 되어있는 현실이었다. 이영표 선수는 주장이었지만 축구부에 면이 서지 않고, 자신은 그들이 잘 때 일어나 열심히 훈련하였는데, 자신은 국가 대표가 되지 않았다는 데에 대한 자괴감이 들고, 이건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고 재능이 우선하는 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3주후에 올림픽 대표단을 뽑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는 보란 듯이 뽑혔고 3개월 후에 국가대표가 되었고, 은퇴할 때까지 한 번도 경기를 뛰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의 노력, 끈기, 투지, 그릿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안정환의 멋진 골인, 박지성의 멋진 골인도 이 이영표의 멋진 어시스트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의 노력이 신화를 이루어 낸 것이다.

 

재능신화가 아닌 <그릿>이 성공의 비밀

필자도 어렸을 적부터 노력하면 된다, 노력하면 된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자랐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노력보다는 이 사회는, 이 시대는 재능 있는 창조적 소수자들이 이끌어가는 것이다 라는 소리를 하면서 재능신화를 말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 소리를 또 다시 뒤집는 노력과 끈기가 정답이라는 소리를 하는 주장이 나와 세상을 들썩이고 있다. Ted 강연으로 이미 천만이 넘었고 책도 나와 이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바로 <그릿>이라는 책인데, 그릿은 영어로 투지, 끈기, 집념, 노력 등의 뜻이 있는 단어라고 한다. 이 그릿이 바로 성공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연구한 저자가 여자인데 이름은 앤절라 더크워스이다. 이 여자도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너는 재능이 없어, 너는 머리가 나빠, 크게 성공하긴 어려울 거야, 이런 소리를 듣고 자랐다고 한다. 그것이 이 여자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녀는 그 연구로 전 세계 단 20명의 천재들만 받는 상, 맥아더상을 수상하게 된다.  머리 나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한 평범한 소녀가 한 끈질긴 연구로 천재가 받는 상을 받게 된 것이다. 그녀가 증명해낸 그 연구란 재능 없이도 성공할 수있다는 것이다. 즉 성공에는 재능보다 끈기, 투지, 집념,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해냈는데 하버드대학에서 한 가지 실험을 했다고 한다. 학생 130명을 대상으로 러닝머신을 타게 했는데 최대속도로 5분정도 달리게 했다. 그리곤 그들이 체력의 한계가 왔을 때 포기하지 않고 몇 발자국이라도 더 뛰었는가를 바탕으로 그릿점수를 측정했다. 그 후 그 학생들을 40년간 추적 조사했다. 그들 중 40년 후 성공한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그 공통점이 그릿점수가 높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릿점수가 높은 사람들이 40년 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노력하면 된다 라는 말을 자신 있게 조카들에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싶어 다행으로 여겨졌다. 자꾸 그런 말하면 이모는, 고모는 고리타분하다고 요즘 조카들은 나를 상대를 안 할려고 한다. 그 조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 돌봄 리더십을 말하다

 

리더십의 변화

세계적 베스트셀러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의 저자 TED 동영상의 최고 강사인 사이먼 사이넥의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리더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는 리더라는 존재를 얘기할 때 엄마라는 존재, 돌봄의 가치를 잘 이야기 하지 않았다. 좀 경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는 이제 새롭게 부상하는 리더십은 돌봄 리더십이라는 것이다. 조직의 성패가 경영의 수완이 아니라 뛰어난 리더십에 기초하는데 리더는 언제나 구성원들에게 집중해야 한다.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이먼은 미 육군, 특히 해병대를 예로 드는데, 미 해병대는 식사시간에 최하급자가 가장 먼저, 최상급자가 가장 나중에 배식을 받는다고 한다. 이것이 결코 명령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아주 간단한 행동 속에 리더십을 보는 해병대의 시각이 들어있다.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 이것은 자신의 필요보다는 부하들의 필요를 보다 우선하는 마음가짐의 표현이며 부하직원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자신의 사리사욕은 희생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필자는 이것을 읽으면서 엄마를 떠올렸다. 보통 엄마들은 남편이나 자식이 다 먹고 난 후 먹는다. 그래서 남은 음식, 찌꺼기를 먹는다. 그 양이 모자라도 신경 쓰지 않고 많아도 신경 쓰지 않고 그것이 내 몫이려니 하면서 먹는다. 그래서 처녀 때 그렇게 예쁘고 날씬했던 사람들이 엄마만 때면 펑퍼짐해진다.

 운동으로 신경 쓰지 않은 이상 운동할 시간도 없겠지만 어쨌든 다 뚱뚱하다. 이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돌봄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가 나의 엄마를 보면서 중요한 것을 깨달았는데 엄마는 항상 맛있는 거 다 양보하면서 내가 너를 위해서 주는 거야, 나는 찌꺼기만 먹는 신세, 하면서 불평불만 신세한탄 한번 하신 적이 없다.

 그래서 엄마는 원래 그러는 사람, 원래 마지막에 먹고 맛있는 거는 다 양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우리는 보통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데 아버지도 제일 먼저 식사를 하시면서 맛있는 것은 살짝 자녀들에게 밀어주시기도 하고 애정을 표현하시지만 엄마랑 차이점은 아버지는 이렇게 하시고 생색을 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깨달은 것이 희생에서 나오는 돌봄은 여성에겐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남자는 본능은 아니라는 것.

 

돌봄 리더십이 성공한 실제 이야기

그런데 이 돌봄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실제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라는 책에 예화가 나오는데 회사를 돌봄의 환경으로 전환하여 죽어가는 회사의 매출액을 2배 이상 증가시킨 이야기가 나온다. 밥 채프먼 이라는 사람이 배리웨밀러 사의 CEO인데 재무상태가 부실하고 기업문화가 아주 형편없는 회사를 사들였다. 이 사람이 제일 먼저 한 것이 직원들과 함께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다. CEO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조직의 리더가 먼저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고 먼저 신뢰를 얻기 위해 실천 했다. 사람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말이 뭐가 대단한 도덕적 가치이냐 할지 모르지만 조직에서 사람들은 매출액 향상을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밖에 안 여기는 리더도 많다. 이 사람의 사고방식은 리더는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한다. 한 직원이 회사에 들어오는 것은 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회사는 마치 한 집안처럼 느껴지게 되고 직원들 사이에서 서로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소속감을 느끼고 편안하고 존중받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직원들은 내가 돌봄을 받는다고 느끼는 만큼 다른 사람을 돌보기 시작했고, 이렇게 서로 돌보는 환경덕분에 직원들은 머리와 가슴을 모두 회사에 헌신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회사도 매출도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례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이 회사에 하나 더 있다. 시간제 직원 한명이 아내가 당뇨병을 앓고 있어 다리를 잃게 되었다고 한다. 이 직원은 아내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가뜩이나 시간제로 근무하는데 시간을 줄인다면 임금이 줄어 들 것 같아 일을 줄일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도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동료들이 서둘러 대책을 세워 이 직원이 휴가를 더 쓸 수 있도록 자신들의 유료 휴가일을 넘겨준 것이다.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어 직원들이 회사에 더 헌신했고 그 이유가 매출액이 오르고 회사가 성장한 큰 이유라고 저자는 말해주고 있다.

 

 돌봄 리더십의 부상, 여성에게 배워야 한다

이제 이 돌봄의 가치는 이 세상에서 부상되고 있는 가치이다. 이 돌봄의 가치는 이미 논의 되어 온 것이다. 필자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여성학 강의를 들었는데 여성도덕철학자 길리건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여성은 여성의 도덕성은 남성과 다르다. 여성은 돌봄의 윤리, 남성은 정의의 윤리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정의 내렸다. 정의의 윤리는 개별적이고 분리된 자아 개념과 공평한 객관성, 공평무사한 규칙 혹은 원리에 대한 선호로 특징지어질 수 있고 반면 여성의 돌봄의 윤리는 타인과 연결되고 상호의존적인 자아 개념, 친밀한 관계에 기초한 정체성, 타인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해롭게 하지 않으려는 민감성, 자신 및 타인의 행복에 대한 관심, 구체적인 상황에서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관심을 특징으로 한다고 보았다. 이 여성철학자는 도덕적 성숙은 이러한 두 지향성의 종합, 혹은 통합에 의한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돌봄과 돌봄이 없는 정의는 도덕적으로 불충분하다고 정의를 했다. 그러나 이 여성의 후기저작에 보면 도덕적 성숙은 정의 지향성보다는 돌봄 지향성이 더 우월한 것이고 우선적으로 획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의 지향적인 것이 더 성숙한 걸까. 돌봄 지향적인 것이 더 성숙한 걸까. 글을 읽는 분마다 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솔직히 옛날에는 여성은 도덕성과도 거리가 멀었다. 도덕적으로 결핍된 열등한 존재로 보았다. 이제는 여성의 가치, 여성의 도덕성을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기업 문화과 모든 조직의 문화는 원칙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기초한다. 이것을 성숙한 것으로 여기는데 이제 대세는 달라졌다. 관계가 중요하고 돌봄이 중요함을 이젠 설파해야 한다.

 

 

 

 

<낯선 이와 느린 춤을>, 그 희생

<낯선 이와 느린 춤을>이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는 미국의 여기자이기도하고 토크쇼 진행자이기도 했던 여자인데 이 여자의 남편이 58세에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린 것이다. 이 여성은 직장을 그만두고 20년 동안 남편을 간병한 것을 에세이식으로 써서 발표했는데 이것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을 보고서 건강에 대한 특히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경각심보다는 이 여성이 사랑하는 남편을 간병하면서, 간병이라기보다는 전쟁 같은 삶을 살면서 그녀의 희생에 대해 감동을 느꼈다. 기억을 잃어가 소통도 불가능하고 때론 발작을 일으켜 자기를 공격하기도 하는 사람을 돌보면서 진작 자기는 10년 동안 건강진단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산 삶을 그녀는 어떤 낯선 이와 느린 춤을 추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죽어가는 남편 옆에서 남편 하비는 인생에서 중요한 모든 것, 사랑, 신뢰, 가족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이가 고맙다 라는 말을 남긴다.

그래서 잠시 희생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 책에 보면 어느 날 같은 침대에 누워 자던 남편이 이 아내에게 왜 자기 침실에 누워있냐고 대뜸 그러는 행동을 한다. 이 아내가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는 결혼한 사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줘도 남편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선 남편은 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아내의 희생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정말 내 아내라면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당신에게 너무 가혹해요"

남편도 남편이지만 그 아내의 인생은 뭔가. 그 간병하는 과정을 책을 통해 보면 가혹하다는 표현이 나올 만도 하다. 어쨌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의 선택은 자기희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변질되어 가는 희생의 가치

우리는 한국의 유교정서 문화 속에서 희생의가치가 가장 숭고한 가치로 배우고 익혀왔다. 아니 그렇게 주입되어 왔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 가정을 위해 희생한 사람을 영웅으로 큰 미덕으로 알고 살아왔다. 그리고 특히 여성에게 희생의 가치는 더욱 강조되어 왔다.

그런데 필자가 대학원을 와서 여성학을 공부하게 되었을 때, 이 희생의 가치가 전혀 전복되어 다가왔다. 즉 희생의 가치는 남녀 차별을 공고히 하는 이데올로기다.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고 여성자신의 존엄성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게 만드는 구시대적 가치이다 라는 것이다.즉 희생의 가치를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강조하고 주입해서 여성의 사회진출도 막고 여성의 자존감을 억눌리게 했다는 것이다. 특히 남성들은 여성의 희생을 매력적인 미덕인 것처럼 여기게 해서 남성중심적인 사회적 시스템을 잘 굴러가게 하려했다는 것이다. 결국 여성의 자기희생을 미덕으로 강조하는 분위기는 남과 녀의 지배와 복종, 차별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는 것이다.

 

솔직히 어렸을 때부터 가정에서 학교에서 교육이 이 차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가정에서도 나는 막내라 귀여움을 많이 받았지만 유교적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오빠들하고 차별을 많이 받았다.  맛있는 거는 항상 아버지 큰오빠 작은오빠 순이었고

지금도 기억에 나는 서러웠던 일은 작은 오빠가 장이 나빠 어머니가 지금의 야구르트를 매일 받아서 작은오빠만 먹였다.  근데 어린나이에 그것이 먹고 싶어 몰래 조금 먹고 물을 타서 채워놓았는데, 그것이 들켜 작은 오빠한테 뒈지게 혼났던 추억 아닌 추억이 있다.

지금의 나의 어머니 세대는 더 해서 고등학교 운동회 때 반바지를 입고 달리기를 했는데, 벌거벗고 뛴다고 할아버지가 책을 다 태우고 학교에 못 가게 하셨다는 일화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차이가 차별이 되어 버려 여성들은 직장에서 기를 못 펴고 결혼이나 임신이나 하면 눈치부터 먼저 보인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거세진 여성운동이 이젠 희생의 가치마저 변질시켜버리고, 왜 여성이 희생하고 나서냐하면서 들고 일어나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를 따뜻하게 하는 희생이야기

그래서 요즘 세대들은 자기 이익에 참 밝고 전혀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업문화도 수당을 더 준다 해도 30분도 더 초과근무하지 않고 자기 시간을 가지려고 하고 회식자리도 가지 않으려고 한다고 들었다.  손해 본다고 생각하면 철저히 따지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희생을 입에 올리려고도 하지 않는 현실이지만 아직도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동시키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의 이야기이다. <낯선 이와 느린 춤을>의 저자도 좋은 직장을 가진 커리어우먼이었는데 남편을 요양원에 보내고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 희생의 삶 속에서 고귀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희생이 더 이상 희생이 아니었다. 그 고귀한 것, 그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아마 그것은 사랑인 것 같다. 사랑이 희생을 희생으로 여기지 않게 한다. 오히려 감사하게 하고 고맙게 여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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