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키워드는 소통, 힐링, 공감, 감성 등의 단어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더 들자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바로 진정성이라는 단어입니다. 요즘에는 어디에나 이 단어가 쓰입니다. 진정성 리더, 진정성 화술, 진정성 마케팅, 진정성 소통, 어디든지 갖다 붙이는데 이것은 진정성이 중요한 가치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진정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혹자는 거짓 없는 진실함 마음으로 상대방을 성실하게 대하는 태도를 진정성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성경으로 돌아가서 믿음의 진정성을 이야기해봅시다. 하나님 앞에 믿음의 진정성을 인정받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 거짓이 없고 진실할 뿐만 아니라 성실하게 임무를 감당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성경인물 중 많이 있겠지만 아브라함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정치가들이 청문회에서 그 진정성을 테스트 받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그 믿음의 진정성을 테스트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시련을 주십니다. 믿음은 시련을 통해서 드러나고 그 형체를 보게 되고 만지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도 시련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테스트 하십니다. 그 시련이 뭐냐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받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론 우리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부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진성성은 내가 최고로 가치 있고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 때에 드러납니다. 모든 것 다 뺏기고 모든 재산, 명예, 권력 다 잃어버려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주님 땜에 행복하고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할 때 그 때에서야 진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진정성은 그 때 인정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 보기 좋게 통과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진정성은 몇 점인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듯이 우리도 시험하실 때 그 시험에 보기 좋게 통과할 수 있으십니까. 하나님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없는지요.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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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간음하다 붙잡혀 온 한 여인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여인은 간음한 현장에서 붙잡혀 예수님 앞에 끌려왔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 하였다 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하려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서 어떠한 판단을 하실지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이 여인을 볼모로 잡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희생양이 된 여자를 구하고 이 시험을 어떻게 빗겨갈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 예수님의 특이한 행동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두 번이나 그렇게 하셨어요. 무엇을 쓰셨을까요? 여성해방운동선언문이었을까요? 어떤 사람은 돌로 치려 한 사람들의 죄목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무엇을 쓰셨던 간에 예수님은 시간을 버셨습니다.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응대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판단보류 하셨다는 것입니다. 흥분한 무리들 앞에서 예수님도 흥분해서 네까짓 것들이 나를 시험하려 드느냐, 간음한 남성은 어디 있느냐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 같은 일차원적 사람이 아니고 수가 대단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의 지연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일단 흥분한 군중들의 마음이 수그러들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일말의 여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판단을 유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틈을 비집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돌을 놓고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판단하여 지적질을 하는 것을 합리적인 행동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에 상처를 주고 영혼을 망가뜨릴 뿐 잘못에 대한 반성과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판단을 유보하여 그 시간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 했던 사람들, 양심에 걸려 돌을 하나둘씩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양심을 돌아보게 되는 일, 그것은 우리의 무자비한 판단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시간의 유보 속에 하나님께 맡길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심하게 판단하고 정죄하진 않았는지 이젠 그것을 유보하고 하나님께 맡겨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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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처음 가지게 되었을 때, 아무런 성경지식도 없고 들음도 짧았던 저는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40일 동안 새벽기도를 하면 제 기도를 무조건 들어주실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하나님을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신정도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달밤에 정한수를 떠다놓고 소원을 비는 미신적인 신앙처럼 공을 쌓으면 하나님이 기적을 이루어주실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여지없이 무너지던 날, 전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다행히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고, 그 이후로 내 믿음은 성경말씀을 통해, 많은 지적 노력을 통해 좀 더 성숙해져 갔습니다.

그리고나서 저는 기독교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를 둔 종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과 그분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알아갈수록 뜬구름 잡던 제 신앙이 점점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였고, 지적으로 더욱 많이 알아갈수록 믿음은 더욱 더해가는 걸 느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맹목적 믿음은 절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역사적 증거, 그분이 행하신 기적들, 그분의 교훈과 부활, 성경의 증거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더욱 확고해진 것입니다. 이젠 제가 왜 믿는지를 압니다. 제가 믿는 사람이 어떤 분이신지를 압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고 말합니다.

지금은 나의 믿음을 성경의 말씀을 통해 점검합니다. 그럴 때 성령이 도와 깨달음을 주시고 내 믿음이 잘못된 믿음인지 허황된 믿음은 아닌지 알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알고 믿도록 돕기 위하여 성령은 성경적 증거와 역사적 증거를 모두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맹목적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알고 믿는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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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키워드 중에서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있다면 아마 변화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옛 습관, 옛 사상, 옛 삶으로부터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옛것이 가져다주는 안정감, 익숙함, 편안함 때문에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새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두려워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 변화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고 부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변화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변화가 작은 실천에서 온다는 것을 안다면 용기를 내볼만합니다. 우리가 경험으로 알다시피 무언가 한 가지가 나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번 나쁜 습관을 들이면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요즘 아침에 30분 일찍 일어나는 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작은 실천이지만 이 변화로 많은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일단 이전 보다 더 정리된 마음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잠깐이나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러면 하루의 내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자랑할 것도 없는 작은 실천이지만 이 변화의 효과는 엄청 큽니다.

우리는 변화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변화가 부담되기도 합니다. 그 변화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줄 방법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작은 변화 한 가지를 일으키면 그것은 놀랍게도 물위의 파문처럼 점점 내 삶의 전 영역으로 흘러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혹시 지금 내 마음에 떠오르는 작은 변화에 대한 부담감이 있으십니까. 외면하지 마시고 작은 것부터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발을 내딛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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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렸을 적 어머니 화장대에 동전이 올려있는 것을 보고 슬쩍하면서 누가 보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 하다가 결국 양심에 꺼려 괴로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문득 하나님이 보시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곤 벌을 받을까 겁이 나서 어머니께 실토하여 광명을 찾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얼마 전 로랑베그의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타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도덕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도덕이란 자기 내면의 목소리라기보다는 타인의 시선이 내면화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실험참가자들을 두 무리로 나누어 두 방에 들어가도록 하는 실험에서 한 방에는 스크린에 꽃 이미지가 떠 있고 다른 방에는 스크린에 사람의 눈 이미지가 떠 있다면 후자의 경우에 집단 내 이타적 행동이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전자의 방보다 후자의 방에서 식사 후 다른 사람의 식기를 치워주는 등의 이타적 행위의 빈도가 훨씬 높았다는 것입니다. 집단구성원들에게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인상을 주면 그들의 사회적 순응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시선이 직접적 처벌 없이도 규제의 역할을 하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에게 타인의 시선보다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신이 어느 곳에나 있다는 의식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중세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천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하므로 차라리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한 연구에서 신의 존재를 은근히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타인에 대한 이타적 행동을 끌어 낼 수 있으며 십계명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대학생들의 부정행위를 줄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어렸을 적 당시에도 타인이 보고 있다는 것보다 하나님이 보고 있다는 의식이 죄를 짓는 행동을 바로잡아 준 것처럼, 믿지 않은 사람들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도덕적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며 함께하신다는 믿음은 우리 가정을 우리교회를 우리사회를 더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신앙적으로 정결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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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행하면 행복지수가 높아진다는 실험보고는 많이 보도되어 다 알고 있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보고도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두 종류의 기록영화를 보여주고 감기 바이러스에 저항하는 저항력을 측정했습니다. 한 종류의 영화는 마더 테레사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을 담은 것인데 이 영화를 보여주고 학생들의 저항력을 측정했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학생들에게 이번에는 히틀러가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장면이 나오는 기록영화를 보여 준 다음에 감기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을 측정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차이가 난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을 본 그 순간에는 감기에 저항하는 저항력이 엄청나게 강력하게 나타나고 히틀러가 악행을 저지르는 장면을 보는 순간에는 저항력이 형편없이 떨어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보기만 해도 내 세포에 엄청난 변화가 생겨 저항력이 강해지고 건강해집니다. 그렇다면 내가 누군가를 직접 돕고 선을 행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건강해지며 아름다워지겠습니까? 저는 이것을 하늘나라체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드시면서, 오른편에 둔 양들, 즉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복을 받을 자들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예수님이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인들이 우리가 언제 예수님께 그랬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우리가 우리 이웃 중에 가장 작은 자에게 선을 베푼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복을 받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체험 어려운 것, 불가능한 것 아닙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 보기이 연습이 우리의 육신과 정신과 영을 건강하게 만들어서 결국 하늘나라를 미리 앞당겨 체험하게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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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슨 대통령은 보통 사람이란 캐치프레이즈로 선거에 성공하여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자기도 보통사람이다 라는 말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심리는 묘합니다. 자신은 보통 사람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누구나 자신이 특별해지기를 바랍니다. 아니 특별하게 여김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 특별함 때문에 소위 말하는 스펙을 쌓고 성공하려고 기를 씁니다. 또한 그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우리는 브랜드를 갖고 싶어 하고 자기가 브랜드화 되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의 특별함을 잘 나타내주는 브랜드를 선택하고 고집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특별한 것을 영웅적인 것, 위대한 것, 보이는 것에서, 주변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토익, 토플점수, 학벌, 나의 이력이 보여주는 스펙을 통하여 특별해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 말을 들어보니까 면접을 볼 때 하도 토익점수, 토플점수, 학벌, 이력 등이 다 좋아서 변별력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말 면접에 합격하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스토리를 갖고 있는 사람, 즉 자기만의 고유성을 잘 발휘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즉 정말 자기다움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점수를 잘 받아 합격한다고 합니다.

<평범함을 위대함으로 바꾸는 8가지 코드>란 책을 읽었습니다. 거기에서 읽은 것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이, 사람도 브랜딩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상품 중 브랜딩이 잘 되어 있는 상품이 선택받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 속에서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서는, 혹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브랜드화해야 하는 시대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브랜드로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저자가 조언을 하고 있는데,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자의 말은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발전시키고 확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인으로서의 본질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 본질을 알고 믿고 발전시키고 확장시켜나갈 때 우리는 평범함에서 특별함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본질을 발전시키고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일상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의미를 찾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때 우리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우리의 본질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특별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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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하나님을 만나기를 한번쯤은 갈망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신앙인이 아닌 일반인 중에도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 하나님을 향한 동경의 마음을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절규하였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편 42:2).

우리는 이 시편기자처럼 삶의 비참한 순간에, 절망의 순간에, 실패의 순간에 하나님을 더욱 찾고 찾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뵙기를 갈망한다고 해서, 찾고 찾는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마음이 청결한 마음이 되었을 때, 정결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히브리어로 청결이란 말은 카다로스(καθαρς)로 깨끗하다, 순결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카다르시스라는 말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저는 순결이라는 말에서 이런 것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됩니다. 수많은 별빛으로 아름답게 수놓아진 밤하늘, 이슬을 머금은 하얀 백합화, 아무 걱정 근심 없이 뛰놀고 있는 천진한 아이들, 엄마의 품속에서 젖을 빨며 엄마를 쳐다보는 갓난아기의 맑은 눈동자, 하얀 드레스를 입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신부의 모습. 그 모습들에서 저는 순수, 순결이란 단어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감동을 느낍니다. 그리곤 곧 그런 모습과 동떨어진 나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곤 합니다.

순결함과 순수함에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나와 거리가 멀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순결함과 순수함이 아닌 거짓과 가식, 위선과 정욕으로 우리의 마음은 더러워져있지는 않은지요? “마음이 청결한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왜 이 축복의 말씀이 헛된 울림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일까요? 우리의 가면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의 내려놓지 못함 때문이 아닐까요? 세상욕심으로 얼룩져 있는 우리의 마음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 내 마음의 순결도는 어느 정도인지 한번 점검해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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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관계라는 말에 익숙합니다. 관계와 공감이라는 말에 수긍하지만 그러나 우정이라는 말에는 왠지 고개를 젖습니다. 우정이라는 단어가 이미 고리타분한 언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런지요. 우정보다는 관계가 더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SNS로 관계망을 만들어갑니다. 이 관계망으로 자신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올리면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자 하고 거기에서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존재감과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공감을 얻고 존재감을 느낄 수 있지마는 정이라는 것이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갈 때 느끼는 정. 그 정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그러고 보면 진정한 인간관계는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식 방법에서 더 강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친구를 어찌 대면불식하는 인터넷 관계망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자신을 희생하면서 얻은 우정, 이젠 다시 이야기해야할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뜨거운 줄 알면서도 불길로 뛰어드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인관간계에 있어서는 목숨도 버리는 희생과 헌신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급진적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이러한 기독교적 희생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면 가정 일터 교회에서 그 누구와도 함께 어울릴 수 있고 그 누구와도 함께 먹고 마실 수 있고, 함께 고통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불편과 아픔과 수고가 따르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셨듯이 우리도 누군가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는 것, 이젠 말해야 되지 않을까요. 어디선가 소외된 누군가와 관계가 아닌 우정을 맺어가는 것, 우리의 할 일이 아닌지 반성해 보게 됩니다.

 

문화에 따라 인사의 표현, 호감의 표현, 사랑의 표현이 다르다.

난 대학원시절에 미국찬양선교를 가서 많은 미국인들을 만났다. 하루정도 homestay를 하고 다음 지역으로 떠날 때 그들은 항상 허그를 하며 ‘Nice to have you'라고 말해주었다.

노인, 남녀, 애엄마, 애아빠 상관없이 헤어짐이 아쉬워 허깅을 하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때 미국문화는 우리 전통 한국의 문화와는 많이 다른 것을 느꼈다. 특히 한국사람들은 감정을 바로바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이 있어서 속정이 깊을지언정 허깅을 하거나 뽀뽀를 하거나 그러지 않는다.

내 짧은 미국찬양선교 기간 동안 노인, 애엄마, 애아빠, 심지어 애기들하고 헤어지면서 허깅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깊은 인상을 주었는데 그때 느낀 것은 친밀 함자체였고 하루정도의 기간이었지만 나를 이렇게 받아주고 반긴 것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느낀 시간이었다.

만약 예수님과 허깅을 한다면 아니 나같은 작은 아이는 그저 안아주시는 거라면 얼마나 친밀한 사랑을 느낄까. 친밀함도 친밀함이지만 나를 보호하신다는 믿음으로 충만할 수 있는 순간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늘 안아주신다. 항상 안아 들어 올려주신다.

어릴 적 아버지가 나를 안고 바다 깊은 데로 성큼 들어가 약간의 두려움을 느낀 경험이 누구나 있을지 모른다. 어린 마음에 바다를 보며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의 억센 팔에 안아들어올려져 있었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것을 금방느끼고 유유자적했던 경험이 떠오른다.

그 작은 아이는 해변가에서 발이나 담그고 물장구나 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안아주시면 아버지 키보다는 깊지 않은 데까지 성큼 다가갈 수 있다. 그 때 드는 약간의 두려움을 금방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믿음. 아버지의 억센 팔에 대한 믿음, 난 절대 위험한 깊은 바다에 두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 믿음 때문에 금방 안전함을 느낀다.

그 아버지의 안음으로 인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얕은 바다가 아닌 깊은 바다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핍박받던 이집트에서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할 때 모세는 이 출애굽을 하나님의 안아주심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안아주심으로 모든 난관과 어려움이 닥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두 팔로 보호하여 주심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안아주심으로 표현했나보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안아주신다. 안아주신다는 말은 항상 우리를 보호하여 주신다는 말이다. 깊은 바다, 난관을 만날 때, 아버지의 억센 두팔의 힘을 느끼듯이 하나님의 강력한 보호하심을 느끼게 된다.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불만불평을 일삼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지켜주셨는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두 팔에 안겨있고 아님 그의 어깨위에 올라타 깊은 바다 위를 누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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