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교회공동체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신앙이 매개가 되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부자나 가난한 자나 어른 아이 모두 예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자녀라는 공동체 의식이 있습니다. 신앙의 색깔은 다르긴 하나 모두가 예수를 찾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소통, 공감, 위로가 일어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가끔 스님이 예배에 참석하거나 성경공부에 오시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일원이 되진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지식은 얻어갈 수 있을지 모르나 일단 대화가 안 됩니다. 그와는 소통, 공감, 위로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교회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예수님 때문에 생긴 공동체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다양하게 체험하도록 돕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있고 성찬이 있고 세례가 있고 각종 프로그램이 존재합니다.

특히 중요한 공동체 의식인 예배는 신앙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의식입니다. 의식으로서 만의 예배가 아니라 예배는 삶과 신앙 체험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영역입니다. 교회에는 예배도 있고 기도가 있고 찬양이 있고 말씀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증언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공동체에는 예수님을 체험하며 나온 삶의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그것을 대표하여 증언하는 때가 예배 때이고 이를 통해 소통과 교제가 일어나고 신앙고백이 일어나고 회심도 일어나고 신앙이 생성되고 성장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설교가 아니라 증언을 해야 합니다, 설교는 목회자의 말을 일방적으로 받아 듣는 행위인데 이렇게 되면 예배가 목회자의 독점물이 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목회자도 평신도도 자신의 신앙체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할 때, 예배를 통하여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고 평신도도 참여할 수 있는 예배, 그럼으로써 예배가 축제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증언은 이야기인데 요즘에는 이야기 신학이 대세입니다. 이야기는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고 거기에 고백도 있고, 규범도 창출하고 덕과 윤리를 세우는 것이 이야기입니다. 더 고상한 말로 해서 도덕적 가치, 성품, 도덕적 이상이 이야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성품을 개도하는 도덕교육에 효과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경험에 동참할 수 있고 그래서 공동체에 속한 사람으로서 동질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눈 예수이야기가 살아있는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이러한 살아 있는 신앙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성장하게 되고 우리만의 특별함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만의 매력을 갖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는 살아 있는 신앙이 활동해야 하고 그 신앙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알고, 살아냄으로써 증언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세대가 조그만 권위에도 저항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기독교에서도 순종이라는 말 충성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느새 사장어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유교적 전통과 군사정권에서 쓰던 말 같아 순종이라는 말이 요즘세대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엄연한 기독교적 신앙의 양식, 덕입니다.

그런데 이 순종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 중의 하나가 교회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신명기적 신앙을 너무 강조합니다. 너무 단순한 교리로 하나님을 복도 주시지만 저주도 주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합니다. 복과 저주라는 말로 간단히 요약되는 이 신앙은 신명기에서 뚜렷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신명기적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신명기 28장에 그 복과 저주가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직접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은 신명기적 신앙을 통째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저주받은 사람이 당하는 벌인 십자가의 형벌을 메시아라는 예수님이 직접 지심으로 축복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저주를 직접 져주시고 담당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것은 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즉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우리 자아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살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주의 무서운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평생 잊혀 지지 않을 아름다운 일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하늘나라 맛을 본 것입니다. 제가 어느 날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얼굴을 들었는데 마치 내가 천국에 있는 듯, 사람들이 다 천사로 보였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아름다운 자연 경치, 나에게 베푼 친절한 사람들의 얼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때 본 경험만큼 아름다운 모습이 없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천사로 보였을까요. 알고 보면 내 욕이나 하고 다니는 친구들이고 그냥 보면 그렇게 이쁘지도 잘생기지도 않은 사람들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는지.

하나님께서 내 기도 후 그 응답으로 하늘나라 맛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하늘나라는 이렇게 아름답다하고 그 맛을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 처음 믿었을 때 아름다운 간증이 참 많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그렇게 기도응답을 잘해주셨어요. 수련회 기도회시간에 한 시간 두 시간을 기도했는데 기도응답이 되지 않아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 저를 만져주시면 제가 기도응답으로 알겠습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그 순간에 누가 다가와 내 등을 어루만지며 기도해주는데 그 기도소리가 너무 아름답게 들리면서 하나님이 기도응답해주셨구나 혼자 감격하여 눈물 흘린 적이 있습니다. 내 음성을 듣고 계시는 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소름이 끼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기도해준 자매가 성령의 음성을 듣고 나를 꼭 찍어 해준 것이 아니라 그냥 다 어루만지며 기도하고 다녔을 수도 있는데 나는 너무 감동받아 울음을 터뜨린 것입니다. 그런 순수한 신앙의 추억들이 지금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제가 다닌 교회 대학부에 셀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 그룹은 좀 특별해서 한 주간에 있었던 일들을 간증하고 두 명씩 짝지어서 전도를 하러 나갑니다. 저도 제 파트너와 전도를 하러 나갔는데 한 여자가 길거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에겐 복음이 전해질지도 모르겠다 생각하여 용기를 내어 다가갔습니다. 우리가 조용히 다가가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면 다시 살 수 있어요.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거예요. 자신은 실연당하고 너무나 외로워서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어주기를 바랬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고 복음이 뭔지도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가 말을 걸어주었다는 것만으로 눈물을 뚝뚝 흘린 것입니다. 그 후 자살을 했을까요. 당연히 아니죠. 교회 나왔습니다. 생명이 살아났어요.

 

 

그런데 크리스천이라면 우리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근원, 본질, 원천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보면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신비하게 느끼기도 하고 때론 소름이 끼칠 만큼 뭔가 특별한 감정은 그 아름다움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세기 유명한 신학자이며 문학가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름다움은 왜 존재하는가, 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의 기원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즉 아름다움의 원천에 대해서 골몰히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는 답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하고 하나님을 평생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에서 삶의 목적과 존재의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보이는 것에서만이 아니라 선하고 참되고 덕스러운 모든 것에서, 아름답고 순결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어른거리고 반사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삶이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비축하는 과업의 연속이며 그것은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을 봄으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믿는 우리들은 창문 밖 풍경을 보듯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순간적으로 힐끗 보고 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아름다움을 아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평생 연구한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 우리도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움 하면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릅니까. 저는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 시골벌판의 밤하늘의 빛나는 별빛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로 채워진 정원, 장엄함을 느끼는 그랜드캐넌의 멋진 자연환경, 그리고 결혼을 앞두고 드레스를 입은 볼이 발그스레한 신부의 얼굴, 엄마의 젖을 물고 새록새록 잠자는 아가의 얼굴, 저는 이런 것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고 잠간 등을 펴고 자신의 땀을 닦는 어느 아낙네의 얼굴, 무언엔가 감동되어 흘리는 눈물 한 방울 저는 이런 것들을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그렇게 보면 아름다움은 예쁘다, 좋다 이런 단순한 말과는 다른 어떤 가치를 품고 있고 숭고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아름다운 것을 다 좋아하고 다 추구합니다. 아름다움은 우리 생존본능과도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니체는 또 우리 마음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생존 본능은 사실 아름다움이라는 자극에 의해 북돋아진다고 설명합니다. 한마디로 미적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생존 본능을 일으켜 세우는 강력한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인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이 아름다움을 지키고 보존하고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당연지사가 되어야합니다.

 

 

아름다움의 근본은 하나님

그런데 크리스천이라면 우리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근원, 본질, 원천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보면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신비하게 느끼기도 하고 때론 소름이 끼칠 만큼 뭔가 특별한 감정은 그 아름다움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세기 유명한 신학자이며 문학가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름다움은 왜 존재하는가, 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의 기원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즉 아름다움의 원천에 대해서 골몰히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는 답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하고 하나님을 평생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에서 삶의 목적과 존재의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보이는 것에서만이 아니라 선하고 참되고 덕스러운 모든 것에서, 아름답고 순결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어른거리고 반사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삶이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비축하는 과업의 연속이며 그것은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을 봄으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믿는 우리들은 창문 밖 풍경을 보듯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순간적으로 힐끗 보고 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아름다움을 아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평생 연구한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 우리도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인상 깊게 본 영화가 있습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라는 영화입니다. 영화에 많은 커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삶의 크고 작은 고통 때문에 그리고 사랑 때문에 아파하지만 그로 인해서 행복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사건, 사고를 그린 것이 이 영화의 특색입니다.

저는 이 영화의 주제가 제 귀속에 맴도는 몇 가지 대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대사가 따뜻하지만 여우같은 정신과 의사인 이혼녀(엄정화 분)가 한 촌스런 형사와 사랑에 빠져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이렇게 자뻑을 합니다. "Are you ready to die for me?" 우리 말로 옮기면 너 나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니?”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 하는 일이라면 죽을 준비라도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인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 연인이든, 부부이든, 자식이든 어떤 관계로 엮어졌든,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노력의 노력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내 머릿속에 맴도는 또 하나의 대사가 있습니다. 이 투박한 형사가 그 이혼녀의 아이와 놀다 아이를 잃어버립니다. 결국 그 형사는 죽어라 아이를 찾다가 임신한 여자 유괴범(실제 유괴범이 아니고, 아이가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유괴인 것처럼 꾸민 것, 실제 이 유괴범도 너무 선하디 선한 자기가 사랑하는 남편의 애를 낳고 싶어 하는 착한 여자임, 그래서 나중에 모두 헤피 엔딩을 맞음)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무릎 꿇고 있는 유괴범을 향해, 그 특유의 투박한 사투리로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세상에 니로 인해 행복해 하는 사람,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내, 니 살려 준다

저는 그 대사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어쩌면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도 나에게 그렇게 묻지 않으실까? “너 때문에 행복해 했던 사람, 아니 지금 행복해 하는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대라, 많은 사람도 필요 없다. 딱 한 사람만 있다면 너는 더 이상 죄인도 아니고 약자도 아니고 나의 사랑하는 강자이고 내 자녀이다.”

나 때문에 행복해하는 한 사람이 있다. 그것 때문에 이미 나는 존재 가치가 있고 더 이상의 약자가 아닌 것입니다. 영화 속에, 모든 삶의 비애로 아파하는 사람들, 더 이상 당한 자, 괴로운 자, 연약한 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너무나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을 주는 사람, 남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 그들은 강자들입니다.

 

누가 강자입니까. 나는 강자입니까. 나는 약자입니까. 자신에게 물음표를 던져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한권의 책을 더 읽었습니다. 불란서의 정신의학자인 폴 투르니에의 이라는 책입니다. 우리나라말로 <누가 강자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책에서 강자와 약자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는데 강자는 타인의 도전 고난 고통 앞에서 적극적으로 강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적극적으로 강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 자신의 나쁜 면을 감추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다른 사람을 자극하거나 자신의 좋은 면을 부각시키려고 열성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강자라는 것입니다. 반면 약자는 타인의 도전 앞에서 굉장히 미약하게 반응하는 사람인데, 왜냐하면 약점을 가리려다가 즉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려다 오히려 그것을 더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보면 약한 자들이 더 정직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두 자신의 문제, 자신의 두려움,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진정한 강자는 영적인 힘에 지배되는 사람인데 이럴 때 강자는 자신의 약함을 볼 수 있고 이를 시인하여 자신의 약함을 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신비한 힘을 갖게 되는 데 이 때 진정한 강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힘은 약자라도 받아드리고 이해하는 참된 힘이다 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즉 강자는 힘으로서 자신의 약점을 가리려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시인하고 드러냄으로써 참 강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BS 다큐프라임에서 방영되었던 강대국의 비밀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것을 만들었던 작가가 그 내용을 담아 <강자의 조건>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는데 우리는 흔히 강대국이 되는 조건을 힘과 풍부한 자원, 막강한 군사력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작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로마, 몽골, 대영제국, 네덜란드,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역사를 연구해보았더니 그들이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관용과 포용성, 개방성과 다원성에 있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이 꼭 강대국이 되는 충분조건은 아니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필요조건임에 틀림없다 라고 말합니다. 그 책에 보면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수상이 한 국제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중국은 미국을 추월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중국의 인적자원은 13억이지만 미국의 인적자원은 70억이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근데 실제로 미국의 인구는 3억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자의 통찰은 뭐냐면 미국은 어느 나라보다 다원성, 다양성, 개방성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포용성이 전 세계 70억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보다 다른 민족의 성공의 기회도 높고 나의 자녀가 이민을 갔을 때 완전한 시민으로 자리 잡을 수 있고, 공직에도 오를 기회가 있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는 미국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스티브 잡스도 시리아출신 아버지를 두었고 오바마는 케냐출신 아버지를 두었고 조지 소로스는 헝가리 이민자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 관용과 포용성이 전 세계의 인재를 끌어들여 전 세계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대국이 되었다는 논리가 저자의 주장입니다. 강자가 힘과 무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승리를 하려면 수준을 높여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사안일만 기도하는 참새의 믿음을 갖지 않길 원하시고 그런 기도는 하나님 뜻에 안 맞아서 안 들어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능력이 나타나지 못합니다. 기도는 하는데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 안 들어주셨다고 원망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수준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영적 독수리가 되길 원하십니다.

독수리는 태풍이 불어도 움찌리지 않고 그 상승기류를 타고 높이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이사야 40:31)”

참새신앙을 가진 사람은 고난이 왔을 때 무사안일만기도하다가 불평 불만 하는데 영적독수리신앙을 가진 사람은 태풍이 불어와도 상승기류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고난이 와도 기회로 삼고 승리하며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수리가 그렇게 오래도록 비상하는 데에는 지독한 자아죽이기 과정이 필요합니다. 독수리의 수명은 30-40년 정도인데 부리도 발톱도 낡아 구부러질 즈음에 자기가 직접 바위에다 대고 발톱과 부리를 부러뜨리고 발톱과 부리가 새로 나면 그것으로 온몸의 털을 다 뽑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새롭게 태어난 독수리는 수명이 30년이 더 연장되어 더 높이 더 멀리 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승리하며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참새가 아닌 멋진 독수리로 살 수 있을까요? 평균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기도의 수준, 믿음의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기도의 수준, 믿음의 수준을 높인다는 말은 뭘까요. 원칙을 예수님 성령님 하나님으로 세우고 성령이 주시는 생각, 성령이 주시는 기도를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도대체 성령 안에서가 뭔지 모르겠다 하시면 상식적인 수준의 가치를 생각지 말고 하늘나라가치가 뭔가를 생각하면 됩니다. 하늘나라의 가치를 맛본 사람은 그 맛을 압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하늘나라를 위해 사는 하나님 나라를 앞당겨 사는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승리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어떻게 해야 승자로 살 수 있는 걸까요. 혹자는 유전자에 의해 승자 혹은 패자가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승자효과 winner effect라는 것이 있다 라고 주장하는 책이 있습니다. <승자의 뇌>라는 책인데요, 이 책의 저자는 동물실험을 통해서 한 번 싸움에서 이긴 경험이 다음 싸움에서 이길 확률을 높여준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바로 승자효과입니다. 한번승리가 다음번의 승리도 보장해 준다는 것입니다. 한번 승리한 경험은 뇌에서 테스토스테론을 분출하는데 이 맛을 본 동물이 다음 번 대결에서도 승리를 거둘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다음 번 대결에서 이 테스토스테론이 보다 더 많이 분출된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그 동물은 덜 불안해지고 더 공격적으로 바뀌며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임계점도 더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즉 테스토스테론이 승리를 거두는 동물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바로 승리한 쾌감을 뇌가 기억하는 것이죠. 그래서 뇌가 다음번 싸움에 더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돕는다는 것입니다. 한번 이긴 경험을 맛본 사람은 다음번 경쟁에서도 이긴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한번 승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그 끝이 절망적이진 않다는 것입니다. 승리한 경험을 계속 간증하는 사례를 보면 그렇습니다. 승리한 맛을 본 사람이 계속 승리하고 전도도 그렇습니다. 전도를 한 사람이 계속합니다. 전도의 맛을 알기 때문이죠.

 

책에서 보면 이런 예가 있습니다. 아카데미상 수상 후보자로 지명된 성공한 배우들을 대상으로 해서 수명을 분석한 결과, 아카데미상 수상자들이 후보로만 지명만 되고 그 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서 평균적으로 4년 더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노벨 수상자들도 마찬가지인데 노벨상 수상자들이 후보에 오르긴 했지만 결국 그 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서 평균적으로 1-2년을 더 오래 살았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결과가 왜 나왔는지 다음과 같이 분석했습니다. 아카데미상 수상이라는 경험이 세상에 대한 통제력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강화하기 때문에 이것이 스트레스의 해로운 효과를 차단해서 더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승리의 경험은 승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한다고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이 통제감은 승자를 스트레스로부터 막아주며 그가 보다 나은 성공을 거두고 보다 오래 살며 또 보다 행복해지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승자는 행복합니다. 승리의 경험은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수명도 연장시켜줍니다. 이기는 삶, 승리하는 삶 이것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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