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펜이고 다른 하나는 검입니다. 펜은 사상을 말하고 검은 권력을 말합니다.

사상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느냐 권력을 가지고 사람을 변화시키느냐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권력으로 세상을 바꾸려한다면 많은 피를 흘려야 합니다. 이에는 억압이 있고 폭력이 있습니다. 사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재적 힘이고 자발적 힘입니다.

우리는 원칙을 내세워 권력을 휘두릅니다. 원칙이 검이 되는 것이죠. 검의 칼질은 많은 피를 흘리게 하고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사상의 힘은 원칙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이 원칙도 바꾸는 것이 사상의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의 힘이 아닌 ()의 힘을 강조했습니다. ()의 힘을 경시했습니다. ()의 힘이 ()보다 우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절대 권력으로 조직을 움직이려 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여기에 많은 부패가 있고 억압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긍정하며 속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식과 올바른 사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에 항변하며 변화를 추구할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나 역사를 보더라도 권력은 패하나 사상은 영원히 남습니다.

올바른 사상과 가치가 절대 권력이 있는 조직에 스며들어 혁신되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착한 소비

 

 

착한 소비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커피한잔을 내가 마시고 또 한잔은 다른 사람에게 기부하는 카페가 있다고 합니다. 또한 사진을 한 번 찍을 때마다 소외계층의 사람들에게 촬영권을 주는 사진관도 있습니다. 독일에는 나눔 냉장고가 독일전역에 백개가 있다고 합니다. 경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이런 곳은 늘어나고 있는 실태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1776년 발간한 <국부론>에서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업자, 제빵업자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경제활동은 이기심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착한 소비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입니다.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고 착한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간성 바탕에 이타심, 공정심을 추구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그만 행동하나에도 자기의 가치를 표현하고 싶어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나만의 이익이 아니라 공익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소비심리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져도 이런 심리 때문에 사회에 따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제 착한 소비가 대세입니다. 윤리와 가치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착한 소비는 소비트랜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너와 나의 공익을 추구한다면 경제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살아남을 것입니다. 공익과 공존, 이것만이 살길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한 순간에 생각한 정치에 대한 나의 소견

 

 

특별시민이라는 영화에서 서울시장의 오른팔격인 참모가 한 여기자를 픽업하며 한마디 질문을 던진다. “정치를 뭐라고 생각하나?” 그 여기자는 대답한다. 그 대답 전체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중 기억 나는 것이 정치는 유권자에게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이다.

정치가 유권자에게 책임을 지는 것, 이 말도 일리가 있다. 모든 정치가들이 이런 개념을 갖는다면 이 나라의 고통 받는 이들이 줄어들 것이다.

이런 면에서 정치의 최고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았다. 우연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을 보고 신선한 답을 얻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처음부분에 인간을 위한 선을 연구하는 학문은 정치학이다

우리는 보통 정치를 정치를 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이나 내세우는 명분을 위해서 싸우는 것정도로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고상한 의미가 있는지 누가 현 실태를 보면서 생각할 수 있으랴.

정치의 목적은 인간의 선을 이루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모든 활동은 어떤 선을 추구한다고 했다. 선이란 모든 것(기술, 행동, 탐구, 학문 등 모든 활동)이 목표로 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고 보면 정치도, 정치학도 선이라는 도덕(morality)에 종속된 것이다. 정치가 누군들 우리가 악을 목표로 하겠냐고 말하겠지만 현실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정치, 정치학의 목적을 다시 근본부터 생각해야 한다. 정책, 공약, 기술, 이미지전략 등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목적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은 또 하나의 목적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 또 하나, 궁극적인 목적을 항상 붙들어야 하며 하부 목적, 하부 기술이 그 목적에 적합한지 항상 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가들은 온갖 기술과 전략에만 힘쓴다. 이미지를 위해서는 가족들까지 동원하고 나선다. 가족들의 사생활은 생각지도 않은 채.

나는 이런 면에서 정치가들이 다 철학을 공부하거나 종교를 가지고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들의 정치를 위한 이상을, 즉 궁극적 목적을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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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

어른이 되기 위해 우리는 실천가가 되어야 할까, 사상가가 되어야 할까

 

 

헤르만 헤세의 글을 읽다 이런 말이 들어왔다.

 

실천가는 어떤 회의나 위원회에 나가서 늘 올바른 주장만을 하지만, 한걸음 밖으로 벗어나면 모순투성이기 일쑤이다. 오로지 미래, 사상, 신앙만은 예외 없이 옳다. 왜냐하면 세계는 이들에게서 원동력을 얻을 뿐 다른 곳에서는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도주의 사상은 휴머니즘의 허상이고, 미래에 대한 기대는 실없는 문학의 망언이며, 인간성의 탐구는 잡담일 뿐이라고 공언하려는 자들은 아직 원숭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들이 인간으로 되기까지에는 오랜 세월이 걸려야만 할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사색의 강변에서> 중에서.

 

우리는 보통 행동하지 못함을 자책한다. 행동 없는 믿음, 행동하지 않는 신념, 사상들은 비판되기 좋은 밥이다. 현 정부를 비판한다면서 촛불집회, 태극기 집회 등 각종 집회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무시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러나 무분별한 비판의식을 갖고 온갖 잣대질을 하며 이 집회, 저 집회 몰려다니는 것, 그것도 모순투성이 사람이 되기 쉬운 일이다. 많은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기도 하고 따라다니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은 들여다보고 사는지. 자신의 내면에 휴머니즘, 희망, 참된 인간성을 갖추고 사는지 물어볼 일이다.

자신의 내면을 갖춘 사람이 진정 올바른 대통령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무분별하게 무비판적으로 감정적으로 색깔론을 들먹이며 무조건적으로 어떤 한 대통령 후보를 지지 하는 것 정말 실물 나는 일이다.

헤르만 헤세는 실천가들이 올바른 주장을 하는 것 같지만 모순투성이 라고 말한다. 앉아서 인도주의를 말하고, 희망을 말하고, 휴머니즘을 말하는 것은 잡담, 망언, 탁상공론일 뿐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직 사람이 덜 되었다고 말하기 까지 한다.

이 말도 오늘의 현실을 보면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사람됨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내면이 충만할 때 다른 사람도 비판할 수 있다. 그 때 그 비판은 힘이 되어 세상을 움직일 만큼 큰 원동력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세상은 그 힘을 가진 사람을 찾는다.

어떤 사람을 무분별하게 추종하고 행동부터 일삼는 것은, 모순투성이를 낳으며, 아무 영양가가 없는 일은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2017년 트렌드, 체험의 경제학에 제언하는 한 가지.

 

 

소유의 만족도 공유의 의무도 아닌 나만의 경험으로 인한 즐거움이 대세

요즘은 체험, 즉 경험이 대세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래서 경험이 곧 경쟁력이라는 것이다. 경험에서 나온 콘텐츠가 상품화되고 있다. 아마 이것은 가상현실에 대한 싫증과 함께 또한 가상현실을 통해 자신을 알리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자신의 고유한 체험을 직접 겪어보고자 하는데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자기 과시, 자기 과잉시대의 분위기에 맞게 자신만의 고유한 체험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을 파는 즉 자신을 알리는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그래서 경제에서도 이러한 시대의 풍조의 맞게 온라인상의 가상현실을 직접 체험해 보게 하는 게임이나 놀이기구 그 외의 시설들을 갖추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풍조를 체험경제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는 상품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온몸으로 겪어 체화하여 얻은 경험, 그 경험에서 온 즐거움, 그것에 가치를 둔다. 그것이 돈으로 환산되어 상품화되는 것이다. 소유의 경제에서 말하는 소유로 인한 만족, 이제는 더 이상 크게 의미부여하지 않는다. 그 소유에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면 그 소유에 나만의 스토리가 없다면 크게 상품가치가 없다. 이제는 온라인으로 인한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공유의 경제라고 혹자가 말했는데, 공유에서 오는 나눔의 가치의 실현, 인간이 가진 윤리적 가치의 실현이 주는 의미 부여도 이제는 상품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치를 조금이라도 지켰다는 것에서 자기만족을 가질 수 있지만 소비자로서의 사람은 상품을 볼 때 그것만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엔 재미, 만족, 유익, 가치의 실현 등 모든 것을 충족시킬 그래서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어 낼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체험의 경제는 가상현실과 실제현실을 넘나들면서 가상현실을 실제화하고 거기에서 퍼 올린 것을 또 다시 가상현실에 담고, 그럼으로 인해서 가상현실과 실제현실은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이제는 이 둘을 어떻게 하면 잘 연결시킬 수 있을까가 관건이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경험, 나만의 스토리인데, 그것은 어느 한가지로 설명될 수 없는, 그리고 만들어질 수 없는 그리고 충족될 수 없는 복합적인 종합패키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

 

 

재미, 유익을 넘어 가치의 실현, 도덕의 체화까지

나는 이왕 체험의 경제가 되었다면 종합패키지인 그 경험에 가치를 담으면 어떨까 제안해 본다. 예를 들자면 포켓몬Go라는 게임을 직접 체험하게 하는 것으로 미국인들을 스스로 걷게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한다. 사방에 다니는 몬스터를 잡기 위해 실제 뛰어다니는 게임인데 이것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미국인들의 포켓몬Go 이용자들의 걸음을 다 합치면 1440억 걸음 이라고 한다. 지구를 143회 왕복하고도 남는 걸음이다. 긍정적인면에서 이러한 변화가 온라인상에서의 게임보다 비만인구가 많은 미국인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여기에 사랑이라는 가치를 담는 것을 목표로 하면 어떨까? 구체적인 방법은 다양하게 나올 것이다. 아이들이 진부하게 느끼는 도덕적 가치의 중요성을 직접 체화하게 하는 것,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으로 다양한 방법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재미, 즐거움, 건강의 유익 거기까지만 가능하게 하지 말고 더 넘어 인간성, 공동체성, 사랑, 배려 등 이런 것들까지고 느끼게 하는 감성도 기를 수 있는 놀이, 게임체험을 만든다면 어떨까.

그래서 온라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사람들 간에 부대끼며 느끼는 도덕적 가치를 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것도 상품의 가치가 충분히 된다고 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체험, 경험을 통해서 지혜를 키워갈 것이다. 경험은 지혜의 교과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지혜는 책에서 오는 지식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업가라면 놀이에만, 상품에만, 몰입한다거나 그것이 주는 즐거움에만, 몰입하지 않고 그것을 체화하는 경험이 이왕 중요하다면 거기에 의미를 담고 가치를 담아 상품의 가치, 놀이의 가치를 더 높이면 어떨까 하는 것이 나의 주제 넘는 제안이다. 목표를 두고 그 구체적인 방안은 좋은 아이디어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의 경험,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체험의 경제학에 기대해 본다.

 

 

 

 

 

 

엄마리더십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의 저자 TED 동영상의 최고 강사인 사이먼 사이넥의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리더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는 리더라는 존재를 얘기할 때 엄마라는 존재, 돌봄의 가치를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좀 경시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새롭게 부상하는 리더십은 돌봄 리더십 이라는 것입니다. 조직의 성패가 경영의 수완이 아니라 뛰어난 리더십에 기초하는데 리더는 언제나 구성원들에게 집중해야 한다.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이먼은 미 육군, 특히 해병대를 예로 드는데, 미 해병대는 식사시간에 최하급자가 가장 먼저, 최상급자가 가장 나중에 배식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결코 명령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아주 간단한 행동 속에 리더십을 보는 해병대의 시각이 들어있습니다. 리더는 마지막에 먹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필요보다는 부하들의 필요를 보다 우선하는 마음가짐의 표현이며 부하직원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자신의 사리사욕은 희생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저는 이것을 읽으면서 엄마를 떠올렸습니다. 보통 엄마들은 남편이나 자식이 다 먹고 난 후 먹습니다. 그래서 남은 음식, 찌꺼기를 먹습니다. 그 양이 모자라도 신경 쓰지 않고 많아도 신경 쓰지 않고 그것이 내 몫이려니 하면서 먹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엄마들은 뚱뚱합니다. 처녀 때 그렇게 예쁘고 날씬했던 사람들이 엄마만 되면 펑퍼짐해집니다. 운동으로 신경 쓰지 않은 이상 운동할 시간도 없죠. 어쨌든 다 뚱뚱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돌봄 때문 입니다.

그런데 제가 중요한 것을 깨달았는데 엄마는 항상 맛있는 거 다 양보하면서 내가 너를 위해서 주는 거야, 나는 찌꺼기만 먹는 신세, 하면서 불평불만 신세한탄 한번 하신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엄마는 원래 그러는 사람 원래 마지막에 먹고 맛있는 거는 다 양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어요. 우리는 보통 그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아버지도 제일 먼저 식사를 하시면서 맛있는 것은 살짝 우리들에게 밀어주시기도 하고 애정을 표현하시지만 엄마랑 차이점은 아버지는 이렇게 하시고 생색을 내십니다. 그래서 제가 깨달은 것이 희생에서 나오는 돌봄은 여성에겐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남자는 본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성에서 나오는 돌봄 리더십

그런데 이 모성에서 나오는 돌봄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라는 책에 예화가 나오는데 회사를 돌봄의 환경으로 전환하여 죽어가는 회사의 매출액을 2배 이상 증가시킨 이야기가 나옵니다. 밥 채프먼 이라는 사람이 배리웨밀러 사의 CEO인데 재무상태가 부실하고 기업문화가 아주 형편없는 회사를 사들였습니다. 이 사람이 제일 먼저 한 것이 직원들과 함께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CEO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조직의 리더가 먼저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고 먼저 신뢰를 얻기 위해 실천을 했습니다. 사람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말이 뭐가 대단한 도덕적 가치이냐 할지 모르지만 조직에서 사람들은 매출액 향상을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밖에 안 여기는 리더도 많습니다. 이 사람의 사고방식은 리더는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한다. 한 직원이 회사에 들어오는 것은 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회사는 마치 한 집안처럼 느껴지게 되고 직원들 사이에서 서로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소속감을 느끼고 편안하고 존중받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직원들은 내가 돌봄을 받는다고 느끼는 만큼 다른 사람을 돌보기 시작했고 이렇게 서로 돌보는 환경덕분에 직원들은 머리와 가슴을 모두 회사에 헌신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회사도 매출도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일례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이 회사에 있습니다. 시간제 직원 한명이 아내가 당뇨병을 앓고 있어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 직원은 아내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가뜩이나 시간제로 근무하는데 시간을 줄인다면 임금이 줄어 들 것 같아 일을 줄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동료들이 서둘러 대책을 세워 이 직원이 휴가를 더 쓸 수 있도록 자신들의 유료 휴가일을 넘겨준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어 직원들이 회사에 더 헌신했고 그 이유가 매출액이 오르고 회사가 성장한 큰 이유라고 저자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정의 지향적 가치에서 돌봄 지향적 가치로

이 돌봄의 가치는 기독교에서가 아니라 이제 이 세상에서 부각되고 있는 가치입니다. 이 돌봄의 가치는 이미 논의 되어 온 것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여성학 강의를 들었는데 여성도덕철학자 길리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여성은 여성의 도덕성은 남성과 다르다. 여성은 돌봄의 윤리, 남성은 정의의 윤리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의의 윤리는 개별적이고 분리된 자아 개념과 공평한 객관성, 공평무사한 규칙 혹은 원리에 대한 선호로 특징지어질 수 있고 반면 여성의 돌봄의 윤리는 타인과 연결되고 상호의존적인 자아 개념, 친밀한 관계에 기초한 정체성, 타인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해롭게 하지 않으려는 민감성, 자신 및 타인의 행복에 대한 관심, 구체적인 상황에서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관심을 특징으로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여성철학자는 도덕적 성숙은 이러한 두 지향성의 종합, 혹은 통합에 의한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돌봄과 돌봄이 없는 정의는 도덕적으로 불충분하다고 정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성의 후기저작에 보면 도덕적 성숙은 정의 지향성보다는 돌봄 지향성이 더 우월한 것이고 우선적으로 획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의 지향적인 것이 더 성숙한 걸까요. 돌봄 지향적인 것이 더 성숙한 걸까요. 솔직히 옛날에는 여성은 도덕성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도덕적으로 결핍된 열등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이제는 여성의 가치, 여성의 도덕성을 새롭게 부각시킵니다. 그러나 아직도 기업문화는 원칙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기초합니다. 이것을 성숙한 것으로 여기는데 이제 대세는 달라졌습니다. 관계가 중요하고 돌봄이 중요합니다.

 이제는 시대에 맞는 리더십 스타일을 여성성에서 찾아야 되지 않을까요. 권위, 원칙, 합리성, 논리, 효율성 이런 것들은 사람들을 경쟁에 끌어들이고 긴장케하고 일시적 성과는 거둘 수 있을 지언정, 헌신과 노력과 배려는 조직이라는 공동체 사회에서 기대해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헌신과 노력과 배려가 장기적으로 기업과 사회에 더 큰 발전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 위로

 

우리 모두에겐 위로가 필요합니다. 현대인들이 어디에선가 위로를 받지 못하면 죽음에 더 가까워진다고 합니다. 멀쩡해 보여도 실패와 좌절 속에, 외로움 속에, 지독한 상처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디선가 눈물지으며 한탄하고, 한숨지으며, 욕지거리 한 사발에 세상을 원망하며 사는 사람들, 아니 극단으로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 중에는 있습니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을 말하며, 지독한 평가와 차가운 냉대 속에서도 견뎌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철저히 현실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만 한다고 가르침을 받습니다.

사람은 두부류인 것 같습니다. 철저히 현실 분석적이고, 이성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하는 사람, 또 한 부류는 그래도 희망을 말하는 사람, 위로를 말하는 사람, 따뜻한 정을 말하는 사람. 두 부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어머니와 저의 체험담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80이 넘으셨는데 몸이 아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죽음이라는 공포가 밀려오셨나 봅니다. 어머니도 신앙인이시지만, 하늘나라를 믿으시지만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아픔과 죽음이라는 공포가 엄습해 올 때는 어머니도 어린아이 같이 불안해 하셨습니다. 다니는 병원이 있었는데 그 병원의사선생님은 좀처럼 냉정하셔서 약만 처방해주시고 끝이었어요. 어머니는 어린아이 같이 제가 나을 수 있나요하면서 애처롭게 물어보시는데도 그 의사 선생님은 냉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다른 병원에 가보자 하면서 유명한 의사선생님이 있는 병원을 찾아가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소원이라 어머니 하자는 데로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병원을 가보아도 검사 이것저것 해보고 약 처방하고 그리고 냉담한 반응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나을 수 있나요하면서 의사선생님께 어린아이같이 매달리시며 불안해하시는 모습을 보이시는데 옆에서 안쓰러워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의사선생님들한테 서운했습니다. ‘괜찮아지실 거예요.’ 거짓말이라도 해주지 정말 가슴 아팠습니다. 의사선생님은 검사결과를 보고 이성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났습니다. 저는 기도를 했습니다. 거짓말하는 의사선생님 좀 만나게 해달라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병원한군데를 더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분은 어머니께 환하게 웃으면서 약 드시면 좋아지십니다. 괜찮아지십니다. 매일 30분 햇볕보시고 성경도 쓰시고 운동도 하세요.’ 하면서 친절하게 가르쳐주시고 성경카드까지 주시는 거였어요. 그 의사선생님이 크리스천이었던 겁니다. 그 날부터 어머니는 달라지기 시작하시는데, 매일 햇볕보시고 식사도 못하셨던 분이 식사도 잘하시고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안 좋은 눈으로 성경을 매일 보시고 쓰시고 너무 달라지셨어요. 아마 제가 보기에는 이러다가 100세까지 거뜬히 사실 것 같습니다.

약이 좋아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의사선생님의 위로의 말 한마디, 희망의 말 한마디로 달라지셨습니다.

 

현실의 냉정한 판단은 무엇입니까. 우리들 모두 다 압니다. ‘인간은 가망이 없습니다. 모두 다 죽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라는 우리가 그것을 말해야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그래도 세상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하나님이 당신을 향한 계획하심이 있다고 크리스천이라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스타강사가 젊은 사람들에게 강의하기를 얻어 맞아라, 맞아도 두 눈을 부릅뜨고 맞아라, 그래서 맷집을 키워라, 그러면 꿈을 이룬다.’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무시 받고 멸시받고 얻어맞고 때리고 이것을 당연하게 이야기하는 현실이 슬프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서 꿈을 이룬 사람 그렇게 맷집 강해진 사람 나중에 이상한 괴물 되면 어떻게 하나요. 그래서 이상한 사회가 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 크리스천이라도 위로의 그 한사람이 된다면 사회가 정화되지 않을까요. 맞고 때리는 걸 당연히 여기는 사회가 된다면 인간성파괴의 괴물만 길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희망, 위로의 메시지가 되지도 않는 기대감만 주어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진정 병들게 하는 쪽은 어느 쪽인가요?

오죽하면 사람들이 위로와 공감에 지갑을 연다고 하지 않습니까. 위로해주고 돈을 버는 마케팅이 뜬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 위로 한마디 듣고 싶어서 밤에 여는 심야식당에 포장마차에서 돈을 쓴다고 합니다. 어떤 게스트 하우스나 미장원은 상처 입은 사람들 오세요. 무료입니다.’ 이렇게 내걸고 장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상처 입은 사람들이 위로 받고 다시 찾아와 단골이 되어 그 사업이 번창 한다고 합니다. 좋은 아이디어 아닙니까?

크리스천이라면 모두 영혼의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 너나 그렇게 해, 목사나 좋은 말만 하면 되지. 현실이 어떤 대, 나는 그런 거 다 이겨낸 사람이야, 그러지 마시고 그런 거 이겨내시면서 얼마나 힘드셨어요. 지름길로 가는 길,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는 말과 행동이 있는데. 우리가 어떤 부류의 사람이 되어야 되는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냉정한 판단은 다 압니다. 인간은 가능성이 없습니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실을 뛰어넘는 비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말은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그래도 세상은 살아볼 가치가 있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여서 살길을 다 예비해 놓으셨어. 우리는 살 수 있어.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이렇게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도 사랑과 위로가 필요하셨습니다. 한 여자의 행동에 큰 위로를 받고 예수님을 그렇게 비난하고 배척했던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죽음이라는 공포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적존재라 죽음도 별거 아니었을까요? 우리랑 똑같이 힘드셨고, 괴로워하셨고, 사랑과 위로가 필요하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똑같을 거라 생각합니다.

크리스천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희망이 되어주고 사랑이 되어준다면 홀로 눈물지으며 아파하고 위로받을 이가 없어 오늘도 한 잔 술로 달래보고 극단까지 생각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건강한 사회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 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런 한 사람, 누군가의 위로자가 되어주는 한 사람이 된다면, 이 냉혹하고 가혹한 현실이 조금은 아름다워지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간의 가치, 그 존엄성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지금 세상의 글로벌 리더들은 ‘4차 산업혁명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 문제를 화두로 삼고 있다. 2016년 다보스포럼의 주제가 그것이었다고 한다. 4차 산업혁명은 소셜미디어와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인공지능, 로봇공학의 세상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산업구조의 재편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소셜미디어는 벌써 정치적 힘을 발휘하고 수십만에서 수백만까지 이르는 시위를 이끌어 저항세력을 만들기도 한다. 인터넷으로 인한 정보혁명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젠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이 싸워야 한다. 어떤 연구자는 이제 인공지능과 로봇에게 도덕률, 옳고 그름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게 가능할까. 인공지능이 아무리 똑똑해도 한 가지 능력이 빠져 있는데 바로 도덕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만약에 전투로봇이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분할 수 없고 적군이 일반 시민으로 변장했을 때, 아무런 판단을 할 수 없다면 애매한 사람을 죽이거나 전투에서 지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제 도덕적 사고도 로봇이 알고리즘 세트로 이해하게 해서 도덕적 옳고 그름도 구별할 수 있는 윤리적 지침을 주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혹자는 이러한 시도가 오히려 윤리적 딜레마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고 비판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즉 누구의 가치관이고 누구의 윤리적 지침이냐 이 문제도 놓칠 수 없는 딜레마라는 것이다. 도덕도 상대주의, 절대주의, 공리주의, 철학적으로 말하면 간단치 않은 문제가 여기에 있고 로봇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파워의 문제도 개입된다는 것이다. 만드는 사람, 만드는 국가의 도덕적 지침이 주입된다면, 이 로봇은 진짜 도덕적 사고를 하는 것인지 우리는 의심을 가져 볼 필요가 있다. 로봇이 인간의 도덕적 사고까지 침범했다고 하나 로봇의 주인은 인간이고 인간의 윤리적 가치판단은 한 가지, 천편일률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로봇의 도덕적 사고 능력은 아직 점수를 줄 수 없는 단계이다.

 

어쨌든 인공지능이 인간의 직관, 도덕 등은 이미 건드렸으나 즉, 인간의 정신세계까지 건드렸으나 인간의 영적인 부분까진 건드리진 못할 것이다. 그래도 염려할 것 없는 것은 인간이 주인이라는 것이다. 스위치만 뽑아버리면 그는 한낱 기계일 뿐이다.

 

어쨌든 만물의 주인, 인간의 위상은 위축되고 지식은 물론이고 인간만이 가진 지혜도 이젠 로봇이 맞먹고 나서니 인간은 어디에서 그 존엄성을 떨칠 수 있을까.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말할 때이다, 인공지능 로봇은 수천만 달러할 때, 길거리의 노숙자는 1달러가 없어 밥을 굶고 죽어간다. 인간의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다는데 숫자로 따지면 인간은 기계인 로봇보다 못한 가치이다.

 

어느 목사님의 나는 세계 최고 부자다 라고 자부하며 설교하는 것을 들었다. 그 목사님은 돈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식 셋에 부인 한명이 있는데, 첫째는 8천억이고, 둘째는 9천억이고, 셋째, 막동이는 늦동이로 낳아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니 돈으로 계산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인은 좀 삭았으니 100억 정도밖에 안 되나, 그래도 다 합치면 내가 최고 부자다라며 자랑하며 이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어떤 신부님은 인간의 몸값은 의학적으로 따지면 5-6억은 된다고 말한다. 사람 몸을 바꿀 때, 팔 하나에 5 천만 원, 두 개니까 1, 다리하나 5 천만 원, 두 개니까 1, 심장 2 천만 원, 그 외 장기 합쳐 1, 눈 하나에 1, 두 개니까 2, 그래서 의학적으로 인간의 몸을 바꿔 낀다면 인간의 몸값은 5-6억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이 신부님이 농담삼이 이런 말을 했는데, 몇 백만 원을 못 갚아 빚더미에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다고 하니, 인간의 가치는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 같다.

 

철학자들은 인간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큰소리 쳤는데, 그것도 기계에 지고 있는 형편이다. 인간의 정신세계도 기계에 침범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이, 인간의 가치가 보호되려면, 이젠 영의 세계에 눈을 돌려야 할 때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하늘이 부여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존엄성은 영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서 더욱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세상이 최첨단으로 갈수록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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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사회 이슈, 1인 가구의 증가, 1인 시장의 확장

 

 

20169월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1인 가구 비율이 27. 2%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 하며 대한민국의 가장 대표적인 가구 형태가 되었다. 이에 따른 소비형태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사회문제의 등장이 사회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혼밥, 혼술, 혼영, 혼행, 혼놀의 신조어의 등장

혼밥(혼자 밥 먹기), 혼술(혼자 술 먹기), 혼영(혼자 영화보기), 혼행(혼자 여행하기), 혼놀(혼자 놀기)이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1인 가구의 성장과 함께 등장한 신조어들이다. 이들에겐 혼자 밥 먹는 것, 혼자 술 먹는 것이 더 이상 겸연쩍은 일도 창피한 일도 아니다. 이들의 취미이고 생활이다. 몰입과 스스로에게 가치 있는 시간을 부여하는 행동들이다.

드라마 <혼술남녀>라는 드라마가 히트를 쳤다. 주인공들은 혼자 술 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일부러 폭탄주를 들이마시는 회식자리를 마다하고 혼자만의 술맛을 즐기는 사람들, 이들은 회식자리의 공동체적 의미를 당당히 거부하고 나선 사람들이다.

이젠 이런 트렌드에 맞추어 혼자 먹기 맞춤 식당도 자주 찾아 볼 수 있다. 싱글족들은 일부러 그 식당을 찾으며 다른 1인 가구와 소통을 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1인 가구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소비형태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공동체적 가치관의 거부, “만의 행복이 우선

이런류의 사람들의 가치관의 특징은 집단주의, 지연, 학연을 싫어하고, 인간관계 맺음에 싫증을 느끼며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나의 행복이 제일 중요하고 내가 편한 것이 제일 중요한 가치이다.

이러한 가치가 등장한 주원인은 핵가족으로의 변화, 결혼에 대한 개념의 변화, 개인주의적 가치관의 확대, 지연, 학연으로 이루어진 집단사회에 대한 염증, SNS의 등장, 스마트 폰의 등장, 경기침체 등 여러 가지로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혼자 밥을 먹을 때도, 한 손으론 젓가락을 들며, 한손에는 스마트 폰으로 온라인 세상을 즐긴다. 이젠 협력이 더 이상 생존 가치가 아니다. 스마트 폰으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자기와 공감하는 사람들과도 소통도 할 수 있다.

 

현대인의 병, 외로움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혼자 있는 것과 외로운 것은 다르다. 혼자 있기를 즐기는 족들은 혼자 있음 속에서 가치를 느끼는 사람들이다. 외로움은 군중 속에 있을 때도, 함께 할 때도 느낄 수 있다. 혼자 있는 것과 외로운 것은 다르지만, 1인 가구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사회 문제로 떠오르는 것이 고독사의 문제인 것만 보아도 외로움의 문제는 현대인의 또 다른 질병으로 등장하고 있다.

60, 70대에서 찾아 볼 수 있었던 고독사가 이젠 40, 50대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며, 이런 사람들은 혼자 방치 된 채, 아무런 이웃의 도움 없이, 죽어간다. 그리고 스스로 삶을 끊는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20, 30대에선 나홀로족을 즐길 수 있을지라도, 더 이상 가족을 이루지 못하고, ‘함께가 없다면 외로움이란 인간의 근원적 질병이 언제든지 사람을 그냥 놔두진 않는다는 것이다. 외로움이 삶을 삼켜 버릴 만큼 크게 자신을 침범할 때가 온다. 더 이상 SNS 소통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정과 사랑이 필요한 것이 사람이고, 위로와 따뜻함을 그리워하는 것은 사람이다.

 

소비 형태의 변화에 대한 상업적 대책이 아닌 사회의 건전한 대책 마련

나홀로족들은 결혼의 대한 생각도 다르다. 이들이 비혼족, 비자녀족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혼자만의 시간에 가치를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외로움도 느끼는 양가적인 감정을 다가지고 있다. 1인 가구, 나홀로족의 소비 형태에 맞추어 많은 상업들이 발맞추어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이면인, 외로움을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적으로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외로움을 타계할 수 있는 건전한 프로그램이 사회적으로 마련되어야 할 때이다. 인간의 외로움의 문제를 종교기관에서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종교기관에도 한계가 있고 딱히 대비책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큰 교회에서는 결혼을 위한 프로그램, 싱글들을 이어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어보았지만, 새 발의 피처럼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나홀로족을 취미, 관심사별로 서로 연대하게 하는 프로그램, 아니면 건전한 공동체성을 기르도록 인센티브를 주거나 어떤 동기를 마련해주는 사회프로그램, 사랑, , 위로의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힐링프로그램 등이 마련되면 어떨까.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대비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1인 가구에 대한 지역 사회에서의 배려, 관심도 더 크게 늘려 나가야 할 것이다.

 

 

 

 

자유, 인간의 궁극적 가치를 말하다

 

 

한번은 자유란 말에 꽂혀 열심히 자료를 찾고 조사를 해보았다.  우선 자유가 어떻게 정의되어 있을까 하고 백과사전을 조사해 보았다. 그런데 더 오리무중으로 빠지고 말았다. 자유의 정의, 개념, 원리만도 무수히 많았고, 자유의 종류만 해도 법률적 자유,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사회적 자유, 등 다양했다.

일단 백과사전에 맨 처음에 나온 자유의 정의를 말하자면, '자유는 일반적으로 내·외부로부터의 구속이나 지배를 받지 않고 존재하는 그대로의 상태와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철학적으로는 이 자유가 무엇인지 단정할 수 없으며, 사르트르는 자유가 형벌에 가깝고, 결속·앙가주망(engagement-자기구속)을 참자유라 하였다.  불가에선 죽음도 자유라 하였고, 도가에선 문명과 욕망의 자유를 거부하고 자연적으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한다.'

이 정의만 들어도 자유라는 것은 참 다양한 개념이고 연구해 볼만한 재미있는 개념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적으로 단정할 수도 없다, 자유가 형벌에 가깝다, 그리고 자기구속이 참자유다, 이런 말은 언뜻 와 닿지 않는다. 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야 할 것 같다.  구속의 반대개념을 보통 자유로 아는데 구속이 자유다라고 했으니 뭔가 깊은 사유가 있는 것 같다.  불가에선 죽음도 자유다라고 했는데 내세에서는 아무 구속도 없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어서 이런 주장을 한 것 같다.

각 사람마다 이런 자유, 내가 느낀 이 자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자유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자유가 뭐예요

자유에 대한 책을 찾다가 자유에 대해 어렵게 접근하지 말고 쉽게 접근해보자라고 생각하고 <자유가 뭐예요>라는 쉬운 책을 사서 읽었다.  철학적인 개념이 잡히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어린이를 위한 책이었다.  첫 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원하는 건 무엇이든 다할 수 있어야 자유로운 거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 자신의 신체적, 환경적 조건이나 제한 때문에 못하게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자유로우려면 무언가를 선택할 줄도 알아야하지만 용기있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제한적인 자유를 이야기하지 우리가 이 사회에서 무제한적인 자유는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철학적인 이야기가 나오는데 뭐냐면, 감옥에 갇혀 있어 자유가 없을 것 같은 죄수도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면 자유로울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것을 초등 4학년이 이해할지 못할지 의문이 들었지만 육체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정신까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니다.  몸이 매어 있다고 해도 정신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수 있고, 감옥 벽 너머로 얼마든지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희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의 필요조건은 희망이다.  또한 이 책에서 자유는 인간의 권리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자유로울 권리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유는 한 번 얻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울 권리를 가지려면, 각자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싸워서 얻어내야 한다는 것, 이 말이 특히 인상깊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가, 아니 우리나라의 역사만 보더라도 자유 투쟁의 역사가 아니었나란 생각이 든다.  그렇게 민주주의를 이루려고 투쟁을 했던 역사가 우리나라 역사였다.  그리고 우리는 식민주의자들의 압제에 해방의 경험도 있고 독재 정부를 몰아낸 경험도 있다.  그러나 그 후 우리는 진정 자유로워졌는가?  또 다른 억압과 구속으로 허덕이고 있진 않은지.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자유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고전중의 고전 <자유론>을 읽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읽었다.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라고 추천을 했고 저자 존 스튜어트 밀은 19세기 유럽의 최고의 지성인으로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로써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유론>에서 밀은 단 하나의 질문을 다루었는데, 어떤 경우에 국가나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 하는 것이 정당한가? 개인의 자유와 관련한 중대한 쟁점을 철학적으로 높은 수준에서 해명하고 있다. 그의 글의 서문에서 몇 문장을 발췌해 보았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중략) 그런 행동을 억지로라도 막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을 하고 말 것이라는 분명한 근거가 없는 한, 결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에 한해서만 사회가 간섭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주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이 당연히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몸이나 정신에 대해서는 각자가 주권자인 것이다.

 

우리 헌법에는 어떻게 명시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자유에 대한 참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새로운 감시사회라고 해서 자유의 근간인 사생활이 많이 침해를 당한다고 논쟁이 되어오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벌거벗고 산다는 이야기도 한다. 사방에는 카메라가 돌아가지, 개인용 녹음기, 친절하게 스스로 페이스북이나 불로그에 사생활을 올려주기까지하고, 게다가 자기가 있는 위치, 지금하는 일까지 트위터로 중계하니까, 알려고만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개인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합의에 의해서 스스로 노출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시대가 달라졌다.  새로운 의미의 자유의 억압이 이슈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유의 개념도 다시 정의 되어져야 되지 않을까.

 

자유의 본질 개념은 수호되어야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 말한 자유의 개념의 본질은 흔들리지 않아야 될 것 같다.  나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절대 침해할 수 없다.  그리고 남도 나의 자유를 절대 침해 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의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고 권력이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일한 경우이고 문명사회에서 일반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도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도 도청, 감청, 뒷조사등 권력을 가진 자들의 특권인양 하고 있다. 어디에선가 이 피해를 보고 있는 사람이 권력에 대항하지 못하고 소리없이 사라져 가는지 누가 알랴.

 

자유, 인간의 궁극적 가치, 이것은 꼭 지켜내야 하고 지켜져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국가라는 것이 부끄럽지 않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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