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현실, 이중 잣대가 문제다

 

 

이중 잣대의 현실을 보다

성에 대해서 남자에게는 관대하고 여자에게는 엄격한 이중 잣대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여성의 현실이다. 시대가 바뀌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인터넷 기사를 읽고 작은 충격을 받았다. 요즘엔 남녀 간에 새로운 이중 잣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요즘 나이 많은 여자 연예인들은 살아남기가 힘들다고 한다. 작가들 사이에서도 "예능에서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자 A급보다 남자 B급을 쓰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즉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자들은 주로 여자인데 여성시청자들은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 시청자들도 예쁜 여자가 아니면 무관심하고, 나이든 여자나 똑똑한 여자는 싫어한다는 것이다. 나이 들고, 똑똑하고, 예쁘지 않은 여자가 망가지고 몸 개그를 하면 나댄다고, 상스럽다고 욕하고, 남성 출연자가 하면 '와 제대로 한다'고 칭찬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남자는 비난을 받더라도 그걸 아예 토크나 코미디 소재로 써먹으면서 치고 나가는 반면, 여자는 뭘 해도 남자보다 훨씬 욕을 많이 먹기 때문에 나쁜 경험이 쌓이면서 위축된다는 것이다. 남성 출연자가 세수 못하고 부스스한 머리로 나오면 귀엽다고 하지만 여성 출연자가 화장 안하면 못생겼다고, 또 화장을 하고 나오면 작위적이라고 비난한단다.  즉 같은 B급의 남자, B급의 여자 연예인이라도 다른 이중 잣대가 적용된다는 것이다. 남자에게는 진정성을 부여하고 여자는 그 가치를 폄하 한다는 것이다. 이글을 읽고 남 얘기가 아니다. 살아있는 나의 얘기임을 느끼며 비애을 느낀다. 여성들, 특히 나이가 과년한 싱글여성들은 온갖 가치폄하와 선입견과 편견에 시달리는 것이 현실이다.

 

드라마 <애정의 조건>, 이중 잣대의 현실을 꼬집다

그런데 이런 남녀 간의 이중 잣대가 사회적으로 이슈화 된 적이 옛날에도 있었다. <애정의 조건>이라는 드라마 때문이었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때당시 30%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많은 화제가 된 드라마이다. 드라마 주인공이 채시라이고, 채시라 동생으로 나오는 것이 한가인이었다. 이 두 여성의 삶이 기구해지고 위험에 처하게 되는 스토리이다. 이야기인 즉은, 채시라의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그런데 남편의 외도에 충격을 느낀 이 채시라가 옛 남자 친구와 밤을 보낸다.  이게 발각되어서 남편으로부터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한 채 이혼을 당하는 데 어찌어찌 우여곡절 끝에 재결합을 한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바람피운 사실에 기겁을 하면서 이 여자를 다시 내치려하고 결국 이 여자에게 풍파가 지속된다. 시어머니는 남자의 외도는 가당해도 여자의 맛 바람은 가당치 않다는 것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데 같은 여자가 더 무섭다. 동생으로 나온 한가인도 어릴 적에 동거하고 유산한 경험이 있는 여자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이 여자의 순수하고 청순한 모습에 반해서 결혼하자고 쫓아다니는 남자가 있었고,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여자의 비밀이 유지되지 못하고 드러나면서 이 여자는 눈물이 마르지 않는 날을 보내게 된다. 이 드라마는 해피엔딩이었을까. 불행으로 치닫고 말았을까. 결말을 어떻게 그리냐는 것도 그때당시 화제가 되었는데, 그때 여성시청자들이 많이 분노했다고 한다. 작가가 그 세태를 반영하여 드라마는 결국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드라마는 해피 엔딩이었으나 아직까지 현실은 여성에게 너무 무서운 잣대가 가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조직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중 잣대의 현실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조직사회에서도 이 이중 잣대의 피해를 보는 여성들이 많다.

싱글녀들은 직장생활의 경험이 모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람 핀 남자 상사는 안 쫓겨나도 스캔들이 난 여자부하 직원은 쫓겨나는 것은 다반사로 듣는 이야기다. 남자 여자가 상하구조 속에 있으면 말하나 마나 여자가 피해를 본다.

그러나 남녀가 비록 대등한 학벌과 실력을 갖추었더라도, 여성을 더 가치 폄하하고, 여성이 스캔들이 있을 경우는 조직사회에서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다. 조직사회에서도 남자의 바람 핀 것에 너무 관대하다.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더 관대하다. 성의 문제에 있어서도 실력의 문제에 있어서도 여성은 똑같은 학벌과 조건에도 가치 폄하되기 일쑤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다 하나 아직은 아닌 것을 피부로 느낀다. 여성혐오현상으로 지나가는 여성을 묻지마 살인하고 여성도 군대에 가야 하느니 이런 소리가 사회에서 나오고 있다.

여성으로서 남성들에게 말하고 싶다. 아직도 가정과 사회에서 조직에서 남성선호로 여성들은 시달리고 조그만 스캔들에도 위기의식을 느껴야 하고, 무조건 가치 폄하 되어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도 남성들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을...

남성들이여, 여성혐오가 아닌 페미니스트들이 되어 달라, 외치고 싶다.

 

 

사고의 전환, 여성은 남성해방을 외치고, 남성은 여성해방을 외치자

남녀 간에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차별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서로 자신이 피해자라고 외치지 말고 여성은 남성을 더욱 이해하고 남성은 여성을 더욱 이해하여 서로 남성은 여성해방을 위해, 여성은 남성해방을 위해, 노력하면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차별, 이중 잣대로 피해보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을까.

남성 중에도 페미니스트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권위적인 남성들은 아직도 가정에서 조직에서 여성을 억압하려고 하는 것을 본다. 뿌리 깊은 유교사상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일까.

조직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여성들, 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지 않길 바란다. 여성성까지 버리면서 살아남기 경쟁을 하는 여성들에게 남성들의 위로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네들은 우리들의 언니이며 누나이며 여동생이다. 그리고 같은 여성들의 따뜻한 시선이 있었으면 좋겠다.

좀 더 폭 넓은 인간이해로 이젠 이중 잣대와 무조건적으로 가해지는 가치 폄하로 시달리는 여성, 또 남성이 없었으면 좋겠다.

 

 

 

 

 

 

 

 

 

 

 

 

 

엄마의 위대함, 로봇다리 세진이 엄마 이야기

 

 

엄마의 위대함, 가슴으로 낳은 아들도 엄격하게 교육.

로봇다리 세진이 이야기를 세바시 동영상이나 TV등을 통해서 다 보았을 것이다. 세진이도 훌륭하지만 나는 세진이 엄마에게 가슴이 더 뭉클해져 옴을 느꼈다.

땡큐라는 TV프로에서 세진이가 자신의 엄마를 소개했다. 자식을 낳는 방법은 배가 아파서 낳는 방법, 제왕절개를 해서 낳는 방법, 가슴으로 낳는 방법, 이 세 가지가 있는데. 세진이 엄마는 세진이가 있는 시설에 자원봉사 갔다가 그 아이를 보고 가슴이 너무 아파 입양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가슴이 아파 낳은 아들이다.

그리고 세진이 엄마는 그 아이를 의사선생님께 데리고 갔는데, "얘는 평생 못 걷습니다."  그 의사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진이는 두 다리 모두가 불구이다.  발도 없고 발가락도 없다.  더군다나 한쪽 발은 짧기 까지 하다.  그런데 세진이 엄마는 못 걷는다는 말에 더 오기가 생겨 이 아이를 반듯이 걷게 하리라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 뒤로 피눈물 나는 재활운동을 했다고 한다.  쇠망치로 된 로봇다리로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영상에 보니까 그 엄마는 자꾸 넘어져 우는 아이에게 '일어나, 일어나' 하면서 얼마나 혹독하게 시키는지, 그 아이는 울면서 넘어지고 또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렇게 혹독한 훈련을 통해서, 이제 세진이는 잘 넘어지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진이가 엄마에게 교훈을 얻었는데, 엄마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너 걷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야, 자꾸 넘어져도 또 다시 일어서는 것이 중요해, 인생도 마찬가지야"

그런 세진이 어떻게 되었을까. 3870m 록키산맥을 로봇다리로 오르고, 10킬로 마라톤 완주를 로봇다리로 해냈다. 두 다리 멀쩡한 일반 사람도 못하는 일들을 해낸 것이다.

 

보통 적자는 엄격하게 훈련시켜도 서자는 엄격하게 훈련시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특히 자신이 배가 아파 낳은 아이가 아니면 불쌍해서 동정해서 더 엄격하기가 쉽지 않다. 거기다가 장애를 가진 아이는 더욱더 그럴 것이다. 이 엄마의 위대함은 동정보다는, 연민보다는 이 아이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었다.  얼마든지 장애인도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가 세진이 에게 했던 말, "너 걷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야 자꾸 넘어져도 또 다시 일어서는 것이 중요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꾸 자꾸 일어나는 것, 이것이 세진이를 강하게 했고 멀쩡한 사람도 못할 일을 로봇다리로 해내게 한 것이다.

이 엄마의 교육에 박수를 보낸다. 품에 자식처럼 애지중지 오냐오냐 기르는 것, 불쌍함에 마냥 의존적으로 키우는 것, 이것은 올바른 교육이 아닐 것이다. 세진이 엄마에게 배워야 한다.

 

 

엄마의 위대함, 용서의 지혜로 적을 내 편 만들기.

그런데 세진이에게 눈물 나는 일화가 있다. 세진이에게 커다란 시련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세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초등학교 6학년 형들이 얘는 로봇다리라고 망치로 다리를 때려서 세진이가 피를 흘리면서 집으로 질질 다리를 끌고 왔던 일이 일어났다. 이때 그 엄마가 한 행동이 놀랍다.

이 세진이 엄마가 이 가해한 아이들을 죽여 살려 흥분해서, 그 아이들을 찾으러 갔는데, 막상 그 아이들을 보니까 평온해 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니네 축구하느라 힘들었지, 아줌마가 햄버거 사줄게 같이 갈래," 그렇게 해서 햄버거에다 맛있는 것을 사주면서 그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니네 아까 이 아이 때리는 거 봤다"  그러니까 어떤 아이는 울고, 또 어떤 아이는 "얘 로봇다리라서 때려도 안 아파요, 안 아파요" 하면서 뻔뻔스럽게 얘기를 한다.

그 때 세진이 엄마 물병을 딱 들고 그 아이들 앞에 확 하고 갔다대면서, 그렇게 놀래 킨 다음에 "그래 아프진 않았을거야 그런데 지금 너희들이 놀란 것처럼 놀랐을 거야" 이렇게 말하고 부드럽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그 아이 엄마란다. 부탁이 있는데 그 아이에게 미안하단 말을 해주겠니."

그 아이들이 어떻게 행동했을까. 미안하다는 말을 물론이거니와 세진이 초등학교 내내 세진이 보디가드가 되어주었다고 한다.

 

세진이 엄마의 위대함, 용서의 지혜에 있다. 자기 자식이 피를 흘리고 왔을 때 흥분하고 분노하지 않을 엄마가 없을 것이다. 특히 세진이는 어떤 아이인가. 장애인을 괴롭혔다는 것에 더욱더 분개할 일이다. 그러나 그 엄마 평온을 되찾으며 그 가해한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까지 사준다. 그러면서 그 아이들로 하여금 조용히 깨닫게 한다. 삶의 지혜로. 그리고 사과도 받아내고. 그 가해한 아이들은 절대 세진이를 괴롭히지 않았다고 한다. 도리어 세진이의 편에 서서 학교생활 내내 세진이의 보디가드가 되어주었다고 한다.

엄마의 지혜로운 방법이 일거양득의 효과를 보았다. 내 자식을 괴롭혔다고 죽여 살려 하면, 세진이는 계속 괴롭힘을 받았을지 누가 알랴. 용서가 답이다. 용서에 삶의 지혜를 얹어 적을 내편으로 만드는 것, 그래서 세진이는 장애인이라도 놀림 받지 않고 외롭지 않았다.

엄마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강자의 조건>, 트럼프의 이민정책을 생각해보며

 

강자의 조건, 관용과 포용성

EBS 다큐프라임에서 방영되었던 강대국의 비밀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것을 만들었던 작가가 그 내용을 담아 <강자의 조건>이라는 책을 냈다. 재미있게 읽었는데 우리는 흔히 강대국이 되는 조건을 힘과 풍부한 자원, 막강한 군사력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가의 생각은 달랐다. 로마, 몽골, 대영제국, 네덜란드,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역사를 연구해보았더니, 그들이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관용과 포용성, 개방성과 다원성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꼭 강대국이 되는 충분조건은 아니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필요조건임에 틀림 없다 라고 그는 주장한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수상이 한 국제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중국은 미국을 추월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중국의 인적자원은 13억이지만 미국의 인적자원은 70억이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근데 실제로 미국의 인구는 3억밖에 되지 않는다. 저자의 통찰은 뭐냐면 마국은 어느 나라보다 다원성, 다양성, 개방성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포용성이 전 세계 70억이라는 것이다. 어느 나라보다 다른 민족의 성공의 기회도 높고 나의 자녀가 이민을 갔을 때, 완전한 시민으로 자리 잡을 수 있고, 공직에도 오를 기회가 있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것이다. 그 점에서는 미국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일례로 스티브 잡스도 시리아출신 아버지를 두었고, 오바마는 케냐출신 아버지를 두었고, 조지 소로스는 헝가리 이민자 출신이라고 한다. 그 관용과 포용성이 전 세계의 인재를 끌어들여 전 세계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대국이 되었다는 논리가 저자의 주장이다. 강자가 힘과 무력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입증해 주고 있다.

 

 

트럼프의 이민정책을 말하다

트럼프는 취임처음부터 자국우선주의, 실리추구를 표방하고 급기야는 이민정책을 반대하고 나서 많은 중동의 이민자들, 그 밖의 이민자들의 발이 묶여 동동 굴렀다. 그의 가진 자의 보호, 극단적 이기주의 행보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미국이 미국다운 강자로 살아남은 것은 관용과 포용정책, 다원성, 개방성에 있었다. 트럼프의 아내도 이민자 출신이라고 한다.  굳이 반 이민정책을 실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백인노동자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데, 지금 미국은 그래도 인력난을 겪고 있다고 한다. 경제적 손실, 산업적 손실을 차치하고라도 세계 최강자의 윤리적 가치가 아예 바닥을 치고 있는 저질스러움을 트럼프는 알까. 트럼프가 강자의 조건이라는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역사상 많은 대국들이 포용정책과 관용정책을 씀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강자의 대의, 강자의 의무, 강자의 윤리가 되살아나야 한다. 미국 자체를 위해서라도. 미국은 명분을 잃어가고 대의를 잃어가고 있다. 지금 반미감정, 반트럼프 감정이 세계에 극에 달한다면 미국이라도 무너지지 않을까.

 

 

 

  

체벌, 교육상 필요한 것인가 또 하나의 폭력인가

 

 

체벌에 대해 생각해보며

이런 뉴스를 접했다. 친모와 외조모가 3살짜리 딸을 회초리로 체벌한다고 무자비하게 때려서 사망시켰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것은 체벌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폭행이고 학대라고 부르지, 체벌과 폭력의 기준은 무엇인가. 부모와 자녀, 그리고 스승과 제자사이에 일어나는 체벌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체벌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체벌을 하더라도 제한적이며 불가피한 경우에만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전에 선생이 체벌로 한 학생을 그 반에서 왕따가 되게 한 일이 있었던 것이 보도가 되었다. 이것도 정신적인 폭력이다 라면서 말이 많았다. 제도적으로 우리나라는 체벌을 금지하고 있지만 실제로 체벌은 자행되고 있어서 체벌은 방법, 정도의 심함 등으로 판단하여 폭력으로 규정되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지탄받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체벌이 없어진 후 교권이 무너져 학생들을 지도하기 어렵다고 말하기도 한다. 반면 체벌금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체벌교사들이 여전히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체벌은 충분한 유대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체벌은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 학교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유대관계가 즉, 신뢰관계가 형성이 된 상태에서 되어져야 한다. 사랑의 매는 있다고 본다. 그런데 매가 있기 전 전제조건이 사랑이라는 유대관계, 감정적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때 체벌이 가해져도 자기의 잘못을 돌이킬 수 있고 폭력이라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체벌 뒤에는 항상 돌봄이 따라야 한다. 가정에서는 부모님,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엄격한 가르침이 없었으면 우리는 올바른 사회인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체벌을 할 때 사랑의 유대관계가 있을 때만, 즉 체벌 후 돌봄이 따라줄 때만 비뚤어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모두 폭력으로 기억된다. 실제로 엄마와의 친밀감, 유대관계가 깊은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보고도 있다.

영유아들만 보아도 그렇다. 영유아들은 엄마에 대한 의존적 관계가 깊고 엄마가 체벌 뒤에도 안아주고 먹여주고 하는 돌봄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건강하다. 초등학교 때도 선생님들과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에 원칙과 규칙을 어겼을 때 체벌이 가해져도 아이들이 빨리 돌이킨다. 그러나 중학교, 고등학교, 사회에 나오면서 점점 그런 유대관계가 약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잘못했다고 체벌을 당할 때 폭력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학교생활을 돌이켜보면,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준 선생님께 맞은 매는 나를 돌이키게 했고 기분 좋게 기억된다. 그러나 아무 이유 없이 때리는 선생님이 있었다. 그럴 때는 매우 두려움으로 기억되고 수치심을 느끼게 한 것으로 기억된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미친개라는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을 개라고 불러서는 안 되지만 그 선생님의 별명이 그랬다. 이 선생님한테 걸리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맞는다. 실내화를 계단에서 신지 않았다고 맞고, 줄을 제대로 서지 않았다고 맞고, 줄을 제대로 섰는데 다른 데 쳐다봤다고 맞고, 그것도 회초리로 맞는 것이 아니라 신체부위를 손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리는 것이다.도 그 선생님한테 맞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기억이 아직도 수치감으로 기억된다.

 

체벌 한 사람의 마음도 아파야 진정한 체벌

중학교 때의 일이다. 우리 반이 단체로 국어선생님께 잘못한 적이 있다. 숙제를 안 해왔는지, 준비물을 안 챙겨왔는지 우리들의 잘못의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그 국어 선생님이(상담 선생님이시기도 하셨음)이 어떻게 하셨는지 아직도 내 가슴에 남을 정도로 작은 충격을 주었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의 잘못을 가르치기 위해서 당신의 손바닥으로 아이들의 손바닥을 치셨다. 그러면 때린 사람의 손바닥이나 맞은 사람의 손바닥이 모두 다 아프다. 한 대 맞았는데 정말 아팠다. 그렇게 아픈 걸..., 반 아이들 모두를... 선생님의 손바닥은 어땠을까.  중학교 당시 한 반에 60명 정도는 되었다. 선생님의 손바닥이 빨갛게 부어오른 것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을 때리면 나도 아프다. 아이들은 모두 머리를 숙였다.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부어오른 손바닥이 말해주고 있었다. 우리를 때리신 선생님은 몇 배, 몇 십 배 더 아프시다는 걸.

그리고 그 선생님은 사고로 돌아가셨다. 학교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전교생이 눈물바다를 이루었고 그 선생님은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장례에서 흘린 학생들의 눈물이 그 선생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 모두 체벌 받은 경험도 있고 체벌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법으로 금지해도 체벌은 일어나고 있다. 잘못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에서가 아니라, 체벌을 가한 사람은 내가 잘못을 고쳐야 한다는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원칙을 지켜야 하니까, 이런 논리에서가 아니라, 그리고 체벌 후 쾌감과 승리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넓은 사랑으로 잘못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체벌을 하는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 그래서 체벌을 한사람도 그만큼 아픔을 느낀다고 인지시켜야 한다. 그럴 때 사랑과 신뢰가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시킬 것이다.

 

 

 

착한 인성이 경쟁력이다

 

 

 

착함이란

어떤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걸까. 오늘날 착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칭찬으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착한 사람이라는 말이 좋게만 들리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착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 보통 자기 주관이 없는 사람, 개성이 없는 사람, 평범한 사람, 약한 사람,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극한 데까지 부정적인 사람은 착한사람을 위선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자기 계발서 들을 보면 이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라, 자기를 마음껏 사랑하고 색깔이 있는 사람이 되라, 이기적이 되라 이렇게 이야기들 하는 경우가 많다.

막상 젊은 남녀가 연애를 할 때도 착한여자, 착한 남자에게 끌리는 것보다 나쁜 남자 나쁜 여자에게 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보통 우리는 어떤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예를 들어 버스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거나 불쌍한 사람을 위해 봉사를 하거나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볼 때 그 사람을 우리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착함을 훌륭하게 여기면서도 나의 남자는 나의 여자는 남한테는 좀 이기적인 사람이 되길 원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희생하고 솔직하고 한 것이 어쩌면 바보같이 보이고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이 모자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우리는 권선징악의 사상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 소설, 동화에서 주인공, 즉 착한 사람은 잘 되고 이 착한 사람을 괴롭히는 악한 사람은 벌을 받기를 바란다. 이것 또한 우리의 인지상정의 마음이다.

그러나 방금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 남한테 너무 착한 사람은 솔직히 인정을 못 받고 있는 현실이다. 왜냐하면 이 착함이 성공적인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성공의 조건이 품성, 인격. 도덕적인 면보다는 일과 관련된 능력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보통 착한 사람은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남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을 잘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 불행해지는 사례가 많다.  양보와 희생정신 때문에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 당하는 경우가 많다.

착함이 불행으로 이어지지 않게 착한 사람도 자신의 권리, 표현, 주장, 등을 잘 할 수 있도록 강화되어야 할 인격적인 부분이 있다.  하지만 능력의 조건이 동등하다면 착한 사람이 더 많이 칭찬받고 더 크게 성공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착함이 경쟁력이다

시대가 변했다. 요즘에는 이 착함이 경쟁능력이다. 착한 사람 중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유재석 개그맨을 보더라도 그는 착한 사람, 겸손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만큼 성공한 사람도 없다. 이젠 착함이 경쟁능력이 되고 있다. 정직, 겸손, 자기희생, 이러한 가치가 그만큼 희소하기 때문에 훌륭함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그 가치가 성공의 기준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실제로 공부, 공부만 한 이기적인 아이들이 성공하는 케이스보다 뛰어놀고 함께하고 공동체성을 기르고 봉사가 뭔지, 희생이 뭔지, 이것을 가르친 아이들이 더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보는 경우가 많다.

내 조카를 보더라도 피부로 느낀다. 나에게는 공부 잘하는 조카도 있고, 공부를 못하는 조카도 있다. 어떤 조카는 전교에서 몇 등을 하고 공부를 잘하지만 나는 그런 조카보다 더 끌리고 사랑스러운 것은 공부를 못하는 조카들이다. 저지방우유를 하도 많이 먹어서 저 지방대학에 들어간 조카들이 나는 좋다. 그래도 인간성 하나는 끝내준다. 어른들 공경할 줄도 알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알고. 그런데 이 저 지방대학간 조카들이 보란 듯이 좋은데 취직이 다 되었다.  우리 사회에 학벌차별, SKY대학나온 사람, 유학 갔다 온 사람들 차별 심하다고 하는데 어쨌든 우리 조카들은 취직이 다 되었다.  조카들이 알게 모르게 노력도 많이 했겠지만, 이제는 면접점수가 중요하고 면접관이 중요하게 보는 것도 그 사람의 인성이었다고 한다.  소통이 가능한가. 공감능력이 있는가. 봉사경험이 있는가. 아무리 학벌 좋고 실력이 출중해도 인간성이 나쁘면 별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 조직사회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학부모들은 너무 너무 공부, 공부, 실력, 실력 하는데 착한인성도 어마어마한 실력이다. 성실한 인간성, 배려, 나눔, 공동체성을 가지는 것, 이것 아무나 되는 것, 아무나 갖추는 것 아니다. 이젠 실력의 개념이 달라졌다. 이제는 우수한 인재를 뽑는 것이 아니라 적합한 인재를 뽑는 것을 더 우선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제일 중요시한 것은 바로 인성

하버드대 인생학 명 강의를 책으로 묶은 <어떻게 인생을 살것인가>라는 책에 나온 예화인데 수많은 세상의 성공했다는 사람들, 부자들도 하나같이 착한 인성의 중요성을 이야기 했다.

투자계의 대부 모건이라는 사람한테 한 기자가 물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성공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그는 대답한다. "인성입니다".

기자는 다시 물었다. "그럼 자본과 자금 중에서는 어느 것이 더 중요하죠".

그러자 모건이라는 사람은 "자금보다는 자본이 더 중요하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인성입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세계적이니 부호 워렌 버핏과 빌게이츠도 이와 같은 대답을 했다고 한다. 19985월 즘 워싱턴 대학교에서 열린 초청강연에서 한 학생이 질문했다. "부자가 된 비결을 알고 싶습니다." 버핏이 대답했다. "비결은 좋은 머리가 아니라 인성입니다".

 그러자 빌게이츠가 그의 말을 거들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도 버핏의 말에 100퍼센트 동의합니다."

 

성공의 조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성이다. 착한 인성이 이제는 경쟁력이고 성공의 조건이다. 공부, 공부만 외쳐대는 교육이 이젠 바뀌어져야 한다. 국영수 실력 기를 때 봉사가 뭔지, 희생이 뭔지, 소통이 뭔지, 배려가 뭔지를 가르쳐야 한다.

 

 

 

혐오문화와 정()의 문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의 문화

한 디지털 뉴스에서 이런 정보를 접했다. 영어단어에 empathy 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의미로는 감정이입, 공감이라는 말인데 정확히 말하면 에 가깝다고 한다. 저사람 인정이 참 많다 라고 할 때 인정에 해당하는 말이 바로 이 Empathy라는 말이다. 미국 미시간대학 연구팀이 'empathy'를 기준으로 국가별 순위를 따져봤다는데 한국은 6위로 나왔다. 

우리나라가 6위에라도 들어간 것을 좋아해야할지 비판적 시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문제제기를 하고 싶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정()의 문화였다. 그러나 우리사회가 얼마나 삭막해졌는지 모두 피부로 느끼고 있다. 요즘에는 각종 혐오문화로 인해서 사람들의 말투부터가 달라지지 시작했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 얼굴이 혹으로 일그러진 사람의 사진이 올랐는데 거기에 댓글이 이런 것이 달려 놀란 적이 있다. 극혐이다 극혐. 구역질난다. 이런 말들이 서스럼 없이 달려 있었다.

극혐 이란 말은 극 혐오하다란 말의 줄임말이다. 이런 말 외에 여성혐오의 준말 여혐, 남성혐오의 준말 남혐이라는 말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혐오를 나타내는 말이 많은데 벌레를 뜻하는 접미사 충자를 써서 예를 들어 급식을 먹는 학생을 비하하는 급식충, 유난스럽게 아기를 키우는 젊은 엄마를 비하하는 맘충, 틀딱충이라는 말도 있다.  틀니 소리를 빗대어 노인을 비하하는 말이다. 이유도 없이 싫다. 그게 이유다. 이런 혐오현상으로 길거리 묻지마 살인도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왜 이렇게 까지 되었을까. 우리나라는 예부터 유교사상을 받아들여 효를 강조하고 정을 강조했다. 맹자의 측은지심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들 누구에게나 남의 불행을 차마 그대로 못 보는 마음이 있다고 했다. 그 까닭은 지금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 안으로 떨어지려 하는 것을 사람들이 본다면 모두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불쌍하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그 아이를 구하려고 하는 데, 그것이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귈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도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나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받기를 바라기 때문도 아니며, 어린아이의 위험을 보고만 있었다는 자기에 대한 평판이 싫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맹자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라고 까지 말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본래 착하고 선하다는 것인데...

사회가 왜 이렇게 까지 되었을까. 내가 초등학교 때 만에도 이웃과의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었다. 나에게는 그 추억이 많다.  누가 이사 오면 항상 떡을 가져와서 나눠먹고 김장도 이웃끼리 함께 해서 나눠먹고 학교 갔다 와서 엄마가 없으면 남의 이웃집 가서 한참 놀고 오고 자다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쩌다 이사 가면 그리워서 그 이사 간 집에 가서 며칠 있다오고 이런 식으로 정을 나누었는데 정말 이웃사촌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일 기대하기도 어렵고 서로 아파트 한 층에 살면서 인사도 안하고 소음난다고 서로 간에 죽이는 일도 벌어지는 현실이다.

 

 

()의 문화가 사라져 가는 이유

왜 이런 정의 문화가 사라져가는 걸까. 그것은 우리 안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 동정하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져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구조가 양극화되고 갑을문화가 고착화되면서 더 그런 현상이 더 나타나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에는 동정도 함부로 해서도 안 된다.

한 철학자의 책에서 본 내용이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MBA 과정을 통과한 동창이 동창회에 와서 자신이 대기업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동정을 표했다. 그 친구는 진심에서 표현했는데, 그런데 그 친구는 지방대를 나오고 중소기업을 다니는 친구였다. 명문대를 나온 그 동창은 위로받기는커녕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지방대도 간신히 졸업했고 영어도 못해서 변변찮은 중소기업에나 다니고 있는 친구가 동정을 보일 정도로 자신이 망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동창회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아무리 내가 실직자가 되어도 너희들의 위로나 받을 사람으로 보이니, 뭐 이런 거지같은 것들이 다 있어, 무능한 것들은 주제 파악도 못하지, 이제 아주 맞먹네." 이러고 나갔다는 실제 일화가 있다. 그러니까 아무나 동정했다가 욕을 보는 일도 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철학자는 사람들은 충분히 우리와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만 동정을 표현해야 한다. 선의의 동정이 잘못했다가는 이처럼 예상치 못한 반발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정()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온다.  동정이라는 말은 조금 부정적 의미가 있다.  갑을관계에 있을 때 동정은 더 부정적 현상을 초래한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과 동일시 여겨졌을 때, 그때만 동정심을 느껴야 한다면 동정이 아닐 것이다.  갑을 관계를 따져서 동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동창회를 박차고 나간 사람, 그 사람이 더 불쌍한 사람,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세상을 들썩였던 탈옥수 신창원이 교도소에 다시 수감되어 있었을 때, 이해인 수녀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신창원이 잔인한 살인마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 공과금 못 낼 정도로 가난했는데 하루는 공과금을 못내었다고 선생님이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 하러 와 빨리 꺼져"라고 망신을 주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신창원은 삐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선생님이 신창원의 가정형편을 알고 긍휼히 여겼다면 방법이 달랐을 텐데 어쨌든 간에 선생님의 혐오를 드러낸 말이 신창원을 악마로 만들었다.

 

 

이젠 정이 그립다

이젠 정이 그립다. 따뜻한 마음이 그립다. 사람들안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넘쳤으면 좋겠다. 측은지심이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다.

갑을 관계를 따지고 상하 구조 속에서 누가 누구를 동정하고가 아니라, 가진 자는 못가진자가 불쌍하고, 못가진자는 가진 자가 불쌍하고, 모두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측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사회의 혐오문화가 좀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억만장자 워렌 버핏의 가난한 아침식사, 패스트푸드

 

 

패스트푸드의 시작

패스트푸드의 시작은 고대 로마와 같은 도시에서 출발하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엌이 있는 공간을 가질 만한 여유가 못되어서 그 대신 조그마한 싼 길거리의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음식을 때웠다고 한다. 빵, 와인, 국수 등이 인기가 있는 음식이었다.

지금은, 패스트푸드의 개념이 다르다. 모든 사람이 부엌이라는 공간이 있지만 패스트푸드 음식점은 이전보다 점점 인기가 있다. 오늘날 패스트푸드는 공장에서 나와서 트럭으로 음식점에 배달된다. 주문이 되면 다시 데워져서 나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패스트푸드는 건강한 음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지방이고 섬유질이 약한 음식이다. 그리고 칼로리도 많고 크기도 크다. 이런 이유로 패스트푸드는 비만의 원인이 된다. 비만은 당뇨병과 심장병을 유발시킨다. 미국에서도 이것은 심각한 사회문제다.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이 비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스트푸드 산업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도 패스트푸드 산업인 매년 40 페센트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억만장자의 가난한 아침식사

얼마 전에 억만장자, 세계 갑부 3위인 워렌 버핏의 아침식사가 패스트푸드, 우리가 잘 아는 맥도날드 음식이라는 것에 놀란 적이 있다. 건강을 중요시 여기는 지금 패스트푸드는 부자들은 꺼리는 가난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침에 아내에게 3달러를 받아 직접 운전하여 맥도날드 매장으로 가서 햄버거를 주문한다고 한다. 특히 돈을 많이 벌은 날은 베이컨과 치즈가 들은 3.17달러짜리 햄버거를 먹고 그렇지 아니면 소시지만 들어간 2.61달러짜리 햄버거를 먹는다고 한다.

재산 70조의 갑부의 식생활, 정말 자신의 식습관 때문인지, 그 이전에 이것만 보아도 그의 가치관,  돈에 대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돈을 쫓았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사랑했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있었다고.

 그는 일이 즐거워 아침 출근길에 매일 탭댄스를 출 수 있을 만큼 일을 사랑한다고 한다.  또한 근검, 절약, 검소가 돈을 버는 것의 반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이야기 한다.

요즘은 세대의 가치관이 변하여 근검, 절약, 검소보다는 누리는 가치, 지금 한 순간에 가치 있는 일을 하자는 풍조가 더 세다. 그래서 재산이 많은 사람도 다 재산을 정리해 세계여행을 하는데 돈을 쓰고 보낸다. 욜로(Yolo)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현재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시대의 가치관이 변하고 있는 지금, 어떤 가치관을 따라야 할까. 근검, 절약, 검소는 부를 쌓게 하고 미래를 안정하게 만든다.

부를 쌓는 데는 다른 능력과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근검, 절약, 검소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어쨌든 시대의 가치관이 달라졌다 하나 워렌 버핏의 검소한 식습관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돈은 어떻게 버느냐보다는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