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사회 이슈,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보며 민심을 읽는다

 

 

첫째, 민심은 대통령, 권력을 가진 자에게 자기들 보다 더 높은 잣대의 도덕성을 요구한다.

보통사람들, 권력도 돈도 그렇게 가지지 않은 사람들, 그들이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한 가지가 있다. 도덕성이다.  나는 어느 유명인들 보단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남을 해코지하면서는 살지 않았다는 자부심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조사한 결과인데 보통 사람은 자기의 도덕성을 평균이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미국의 1000명의 일반인에게 죽어서 천국에 갈 것 같은 유명인은 누구일 것 같은가를 질문했다.  마더 테레사가 천국 갈거라고 답한 사람은 79퍼센트, 마이클 조던이 65퍼센트,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60퍼센트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것보다도 더 흥미로운 대답은 자기가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답한 비율이 가장 높았다는 것이다. 나는 천국행이다 라고 대답한 사람이 87퍼센트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민초들도 도덕성하나만은 자부심이 높은 사람이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불의를 저지르면 불일 듯 일어날 수 있는 것도, 심판할 수 있는 것도 이 자부심 때문이다. 자기들이 뽑은 대통령, 권력을 쥔 사람들은 자기들보다 더 높은 도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 더 높은 잣대를 갖다 대며 우리는 그들을 판단 한다.

솔직히 실망 안 시킨 권력자가 없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높은 잣대로 심판을 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 권력으로 비선실세의 권력과 특혜를 키워주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뇌물성, 댓가성 돈의 비리에 얽힌 것, 그것이 그녀의 탄핵의 큰 이유였다.

우리는 권력의 속성이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권력을 가진 자가 청렴결백하길 원한다.  가지지 못한 자들은 불행을 겪는데 그 권력으로 갖은 특혜를 누린 것에 우리는 분노한다.

 

민심은 이렇다.  민심이 오만할 수 있는 것은 높은 도덕성 때문이다.  민심을 두려워하지 않는 권력자들은 망하게 되어 있다.  아무리 대통령의 딸도, 영웅의 딸도, 권력비리는 가차 없는 심판을 받는다. 우리 민심의 자부심을 권력자들은 읽어야 한다.

 

둘째, 민심은 불통이 아닌 열린 리더십을 원한다.

박근혜의 리더십은 불통의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장관들하고도 회의를 직접 주재해서 나라 일을 듣는다거나 하지 않고 전화로 명령을 내리는 식으로 치리를 했다고 한다. 민심은 들어주기를 원한다.  자기들의 의견이 반영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의 말을 듣고 각종 연설문까지 손대게 하며, 개입시키며 어쩌면 그녀의 손에서 놀아난 듯 보인다.  바로 그 최순실이라는 여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권력을 가지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옆에서 도왔던 사람. 당연히 그녀의 의견은 편협될 수 밖에 없는데, 그녀의 소리에만 귀 기울인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안일함의 소치이다.

많은 사람들의 소리,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소리도 들어, 화합과 통합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대통령, 열린 대통령,  민심은 그런 대통령을 원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렇게 소통이 약했던 것도 아버지의 영향, 독재의 잔재로 보는 사람이 많다. 그녀의 한계인가.

 

셋째, 이제 민심은 여성의 부드러운 리더십이 아닌 강한 능력의 리더십을 원한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아쉬운 것 또 한 가지는 능력의 부재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초기에 여성으로서 부드러운 이미지로 남자권력자들보다 더 깨끗한 이미지로 어필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무능력한 대통령으로 낙인찍혀 버렸다.  자신이 능력이 없더라도 능력 있는 참모를 키워,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얼마든지 많은 일들을 해 낼 수 있었을 텐데.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의 무슨 능력을 믿고 그녀를 의지하고 치리를 했을까.  능력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부리는 것도 능력인데 박근혜 대통령은 사람을 다루는 능력도,  개인적 실력도 다 의심받고 있다.

민심은 전능한 강력한 파워의 리더십을 원하게 이르렀다.  여성으로서 박근혜 대통령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단점만 드러나 결국엔 파국에 이르렀다.

나도 여성이다. 여성리더로서의 약점, 맹점을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고쳐나가야 할 부분은 고쳐나가야 하겠다.  어쨌든 여성리더로서 장점을 잘 살리지 못하고 하차한 것에 대해 정말 유감스럽다.

 

2017년 사회 이슈, 각자 도생

 

 

각자 도생의 개인주의적 생존전략의 현상들

세계적으로 전에 없던 자연재해나 경기침체로 불안해지고 국가의 문제 해결능력은 신뢰받지 못하자 국민들의 제각각 살아나갈 방법을 혼자 모색해야겠다는 생각이 커지면서,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2017년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각자도생은 개인주의적 생존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사회에 공동체적 연대의식이나 유대감, 공감능력이 더 떨어지고 이러한 사회풍조가 묻지마 범죄같은 심상찮은 사회적 징후들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의 심리기조에는 나는 억울하다, 나는 누군가의 잘못들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피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타인을 배척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현상이 증가하는 것이다.  또한 각자도생의 증후군으로 각종 혐오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4,50대 남성을 비하하는 개저씨, 노인을 비하하는 말로, 틀니를 딱딱거리는 벌레라는 뜻인 틀딱충, 여성을 비하하는 김치녀, 맘충, 한국남자를 벌레로 비하하는 한남충,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 사람들을 더욱더 각자도생의 생존전투의 모습으로 번져가게 하고 있다. 사회가 더욱더 무한 이기주의로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각자 도생, 이대로 좋은가.

각자 도생의 생존 전략은 개인주의, 이기주의의 극대화, 각종 혐오현상과 묻지마 범죄의 원인이 되어가고 있다. 국가차원에 나서서 해결방안을 나서야 한다. 나라의 중요한 가치 근반이 흔들리고 있다.

 

이제는 공유경제, 소통이 중요

이미 학자들은 자본주의가 소유경제에서 공유경제로 들어섰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개인적으로 능력이 뛰어난다 하나 혼자만의 정보와 지식만으로는 그렇게 되지 못한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를 공유한다. 남의 것을 손쉽게 얻었으면 내 것도 손쉽게 내어주어야 한다.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면 대 대면으로 하는 소통이 아니더라도 인터넷상의 소통이지만 이것도 얼마든지 관계를 형성하고, 관계망을 형성하여, 공감을 형성하고,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  혼자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것보다 누군가와 소통을 하는 것이 각자 도생보다 생존력이 더 강할 수 있다.

 

더불어 함께 하는 공동체 의식의 필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의 공공기관, 기업 등의 표어는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이었다. 인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공동체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각자 도생은 경제가 어려워진 데 대한 살아남기의 극한에 몰린 사람들의 이기적인 생존 전략이다.  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공동체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개미의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다.  행동생태학과 사회생물학에서 연구된 것인데 군집에서 소외된 개미는 수명이 10분의 1로 줄어든다는 연구결과다. 일개미는 홀로 최대 6일을 사는 데 일개미가 집단을 이루면 최대 66일을 산다.  왜 그런가 했더니 개미에게는 사회위라는 모이주머니가 있어 먹이를 바로 소화하지 않고 사회위에 저장했다가 배고픈 동료가 개미수염을 자극하면 저장한 먹이를 토해, 배고픈 동료를 먹인다는 것이다.

미물인 개미도 어려운 처지의 동료를 돌볼 준 안다. 공동체로 오라. 삭막한 공동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따뜻하고 돌봄이 있는 공동체가 얼마든지 있다.

 

존중과 신뢰의 도덕적 근본 가치의 부활

개인이 극한의 이기적으로 가는 데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윗사람, 아랫사람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때론 사람에 대해 믿어주는 용기가 필요하다.  실제 엄마가 아파서 약을 훔친 한 소년이 잡혀 혼나고 있을 때, 대신 약값을 물어주며 먹을 것까지 준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 훔친 소년이 나중에 의사가 되어 그 사람을 찾아 몇 배의 보은을 했다는 것. 우리사회에도 중국사회에서도 실제 있었던 일이다.

지금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을 믿어주는 것, 신뢰하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러나 이 신뢰의 가치가 바닥났을 때 신창원 같은 죄인중의 괴수를 낳게 된다. 신창원은 한 수녀와의 편지에서 고백했다고 한다. 자기가 삐뚤어지게 된 것은 초등 5학년 때,  가난해서 공과금을 못낸 자기에게 선생님이, "야 이 새끼야, 뭐하러 학교왔어, 나가" 이런 거친 말 한 마디가 자기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어려운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기보다 믿음으로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것, 우리 사회에 이러한 넉넉한 가치가 무한 이기주의 생존 전략에 지쳐가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2017 트렌드, <욜로 라이프> "지금 이 순간"

 

 

2017년 키워드, 욜로(YOLO)

세계적으로 그리고 시대적으로 고 성장기는 막을 내리고 디플레이션 시대로 오면서, 바로 욜로(YOLO)라는 신조어가 트렌드로 급부상하고 있다.  바로 "You Only Live Once"라는 문장의 첫 글자를 딴 약자가 욜로이다.  즉 "단 한번 뿐인 인생" 이런 뜻이다. 그래서 욜로 라이프라는 말은 자기 지향적이고 현재지향적인 삶의 스타일, 미리미리 계획하는 대신 그때그때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소비하는 스타일을 욜로 라이프 라고 한다. 그렇다고 이 욜로 라이프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사고 싶은 물건 지금 사라"는 충동적인 의미가 아니라 지금의 삶을 후회 없이 살고 사랑하고 배우라는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한다. "욜로"라는 말은 경제는 성장하지 않고 그만큼 미래에 대한 기대는 희미해져 가고 계획을 세울 수가 없는 지금 현대인에게 절망의 외침인 동시에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희망이 담긴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말은 미국에서 생겨난 신조어로 2011년 인기 래퍼의 노래에 등장하면서 젊은 층의 유행어가 되었다고 한다. "인생은 한번 뿐이니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고 후회 없기 즐기며 사랑하고 배우라"라는 의미로 재조명되면서 오바바 대통령이 자신의 정책을 홍보한 영상에서 "Yolo Man" 이라고 외치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는 <꽃보다 청춘>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주인공 4인방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다가 혼자 여행하는 금발의 여성을 만나 대단하다고 칭찬을 하자, 그 금발의 여성이 "Yolo"라고 외치면서 유명한 말이 되었다.(김난도 외 5, <트렌드 코리아 2017> (서울:미래의 창, 2016), 199-216p. 참조).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라.

톨스토이의 러시아 민화집에 이런 말이 있다. "가장 소중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고, 가장 소중한 장소는 바로 여기며,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영어의 present는 현재라는 뜻도 있고, 선물이라는 뜻도 있다.

인생을 너무 목적 지향적, 결과 지향적, 미래 지향적으로 살면 오늘의 기쁨, 오늘의 행복을 상실할 수 있다. 욜로 라이프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히 살려는 현재지향적인 라이프 스타일이다.

이런 사고 방식에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펜스 존슨의 <선물>이라는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한 소년과 한 노인인데, 노인은 어린 소년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해놓고 선물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스스로 찾아보라고 한다. 그러나 찾지 못한 채 세월을 가는데...

그리고 그 소년은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에 빠져 가고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인생에 대한 불만은 더 쌓여 간다.

그 때 노인이 생각나, 노인을 찾아가 대화를 시작하고, 선물 생각을 하게 된다. 노인은 찾아온 성인이 된 소년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날들 속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인가를 기억해보라고 한다. 그때 그 성인이 된 소년은 바로 이 순간, 지금이 제일 중요하다고 느끼고, 그 선물이란 것이 "지금 이 순간"임을 알게 된다. 영어로는 선물 곧 present 이다.

무엇을 하든 우리가 의미 있게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중요하고 지금의 행복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도전한다, 나는 체험한다.

새로운 트렌드 욜로 라이프는 "도전"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낳았다. 미래보다 현재가 중요한 사람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가족이 여행을 즐기며, 모험하며 도전하는데 시간을 쓴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벗어나 일상을 즐기며 사는 데 가치를 둔다. 그리고 무한한 체험을 해보는 것에 가치를 둔다.

 

 

나는 남의 눈치 보지 않는다

욜로 라이프는 "단 한번 뿐인 인생"이라는 모토로, 하고 싶은 것은 주저 않고 소위 해보는 것인데 반대로 말한다면,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논리다. 즉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나만의 삶을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욜로 라이프는 무한 경쟁 시대, 저성장 시대, 미래에 대한 불확실에서 나온 삶의 스타일이지만, 어쩌면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절망을 반영한 것이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려는 긍정적 메시지,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삶의 스타일이 요즘 젊은이들에게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욜로 라이프의 긍정적인 면이 오늘을 사는 우리 세대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길 바라며, 지금의 중요성, 현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미래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이 되길 바란다.

 

 

 

여성성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남자의 퇴화물"이라고 하였고, 토마스 폰 아퀴나스는 "남자의 실패작"이라고 했으며, 쇼펜하우어는 "열등인간", 그리고 니체는 "하나님의 두 번째 실수", 밀턴은 "아름다운 불구자"라고 여성을 폄하했다.

실제 여러 나라의 언어를 보더라도 독어에서 사람(Mensch)과 남자(Mann)라는 낱말이 하나뿐이다. 영어의 더 맨(the man)은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남자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남자만이 사람의 본래의 기준이 될 뿐, 여자란 거기서 파생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라는 기준과는 분류해서 취급해야 할 존재라는 뜻이므로, 결국 이러한 영향하에 있었던 종래의 모든 학문은 편협하기 이를데 없다.

 

그런데 이와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해블로크 엘리스라는 사람이 있다. 그에 의하면 남자보다도 여자는 체력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거나 또는 병든 상태에 있거나 간에 그다지 아이들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는 아직도 전면적인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좀 더 완전한 한 가지 형태이므로, 문화수준이 점점 향상됨에 따라 남자는 점차 여성에 동화 되어간다고 주장한다.

 

여성을 아이들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여성주의 입장에서 내가 들어보지 못한 또 다른 견해인 것같다. 자칫 그 비유가 여성을 더 폄하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으나, 해블로크 앨리스가 여성을 가능성을 내포한 인간의 좀더 완전한 한가지 형태로 본 것은 의미심장하다. 내가 이해하기론 한마디로 여성은 남성보다 고등생물체라는 것이다. 남자가 100이 전부라면 여자는 200을 가지고 있다. 남자는 100까지 쉽게 도달하고 끝나지만 여자는 100을 채우고도 또 다른 100의 가능성이 있다. 내가 이해하기론 그렇다. 여성은 퍼 올릴 수 있는 것이 남성보다 더 많다. 그렇다면 여성은 정말 남성보다 멋진 존재이다. 해블로크 앨리스의 말대로 문화수준이 발달된 나라일수록 남자가 여성에게 동화되는 Uni-sex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더라도 이 말은 진리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남성성을 과시하는 것, 남성성의 상징을 추상적으로 말해서 통합적인 힘(power)이라고 본다면,  대개 힘을 과시하는 가부장적 사고는 정말 졸렬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부드러운 여성성, 드러나지 않고 뭔가 감추어져 있을 것 같은 신비스럽기까지한 것, 뭐라 딱히 표현 할 수 없지만 모든 추상적인 가치, 사랑, 인내, 희생, 이런 것들은 여성성에서 나온 것이다. 독일어에는 단어 하나마다 남성, 중성, 여성의 성이 있다. 대표적으로 사랑(liebe)Die Liebe이다. 여기서 Die는 여성성을 가리킨다. 결국 사랑은 여성성이다. 이 세상의 가장 숭고한 가치가 여성성인 것만 보아도 하나님이 여성을 지을 때, 육체는 비록 작게 지으셨을 지라도 그 심장은 남성보다 더 크게 만드셨을 것 같다.  왜냐하면 더 많은 가능성, 무한함, 신비로움, 등 퍼올릴 모든 것들을 그 속에 담으셨을 테니까...

 

 

 

 

인터넷의 익명성에 대해

 

 

인터넷 익명성의 문제는 오늘날 매우 복잡한 이슈이다. 이 문제에는 책임감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 소통의 문제, 언어의 자유의 문제, 등 많은 것들을 함유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은 오늘날 사회에 중요한 소통의 방법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인터넷으로 소통할 때, 우리가 개인 대 개인으로 직접 소통하는 것과는 다른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숨긴 채, 블로그나, 트위터, SNS등에서 대화를 나눈다. 어떤 이들은 이 인터넷의 익명성 때문에 저질러지는 폐해를 이야기하며 이것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명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익명성 때문에 많은 폭력적 언어가 오고 가며, 혐오문화를 낳고, 남의 사생활을 근거 없이 까발리는 인권 침해도 스스럼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실제 실명을 쓰면 사람들은 폭력적인 언어나 근거 없는 소문, 저질스런 말들을 쓸 수 가 없다. 자신의 인격이 드러나므로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것도 우리의 말과 언어의 자유를 제한하므로 해롭다고 이야기 한다. 개인이나 집단이 정부나 정부의 방침에 대해 그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한다면 이것도 민주주의를 해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제 TV보다 신문보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인터넷으로부터 얻고 인터넷으로 소통을 나누고 여론을 형성하고 이것이 정치나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터넷의 익명성으로 일어나는 폐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이제는 정책상 고민해봐야 한다.

각종 혐오문화, 저질문화가 인터넷 속에서 만들어진다. 인터넷상의 폭력적인 언어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들이 있고, 실제 자살한 연예인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터넷의 익명성을 제한하면 언어의 자유를 제한하여, 이것이 민주주의를 해치는 것일까. 인터넷을 실명으로 했을 때 더 건전한 민주주의가 만들어지진 않을까.

더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다.

 

 

100억을 기부한 강석창 회장이야기, 기부문화 정착에 대한 단상

 

 

20년간 100억을 기부한 강석창 회장이야기

페이스 북에서 20년간 100억을 기부한 중졸 회장님의 이야기를 보았다. 그는 "전 재산의 99%"를 내놓겠다. "돈은 잠시 맡아 보관하는 것일 뿐"이라고 회견했다. 그는 소망화장품 창업주 강석창 회장이다. 그는 몸이 아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고생 끝에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그 어려운 시절을 보냈기에 돈에 대한 욕심이 더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기부하는 돈이 아깝지가 않다고 한다.  "골프 치러 가는 사람이 골프 치는 돈이 아깝다고 생각합니까.  기부는 저한테 골프 같은 겁니다.  즐겁고 보람찹니다." 그리고 그는 겸손하게 자기는 명함 내밀 수준이 아니라고 말한다.  몽골 같은데 직접 봉사하러가서 월급 100만원 받고, 그 100원도 기부하는 사람도 보았다. 그런 영웅들에 비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겸손해 한다.

그는 부자이면서도 좋은 차를 몰지 않는다. 그는 다른 부자들과는 근본 가치가 다르다.

그는 부자들이 기부에 인색한 것은 기부에 대한 정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기부=세금'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사실 기업가는 나쁘게 말하면 고객들에게 돈을 뻿어 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어려운 사람에게 일부 돌려줘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기부는 기쁨이고 자발적으로 기부하면 업무 스트레스가 저절로 풀린다는 것이 그의 기부에 대한 생각이다.

 

기부에 대한 나의 단상

기부문화가 우리 사회에 정착되려면 우선 우리들의 가치가 성숙되어야 한다.  무엇을 가지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려고 하는 나눔의 가치가 이 사회에 윤리적 가치로 자리 잡아야 하며, 특히 가진 자들은 노블리스 오불리주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의식이 필요하다.  강석창 회장의 생각이 남다른 이유는 그는 부자들은 당연히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기부가 기쁨이다라고 표현했다.  나눔의 가치의 속성은 기쁨이다.  나눌 때 행복해지고 기쁨을 누리는 것, 이것이 성숙한 사람의 특징이다.  많이 가졌는데도 더 가지려고 하고, 사람 등까지 쳐 먹는 인간들, 사람이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나는 기부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또 있다.  바로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이다.  그는 세계적인 대부호였으며 지금의 미국의 기부문화를 정착시킨 최초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한때 1년간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고 돈을 벌려고만 했던 그의 가치관이 돈을 좋은 곳에 써야겠다는 가치관으로 전환되는 경험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많은 돈을 사회에 희사하고 기부했다고 한다.  그는 곧 건강을 회복하고 99세까지 건강하게 살았다고 한다.  무엇을 가지려고만 했던 가짐의 가치에서 나누어주고자 하는 나눔의 가치로 변한 모습을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가난해진 것도 아니며 그는 더 행복하게 그리고 더 높은 삶의 질을 누리며 장수하며 살았다.

우리에게 이러한 가치의 전이가 일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역할을 해낼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막스 베버는 종교가 가치체계를 통해서 행복을 줄 수 있으며, 삶의 의미의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으며, 그래서 인간의 삶의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가치의 변화에 종교는 일익을 담당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역할을 하여야할 책임이 있다고 하겠다.  종교의 아름다운 가치인 나눔의 가치가 이 사회에 정착되어 기부문화가 더욱 활발해지고 우리사회가 더 아름다워지기를 바란다.

 

 

 

 

이젠 이미지가 관건이다

 

 

조카의 취업이야기

요즘 취업경쟁이 심하다고 말들한다. 나에게는 취업을 준비하는 20대 조카가 두명있다. 취업준비로 고생을 참 많이 했다. 내 조카뿐만 아니라 취업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려면 취업 포털 사이트에 들어 가 보면 안다.저는 몇 번 떨어졌어요. 이 나이에 준비해도 되나요등 별 내용이 많은 데 가슴 아픈 내용도 많다. 내 조카도 서류심사에서도 떨어지기도 하고 필기시험에서도 떨어지기도 하고 면접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그런 과정을 겪다가 이 조카가 철저히 준비를 하고 온갖 자격증을 다 따고 영어 토익점수를 높이고 그래서 드디어 서류심사 필기시험까지 합격을 했다. 이제 면접이 문제인데 내 조카는 말 주변이 없다. 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 면접점수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면접준비만 따로 하는 추세다. 회사도 모집정원의 배수를 뽑아 면접에서도 많이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내 조카가 필기심사에 합격한 직장도 합격정원의 3배수를 뽑아서 면접에서도 부지기수로 떨어뜨렸다고 한다. 면접 갑질이라는 사설을 신문에서 보았는데 대기업에서는 면접관이 거의 폭력수준으로 취업자들을 비하하고 지방대는 아예 말할 기회도 안주고 성차별은 보통이고 외모를 비하 하는 등 많은 일이 벌어진다고 한다.

어쨌든 조카가 그렇게 면접시험을 걱정했는데, 아 글쎄 면접에서도 통과를 하고 취직이 된거다. 그런데 조카가 하는 말이 자신과 함께 서류심사, 필기시험에 통과한 친구는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 친구는 면접에서 유창하게 말을 잘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조카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해보다가 조카가 나에게 이런 사실을 털어놓았다.

조카는 자기가 말을 유창하게 잘 못한다는 것을 아니까 이 회사에 들어오면 자기가 얼마나 행복할까 그것을 상상하고 내내 그 표정을 짓고 생글생글 웃었다고 한다. 아마 표정에서, 인상에서 점수를 땄나보다. 그래서 유창하게 말은 잘 못하고 면접관이 묻는 말에도 완벽하게 대답을 못했다고 했는데 아마 그 표정에서 간절한 마음이 전해진 것은 아닐까. 진정성이 전해진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미스터리이다. 그러나 조카의 믿음 때문이라면 마음이 표정에서 드러나고 이젠 마음이 드러나려면 표정, 이미지 관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이미지가 관건이다

첫인상, 이미지가 중요하다 라는 말을 많이 한다. 사람의 첫인상은 6초 만에 결정되는데 얼굴을 보고 판단하는 시간은 겨우 1초고 나머지 5초 이내에 목소리와 자세, 태도 등을 통해 첫인상이 결정된다고 한다. 불과 몇 초 동안의 짧은 시간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대에게 이미지가 전달되기도 하고 상대를 판단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는 이미지 시대다. 이미지 리더십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이미지가 중요한 경쟁력이 됨을 많이들 이야기한다. 이미지로 대통령이 된 사람도 있다. 이미지 리더십이라는 말이 아마 노무현대통령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청문회에서 5.18광주 사태의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그 때 당시 관련된 정치인들을 날카롭게 청문하는 것이 통쾌했고, 약자에 편에선 그 이미지로 인해서 인기가 엄청났다. 그것이 대통령이 된 요인이라고 사람들은 분석한다. 그래서 이 이미지가 백 마디 말보다 더 효과가 크다라는 말이 있다.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을 이 시대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판단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은 그 내면이 즉 중심이 외모로, 겉으로, 이미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각각 따로 노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미지는 오롯이 그 사람의 내면에서 결정되며 그 사람의 내면 상태에 따라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제는 속과 겉모두 다스리는 이미지 연출이 필요한 시대다.

내가 말하는 이미지는 외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형수술로 고친 빤질빤질한 외모가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서 풍겨나오는 이미지이다. 그 이미지는 진성성을 드러낸다. 이것이 성공의 조건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다, 트럼프의 위압정치, 힘에 의한 평화에 대한 생각

 

 

강대국들의 힘의 정치

김기훈 위비경영연구소장이 조선일보에 미국, 중국, 일본의 정치에 대한 성향을 잘 정리된 단어들로 보여주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위압정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공포정치,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파격정치라는 말로 요약했다.

트럼프는 불법이민을 막고 전 세계 기업인들을 힘으로 눌러 미국물건을 사고 미국인을 고용하라고 외치며 위압정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진핑은 주가가 하락할 때 시장 논리에 따라 공매도를 해 이익을 본 증권사 사장을 주가 급락 주범으로 지목해 감옥에 집어넣고 있는 공포정치를 하고있다. 경제를 살기기 위해 절대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베는 좀 다르다. 협박하거나 감옥에 넣지는 않는다. 그는 이것을 파격정치라 불렀다. 아베는 야근금지라든가, 노인노동연령을 연장하거나 이런식으로 경제에 화력을 불어넣으려고 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 다르다.

특히,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내년 국방비 예산을 61조원이나 늘리기로 표명하고, '힘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라는 자신의 안보 기조를 구체화하고 나섰다. 본격적으로 위압정치, 힘의 정치를 하겠다고 표방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이 자국이익정책을 발표하고 힘에 의한 정치, 위압정치를 하기 시작하니 중국도 자국이익을 위해 힘을 사용하는 정치를 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들이 잠간 효력은 보고 있다하나 그것이 오래갈까.

잠간 기업인들이 두려워 말을 듣는다 하나 역사적으로 공포정치, 힘을 사용한 사람들은 힘에 의해 망한 사실을 볼 수 있다. '팍스 로마나' 라는 말을 아실 것이다. 로마의 힘에 의한 통치, 힘에 의한 평화를 이렇게 불렀다. 그러나 로마 당시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강대국도 허물어졌다. 힘에 의한 통치, 힘에 의한 정치는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용암이 잠잠하다 분출하듯이 언젠가는 그 긴장과 갈등이 탈이 나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이렇게 나오면 약소국들은 힘에 눌려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그 속에 용암은 어떤 식으로든 터져 나올지 모른다.

 

강대국들의 정의의 개념이 다시 논의되어져야 한다.  힘에 의해 정의를 이루는 것, 그것이 진정한 정의인가.

 

정의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책은 많다.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이 말하는 정의는 상대적인 정의이고 정의의 개념이 정확하지 않다.

이제 정의의 개념에 관계의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 그 관계유지는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관계는 관대함과 따뜻함 더 나아가 사랑으로 존속되는 것이다. 정글 같은 세상에서 무슨 사랑이냐, 그것은 종교에서 말하는 것이고 현실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릿속에 이런 개념이 없는 사람이 리더가 되는 거랑 이런 개념이 있는 사람이 리더가 되는 거랑은 확실히 다르다.

사랑과 정의가 입 맞출 때, 관대한 정의가 이루어진다. 예로, 부모가 권위적이라서 공포, 위압으로 교육시켰다고 해보자. 그 아이는 언제가 그 억눌린 분노를 터뜨리고 삐딱하게 되기 쉽다.

정치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위압과 공포는 약자를 긴장시키고, 억눌리게 하고, 결국엔 분노로 표출된다. 아예 관대함과 따뜻함으로 동등한 인격으로 보고 타협과 협상을 해나가는 것이 좋은 방법은 아닐까. 그러나 지금 강대국의 리더에겐 그것을 기대해 볼 수 없다. 그들은 온통 외곬으로 묶인 사람 같다. 지금 미국사회에 도는 반 트럼프 감정 무시하고 지나갈 것이 아닌 것 같다.

 

 

 

강자의 윤리, 반 난민정서, 반 이민정책을 생각해보며

 

 

진정한 강자는 약자와 눈높이를 맞추는 사람

강자의 윤리, 이 단어를 떠올리면 어렸을 적 추억과 오버랩 되는 것이 있다.

나는 4남매의 막내이다. 그런데 어렸을 적 위로 오빠 둘이 있어 언니보다는 오빠들이랑 더 잘 놀았다. 큰오빠는 나보다 5살 위인데 키가 크고 힘이 셌다. 작은 오빠는 나보다 2살 위인데 키가 작고 몸집이 작았다. 그런데 이들이 권투시합을 하고 잘 놀았다. 심판은 막내인 나였다. 사각 링은 사각 누빈 솜이불이었다. 싸우다 이 솜이불 밖으로 벗어나는 자가 지는 거였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내가 보기에도 시합이 안될 만큼 키 차이가 컸다. 그래서 나는 큰오빠 더러 무릎을 꿇으라고 했다. 어린나이에도 불공평한 거가 보였는지 큰오빠가 강자처럼 보이고 작은 오빠가 약자처럼 보였다. 본능처럼 정의감이 있었는지 어떻게 이런 판단을 내렸는지 모르지만 큰오빠는 무릎을 반쯤 꿇었다. 그러니까 키가 비슷해졌다. 나는 시합시작을 알리고 시합도 아닌 시합이 시작되었다. 서로 웃으면서 때리고 맞고 큰오빠는 일방적으로 맞는데, 맞으면서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은 그 때 처음 본 것 같다. 어린나이에도 큰오빠가 져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해서 작은 오빠가 이기기도 하고, 큰오빠가 이기기도 하고, 그러다가 승패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모두 모두가 즐거웠다. 헤피 엔딩이었다.

나는 강자의 윤리가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약자와 눈높이를 맞추는 거, 그러기 위해서 무릎을 살짝 꿇어주는 것, 약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는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강자들은 약자들의 약함을 너희들의 무지함 때문이다, 너희들의 게으름 때문이다라고 비난만 하지 않아도 다행이다. 그리고 맞아주기는커녕, 져주기는커녕 흠씬 패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감히 나에게 덤볐다고 때리고 아니면 훈련시킨다고 그래야 맷집이 세져 하면서 때려 된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들 성한 사람 하나 없고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 괴물이지 사람이 아니다. 인간성이 파괴된 괴물이다.

 

 

진정한 강자는 남을 기쁘게 하는 넉넉한 사람

진정한 강자는 약자와 눈높이를 맞추고 남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가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 업신여기거나 무시해서도 절대 안 된다. 이 세상의 강자와 약자는 자로 재듯이 구분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기를 강자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도 교만이 될 수 있다.

어느 여름날 있었던 일이다. 길을 지나가는 데 깡마른 할머니가 검은 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내 잡수시고 계셨다. 더운 여름에 위생상태도 안 좋아 보이고 음식 내용물도 뭔지 모르겠고 동냥해서 얻으셨나 저러다 배탈 나실까 걱정이 되어 지갑을 열었다. 천 원 짜리 몇 장을 꺼내다가 아예 만 원 한 장을 꺼내드리면서 할머니 점심 사드세요, 이것먹지마세요, 그랬더니 제 손이 무안하게 할머니 일언지하에 거절하시면서 저 동냥 안받아요, 없이 살아도 남의 돈 안받아요, 하시는 거였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폐휴지 주워서 그 돈으로 지나가는 귀여운 아이에게 과자사주시면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아이도 기뻐하며 넙죽 절하며 과자를 받아갔다. 할머니 존경스러웠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사람도 남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 사람이 진정 강자다.

어떤 사람이 한 환경미화원이 청소차 트럭 뒤에서 한 숨 자는 모습을 사진을 찍어 자신의 트위터에 올려놓고 비하하는 내용을 실었다. '자기 자리를 아는 사람' 이라느니, 흙수저 라느니 하면서 비웃음거리로 삼았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같이 동의하는 댓글을 달아 올렸다는 사람도 많았다고 들었다. 그 사람들 인격이 의심스럽다. 지구를 떠나야 될 사람들. 이 세상에 직업에 귀천도 없고 하찮은 사람도 없다.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인가. 나보다 남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이미 넉넉한 사람이고 강자다. 폐휴지 줍는 그 할머니 이미 넉넉한 사람이고 강자중의 강자다.

돈이 많다고 권력이 많다고 명예가 있다고 강자인가.

그 할머니 폐휴지 주워서 몇 천 원 못 버셔도 그 돈으로 남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냥 동냥처럼 베푸는 것은 받으려고도 하지 않으셨다.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반 난민 정서, 반 이민 정책으로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어져 가고, 정말 삭막해져가는 현실을 느낀다. 독일에서는 증오범죄가 하루 10건씩, 반 난민정서 때문에 일어난다고 한다.

가진 자들의 배려, 가진 자들의 윤리성이 다시 거론되어져야 할 때다.

 

 

 

 

 

 

 

대통령은 약한 여자, 권력 있는 여자와 권력 없는 여자의 차이

 

 

대통령은 약한 여자

Jtbc 뉴스현장에서 박근혜 대통령 변호 대리인단의 김평우 변호사가 한 말이 논란에 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겠다는 것은 정권을 잡겠다는 사기극이며 대역죄라는 것이다. 대통령을 탄핵하면 아스팔트가 피와 눈물로 덮인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말은, 같은 여자라도 공감할 수 없는, 대통령은 약한 여자이기 때문에 사나이가 보호해야한다. 약한 여자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였다. 대통령은 약한 여자이다. 그러나 권력을 쥔, 그 권력을 남용한 여자이다.

양보, 소통, 화합도 안 되고 장관 수석들도 벌벌 떨었다는데 어떻게 약한 여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대통령은 약한 여자이지만 권력을 쥔 여자였고, 그 권력을 남용한 여자였다.

 

 

권력 있는 여자와 권력 없는 여자의 차이

나도 여자다.  평범한 여자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여자가 권력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게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야 할 만큼.

누구는 그럴 것이다. 실력만 쌓으면 된다고. 그 실력 쌓을 때 남성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냐, 그래서 보통 여자들은 실력 외에 플러스 요인이 있어야 한다. 배경이나 돈, 성적인 매력으로 어필하던가. 여성들이 권력을 쥘 수 있는 수단이 외모라는 것은 여성도, 남성도, 지나가는 개도 다 안다. 외모지상주의, 성형수술, 다이어트 열풍 왜 생기겠는가.

실력이 있어도 외모가 뚱뚱하고 엉망이면 조직사회에서 개무시 당한다고 어느 여자 후배가 털어놓는다. 조직사회도 물론이고 집에서 부모님도 개 무시한다고. 연애도 한번 못한다고.

또 외모가 반반하면 그 외모 때문에 성 유린을 당하거나, 성희롱을 당하기 쉽다. 심성이 약한 여자는 이 상처가 오래 남아 정신병까지 이르는 것을 봤다.

권력의 자리에 오른 여자들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성적인 것까지 이용하여 권력을 획득한 경우가 많다. 아니면 타고난 공주님이든지.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의 딸이었다. 그것도 우리아버지 세대에서 영웅으로 떠받드는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다. 그것만으로 권력을 잡기가 쉽지 않았을까.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핍박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 배경 없고, 외모도 평범하고, 가진 것 없고, 그런 여자가 실력 하나만으로 권력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비교될 수 있으랴.

그렇다고 박근혜 대통령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이라는 속성이 얼마나 무섭고 부패하기 쉬운지. 남자, 여자 가릴 것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래도 도덕성은 여자가 더 우월하다.

권력의 속성이 극에 달하면 멀쩡한 사람도 개가 된다. 남자 대통령 중 돈과 섹스 문제에 안 걸린 사람을 손꼽아야 한다. 세계적으로.

그러나 세계적으로 여성 지도자들 중 돈과 섹스 문제에 걸린 사람은 잘 찾아 볼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여성의 도덕성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을 같은 여자로서 도덕성까지 폄하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 권력을 남용한 것은 사실이다.

 

 

권력남용은 여자라도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

그 권력 가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지금도 그 권력 때문에 상처 받는 사람, 소외당하는 사람, 짓밟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조직의 쓴 맛으로 직장을 잃어 홀로서기의 괴로움으로 얼마나 생을 고달프게 살아야 하는지.

그 권력, 그래서 가지려고 애쓰지만 평범한 사람은 너무나 가지기 어려운 것.

그런데 그 권력을 쉽게 가지고 남용까지 한다면. 여자라도 남자라도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 그것은 법의 이성적인 판단에 맡겨야 한다. 약한 여자라고 동정, 인정, 감정에 끌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권력의 특권만 누리고 특혜만 누리고 거기다 직권 남용까지 한다면. 누가 준 권력인데.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눈물 나는 필살기가 허무하고 억울하지 않기 위해서는, 권력을 쥔 사람들의 양심이 바로 서야한다. 그 권력의 속성이 통제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믿을 곳은 성향에, 색깔에, 감정에 휘둘리는 여론도 아니다. 정확한 증거와 판단위에 근거한 법의 심판이 공정하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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