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종말을 맞을 때, 죽음을 맞을 때 정말 악인이라도 사람을 죽인 사형수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종말을 생각하면 사형수라도 불쌍한 것입니다. 너는 죽어도 싸 그런 마음이 들겠습니까.

페이스북에서 미국에 49명을 죽인 살인마가 재판을 받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살인마는 49명을 죽여 놓고도 그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어디에 매장시켰는지 기억하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판사가 당신의 죄를 인정합니까 라는 말에 영어로 guilty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뻔뻔한 모습에 사람들이 다 경악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종신형을 받았는데 판사가 이 사람 때문에 죽은 유가족에게 한마디씩 이 살인마에게 하라고 기회를 주었습니다. 유가족이 한사람씩 나와서 한마디씩 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죽인 사람을 기억 못할지 몰라도 당신에겐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그 사람은 우리에게 전부였다. 우리의 엄마이자 언니이자 친구였다. 어떤 유가족은 너는 짐승이다 지옥에나 가라 하면서 저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살인마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다 듣고 있더니 어떤 한 사람의 말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거였습니다. 그 어떤 한 사람은 그 살인마에게 자식을 잃은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은 다 당신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번 일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You are forgiven. 그러니까 이 악마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49명을 죽인 악마의 마음도 녹였습니다. 그 죄도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말에 희망을 말해야 하는데 그 희망의 필요조건은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서함 받고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만 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된다 하시면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어떤 임금이 불쌍히 여겨 용서해주었더니 이 사람 자기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그 빚을 갚으라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이 괘씸하게 여겨 용서하지 못한 그 사람을 옥에 다시 가두어 둡니다. 이 비유를 드시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아마도 베드로가 <베드로 전서> 오늘 말씀 속에서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한 것 같습니다. 용서가 답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고 가르쳐 주신 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덮어야 우리의 죄도 덮어지는 것입니다. 허물을 자꾸 들춰내는 것 예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런 말씀하신 것이 수두룩합니다. 간음한 여자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돌로 친 사람이 없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누누이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여야 하나님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14-15절에 대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허물을 다 덮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들춰내는 것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타인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그러나 그것이 또 얼마나 무익한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다 압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그리고 직접 예수님께 용서를 받은 체험을 통해서 마지막 종말에는 이것뿐이다. 이것이 희망이다 하면서 오늘 말씀을 내놓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희망의 조건은 사랑이고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비판 정죄의 문화 속에서 오늘도 상처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이 나의 종말이라고 생각할 때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불쌍히 여겨야죠. 생각하면 모두 불쌍합니다. 그 때 우리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아끼면서 살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이라 믿습니다.

하루하루가 새날이지만 종말이기도 합니다. 내일일은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항상 이런 의식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기에 힘쓰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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