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착같다란 말을 좋아하십니까. 싫어하십니까. 저는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어릴적에 아버지한테 너는 매일 악착같지 않고 뒷심이 없다고 혼나서입니다. 그래서 30, 40대에 와서는 나는 왜 이러지 하고 항상 등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가 악착같지 않아서 마음에 안 들어 할 거다, 이런 생각이 항상 있었습니다. 제 등신감때문이겠죠.

그러나 자기 손해 보지 않는 일에 악착같고 누굴 이기려고 악착같고 남의 것 빼앗으려고 악착같지, 착한 일에 악착같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밝지 않는 거예요.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성공하는 세상인걸요.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달라야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악착같아서 노이로제 걸려 사느니 자기 한계 인정하고 내려놓고 마음의 평안을 사는 게 낫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왜 좋은지 아세요. 내려놓을 대상이 있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뭐든지 악착같이 해이 말 칭찬으로 듣지 말아주세요.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악한 일에는 미련해야 돼요. 우리는 손해 보지 않으려고 너무 똑똑한 척하고 집착을 합니다. 손해 좀 보더라도 착한 일에 열심히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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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여의도 순복음교회 대학부(CAM)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크다보니 별별 사람이 다 모여, 신앙의 색깔도 가지각색이었죠.

저는 신앙이 뭔지 모르고, 성가대 봉사도 하고 일단 착실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성경공부모임에 들어가 성경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는데,

어떤 소문난 특이한 그룹에 들어가 그 모임을 인도하는 Bible Leader를 알게 되었습니다.

리더라는 그 사람은 틈만 나면 손잡고 기도하면서 무슨 환상이 보이는지 말하라는 훈련을 조원들에게 시켰습니다. 성령은 하나이기 때문에 손잡고 기도를 하고나면 하나의 환상이 보인다고 하면서.

기도를 하고 난 후 한사람씩 보인 환상을 말하는데 난 아무리 눈을 감아도 시커멓고 환상은 무슨 환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냥 왕따가 되기 싫어서 옆에 사람이 하는 말을 컨닝했습니다. 옆의 사람의 말을 따라했다는 뜻.

그런데 그 leader의 특징은 무조건 손잡고 기도하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이 사정이 있어 기도중에 간다고 하면 저 사람은 사탄이라고 대번에 정죄를 하고 마귀가 역사했다고 까지 말을 했습니다. 자기 말에 토를 달면 무조건 사탄의 역사란 말을 쉽게 했습니다. 그때당시 그 어린 신앙에 뭘 몰라 두려움을 느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 리더의 말로는 영성훈련이라고 합니다. 그때는 판단능력이 없었습니다.

영적 leader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반대한다고 무조건 사탄이라고 말하는 것, 문제 있습니다.

자신의 영적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자신에게 거슬리는 사람을 사탄, 마귀라고 정죄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죄를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죄를 덮어씌우는 자체가 사탄의 역사입니다.

영성훈련가라는 사람이 무조건 환상만 보려하고 자신에게 거슬리는 사람을 무조건 마귀라고 한다면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영성, 예수님의 영성을 닮아가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탄이라며 상대를 정죄하는 것은 정말 위험합니다. 상대는 사람일뿐 그 사람자체가 사탄은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이비 종교에서는 사탄을 없앤다고 안찰한답시고 사람을 때려서 죽인 사례도 있지 않습니까. 악령이 씌었다 하면서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원에 보내는 것도 흔한 사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가난한 심령을 사랑하십니다. 죄를 상대에게 덮어씌우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죄를 상대에게 덮어씌우는 그 리더의 눈빛에서 저는 사탄의 역사를 느꼈습니다. 리더라고 power에 집중하다보니 정치인들이 하는 행태보다 더 무섭게 상대를 궁지에 몰려고 사탄이니, 마귀니 하는 말을 함부로 합니다.

그런 리더에게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우리들은 조직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리더를 만납니다. 리더라면 겸손과 포용력을 가지는 것이 우선입니다. 어휘도 조심해야 하는 것이 리더의 책임감 때문입니다. 지나온 세월 여러 가지 경험을 얻으며 그때의 일을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신앙인이면서 조직의 리더라면 예수님의 영성을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성!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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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선물

 

이외로 많은 사람들이 대가를 바라며 신앙생활을 한다. 그래서 자신이 바라던 대가가 주어지지 않으면 힘들어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그 분과 교제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만 관심이 있을 뿐 하나님 자체를 기뻐하며 감사하는 신앙은 아니다.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신앙인이 기독교인중 몇 퍼센트나 될까.

믿음이 생기고 강해지는 경우 하나님께 뭔가를 바라고 소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만 실망하고 하나님을 저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한분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신앙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우리의 기대와 소망을 이루려고 할 뿐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와 함께 하면, 복을 선물이라 했을 때 그 선물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우리는 선물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이 부차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신앙은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는 신앙이다. 하나님 아버지 한 분만 계시면 우리의 필요, 선물은 저절로 해결된다.

 

어렸을 적 나의 육신의 아버지가 퇴근해서 돌아오면 달려가 인사를 하는데 내가 제일 먼저 쳐다보는 것은 아버지의 옆구리이다. 뭔가 선물이 들려 있나. 뭐라도 사오셨나. 아무것도 없는 날에는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아버지라는 존재에는 관심이 없고, 즉 아버지라는 존재를 반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뭔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있나, 선물이 있나, 나에게 이로운 것이 있나 그것만 생각한다. 사실 나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존재이다. TV도 못 보게 제재하고 아버지로 인한 온갖 예절, 규율, 규칙이 나에겐 무서운 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 퇴근길이 반가웠던 이유는 오로지 선물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아버지 자체가 나의 인생에 없었더라면 그 선물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며 아버지를 통해 누렸던 온갖 혜택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관심이 더 많은 것은 어린아이 신앙이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혜택, 즉 은혜를 우리는 날마다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해도 우리에겐 더 없는 은혜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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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부끄러움


 

여러분은 언제 부끄러움을 느끼십니까? 제가 처음 부끄러움을 느낀 것은 정말 어릴 적 몇 살인지 기억이 안 나는데, 유치원도 안다녔던 어린 나이인 것 같습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기를, 화장실에 가서입니다. 그 화장실은 사방이 막혀있었는데, 위가, 하늘이 뚫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부끄러웠을까요? 그 어린나이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들여다보시면 어떡하지.’ 그 언뜻 든 생각이 아직도 기억에 납니다.

왜 제가 그런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수치심을 느낍니다. 원죄와 연관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살던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자연스런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을 알 수 있는 선악과를 먹은 후부터는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수치심은 죄의식과도 맛 물려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죄를 저지를 때 부끄러움, 수치심을 느낍니다. 그런데 죄의식과 수치심은 좀 다르다고 합니다.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수치심은 죄의식과 달리 자기중심적인 감정과 타인에 대한 적의를 불러일으키는 반면, 죄의식은 종종 회복을 추구하는 태도, 즉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는 행동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 수치심은 자기가치감정, self-esteem과 관련이 있어서 자기 존재(being)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행동(doing)에 대하여 괴로워하는 죄의식을 해결하는 것보다 이 수치심을 치유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도 수치심을 느낍니다. 자기에게 닥친 고난에 대한 이유를 모른 채 어려움을 당한다면 사람들은 자기 존재에 대해서, 자기가치에 대해서 열등함을 느끼고 수치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 뜻, 그 이유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다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고난에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고 있는데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사도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이 복음을 위한 고난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의 뜻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혹시 고난 중에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을 가지고 부끄러워했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실 것임을 확신하고 다시 한 번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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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솔루션입니다.

 

인터넷상의 페이스북'은 늘지만 대면(對面) 접촉인 '페이스 투 페이스'는 사라져가고 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아는 사람은 많지만 말할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온라인 대화는 있어도 오프라인을 통한 진정한 만남은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진정한 만남의 소통을 사람들은 갈망합니다. 친구, 가족, 남편, 누구든지 자신의 속 이야기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 이웃이 없어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는데, 실제 이 외로움 때문에 자살하고픈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서울시자살예방센터가 분석한 자살 동기 가운데 외로움·고독이 차지하는 비중도 20073.4%에서 2011(9) 10.7% 등으로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외로움의 대안으로 사람들은 컴퓨터에 빠져듭니다. 저도 페이스북에 가입해 페이스북 친구는 알게 모르게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라는 기계를 통해 불특정다수와 시시콜콜한 잡담을 주고받기는 하지만 이것이 외로움을 달래주는 진정한 소통의 통로는 되지 못합니다.

저는 이런 사회현실에 교회의 역할이 더 중요하게 부각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제가 하고픈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실제로 저는 진정한 소통의 문제를 교회에서 해결하였습니다. 시시콜콜한 잡담이 아닌 나의 속 이야기까지 할 수 있고 나의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고 남의 고민도 진지하게 들어가며 세상 살아감이 어떤 것인가도 깨닫게 되고 외로움도 해결하고. 이 모든 것이 교회에서 가능했습니다. 봉사를 하면서 소그룹모임을 하면서 만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그리고 형제, 자매들, 그들은 나에게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간접체험하게 해준, 그리고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따뜻하게 말을 건네 준, 그리고 내 삶의 이야기도 쏟아놓을 수 있는 통로들이 되어 주었습니다.

지금도 외로움을 달래며 애꿎은 컴퓨터에만 매달리는 형제, 자매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곳이 교회여야 할 것입니다. 페이스 투 페이스를 통해 진정한 만남으로 나아가는, 사람의 얼굴을 대면하며 진정 예수님을 보는 그런 오프라인의 만남을 교회에서 마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사회에 교회가 대안이고 교회가 바로서야 한다는 다소 고리타분한 말이 이젠 진정으로 내 마음에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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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젠탈 효과

 

중학교 과학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번 과학시험은 평소에 했던 실기점수 30퍼센트, 필기시험 70퍼센트로 평가가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곤 필기시험 전에 실기점수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을 호명하며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만점을 받을 가능성이 큰 사람들이니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말고 열심히 해서 만점을 받아라. 기대 할께그 자리에 저도 있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호명하는 목소리에 자랑스럽게 일어나 이번 시험을 잘보리라 의욕을 불태웠습니다. 그 결과 다른 과목은 백점을 받지 못했는데 과학과목만 백점을 받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주목하고 기대해 주고 믿어준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열정을 갖게 했고 그 기대에 부응해야겠다는 결단을 하게 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심리가 사회심리학적으로 연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로젠탈 효과라는 것입니다. 하버드대 교수인 로젠탈과 20년 동안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레노이 제이콥슨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초등학교에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지능검사를 했습니다. 이후 무작위로 한 반에서 20% 정도 학생을 뽑아서 그 명단을 교사에게 주면서 지적능력이 뛰어나거나 학업성취 향상 가능성이 높은 학생들이라고 믿게 했습니다. 8개월이 지난 후 지명 받은 이 학생들 대부분이 상위권을 차지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서 누군가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믿어주고 기대를 접지 않으면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결과의 원인은 교사들이 명단에 기재된 학생들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정성껏 돌보고 칭찬해 준 데에도 있지만, 학생들이 자신을 특별하게 보고 자기 자신에게 향한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도 있습니다. 긍정적 기대가 나 자신에 대해 긍정적 믿음을 갖게 했고 그리고 긍정적 결과를 낳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예수님께서 핏 값으로 산 존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우리는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믿음, 즉 나를 특별하게 보는 것,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에서 선한 열매, 좋은 결과를 얻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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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원씽

 

미국에서 가장 큰 투자개발 회사의 게리 켈러가 쓴 베스트셀러인 The One Thing 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복잡한 세상을 이기는 단순함의 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애플의 아이폰,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코카콜라의 레시피와 같이 성공하고, 성장하는 기업에는 그들만의 한 가지, 즉 원씽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가치, 단 한 명의 사람, 단 하나의 아이디어가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은 멀티태스킹을 강조하는 이 시대에 만연된 성공에 대한 거짓 신화를 바로잡아 주면서, 바쁘게 많은 일을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더 깊게 집중해야지 더 크게 성공하고 행복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핵심은 사람들마다 다양한 분야에서 살아가지만 자기만의 단 하나를 찾아내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인생이요,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단 하나는 무엇일까요? 아니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가장 쉽지만 가장 이루기 힘든 질문입니다. 그 답은 바로 예수님이고 아니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단 하나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분주한 일상사뿐만 아니라 우리의 관심이 물질, 안락함, 개인적인 성공 등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세상도 단 한 가지에 집중해야 성공하고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 원씽의 중요성은 세상의 원씽과 비할 바가 아닐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목적과 우선순위는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이 단 한 가지에 집중하여야 교회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삶이나 교회공동체에서나 일터에서 이 원씽에 집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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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짜증나고 우울하고 화가나는 이유는 내가 희생하기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고 있기 때문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희생을 희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삶에 짜증이 난다. 내가 가족을 위해서 내가 친구를 위해서 내가 회사를 위해서 희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짜증이 난다.

그러나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그 속에서 의미를 창출할 줄 알아야 하고 가치를 창출할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희생은 희생이 아니라 나의 성장이고 나의 미래를 위한 투자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회사를 위해 내가 조금 더 일하는 것, 나의 성장을 위한 것이고 나의 미래를 위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우울해질 필요가 없다. 내가 가족을 위해 희생 하는 것, 친구를 위해 희생하는 것,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사랑이라는 가치를 느낄 수 있고 기쁨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희생이 희생이 아닌 것이다. 내가 만약 치매어머니를 돌보고 있다면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고귀한 것이 있다. 2016년에 베스트 셀러였던 <낯선이와 느린 춤을>의 저자는 여성으로서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린 남편을 20년을 돌보고 남편에게 도리어 고맙다라고 표현한다. 남편을 돌봄으로써 인생에서 중요한 사랑, 신뢰, 가족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글을 통해서 당당히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였으니 우리도 희생해야 한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복음이 변질된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가장 값진 희생을 치루셨으니 즉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으니 우리는 감사하며 기쁘게 살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십자가라고 느껴지는 것도 우리는 감사하며 질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우리는 희생을 하며 살아야 한다, 온갖 불행, 희생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에 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희생을 더 이상 희생으로 생각하지 않고 행할 때 우리는 가장 값진 것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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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감각

 

아들러의 심리학의 핵심개념에 공동체 감각이란 말이 있다. 쉽고 흔한 표현이지만 그 의미를 추적해 보면 심오하다. 아들러는 인간이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가는 것은 인간에게 내재된 근본 원리, 본능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공동체 감각을 자라면서 익히는 것이 아니라 발굴해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공동체 감각, 즉 인간과 인간끼리 관계맺기를 원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나약함 때문이다라고 아들러는 말한다. 인간은 수렵채집시대부터 인간혼자서는 나약해서 살 수 없기 때문에 집단사회를 이루어 같이 사냥도 나가고 아녀자들을 보호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문명을 이룬 것도 인간의 나약함, 열등감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이 발이 빨랐다면 자동차를 만들어내지 않았을 것이고, 날수 있었다면 비행기를 발명하지 않았을 것이고 고래같이 물속에서 견딜 수 있었다면 배를 만들어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문명은 인간의 교만함의 산물이 아니라 열등감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그 나약함 때문에 집단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창조해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 감각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아들러의 공동체 감각이란 핵심개념은 자체가 신앙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인간의 나약함을 알고 협력관계를 이루려고 하는 것 자체가 교회에서 필요한 교우관계의 개념이다.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런 개념에서 교우관계도 필요한 것이다. 교우관계를 맺을 때 내가 너보다 우월해서 내가 너보다 강해서 너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약함으로 너를 필요로 하고 협력해야 함을 알고 접근할 때 권위적인 관계가 아니라 이웃간의 수평적인 관계 맺기, 민주적인 평등한 관계 맺기가 가능할 것이다.

아들러의 공동체 감각은 우리 사회에 어느 공동체든지 필요한 핵심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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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재와 예수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의 시<너에게 묻는다>

 

이 시는 단 두 문장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마음을 뜨겁게 하기도 하며 자신을 되돌아 보게 만든다.

우리가 우습게 보는 연탄재, 내가 어릴적만 해도 요즘 현대같이 세련된 난방시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탄으로 난방을 했다. 시꺼먼 연탄 자신이 다 타버려, 다 연소되어, 우리를 따끈따끈하게 해준 후 결국 희옇게 되어, 버려진다. 그리고 최후는 발로 밣히고 먼지로 사라진다. 이 연탄재가 시의 소재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이 시속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남을 위해 한번이라도 뜨겁게 자신을 태웠는지 반성해 볼일이다.

자신을 뜨겁게 태워 다른 이를 유익하게 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예수를 떠올릴 것이다. 연탄재와 예수를 연결해 본다. 우리가 언제 한 번 작은 예수라도 되어 본적이 있는지. 나를 희생한다는 것, 혹은 타인을 위한 열정을 가진다는 것, 한 번 뿐인 인생이라 우리는 더 몸을 사리는 것은 아닌지, 한번 뿐인 인생이기 때문에 열정과 희생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닌지....

이 시에 얼굴이 뜨거워지거나 마음이 뜨거워진다면 우리는 아직 가능성이 있는 존재다. 자신을 불살라 타인을, 이웃을, 사회를, 아니면 국가를, 아니면 세계를 유익하게 한다면, 이런 거창한 말이 아니라도 자그마한 실천이라도 하려 결심한다면 연탄재에 부끄러운 존재는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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