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뿌리

 

 

어떤 책에서 요한네스 슐라게터(Johannes K. Schlageter)라는 사람이 신뢰에 대한 인문학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 것을 읽게 되었다.

 

신뢰란 자기 자신과 타인과 세계의 관계에서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그러나 복합적으로 다양하게 체득된 견해다. 신뢰는 특히 타인과의 관계에서 위험이나 문제, 위기가 나타났다가 의미 있게 극복 될 때 의식에 새겨진다. 이 신뢰 앞에는, 유아기에 믿을 만한 주변의 보호자들, 특히 엄마와의 관계가 시작될 때부터 처음에는 무의식으로 생겼다가 나중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신뢰, 즉 신뢰의 원형이 있다. 이 원형적 신뢰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신뢰의 기본 능력이 갖추어지는데 이는 자신에 대한 신뢰인 자신감 또는 가치에 대한 신뢰, 존재에 대한 신뢰, 종교적인 초월적 신뢰로 나타날 수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어릴 적 신뢰가, 특히 부모(엄마)와의 관계가 어른이 되어서도 자존감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종교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원형적 신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교를 가지고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뿌리는 이미 유아기 때부터 심기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론에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이론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어렸을 적 부모가 없는 불우한 환경에서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자매가 있었다. 그녀는 신학대학을 갔고 교회전도사님이 되었는데 그녀같이 믿음이 좋고 언제나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으며 진짜로 하나님을 인격적인 아버지와 사귀는 것처럼 말을 하였다. 그녀는 이미 유아기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방랑기가 있어서 그녀를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밑에 동생을 돌보고 어찌어찌 형제들끼리만 살았다고 한다. 그녀의 불우한 환경은 그렇게 나아지지도 않았다. 비가 오면 집에 물이 샜고, 방랑하다 돌아온 아버지는 돈을 요구했고 어쩌다 아프시면 돌보고 입원비까지 대야 했다. 그래도 그녀는 항상 웃음 띤 얼굴을 잃지 않았고 희망을 잃지 않았고 한 번도 힘들다는 소리를 한 적이 없다. 항상 아버지(여기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책임져 주신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하나님 아버지의 신뢰에 대해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나도 크리스천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져 기도를 포기하고 온갖 부정적인 말과 원망으로 점철했던 자포자기했던 시절이 있었다.

성경에도 고아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는 육신의 부모로부터 형성된 신뢰관계, 애착관계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에게 종교체험은 그 육신의 부모가 아무 필요 없는 그것을 초월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인 아버지로 얻는 것이기 때문에, 그 체험 앞에서는 어렸을 적 원형적 신뢰, 무의식적 신뢰가 약하더라도, 더 강한 의지로 하나님을 붙들고 신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실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어렸을 적 부모와 사이가 안 좋고 학대의 경험이 있고 환경이 불우할수록 난 하나님 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더 하나님께 매달리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떼어 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유일한 자존감을 회복시켜주고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이었다. 그 신앙적 힘은 단발적인 것도 아니었다. 어려운 일이 계속 되도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더 강화되었지 약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신앙생활은 더 성숙해져 갔다. 하나님의 대한 신뢰가 그들의 생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침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하나님과 신뢰의 관계, 그것은 인문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하고 초월적인 뭔가가 있다. 종교적인 힘, 하나님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만남의 체험, 이것을 연구하려면 인문학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어야 될 것 같다. 신앙의 세계, 그것은 참 신비하다.



 

 

우리는 니체를 허무주의자로 알고 있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그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세상에서는 어떤 기대감도 가질 수 없다는 말로 비극적으로 들리나 그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초인의 개념을 말한다. 그 초인은 담대히 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어떠한 모양으로든 그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신의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의 출발점이다. 새로운 도약, 창조적인 도약의 출발점, 즉 도움닫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허무를 말한 것이 아니라 허무를 초극하려는 의지를 말하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초인을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크리스천이라도 때때로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 계신다. 하나님은 죽었다, 라는 절망감을 수없이 겪고 산다. 그러나 그 믿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다. 그 믿음의 고민위에서 몸부림쳐본 사람이 끝까지 신앙을 지켜 갈 수 있다. 나는 이 사람을 초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니체는 신은 없다에서 출발해서 그것을 초극해보려는 의지를 말했지만, 나는 신은 없다라고 느끼는 상황에서조차 신의 뜻을 찾고 일어서는 사람, 개념은 다르나 허무를 초극하려는 의지로 볼 때 두 사람의 일생은 다른 길을 갈 수 있을 지언정 그들을 초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는 때로 깊은 절망에서 더 창조적인 힘이 생기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밑바닥을 칠 때 그 반동의 힘이 생기는 것처럼.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니체의 해석이 나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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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필수요건, 책임의식

<특별시민>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인 서울시장의 오른팔격인 참모가 한 여기자를 픽업하며 한마디 질문을 던집니다. “정치를 뭐라고 생각하나?” 그 여기자의 대답 전체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중 기억나는 것이 정치는 유권자에게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을 떠올리며 서울시의 아니 한 나라의 리더가 유권자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식이 있다면, 모든 정치가들 아니 리더들이 이런 개념을 갖는다면 이 나라의 고통 받는 이들이 줄어들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치가들이고 책임의식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리더가 더 책임의식이 강한 지, 그것이 우리가 꼭 물어야 할 과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책임감, 책임의식은 어떻게 발동되는 걸까요. 그 근본 동력은 뭘까요. 저는 그것을 이 세상에서 제일 책임감이 강한 리더인 예수님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책임의식의 동력, Compassion

성경에는 예수님이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나 된, 기적을 일으키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통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에 포커스를 두고 화자 되었는데, 저는 여기서 예수님의 리더십을 보고자 합니다. 32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흘씩이나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이 굶주리고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굶주린 것이 가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깊은 책임감을 느끼십니다. 저는,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 영어로 말하면 compassion에서 바로 리더들의 필수요건인 책임감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리더십의 원천을 권위라든가, power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리더십의 발로는 power가 아니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들을 책임지고자 하는 마음, 그들을 돌보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져 불쌍히 여기는 마음, compassionpower에 비하여 열등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분법적 사고의 폐해입니다. 이분법적 사고는 모든 것을 둘로 나누고 하나는 가치 있는 것, 우등한 것으로 다른 하나는 열등한 것, 무가치한 것으로 보게 만듭니다. 예를 들면, 정신을 중히 여기고 물질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내면이 중요하고 외면은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 등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남녀관계에도 적용됩니다. 남성보다 여성은 열등한 것처럼 보이고 어른에 비해서 어린이는 열등하다고 여기고 서양에 비해서 동양이, 내국인에 비해서 이방인들이 열등한 것으로, 전자에 종속된 것으로 여기게 되고, 결국 그것이 상하관계를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이분법으로 구분 짓고자 하는 마음에는 이런 상하 구분이 내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 돌봄 등은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남성적인 것에 비해서 열등한 것으로 생각하여 무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리더가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의 발로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흘이나 굶고 따라온 무리들을 무책임하게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굶겨 보내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시며 결국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같은 감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리더가 통치하려고만 하고 따르는 무리들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그들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리더가 아닐 것입니다. 요즘세태를 보면 한 조직의 리더가 사람들을 조직이라는 기계의 한낱 부품쯤으로 간주하고 이용수단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자신만이 조직에서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리더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리더들은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리더의 삶에 교만이 뿌리내린 걸 알려주는 확실한 징표는 아랫사람들을 더 이상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아랫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리더라면, 따르는 이들을 돌봐야 할 책임과 나아가 목숨까지도 내거는 헌신이 있어야 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책임지고자 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이 굶주린 것을 스스로 책임지고자 하셨습니다.

 

 

 





믿음을 해치는 것, 감정과 상상력?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이자 문학가인 C.S.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제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이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제 믿음은 이성에 근거해 있습니다. 정작 제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저의 상상력과 감정입니다. 믿음과 이성이 한 편이 되고, 감정과 상상력이 다른 편이 되어 싸움을 벌이는 것이죠.(219p. 홍성사)

 

현 시대는 감성의 시대라고 한다. 기독교가 이 감성에 의지에 예배에 찬양을 도입한다든지,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나도 찬양을 좋아한다. 그러나 어떤 예배는 뜨거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너무 작위적으로 애쓴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귀중하다. 이 감성이 영성으로까지 통한다. 그런데 감성은 영구성을 목표로 할 때는 약점을 가진다. C.S. 루이스도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감정과 상상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분명 감성은 믿음을 형성하는 데 중요하지만 그것이 이성에 의해 견고히 유지될 때 온전한 믿음이 되는 것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말한다. 현실에 뿌리박지 않은 영성은 불안한 것이라고. 현실직시의 영성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끊임없는 이성의 작용이 필요하며, 그 이성이 믿음을 더 견고히 하여, 믿음이 평생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루이스가 말한 감정과 상상력은 공상이거나, 불안을 동반하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뜬구름 잡는 영성이다. 난 이것의 폐해를 많이 겪었고 많이 보았다. 예를 들자면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자매가 무턱대고 나는 신데렐라가 될 것 같다. 그러기 위해 기도한다 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한 경우가 있다. 또 어떤 자매는 환상 속에서 어떤 남성이 떠올랐는데 그 남자와 결혼할 것 같다. 그 남자가 하나님이 주신 남자다라며 기도한다 라고 하는 경우가 실제 있었다. 특히 결혼에 대해서 뜬구름 잡는 영성을 가진 자매가 많다. 정말 결혼이 특히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 필요한데도 말이다. 뜬구름 잡는 영성은 공상과 잠시 흥분된 감정을 수반한다. 이런 경우 현실에 부딪쳐 많은 상처를 입고 끝난 경우를 본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떠난 경우도 많이 보았다. 믿음에는 현실 직시가 필요하고 이것은 이성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이성의 노력이 수반된 감성과 상상력의 나래가 큰 믿음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실직시와 현실의 노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에서도 감성보다는 이성의 작용이 먼저 있었다. 즉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인 것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것이다. 믿음은 한 순간의 기분도 감정도 아니다. 끝까지 평생 가는 것이다. 그것은 훈련을 통해, 이성의 노력을 통해 가능하다. 감정은 열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정말 좋지만 끝까지 가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근거 없는 상상, 근거 없는 감정은 믿음을 해친다. 찬양예배를 뜨겁게 함으로써 한 순간의 믿음의 감정, 사랑의 감정, 단시간의 열정을 끌어낼 수 있지만 끝까지 고수되지가 않는다. 믿음은 상상력이라고, 꿈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상상력은 현실에 바탕 해야한다. 현실의 도를 지나쳤을 때 그것은 공상일 확률의 가능성이 많다.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확신은 이성에 근거한 것이다.

감성의 시대에, 감정의 중요성을 설파하여야 하지만, 끝까지 가는 믿음은 이성을 동반해야 함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감정은 초현실적인 세계로 이끌고 영성을 이끌어 내기도 하고 기적의 조건이 되기도 하지만 단시간, 단발성, 단순성에 기초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끝까지 가야 한다. 우리의 이성의 노력을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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