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기적의 조건

 

한 자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코맹맹이 소리였다. 감기라도 걸렸나 걱정을 했더니 찬양을 듣다가 울었다고 한다. 그 소리가 얼마나 귀하게 느껴지던지. 그 자매는 지금도 하나님을 붙들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찬양을 듣거나 부르거나 할 때 눈물을 흘린다는 것, 기도할 때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가 얼마나 간절한지 알게 해준다. 그 눈물에 간절함이 묻어나오는 것이다. 그 눈물 속에서 그 사람의 감성과 만나고 결국 그 사람의 영성을 엿보게 된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불도저처럼 밀어 붙이는 영성이 아니라 절망과 만나고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영성이 눈물의 영성이 아닐까. 하나님은 그 영성을 사랑하신다. 그러니까 히스기야가 병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신 것이다. 그 증거로 해시계를 10도 뒤로 물러나게 하는 자연의 순리까지 움직여서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에 온 맘과 온 정성과 온 힘을 다해 그 증거를 보여주셨다. 병이 낫는 기적을 베풀어주신 것은 물론이고.

히스기야는 기적의 주인공이었고 조건은 기도의 날 수도 아니고 기도의 시간도 아니고 금식기도도 아니고 안찰기도도 아니고 방언기도도 아니고 단지 눈물의 기도였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낫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무리를 먹이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베푸시기 전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위해 우시는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기적을 베푸시기 전에 박수치고 북치면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불 받아라 하는 식의 제스처, 퍼포먼스도 보이시지 않았다. 그는 눈물을 보이셨다. 그것은 허망해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불쌍함, 그 이유에서 나오는 애틋함, 그것이 하나님께 상달되기 원하는 간절함, 그것이 어우러져 눈물로 승화되고 결국 눈물의 역사가 기적의 역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눈물은 허망함,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기대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애절한 표현, 하나님의 애간장까지 녹일 수 있는 절실하고 간절한 표현의 양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