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로마서 13:14)

 

 

왜 바울은 이와 같이 말했을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옷이라는 뜻인가?

일단, 옷의 기능을 생각해보자

옷은 우선, 우리의 발가벗은 몸을 거친 환경으로부터 보호해준다.

둘째, 옷은 인간의 벌거벗은 몸 즉 수치심을 가려준다.

셋째, 옷은 우리의 몸의 온도를 조절해준다.

넷째, 옷은 인간의 신분, 즉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신분 등을 나타내 준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즉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입는다는 뜻, 혹은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옷의 기능이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의 약함을 외부로부터 보호한다. 여기서 외부라는 것은 유혹, 사단에서 비롯되는 죄성을 말한다.

둘째로, 예수그리스도는 약함과 수치심을 의미하는 벌거벗은 몸을 가려주신다. 이것은 우리자아에 존재하는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나 수치심을 가려줌을 의미한다.

셋째로,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몸을 적절하게 조절해준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냉정한 지성과 뜨거운 열정을 갖게 한다. 덧붙이자면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얼어붙은 마음이나 완고함을 녹이기도 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우리를 사로잡기도 한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새 신분을 드러나게 한다. 즉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자녀라는 새 신분을 획득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새신분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부끄러움과 약함에서 강하고 담대한 인간의 모습으로의 변화를 말한다. , 인간은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통해 새로운 존재가 된다.

 

옷에 얽힌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옷이라고 하지만 내가 학창시절에는 유니폼이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복장이 자율화되고 두발도 자율화되어 우리는 유니폼, 즉 교복을 입어보지 못했다. 그 당시 교복은 일제의 잔재라는 의식과 학생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하고 인격적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어 일시적으로 자율화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학교의 불량스러운 아이가 어른들처럼 복장을 하고 머리를 파머를 하고 친구와 함께 포장마차에 가서 술을 마신 것이다. 포장마차 주인도 학생인줄 모르고 술을 판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술에 취해 싸우다 그 불량한 학생이 친구를 칼로 찔러 친구가 죽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은 학교에서 크게 문제가 되어 그 학생은 감옥에 갔는데. 그 친구를 살해한 학생의 어머니가 학교당국에 한 말을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학교에서 우리 아이의 머리와 복장을 단속했더라면, 아니 교복을 입혔더라면 이런 일까지는 없었을텐데... 하면서 원망의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옷이라는 것은 정말 중요하구나. 옷은 철저히 신분을 드러내는구나. 그래서 그 옷이 죄를 짓는 것으로부터 방패막이 되어주기까지 하는구나. 진정 유니폼, 교복을 생각만해도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의 옷은 하물며 어떠랴. 예수그리스도의 옷은 우리가 하나님자녀의 신분임을 드러내주고 우리가 사탄의 흉내를 못 내도록 막아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더욱 짧게 의미부여하면 예수그리스도는 옷이다. 또한 예수그리스도는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옷은 사랑이다. 즉 사랑은 옷이다.

사랑은 옷!

그래서 크리스천의 의무는 이 사랑의 옷,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나눠줘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머니, 아니 엄마다.

(요한복음 131-9)

 

 

유월절 전인 어느 날 저녁,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를 미리 아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의미 있게 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일을 행하신다. 그 일이란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후의 행동 즉, 그 두르신 수건으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는 일까지 잊지 않으시고 꼼꼼히 이 일을 행하신다.

그 당시는 종이 밖에서 들어온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주님이시며 스승인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 사건을 예수님 자신을 종의 위치로 낮추신 즉, 사랑, 겸손 또는, 섬김의 본을 보이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위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는 과정 중의 행동은 너무나 익숙하고 많이 해본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리고 제자들 중에서도 그런 예수님의 행동을 거부하거나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자가 없다. 유독 베드로만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라고 완강히 거부한다.

스승님이신데 어떻게 저 같은 제자의 발을 씻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양말도 스타킹도 안 신어서, 먼지가 잔뜩 묻고 정말 시커먼데, 안됩니다. 제가 씻겨드리면 씻겨드렸지 이것은 아니되올 일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주라고 믿고 또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고 쫓아다니는 예수님이 자신의 더러운 발을 씻겨주는 것에 민망하고 황송함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씻기는 행위자체에 중점을 두어 죄사함, 구원 혹은 침례나 성결의 의미로 해석되어 왔지만,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보려 한다. 그 의미는 즉,

베드로야, 네가 진정 나를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않느냐 네가 지금까지 나와 같이 지내면서 네가 느끼는 것이 고작 그것밖에 안되느냐, 이렇게 많은 시간을 같이 지냈는데(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네가 나를 생각하는 것이 스승으로 밖에 여기지 않느냐, 그래서 그렇게 날 어려워하느냐? 다른 제자들을 보라, 아무도 날 어려워하지 않는다. 발을 씻겨달라고 내밀기도 하고 손과 머리까지 씻기어 달라고 내밀지 않느냐, 또한 나의 품에 기대어 눕기도 하고 나의 가슴에 기대어 질문을 하기도 하지 않느냐?(요한 13:23, 25) 너와 나의 진정한 관계가 무엇이냐?’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당신과 제자와의 관계가 단순히 주와 종,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만 머무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와 나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다. 엄마가 아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 뭐 그렇게 이상하냐, 너는 나의 핏줄이다. 너와 나에게선 아무 거리감도 없다. 너와 난 촌수로 따지면 1촌이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와 나의 거리감은(-네가 생각하는 나와의 관계는)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하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세족 사건속에서(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자신을 낮추심, 섬김, 겸손등의 윤리적 가치를 이야기한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제자들과 진정 원하는 관계를 말씀하신 것으로 본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위는 주로서 자신을 낮추신 섬김의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행위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리고 너무나 친밀한 행위라서-엄마가 자식을 목욕시켜주는 것처럼- 엄마의 (나는 이런 친밀한 관계로 인하여 엄마란 단어를 쓰고 싶다.) 행동은 분명 섬김, 자기희생적인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고 깨닫지 못한다. 그 이유는 너무나 친밀하고 자연스러워서.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바로 이런 관계이다. 예수님의 사랑 또한 어머니 아니 엄마와의 친밀한 사랑처럼 너무 우리에게 익숙해서 깨닫지도 감사하지도 못하는 그런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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