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 인생의 고백이 될 수 있는가?

 

 

궁극적인 철학적 명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그 이외의 것, 세계는 차원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정신은 아홉게 혹은 열 두 개의 범주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

자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마치 멜로 드라마에 있어서처럼, 그것은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에 패배했다는 것, 혹은 인생을 이해하지 못한 고백을 하는 것이다.”

      알베르까뮈 <인생은 부조리에 잠겨져 있다> 중에서.

 


자살은 인생의 고백이다, 이 말은 자살이 많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양 자살을 미화한 것 같다. 분명 자살은 자살을 한 사람의 인생의 고백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백에 얼마나 관심하는가? 차라리 살아있는 사람의 회고록이나 철학자의 인생철학이 아니더라도 인생의 수많은 역경과 굴곡을 이겨낸 작은 영웅(이건 어디까지나 내 표현-소시민일지라도 난 인생의 절망을 극복한 사람을 다 영웅이라고 표현하고 싶다)들의 이야기에 관심한다.

알베르 까뮈의 말처럼 자살은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의 인생고백은 너무나 허무한 것이다. 자살한 사람에게는 그 결정이 정말 치열하였을지 모르지만 타인에게는 그 인생이 비록 어떤 절망에 있었던들 허무감을 줄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예화 중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한 사상가들의 전설 이야기가 나오는 데 참 재미있다. 뻬레그리노는 견유학파의 철학자로서 올림픽 경기 때 사람들이 말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불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소리치며 뛰어들었으나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어서 그대로 불에 타 죽었다. 쥘르 르끼에는 19세기 중엽의 프랑스 철학자로서 모든 지식의 근원에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하고 바다 한가운데로 헤엄쳐 나가다 죽었다고 한다. 이 일련의 예화들은 아무리 지식이 많은 철학자라도 참 어리석다 라는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모든 인간은 어리석다. 그 중 자살하는 사람은 더 어리석다.” 이것이 내 결론이다. 머리가 좋아 세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요리하며 살 수 있는 재간이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미래의 한치 앞도 알지 못한다. (자신은 아는 것처럼 장담하나...). 인생의 어떤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훌륭하고 덕망 있는 사람이라도 그 순간이후의 시간은 알지 못한다.

모든 인간은 알지 못하지만 삶을 살아간다. 주어진 인생,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 거기에는 희망도 있고 절망도 있다. 밑바닥을 구르기도 하고 어떤 땐 뛰어다니기도 하며 어떤 땐 아무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막을 정처 없이 걷기도 하며 그 속에서 인생의 희로애락. 인내와 용기, 절제 등을 배워가지 않는가. 이런 사람만이 나중에 인생이 무엇인지 고백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 자살은 인생의 고백이 될 수 없다. 인생의 고백은 자살을 통하지 않아야 한다. 자살은 인생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포기, 허무만 남기는 것, 자살한 사람은 인생을 고백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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