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평생 살면서 가치관의 변화를 겪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끝까지 철이 안 들고 미성숙한 채로 사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평생가도 철이 안 든다는 말이 잇지 않은가.

그러나 보통 종교의 힘이든지, 아니면 인생관을 바꿀만한 큰 고난을 당하고서든지, 사람은 가치관이 변하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윤리학에서는 가치의 단계를 네 개로 나뉜다. 먼저 가짐의 가치, 됨의 가치, 나눔의 가치, 섬김의 가치.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숭고한 가치는 섬김의 가치이다. 섬김의 가치를 최고로 실천하시고 돌아가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가짐의 가치, 됨의 가치 정도만을 추구한다. 일평생 이것만 추구하고 안락한 삶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눔의 가치를 실현하며 이것을 목표로 일평생 사는 사람도 많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종교의 영향이 크다.

나는 가치관의 변화로 성공의 가도를 달리다가 갑자기 나눔의 삶을 실천하고 사는 한 여성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문애란이다. 그녀는 한국여성 최초의 카피라이터이다.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이 생소한 시대에 600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입사하여 무수한 실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던 여성이었다. 그 여성이 성공을 이룬 카피는 누가 들어도 다 알만한 것이다. 예를 들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미인은 잠꾸러기. 미인은 잠꾸러기 라는 카피는 40억 규모의 회사를 400억 규모의 회사로 성장시킨 성공신화를 만든 카피이다. 그에 따라 그녀의 인생도 승승장구를 달렸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삶의 질곡은 있었나 보다. 남편이 아프고 여러 가지 일로 인해 그녀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게 되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녀는 가치관의 변화를 겪게 된다. 성공하는 승승장구의 삶, 안일한 삶이 아닌 나눠주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개인 사재를 털어 자원봉사를 하기 시작했다. 자선 단체 compassion 일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의 자원봉사는 좀 특이했다. 사재를 털어 지인들을 모아 파티를 여는 것이다. 그 파티에서 지인 한명 한명을 아프리카 오지의 굶주린 아이들과 연결 시켜 한 달에 4만원이 넘는 돈을 후원하게 하는 것이다. 몇 백 만원, 몇 천 만원, 몇 억 이런 식으로 기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몇 만원을 내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꼭 그렇게 10년 이상은 해야 한다.

나는 그녀를 보고 이렇게 멋진 인생을 사는 사람이 다 있구나 라고 느꼈다. 멋진 파티라면 낭비고 사치라는 선입견을 가지는데 지인들과 멋진 파티를 하고 그 목적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나눔의 실천을 위한 것이라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지인들과 만나서 친목을 도모하고 사귀어서 좋고 그 친구들에게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줘서 좋고 도움을 받는 아프리카 오지의 아이들은 당연히 좋고, 본인도, 기부하는 사람도, 기부 받는 사람도 좋은 13조의 행사인 것이다.

나는 그녀의 인생 강의를 들으면서 내 삶의 목적도 나누는 삶, 나누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생겼다.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진 않으나 나눌 것이 정말 없으나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살아서 나누는 삶을 목표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이런 의미를 내 안에서 되찾으니 삶의 활력이 솟고 삶의 이유가 생긴 것 같아 불끈 불끈 힘이 난다. 최고의 숭고한 가치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더 노력하고 나아가는 삶, 그런 삶을 살도록 아니 그런 삶을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로 시작해 본다.



 

 

이 시대는 국제화 시대이다. 그러다 보니 국제결혼도 많아지고 자연히 다문화 가정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생겨나고 있는 현실이다. 며칠 전 다문화 정책에 대한 포럼을 들었는데 다문화 가정의 이중 언어 교육은 당연히 해야 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말하는 연설자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이중 삼중의 언어를 습득해야 하는데 언어 스트레스가 엄청나며 그것 때문에 많이 삐뚤어져 나가고, 왕따를 당하고 심지어 초등학교 저학년인데도 폭력성이 강한 것을 보았다.

난 한 아이와 씨름을 한 적이 있다. 그 아이는 도통 영어공부를 하지 않으려하고 영어말소리만 들어도 경끼를 한다. 심지어 다른 아이를 괴롭히고 공격적이며 항상 씩씩댄다. 아빠는 한국 사람이라 아빠랑은 한국말로 소통하고, 엄마는 조선족으로 중국말을 한다. 아빠가 조선족 중국 사람과 재혼한 케이스다. 그 애는 자기는 아빠가 둘이고 동생은 중국 사람이라고 말했다. 복잡한 가정 사에 이 아이가 겪을 혼돈이 대단 하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나는 그 아이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아이한테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다. 교실에 조용히만 앉아 있어도 상을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요란한 아이를 수업시간동안 잠재우는 것은 가능했지만 어떻게 영어교육을 하느냐는 나의 숙제이자 연구대상이었다.

그렇게 한 달반 동안 연구를 하다가 나는 묘책을 생각해 냈다. 아이에게 아는 척을 했다. “엄마가 중국 사람이면 너 중국말 할 줄 알겠구나, 이 세계에서 중국하고 삐까삐까한 나라가 어디니?” 라고 물어보았다. 그 아이는 미국이라고 말했다. “미국사람은 무슨 말을 쓰니?” “영어요!” “그래 너는 중국말도 할 줄 알고 영어도 배워서 영어도 할 줄 알면 너무너무 멋진 사람이 될 거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영어를 한 단어 가르쳐 줄 테니. 너는 선생님한테 중국말 한 단어를 가르쳐 주렴.”

그랬더니 그 아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에게 핸드폰이 중국말로 뭔지, 형이 중국말로 뭔지, 하나, , 셋이 중국말로 뭔지 알려주기 시작했다. 나는 이 때다 싶어 영어로 행복하다, 사랑한다, 좋아하다 란 말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자 그는 어느새 영어를 배우는 데 거부감이 없어졌다.

나는 서두르지 말고 하나씩하나씩 거부감이 없이 해나가면 그 아이가 성장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가 영어를 공부한데에 결정적인 요인은 그 아이가 한순간에 자존감이 높아져 버렸다는 데에 있다. 세계화 시대에 멋진 발맞춤을 하는데 네가 merit이 너무 많다고 자존감을 높여 놨으니, 선생님까지 자기한테 중국말을 배우려고 하니 얼마나 신나겠는가!

그렇게 매일매일 그 아이를 포함해 다른 아이들과 나는 중국말, 영어, 한국말까지 삼중언어를 하면서 재미있게 수업을 했다. 이 기억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기억이다. 그 아이가 영어 공부를 하기 시작해서가 아니라 다문화 가정아이들이 자칫 따돌림 받기 쉬운데 그런 아이에게 친구가 다가오도록 사회성, 공동체성을 길러준 것만으로 난 뿌듯하다. 그 아이가 멋진 아이로 성장하기를 정말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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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싸이가 미국 NBC<엘렌 드제너러스 쇼>에 출연해 강남스타일 열품을 일으켰다. 그 프로에서 싸이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진행자 엘렌에게 강남스타일 춤을 가르쳐 주었는 데, 그때 당시 진행자의 질문에 대한 싸이의 답이 정말 재치 있어 지금도 유명하다. 질문이 무엇이었냐면,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하이힐의 굽이 높은 것을 보고 진행자가 하이힐을 신고 이 춤을 춰도 되는가라는 것이었는데 싸이의 답이 정말 명답이고 재치 있었다. 바로 “Dress is classy, dance is cheesy." ”의상은 우아하게, 춤은 싼티 나게

바로 이 말도 안 되는 극과 극, 고상, 우아, 고급, 클래식이 싼티, 저질과 조화를 이루어 <강남스타일>이라는 대박을 이룬 것이다. 정말 예상치 못한 조화, 아니 조화롭지 못한데서 오는 우스꽝스러움 때문에 강남스타일은 대박을 친 것 같다.

 

이 우스꽝스러움이 어린이고 어른이고 다 이 노래와 춤에 빨려 들어가게 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극과 극의 조화를 이루지 못한 데서 오는 우스꽝스러움이 속된 말로 사람들에게 먹힌다고.

내가 생각해도 아직도 웃음이 지어지는 경험이 있다. 나는 작은 단체에서 초등학교 1학년과 2학년 아이들을 상대로 무언가를 가르친 적이 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좀 불량했다. 공격적이고 씩씩거리고 그 수업시간에 껌을 씹기까지 했다. 난 그 아이한테 다짜고짜 껌 뱉어라고 하지 않고 재미나는 것을 생각했다. 내가 직접 껌을 씹으며 다리를 떨며 온갖 불량을 다 떨며 아이들에게 질문했다. “선생님, 이뻐, 안 이뻐?”

아이들은 웃으면서 조용히 껌을 뱉었다. 그 상황이 내가 생각하기해도 웃긴 것이, 화장을 예쁘게 하고 예쁜 옷을 입고 무언가를 가르치는 권위를 가진 고상한 여자가 온갖 불량한 흉내를 내니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그러나 껌 뱉어라는 위압적인 태도보다 몇 배의 교육효과가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아이는 하나도 상처받지 않고 그 다음부터 불량한 태도도 보이지 않고 껌도 씹지 않았다. 그러나 난 아이들 사이에서 왕년에 일진이었다는 소문을 얻었다(?).

나는 그 때 어린이에겐 선생님이란 권위가 유치해지는 것, 이것이 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극과 극이지만 눈높이를 맞추는 데는 최고의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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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라는 책을 통해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21세기를 지배하는 질병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질환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난 왜 21세기가 정신적 질병에 허덕이는 사회인지, 말 그대로 <피로사회>인지 그 이유를 찾아보다가 요즘세대는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거침없는 말투와 지적과 쓴 소리, 독설이 남발하는 데서 원인을 찾았다.

불과 반 세대 전만 해도 샤이(shy)한 것, 약간 수줍음을 타는 것은 미덕이었다. 그것은 좀 더 공손하게 보이게 하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사랑받을 만한 조건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shy한 것은 좀 덜 떨어지는 것, 손해 보는 것으로 여기고 모두 다 지적과 쓴 소리, 독설을 찾아 난리도 아니다. 유치원 학생부터 초등학생까지 상대방이 선생님이라도 무조건 앞 뒤 가리지 않고 말을 던진다. 그것이 저학년인 그들에게 정말 사랑스럽지 않은, 예의 바르지 않은 소리라도 그들은 던진다. 이미 그들은 선생님이 당황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저학년은 모르고 그런다고 치자. 고학년, 중학생부터는 거의 전쟁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중2가 무서워 북한에서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교단에서도 사교육에서도 벌어지는 것이 현실의 조직에서도 작금 벌어지고 있다. 웬만큼 달련되지 않고서는 지적질 소리, 쓴소리에서 정신적으로 해방될 수 없다.

문제의식을 갖는 사람이 이 시대를 모르는 사람, 약한 사람,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찍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방이 상처입을까, 당황해할까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고 말을 할 순 없을까? 좀 더 공손하게 말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 이것이 바른 교육임을 알 텐데... 세태는 왜 이렇게 흘러갈까?

우리사회가 다시 예의, 공손, 겸손, 배려라는 미덕을 회복해야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회가 될 것 같다. 그런데 그 미덕을 몸에 익히려면 말투부터 그 언어부터 달라져야 할 것 같다.

 

 

 



 

 

현대인들이 사회공동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뛰어난 능력과 실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공감능력이나 공동체성, 사회성 등, 요구되어지는 것이 많다. 그래서 요즘에는 네트워크 지수 혹은 공존지수라는 말이 떠돈다. 즉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 친밀감을 잘 유도하고 친화력이 많은 사람은 이 지수가 높다.

‘Grooming'이란 말이 있다. 침팬지들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면서 서로 털을 고르며 만져주는 습관이 있다. 이것이 서로간의 친밀함의 표시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그들에게 소일거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집단에서 친밀함을 못 이루면 따돌림을 당하는 데, 이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사회, 조직내 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원만한 성격으로 친화력을 이루는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조직에서 어울리지 못하면 따돌림을 당하다가 도태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우리가 공동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친밀감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존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친밀감을 이루는 것이 침팬지의 본능인 것처럼 우리 인간도 본능처럼 공동체에서 누군가와 친밀감을 유지하고자 한다. 즉 그것이 무서운 위계사회에서는 생존이 달려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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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동기는 성장경험

 

 

나는 교육하는 일에 종사해 왔다. 영유아들로 시작해서 초등학교 아이,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50대 아주머니, 80대 할아버지부터 안 가르쳐 본 연령대가 없다. 그때마다 나는 사람들이 학습에 흥미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 칭찬을 한다든지, 어떤 인센티브를 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그만 대답에도 칭찬을 한다든지, 초등학교 아이 같은 경우는 알아맞히는 사람에게 사탕이라도 주든지 해서 학습동기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고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어떤 책을 읽고 발견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20101월 호에 상사와 부하들의 동기에 대한 견해 차이를 연구한 결과가 실렸다. 600명에 이르는 다양한 회사의 관리자들에게 부하들의 동기를 높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의 순서를 정하라는 설문을 조사하고 부하들의 일기 12,000여 건을 분석해 둘을 비교했는데, 결과는 서로 정반대에 가까웠다. 상사는 자신들이 인정해 줄 때, 인센티브를 제공했을 때, 동료들과 협업을 할 때, 일에 진전을 보았을 때의 순서로 부하들의 동기가 높아졌다고 대답했다. 반면 부하들은 약 76%가 자신에게 최고의 날을 만들어준 경험은 상사의 지지가 부족했던 일에서 자신이 큰 진전을 보았던 날이라고 답했다.

, 칭찬이나 인센티브는 그렇게 동기를 부여하는 데 중요하지 않았다는 결과이다. 상사마저도 자기를 지지 하지 않고 오히려 비난을 했을지도 모를 일에서 자기 혼자 스스로 진전을 보았을 때, 즉 스스로 성과를 이루었을 때, 그 때 동기가 부여되어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상사의 칭찬과 상관없이 자신의 성취감이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이다. 상사의 칭찬을 받기 전부터 부하는 만족감에 동기 수준이 높아져 있는 데 상사들은 이를 자기가 칭찬해 주어서 부하들이 고무된 것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칭찬과 인센티브는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고, 동기의 가장 큰 원천은 자신의 성장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직장생활에서도 그렇듯이 교단에서나 교실에서도 학생들의 학습동기를 부축이기 위해서는 칭찬도 중요하지만 목표를 던져주고 스스로 해내게 하던가, 어려운 일을 스스로 뛰어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임을 알았다. 스스로 성취해서 만족감을 얻는 것, 성취감을 얻는 것, 그것이상의 동기부여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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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카의 <도덕에 관한 편지 Epistolae morales>에는 사람은 가르치며 배운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중등, 고등학교 때 배운 영어가 아무 활용이 되지 못하다가 내가 영어를 가르쳐야 할 때 복습함으로써 실력이 되어 나타난 경험이 있다. 학교 때 받아먹은 식으로 배운 공부는 실력으로 튀어나오지 못하지만 누구를 가르치려고 내가 공부를 파고 들 때, 그것이 정말 실력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가르치고자 공부한 것은 정말 내 것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주입식의 학습은 도움이 못된다고 말하고 싶다. 어느 정도 초등학교같이 어릴 때에는 주입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처음 익힐 때에는 모방, 반복학습이 중요하다. 그런데 진짜 자기의 실력으로 남으려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깨쳐 가는 것이 중요하다.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알을 깨어 나올 때 어미닭과 병아리가 안팎에서 동시에 알을 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때 어미닭은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오는 데 작은 도움만 줄 뿐, 결국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병아리 자신이라고 한다. 요즘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모두 친절하기만 바라고 모두 다해주기를 바란다. 내 의견으로는 사교육이 성행하고 교육이 서비스기관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친절하지 않거나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학원쯤 갈아치우는 것은 밥 먹듯이 한다. 그래서 이런 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은 어려움을 호소한다. 그러나 이런 교육방법은 한 참 잘 못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미닭이 조금의 도움을 주는 것처럼, 스승은 학생들에게 조금의 도움만 줄 뿐 학생이 스스로 병아리처럼 알의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 튼튼한, 실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 병아리들은 다 죽는다.

요즘 아이들은 엄마가 선생님이 모든 것을 다 챙겨주며 따라다니니 스스로 깨우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 때론 엄마가 선생님이 거칠고 무관심해도 의도가 있는 교육의 방법임을 깨닫고 스스로 헤쳐 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는 것, 이것을 이해시키기가 너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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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라비언의 법칙(The law of Mehrabian)

 

UCLA 심리학과 명예교수인 앨버트 메라비언(Albert Mehrabian)은 자신의 저서 <침묵의 메시지>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내놓았다. 즉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거나, 누군가와의 첫 대면에 인상을 결정짓는 요소는 무엇인가를 관찰 분석한 결과, 목소리가 38퍼센트, 보디랭귀지 55퍼센트(표정 35퍼센트, 태도 20퍼센트)의 영향을 미친 반면 말하는 내용은 겨우 7퍼센트의 영향만 작용한다는 것이다. 즉 효과적인 의사소통에서 말투, 표정, 눈짓, 제스처 같은 요소가 무려 93퍼센트나 차지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용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외국인과의 대화를 겁내는 사람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우리는 외국인과 대화할 때 대화의 내용을 못 알아들을까봐 겁내하며 대화하기를 꺼린다. 그러나 이 법칙에 의하면 의사소통에서 내용이 차지하는 부문은 겨우 7퍼센트이다. 우리는 눈짓, 몸짓, 표정, 제스처 아니면 부드러운 목소리 등으로 사람에게 얼마든지 다가갈 수 있고 호감을 줄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아직도 외국인이 말을 건네 올까봐 움츠러드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내용을 못 알아들으면 어떠랴, 그 표정과 말투, 제스처로 우리는 얼마든지 상황파악을 할 수 있고 초등학교 때 배운 영어 실력으로도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영어에 자신감이 없는 내 조카에게 이 법칙을 말해주며, ‘언어는 감이다, 그의 표정과 몸짓으로 감을 잡고 네가 먼저 말을 건네라, 그러면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100퍼센트 말의 내용만을 알아듣는 사람은 없다.’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그러자 내 조카는 자신감이 생겼는지 이제는 외국인을 겁내하지 않는다. 내용을 알아들으려고 하기 보다는 분위기, 눈치, 감각, 제스처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보려하고, 그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감이 생기자 이제 외국인과도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지금도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100퍼센트 알아들으려고 하는 것은 무리이니 먼저 용기를 가지고 자신감을 가지고 다가가는 것부터 시도하는 것이 어떨까. 그러면 영어실력이 일취월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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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 업(join-up)

 

어떤 책에서 조인 업(join-up)이란 말을 알게 되었다. 이 말 뜻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사람을 경계하는 말이 마침내 그 공포와 경계심을 극복하고 조련사의 말을 따르게 된다는 몬티 로버츠(Monty Roberts)의 조련방식을 말한다. 나는 이 단어를 듣고 언뜻 승마를 한 나의 경험을 떠올렸다. 난 단체로 승마체험을 한 적이 있다. 난 멋진 말을 금방 골라 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조련사는 한 참 동안이나 말과 함께 둘이서만 거닐 뿐 말을 태워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유인 즉은 말은 공포나 두려움이 많아 처음부터 다짜고짜 타 버리면 거칠어져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참 동안 말은 조련사와 거닐면서 조련사를 신뢰하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조련사가 태우는 어떤 사람도 경계하지 않고 태우고 다녔다. 그런데 조련사가 꼭 함께 했다.

나는 나의 경험을 통해 조인 업이란 말을 실제 체험했다. 그리고 말과 조인 업을 이루기 위해서도 사람은 시간을 들여 함께 거닐고 신뢰관계를 쌓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간관계 그리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시간을 들여 함께 하고 서로 가까워지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지 서로간의 경계심, 두려움이 극복되고 신뢰감이 쌓여 간다.

나는 미물인 말을 달래기 위해 말과 몇 바퀴를 함께 걸어주는 조련사의 정성에 놀랐다. 미물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마땅히 해야 될 것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무슨 노력을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함께 걸어주는 것, 바로 이것이 조인 업(join-up)"하는 최고의 방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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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불편의 법칙  (0) 2017.06.13


 

 

김영하 소설가의 세바시 동영상 <자기해방의 글쓰기>를 보고 몇 마디 공감하는 것이 있었다. 그에 의하면 글쓰기는 인간에게 허용된 최후의 자유이자 존엄이며 권능이라는 것이다. 아무도 글을 쓰는 사람을 만만히 보지 못한다. 모든 것을 빼앗긴 인간, 억압을 받고 있는 인간도 글을 쓸 수 있으며 그 인간은 살아있는 것이고 존엄 자체이다.

나 자신도 책을 출판하고 블로그를 통해 글을 쓴다. 잘 쓰던 못 쓰던 글을 쓰는 것이 참 좋다. 때론 이것이 지적 허영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때론 나 자신을 너무 드러내 보이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우려가 글을 쓰고 나서의 해방감, 성취감을 압도하지 못한다. 때론 남에게 대면하여 표현하지 못한 것을 글로써 표현하여 통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현실의 부당함을 적나라하지 않더라도 우회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대리 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때론 내 속에 감춰져 있는 억압 경험을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어휘로 표현해 내는 것에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때론 고전의 어느 위대한 작가의 글이 내 안의 나와 만나 글로 표현되어지고, 때론 비평한마디라도 던질 수 있을 때 지적 충만감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이 좋고 글을 쓰는 내가 참 좋다.

그런데 직업별로 평균수명을 조사한 결과 종교인이 1위이고 작가, 저술가들은 꼴찌라고 한다. 글을 쓰는 것은 성취감, 해방감을 주지만 그만큼 작가의 혼신의 힘이 들어 간 것이다. 나는 짧은 글을 완성하고 나서도 크게 피로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작가의 수명이 짧은 것은 아닌지. 그러나 작가는 은퇴가 없고 정년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직업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참 멋진 도전이다. 그리고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도 감사할 일이다. 쓰레기 같은 정보가 많은 시대에, 그리고 속도의 시대에 남의 글을 시간을 들여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니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는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그만큼 자기 글에 책임감도 따라야 되지 않을까.

나를 해방시키는 글, 나는 항상 무엇을 쓰고 싶어, 내 안에 무언가를 쌓으려 열심히 노력하며 산다. 이것만으로도 내 삶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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