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체험연습

 

 

엄마 없는 장보기

2015년 겨울 어느 날 써놓은 저의 일기를 고백하려 합니다. 나는 47살의 노처녀입니다. 노처녀라는 말이 자존심 상하니까 골드미스라고 불러주십시오. 아직까지 변변한 남자 친구 하나 없습니다. 저의 낙은 엄마랑 장보기입니다. 왜냐하면 엄마랑 장을 보면 엄마가 제가 원하는 거 하나 꼭 사주셨거든요. 그것 때문에 내심 귀찮으면서도 싫은 기색 안내고 잘 따라 다녔습니다. 솔직히 저의 꿈은 남편이랑, 이쁜 자식이랑 데리고 마트 돌아다니며 사고 싶은 것 다사고, 마지막에 다 같이 아이스크림 사먹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아, 저는 엄마랑 마트 장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낙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어느 날 깨닫고 눈물이 났습니다. 엄마가 아프셔서 장을 나 혼자 봐야 했을 때, 엄마는 내 곁을 떠날 사람이구나 마음의 정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슬펐습니다. 이게 정말 신파조 같지만 제가 엄마한테 살아계실 때 잘하지 못했던 것, 못되게 굴었던 것, 정말 후회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번쩍 들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언젠가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에겐 하늘나라의 꿈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슬프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제 믿음이 약해서 일까요. 마음의 정리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 정말 살아있을 때 잘해야 겠구나, 그리고 하늘나라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나라를 알게 해야 겠구나, 하늘나라의 소망도 없으면 우리는 이 큰 슬픔 이겨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 체험이 많이 없으면 진짜 하늘나라도 소망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하늘나라를 동시에 살아야 한다. 하늘나라를 앞당겨 살아야 한다, 이런 말씀을 우리는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체험하려면,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 세상에서도 하늘나라처럼 사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중한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넘어 나의 이웃들과도 하늘나라를 사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체험연습 방법

그렇다면 이젠 하늘나라를 체험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 이야기해 볼려고 합니다. 돈과 권력, 명예, 세상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서면 그것이 우리에게 하늘나라체험을 가져다 줄까요? 어마어마한 부를 가졌던 스티브 잡스도 죽음직전에 이런 마지막 유언(last words)를 남겼습니다. 요즘 페이스북, SNS를 통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다 소개할 수는 없고 그 중에 인상깊었던 구절을 번역된 것으로 소개하겠습니다.

 

Non-stop pursuing of wealth will only turn a person into a twisted being, just like me.

쉬지 않고 부를 추구하는 것은 사람을 비틀어진 존재로 만들뿐이다. 나처럼.

God gave us the senses to let us feel the love in everyone's heart, not the illusions brought about by wealth.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사랑을 느끼게 만드는 감각을 주셨다. 부가 가져오는 환상들이 아니다.

The wealth I have won in my life I cannot bring with me

What I can bring is only the memories precipitated by love

내가 평생 동안 획득한 부는 (하늘나라로) 가져갈 수 없다.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으로 점철된 추억들뿐이다.

That's the true riches which will follow you, accompany you, giving you strength and light to go on.

그것들은 당신을 따라다니고 당신과 함께 동행하며 당신에게 계속되는 힘과 빛을 제공해 줄 진정한 부유함이다.

죽음을 앞두고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이룩한 부, 이 부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부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은 비틀어진 존재, 꼬인 존재, 즉 영어로 twisted being을 만들 뿐이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부는 사랑으로 만들어진, 즉 사랑으로 점철된 추억이며 이것은 항상 우리를 따라다니며 우리와 동행하며 우리에게 힘과 빛을 제공해 준다고 말합니다. 결국엔 하늘나라로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이 사랑으로 만들어진 추억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갈 것은 사랑의 기억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하늘나라체험연습 방법 첫 번째는 사랑의 추억쌓기입니다. 지금 옆에 누가 계십니까. 남편, 아내, 자식, 아버지, 어머니, 교회공동체 식구들, 일터의 동료들 어떻게 보면 정말 신비스러운 천륜과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인데 우리는 그들을 한 번도 진정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애가 본성인 우리는 정말로 진정으로 사랑을 하기가 힘든 존재입니다. 저 자신도 정말 이기적으로 살아온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추억쌓기가 하늘나라 소망을 갖게 하고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앞당겨 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82살의 아버지가 컴퓨터를 배우시고 스마트폰을 사셨습니다. 은퇴하시고 텃밭을 가꾸며 살아오신 아버지가 무엇이 자극이 되었는지 어느 날 컴퓨터를 배우시겠다고 신청을 하시고 컴퓨터를 사시고 스마트폰을 사시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습니다. 그 후로 아버지는 저를 괴롭히기 시작하셨습니다. 여기엔 괄호열고 귀여운 물음표가 붙어야 합니다.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가 저를 붙들고 컴퓨터, 스마트폰 하는 방법을 물어보시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몇 번 가르쳐 드려도 돌아서면 또 까먹으십니다. 속이 터집니다. 아버지는 미안해서 그러신지 겸연쩍어서 그러신지 내가 늙어서 점점점... 그래도 초등학교 1학년 머리는 돼.” 그러시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제가보기엔 5살 지능이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래도 자존심을 내 세우며 니 엄마보단 낫다그러십니다.

저는 그래도 그런 아버지가 내심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랑 이런 추억도 쌓는구나. 그렇게 무서웠던 아버지였는데... 친절하게 가르쳐 드려야지 다짐에 다짐을 하지만 또 가르쳐 드리면 속이 터집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짠합니다. 그 다음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버지에게 컴퓨터 가르쳐 드리기, 저에겐 아버지와 나눈 사랑의 추억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하늘나라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선 하늘나라가 저절로 이뤄지는 것 같진 않습니다. 우리의 사랑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노력이라고 말하지 말고 연습이라고 말하면 더 가벼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금 당장이라도 전화해서 추억을 만들어보기, 이러한 연습이 우리의 육신과 정신과 영을 건강하게 만들어서 결국 하늘나라를 미리 앞당겨 체험하게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40대 싱글녀로서 소외를 느낄 때, 차이일까 차별일까?

 

난 어렸을 적부터, 오빠들을 따라다니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큰 언니가 있지만. 오빠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 날도 작은오빠, 큰오빠, 큰오빠 친구 욱이가 집에서 놀고 있었다. 내 나이 7살 때 쯤. 난 집에 사람들이 북적인다는 것, 자체만으로 신이 났다. 그리곤 좋아라, 오빠들을 좇아다녔다. 남자들이 하는 놀이에 다 참여하였던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열심히 끼어 다녔던 것 같다.

그 날 기억이, 아직도 가끔 다시 떠오르면, 남녀는 유별하다는 옛 고사 성어를 떠올리며 그때의 나를 철부지로 치부하곤 웃음 짓기도 하지만.

지금 40을 넘어 50을 바라보는 나, 남녀가 유별한 차원을 넘어, 남녀가 차별 받고 있는 현실을 너무나 뼈저리게 경험해 버린 나에게 그때의 기억이 왠지 서글프게 다가오는 것은.

오빠들, 남자라는 성을 가진 오빠들의 반응이 새롭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나의 뇌는 언제부터인가 남자라는 성의 반응까지도 추적해가며 나에게 남자와 여자는 다른 데, 여자는 언제나 손해라고 외치며, 남자는 언제나 방해라고 외치는 남녀유별의 현실을 차츰 차츰 깨닫게 해주는 기능을 해오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마저 서글퍼지도록.

그 기억의 발단은 어쨌든 나의 고집 때문에 비롯된 것 같다. 작은오빠, 큰오빠, 큰오빠 친구 욱이는 욱이네 집에서 오빠들끼리만 놀겠다고 주장했다. 나는 집에 있으라고 종용한 채.

오빠들끼리만 놀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그 놀이는 다름 아닌 욱이네 오빠 집 목욕탕에 물을 받아서 남자들끼리 수영(?)은 못하더라도 물장난을 하며 놀자는 것이었다. 셋은 이 모종의 계획을 나한테 감추곤 넌 집에 있어라고 종용해왔다. 그러나 난 지지 않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으로서의 본분과 책임의 완수를 미끼 아닌 전략으로, 오빠니까 오빠로서 나를 어떻게 떼어 놓을 수 있느냐라는 주장을 막내의 막무가내 기질대로 떨어질 수 없다고 우겨댔다.

그러자 오빠들은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오빠들끼리 목욕탕에서 놀거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난 안된다고 우겼다. 큰 오빠는 안 되는 이유는 말하지 못하고 굉장히 난감해 하는 모습을 얼굴에 띄우곤, 나에게 사정을 했다. 난 안된다고.

난 정말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오빠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는지. 어쨌든 난 끝까지 우겼다. 나도 수영복이 있다고. 나도 데려가 달라고. 당시 엄마 아버지가 집주인이면서도 작은 집의 사정을 봐주느라 집주인 행세도 못하고 셋방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변변한 목욕탕 구경을 못한 나에게는 환장할 만한 신나는 놀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었나 보다.

욱이 오빠는 목욕탕에 물을 받아 놓겠다고 하고 먼저 가고 큰오빠는 작은오빠한테 나를 맡기고는 가버리고. 급기야 작은 오빠는 나한테 짜증을 내고. 그래도 난 수영복을 싸들고 욱이 오빠네 집에 갔다. 신나는 물놀이를 기대하며.

욱이 오빠네 집에 도착했을 때, 오빠들 셋의 표정은, ‘허무와 좌절. 설마 했더니 끝까지

목욕탕 놀이는 고사하고 오빠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욱이 오빠는 나를 피하고, 큰오빤 욱이 오빠와 나 사이에서 난처해하고, 작은오빤 너 때문이다 라는 표정으로 투덜대고 난 욱이 오빠네 목욕탕 구경은 했지만 내가 기대했던 신나는 놀이는 할 수 없었다. 오빠 셋은 풀이 죽어 있었고, 그래도 남자들만이 할 수 있는 다른 놀이를 찾으려 했다.

난 여전히 소외되어 있었다.

난 그들에게 왜 그리 반갑지 않은 방해꾼이 되어버렸던 걸까?

그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하다 라는 것을 느꼈을 뿐. 그 이상한 느낌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나의 뇌 속에 솜박아 있었고, 지금 다시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 해답을 아니 그때의 상황을 해석해 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오빠는 남성이고 난 여성이고 우리는 달랐고. 그때의 나이론 남녀 7세부동석, 남녀가 유별하다는 것을 오빠들은 깨달았고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고.

이렇게 간단하게 결론을 내릴 수도 있지만.

지금 나를 서글프게 하는 것은 바로, 남녀유별, 남녀차별이 아닌 남성지배의 사회구조에 무서운 아픔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남녀평등을 외치며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여자가 설친다는 이유로 당하는 따돌림과 비아냥거림, 남자들의 저속한 뜻으로 대하는 시선과 행동에 피멍이 들어갔다. 그리고 점차 소외되어갔다.

현재, 내가 방해꾼처럼 기억되지 못하는 소외된 자리에 놓이게 된 것은 옛날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철부지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제 난 철부지가 아닌 한 여자로서 한 여성으로서 소외되어있다.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이 사회에서.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라서, 남자들이 끼이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아놓은 자리, 또한 그들이 여성들의 자리라고 규정한 열등한 자리로 힘없이 소외되어가고 있다.

소외된 이 자리, 이젠 나와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이 자리,

난 그 속에서 위로와 평안을 얻고 살아갈 길을 모색해 가는 지금,

소외된 서글픈 자리가 다시 조금씩 충만하게 채워져 감을 느낀다.

아니 난 소외 되지 않았다. 더 이상의 큰 자리를 얻었다. 나와 같은 성의 사람들이 우리라는 성으로 눈덩이처럼 불어 갈 때, 언젠가는 꼽사리처럼, 방해꾼처럼 끼이는 자리가 아닌 당당하게 맞서는 자리에 서게 될 날을 기대한다.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의 힘이 되어주고 또한 힘을 얻기 위해, 아직도 살아내려 꿈틀거리는 나를 느끼며.

 

 

 

 

바보는 이젠 호감언어

 

 

스티브 잡스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2005년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우리말로 옮기자면 항상 배고프게 갈망하고 바보같이 우직하게 살아라

여기서 foolish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인생도 그의 말처럼 바보같은 데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창업한 애플사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그는 끝끝내 다시 그 회사의 최고경영자로 복귀하여 전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발명품들을 내 놓았습니다. 그의 인생의 full story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났을 때 포기했더라면, 당장의 눈앞의 이익 때문에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는 그의 놀라운 업적을 이루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직하게 어쩌면 바보처럼 한 길을 간 것. 그것이 그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지 않았을까요.

 

그러고 보면 foolsih란 말이, 즉 바보란 말이 이젠 더 이상 이 시대의 경멸적인 언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호감언어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바보는 어리석고 못나게 구는 사람을 얕잡거나 비난하여 이르는 말또는 지능이 부족하고 어리석어서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즘 바보라는 말이 대유행입니다. 딸바보, 아들바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요즘 연예인들이 자신의 자녀들과의 인증샷을 올리며 그 말을 은근히 듣고 싶어합니다. 스타들이 전에는 신비주의를 지향하여 사생활을 숨기고 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자신을 바보로 낮춤으로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이 자신을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미를 부각시켜주는 효과를 주어, 오히려 더 관심을 끌고 인기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타들은 이 방법을 일종의 처세로 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보는 이젠 사전적인 의미로서 쓰이기보다는 어느 한 쪽의 전문가를 애칭으로 부르는 말이 된 것 같습니다. 이 바보라는 것을 희화화한 예능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인데, 201510월쯤, 제목은 바보전쟁, 부제목은 순수의 시대로 방영된 것으로 기억됩니다. 뇌순남(뇌가 순수한 남자), 뇌순녀(뇌가 순수한 여자)를 뽑고 웃기는 게임도하고 경기도 하는 그런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바보전쟁입니다. 이 단어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들리지 않고 프로그램이 재미있었습니다. 거기서 뇌순남, 뇌순녀로 뽑힌 연예인들은 미술이면 미술, 음악이면 음악, 연기면 연기, 어느 특정한 데에 있어서는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예능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상식은 꽝인 바보들이었는데 사자성어도 하나도 모르고 한글 받침법도 다 틀리고 쉬운 영어도 하나도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보가 아닌 바보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연예인들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그 모습들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바보가 이제는 더 이상 비하하는 단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한 쪽 면으로 너무 치우쳐 다른 쪽은 모자라는 사람인데 그것이 오히려 더 매력적인 사람, 그런 사람을 바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바보가 되는 것이 전략일 수가 있지 않을까요.

 

자신을 깍아 내리고 자존심을 버려도 어쩌면 어리석게 보이지만 꿋꿋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것. 이 시대에 필요한 처세술이 아닐까요. 바보처세술이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전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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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위복, 긍정의 심리학

 

 

언어에서 보는 긍정의 문화, <전화위복>, <샐리의 법칙>

우리나라는 예부터 한의 정서를 가진 문화로 알고 있으나 우리나라 사람같이 흥이 많고 노래를 좋아하고 춤을 좋아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노래방이 즐비한 것만 보아도 그렇고 우리 나라의 아이돌이 세계를 주름잡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나는 요즘 대세인 한류 문화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흥의 문화를 언어에서 찾아보려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에는 옛부터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고, 지금도 많이 쓰는 단어이다. 화가 오히려 복을 불러들인다 라는 뜻인데, 우리 나라사람들은 화도 복으로 바꾸는 마음의 넉넉함과 여유가 이미 있었던 것이다.

이미 미국에도 비슷한 종류의 속담이 있다. 머피의 법칙, 샐리의 법칙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살다 보면 일이 자꾸만 꼬이는 경우가 있다. 하필이면 빵의 버터 바른 면이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든지, 버스가 늘 늦게 와서 늦게 나갔더니 그날은 제시간에 와서 이미 떠나버린다든지, 하릴없이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데 길 건너엔 같은 번호 버스가 잇달아 지나가건만 이쪽엔 마냥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세차를 방금했는데 비가 와 버린다든지, 물건을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샀더니 그 다음날 반값에 세일을 한다든지...

이렇게 손해보고 일이 잘 안 풀릴 때 우리는 머피의 법칙이라고 한다. 머피의 법칙이라는 가요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는 이 머피의 법칙도 유머스럽게 긍정적으로 풀어내었다.

반면 '샐리의 법칙'(Sally's law)이라는 말도 있다. 우연히 유리한 일만 계속 되거나, 나쁜 일도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는 경우를 말한다. 맑은 날에 우산을 들고 나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든지, 시험 직전에 펼쳐본 교과서 내용이 문제로 나온다든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긍정의 심리를 나타내주는 전화위복, 샐리의 법칙 같은 말이 있다. 이것은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말해준다. 어느 세상,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좋은 일만 일어나고, 나쁜 일만 일어나겠는가.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화도 복이 될 것이라고 믿는 믿음, 이러한 삶의 태도를 가진다면 그 사람의 인생, 그 나라의 운명은 잘 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이것을 긍정의 심리학에서 잘 말해주고 있다.

 

 

긍정의 심리학

긍정의 심리학의 창시자 마틴 셀리그만(Martin E. P.Seligman)은 인간의 긍정적 감정, 행복은 좋은 유전자나 행운을 타고난 결과가 아니고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행복도 배우는 것이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고 스스로 기쁨을 창출하여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내가 실연이나 실패의 경험을 했을 때 그럴 때도 낙관적인 태도, 즉 전화위복의 믿음을 발휘하는 것이 진정한 긍정의 태도일 것이다.

처음부터 태도를 결정할 때, 낙관성을 선택하느냐, 비관성을 선택하느냐 이것이 사람의 운명을 달라지게 한다고 한다. 셀리그만이 관찰조사를 했는데, 성공한 세일즈맨과 실패한 세일즈맨들 간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성공한 직원들은 낙관적이었으며, 실패하는 사람들은 비관적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똑같이 보험가입을 거절당했는데도 낙관적인 사람은 이 사람이 너무 바쁜가봐, 내가 저녁식사 중에 전화를 걸었나봐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비관적인 사람들은 난 안 되나 봐”, “재수가 없나봐”, “이러다 밥값도 못하겠어.“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패의 경험 뒤에도 설명양식이 낙관적이냐 비관적이냐가 삶을 결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행운과 행복, 성공은 삶의 태도의 문제이고 선택의 문제이다. 안 좋은 상황에서도 낙관성을 선택하느냐, 비관성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이다.

실패를 경험했을 때, 그 일을 설명하는 방식을 심리학에서는 설명양식(explanatory style)이라고 하며, 그것은 그 사람의 사고방식을 결정한다고 한다.

낙관적인 사람이나 비관적인 사람이 나쁜 일을 당했을 때, 그 원인을 찾는 방법이 세 가지 측면에서 다르게 나타난다고 한다.

첫째, 원인의 지속성을 판단하는 데서 다르다. 비관적인 사람들은 실패했을 때의 원인이 지속적이라고 믿으며, 낙관적인 사람은 일시적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사로부터 질책을 당하면 비관적인 사람들은 그 사람의 성격 때문이라고 하고 낙관적인 사람들은 그 날의 기분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낙관적인 사람들은 나쁜 일이 지속될 거라고 믿지 않고, 반면 비관적인 사람들은 지속될 것이라고 믿는 다는 것이다.

 

둘째, 원인의 전반성 정도를 평가하는 것이 다르다. 예를 들어 데이트를 신청했는데, 거절을 당했을 때, 비관적인 사람들은 여자들은 모두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낙관적인 사람들은 다른 여자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어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비관적인 사람들은 부분의 일도 전체의 일로 확대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실패의 원인을 누구 탓으로 돌리는지가 다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할 때 긴장을 할 경우, 비관적인 사람들은 '나는 너무 겁이 많아' 이렇게 생각하고, 낙관적인 사람들은 '대중 앞에서 긴장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해' 라고 생각한다. 즉 비관적인 사람들은 나를 왜소화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한다면, 낙관적인 사람들은 그 원인에 그렇게 천착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관대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실패의 경험 뒤에도, 내가 화를 입은 경험 뒤에도, 나쁜 일을 당한 경험 뒤에도 그 원인을 해석하는 설명양식이 비관적이지 않고 낙관적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성공의 길로,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전화위복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전화위복의 긍정의 심리가 우리를 또 다른 삶으로, 긍정의 문으로, 행복한 삶으로, 성공의 길로 이끌어 줄 것이다.

 

 

 

 

 

 

 

 

 

 

 

 

 

 

 

 

 

 

 

 

 

 

 

 

 

 

 

놓아버림, 성공의 조건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이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신의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쓴 책 <인생수업> 처음부분에 이런 예화가 나온다. 어느 40대 초반의 여성의 경험담이다. 혼자서 차를 몰고 시내 외곽을 달리고 있는데 고속도로 중간쯤 갔을 때 앞서 달리던 차들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런데 백미러를 보니 뒤에 따라오던 차 한 대가 전혀 정지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차는 전속력으로 돌진해 왔다. 아마도 그 차의 운전자가 순간적으로 한눈을 팔았던 것 같은데, 곧 자기 차를 강하게 들이받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위험한 상황에서 인간은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될까. 보통 사람이라면 무섭고 긴장하여 운전대를 꼭 잡고 부들부들 떨 것이다. 그 때 그 여성은 의식적으로 운전대를 꼭 움켜쥐고 있던 자기 손을 내려다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이것이 내가 이때까지 살아온 방식이구나,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도 않고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도 않다이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운전대를 움켜쥐고 있던 양손을 내려놓았다. 운전대를 놔버린 것이다.  그리곤 삶에 아니 죽음에 순순히 자신을 맡겼다고 한다. 그리곤 뒤이어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는데...

그 여성 어떻게 되었을까. 차는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는데, 그 여성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경찰은 몸에 힘을 뺀 것, 몸의 긴장을 푼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몸이 긴장했으면 크게 다쳤을 거라고.

그러면서 그 여성은 늘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살아왔지만 이제는 손바닥 위에 부드러운 깃털이 놓인 것처럼 평화롭게 손을 편 채로도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쥐면 쥘수록 잃고 다치고 멀리 못가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우리가 움켜진 만큼 되는 것도 아니고 움켜진 만큼 된다고 해도 별 볼 일 없는 인생이다. 인생은 우리의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사탄의 가장 무서운 무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애지중지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 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매달리다 죽어간다. 이 세상에 우리가 집착하는 보기 좋고 맛좋고 편안하고 안락하게 하는 것들 우리를 죽이는 것들에 우리는 집착하며 살아간다.

 

유명한 정신의학자 데이비드 호킨스박사는 그의 책 <놓아버림>에서 놓아버리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항복이야 말로 완전한 성취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노력기제라는 밧줄을 이미 끝까지 당겨 보았다, 그러나 원하는 곳에 닿기 위해 열심히 당겨 봤자 밧줄만 점점 더 너덜너덜해질 뿐이다. 이제는 더 쉽고 편한 길이 있다.  바로 그것은 그 밧줄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심리학의 용어로 노력기제 대신 항복기제를 써보라는 것이다. 고통의 주 원인이 우리가 뭔가에 집착하는 것, 애착하는 것이라면 놓아버림 기법은 마음속 애착과 걸림돌을 없앨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렇게 하면 일단은 육체적인 면에서 건강에 이롭고, 행동 면에서 부정적 감정이 점차 줄어들면서 약물, , 오락, 지나친 수면들에 의존했던 사람들은 그것에 벗어나고 활력과 기운을 찾고 그럼으로 인해 대인관계도 좋아지고 이것을 끊임없이 실천하면 의식과 자각, 영성에 눈을 뜬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자신의 한계를 점차 놓아버림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놓아버림의 방법은 높은 영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중에서 가장 효과가 뛰어나다고 말한다.

놓아버림은 고통의 주 원인의 해결책이다. 그러면 마음과 몸의 건강을 찾고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며 다른 목표를 계획한다면 우리는 더 좋은 성공의 길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강한 집착과 고집, 욕심, 강한 훈련만이 우리를 성공으로 이끄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때론 놓자, 더 좋은 기회를 위해.

 

 

 

 

 

 

 

 

 

삶은 저항이다

 

 

 

삶은 저항이다. 저항과 순응 중 어떤 것이 삶의 태도인가 묻는다면 저항이 답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저항이란 단어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우리는 저항하면 우리나라의 독특한 역사 때문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데모운동을 떠올린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저항은 권력에의 저항뿐만 아니라 폭넓게 삶에의 의지가 저항이다.

즉,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으로부터의 저항, 삶의 장애물들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몸부림으로서의 저항, 삶의 어두운 곳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저항, 짓누르는 질병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저항, 무기력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저항, 주저앉고 싶을 때 일어서고자 하는 저항, 이 모든 것이 삶에의 의지이고 이것은 저항성의 성격을 띠고 있다. 현재보다 퇴보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원한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려는 몸부림, 그 속에서 우리는 저항성을 발견하게 된다.

저항은 꿈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종의 향상심(向上心)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니체가 먼저 한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러기 위해서 세상이라는 들판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불가피하게 경쟁 속에 뛰어든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항성을 키우지 않으면 안된다. 순응하고자 할 때 좋은 먹잇감이 되기 쉽다.

세상이라는 정글은 순응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허나 그들은 쉽게 먹잇감이 되고 상처입고 버려진다.  끊임없이 저항성을 길러야 한다. 자신의 무기력을 돌파해야 하고 삶의 장벽과 난관을 돌파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어떤 학자는 인간은 저항하는 본성을 가졌다고 한다. 이것이 동물의 실험에서 증명되었다.

한 행동심리학자가 실험을 했는데 동물들도 자신이 지배하지 못하고 즉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이 강요당할 때 그것에 저항하려는 욕구가 짝짓기나 먹는 것과 같은 생존 본능보다 더 강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 사이언스라는 논문에 그렇게 연구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한다.  흰밭 들쥐를 잡아서 실험실에 가둔 뒤 실험상자안의 불을 껐다.  그런데 들쥐들이 그 불을 켜기 위해 내내 안간힘을 쓰더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 불을 껐다.  그러니까 이제는 쥐들이 그 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쓰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쥐들은 어떤 실험조작을 하든 그 실험 조작에 저항하는 데 모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한다는 것이다.  쥐들은 단순히 저항을 위해 저항했다. 이유가 없다. 왜 들쥐는 이유 없이 실험 상황에 계속 저항하는 것일까? 이 현상에 대해 셀리그만이라는 학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능력에의 욕구나 외적 강제에 저항하려는 욕구는 바로 다름 아닌 무기력을 회피하려는 욕구다.  본능처럼 무기력으로부터 회피하고자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무기력하지 않고 능력 있음을 증명하려고 저항한다는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그러고보면 사람의 인생도 인류의 역사도 저항의 산물이다.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본능인 이상 사람은 끊임없이 저항해야 한다. 순응은 퇴보다.  끊임없는 저항성을 길러내는 것, 이것이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평범함과 특별함, 의미부여의 차이

 

 

평범함과 특별함 사이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슨 대통령(노태우)보통 사람이란 캐치프레이즈로 선거에 성공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자기도 보통사람 중 하나다 라는 말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기준도, 평범한 사람의 기준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충 생각하기를 평범한 사람은 '나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 보통의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 도덕과 윤리를 아는 사람, 나는 부자이지도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정도의 사람이 평범함을 대표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인간의 심리는 묘하다. 자신은 보통 사람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누구나 자신이 특별해지기를 바란다. 아니 특별하게 여김 받고 싶어 한다.  VIP 대접을 받았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특별함 때문에 소위 말하는 스펙(구직자 사이에서 학력, 학점, 자격증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쌓고 성공하려고 기를 쓴다.  또한 그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우리는 브랜드를 갖고 싶어 하고 자기가 브랜드화 되려고 애를 쓴다.  자기의 특별함을 잘 나타내주는 브랜드를 선택하고 고집한다.

 

특별함을 기대하며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웃자고 하는 얘기이다. 나는 노처녀다.  그러나 20대때부터 나는 나의 배우자가 특별하 사람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돈 많은 남자, 실력이 출중한 남자, 이런 남자가 아니라 뭔가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함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여대를 나와 소개팅, 미팅도 많이 했고 아버지 친구의 아들, 오빠 친구들, 소개팅을 100번은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남자들이 다 성에 차지 않았다.  그 때마다 이유는 있었다. 저 사람은 술 담배해서 안 돼, 저 사람은 너무 교회 오빠 같아, 그래서 안 돼. 이유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사람들에게서 특별한 매력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퇴짜를 맞은 적이 많지만.

한번은 나의 사촌 언니가 서울대를 다니는데 그 과 후배남학생을 나에게 소개팅을 시켜주었다. 근데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대생이었으면 그 상대방 남자는 꽤나 자존심이 강하고 특별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눈에는 평범해 보였다.  그래서 퇴짜를 놨다. 그랬더니 그 소개해준 사촌언니가 내게 전화해서 하는 말이, "평범한 것이 제일 좋은 기라, 남자는 좀 싱그브리 해야한다."  대구사람이라 사투리를 쓰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때 사촌언니가 내게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평범하고 싱그브리 한 남자,  그 평범함 속에 있는 특별함을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특별함은 곧 자기다움

그렇다면 특별함이란 도대체 뭘까.  우리는 특별한 것을 영웅적인 것, 위대한 것, 보이는 것에서, 주변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토익, 토플점수, 학벌,  나의 이력이 보여주는 스펙을 통하여 특별해지려고 한다.  그런데 요즘에 말을 들어보니까 면접을 볼 때 하도 토익점수,토플점수, 학벌, 이력 등이 다 좋아서 변별력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정말 면접에 합격하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스토리를 갖고 있는 사람, 즉 자기만의 고유성을 잘 발휘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즉 정말 '자기다움'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점수를 잘 받아 합격한다고 한다.

브랜드 이야기를 했는데,  <평범함을 위대함으로 바꾸는 8가지 코드>란 책이 있다. 거기에서 읽은 것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이, 사람도 브랜딩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수많은 상품 중 브랜딩이 잘 되어 있는 상품이 선택받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속에서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서는 혹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브랜드화 해야하는 시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브랜드로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저자가 조언을 하고 있는데,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저자의 말은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발전시키고 확장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러기 위해서 책을 읽고 전문분야에 대한 연구를 넘어 직접 사람을 만나고 경험하며 쌓은 지식을 가지라고 저자는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브랜드는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끈기를 갖고 꾸준히 노력하라는 것이다.

 

평범함을 넘어 특별함으로

세상은 다 의미 있는 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한 나만의 것을 찾아 SNS활동을 하고 블로그 활동을 한다. 그것이 공감되어지기를 바라고 거기서 자기존재감을 느낀다.

사실 우리 일상은 의미들로 온통 채워져 있다.  하루는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매일 마시는 커피인데 그 한 잔의 커피에 의미부여를 한 것이다. 내가 매일 커피한잔을 동료와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불경기속에 일터가 있다는 것이고,  동료가 있다는 것은 왕따는 안당하고 있다는 것이고, 커피한 잔을 마실 수 있는 물질적 여유도 있고, 그리고 시간적 여유도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정말 엄청난 축복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의미부여한 커피한잔이 나를 엄청나게 행복하게 하고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일상에서 의미를 찾고 나의 본질을 발견하고 나다움, 자기 다움을 긍정할 때 우리는 특별해 지는 것이다.  일상에 지치고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나 다움에 자신 없어 할 때 우리는 평범함에도 못 미치는 미약한 존재가 될 것이다. 나다움, 자기다움이 바로 세계적인 특별한 것이다.

 

 

 

 

 

 

진정한 우정이 통하는 친구가 되는 팁, 한 가지

 

 

지란지교를 꿈꾸며

필자의 고등학교 때, 좋아하는 시나 수필을 그림과 함께 써서 그것을 코팅한 다음에 선물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런데 그때 당시 유행했던 시, 산문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유안진이란 작가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것이었다. 그 산문이 이렇게 시작된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 받고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내용을 중략하고..., 이것이 왜 그렇게 말똥만 굴러가도 웃음이 나오는 고등학교 여학생의 감성을 건드렸는지 굉장히 인기가 있는 글이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 여학생에겐 부모보다, 스승보다 좋은 것이 동성의 친구였던 것 같다.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 이런 친구가 있길 모두다 원할 것이다. 이런 친구를 인생에 있어서 한 명이라도 만난다면 큰 행운이다.

 

친구가 좋은 이유

왜 친구가 좋은 것일까? 마음이 통하는 친구, 마음에 맞는 친구지간에는 일단 서열, 권위의식, 높낮이가 없다. 그래서 편해서 좋다. 옷에서 김치 냄새가 나도 흉보지 않아서 좋다. 그래서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두 번째는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서 좋다. 그리고 둘 만의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소통이 잘된다. 마음이 잘 통한다. 세 번째는 고민을 털어놓을 수가 있다. 비밀을 공유할 수 있다.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다. 친구가 잘되면 함께 기뻐해주고 잘못되면 함께 슬퍼하고. 고민을 함께 고민한다.

 

관계와 우정의 차이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관계라는 말에 더 익숙할 것이다. 관계와 공감이라는 말에 수긍하지만, 그러나 우정이라는 말에는 왠지 고개를 젖는다. 우정이라는 단어가 이미 고리타분한 언어가 되어버린 감이 든다. 우정보다는 관계가 더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SNS로 관계망을 만들어간다. 이 관계망으로 자신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올리면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자 하고, 거기에서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존재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 관계는 공감을 얻고 존재감을 느낄 수 있지마는 정이라는 것이 빠져 있는 것 같다. 인간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갈 때 느끼는 정, 그 정이 그리운 시대이다. 그러고보면 진정한 인간관계는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식 방법에서 더 강하게 이루어지는 같다.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친구를 어찌 대면불식하는 인터넷 관계망에서 얻을 수 있을까. 자신을 희생하면서 얻은 우정, 이젠 다시 이야기해야할 시대가 된 것 같다.

 

진정한 친구가 되는 방법, 셀프디스

랄프 왈도 에머슨이란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 "친구를 얻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먼저 친구가 되는 것이다."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지만 말고 먼저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친구가 되려면 좀 모자란 듯 보여야 한다. 이 말이 수긍이 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텐데, 좀 잘 나보이고 가진 게 많아보이고, 아는게 많아보여야 사람들이 몰려들고 친구가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난 좀 반대의 생각이다.

친구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셀프디스하는 것이다. 자신을 깍아내리는 것이다. 요즘에 정치인들도 자신의 이미지를 쇄신시키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는 방법으로 셀프디스를 행하기도 한다. 자신의 실수나 결점을 인정하면 더욱 인간미를 느껴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실수나 약점이 약이 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을 얻게 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기업경영에서도 이러한 셀프디스의 방법을 사용한다고 한다.

 

진짜 있었던 일이다. 북부 캘리포니아에 라구니타스라는 맥주 회사가 있다. 그렇게 유명한 회사는 아니다. 한 번은 이 맥주회사가 공장의 잘못으로 인기 제품인 크리스마스 시즌에 나오는 맥주상품을 제대로 생산할 수 없었다. 회사로서는 시즌 예약을 했던 고객들 항의가 예상되는 상황이었고 품질 면에서도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게 될 상황이었다. 이에 맥주 회사는 그 크리스마스 시즌에 나올 맥주상품의 맛이 별로일 것이라는 사실을 고객들에게 자진해서 알리기로 결정했다. 맥주광고에 아예 "라구니타스가 홀리데이 에일을 망침: brown Shugga 대체품 판매"고 써놓고 "우린들 기쁘겠습니까? 이번 시즌을 이렇게 망치는 게 민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우린 참 별로입니다(we suck)"라는 사과문을 붙였다. 그 당시 소수만 알고 있던 라구니타스 맥주회사가 그 후 기사로 검색될 정도로 알려져 유명한 브랜드가 되었다고 한다. 인간적이고 진솔한 방법이 사람들을 끈 것이다.

니체는 향상심을 돕는 친구, 서로 발전시킬 수 있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어느 정도 경쟁관계에 있는 친구가 좋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니체는 실제로 친구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들은 바로는 외롭게 죽었다고 한다.  진정한 친구의 조건은 자기의 우위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기업도 자신을 깍아 인간미로, 진솔함으로 이미지를 높이듯이 친구가 되려면 인간미, 진솔함이 우선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우위를 말하고, 경쟁관계에 있는 것보다, 자기를 깎아내려 내가 너와 소통할 준비,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야 한다. 그저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정이 통하는 친구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under / stand 해야 한다.

 

 

 

 

 

 

 

 

 

요즘은 "인성이 경쟁력이다"이라고 말들 한다. 그런데 이 인성이 충분한 수면과 관련이 있다. 이제 충분한 수면은 게으름의 상징이 아니라 축복의 상징이다. 수면이 건강과 생산성, 인간관계, 행복등과 직결되어 있음을 입증하는 연구결과는 많다. 이제는 "밤새워 일하는 게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은 낡은 관념이 되어버렸다.

좌충우돌 행보와 막말로 유명한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그에 대한 이런 보도가 있었다. 트럼프가 자신의 성공요인은 잠을 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3-4시간 밖에 자지 않는데, 자신이 성공한 것은 밤을 새워 노력했기 때문이라며, 성공하려면 잠을 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이 논란이 되었다. 이 말에 반박하는 사람들이 트럼프의 공격적인 언행은 만성적인 수면 결핍 때문이다 라고 지적했다. 미국에서 자녀들이 잠을 안자면 "얘들아, 잠을 안자면 도널드 트럼프처럼 된단다" 이렇게 혼낼 것이라고 예측한다고 한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는데도 그에 대해서 여전히 말이 많고 논란이 많다.  미국의 반트럼프 감정, 트럼프의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젠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성공요인이라고 보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나의 고 3때 이야기다. 전교에서 1, 2등을 서로 앞 다투어 하는 아이가 2명이 있었는데, 한 아이는 잠 안자고 밤새 공부하고 학교 와서 코피 흘리고 피곤해서 조는 아이였고, 한 아이는 잘 것 다자고 수업시간에 집중하여 듣고 쉬는 시간에, 10분 짜투리 시간에 들은 것을 잠깐 복습하는 식으로 공부하는 아이였다. 이 둘이 유명해서 선생님들이 둘 다 칭찬을 했다.

그런데 나중에 둘 중 어느 아이가 잘되었을까. 잘 것 다잔 아이가 잘되었다. 서울대에 합격하고 성격도 좋아서 인기도 많았고 동창회에서도 잘 나간다. 그런데 평소에도 밤새 공부만 한 아이는 성격도 까칠하고 친구도 많이 없었다. 대학진학도 1차는 떨어지고 2차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격자체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어떻게 사는지 그의 소식은 알 수가 없다. 잠을 자고 안자고가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고등학교 때 재미있게 비교될 수 있는 두 아이가 있었다.

 

그래서 충분한 수면은 공부와도 관련 있지만 인성에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그때부터 알았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인성이 훌륭하지 않으면, 트럼프같이 리더가 되어도 반발이 심하고 욕을 들어먹고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성공의 조건이 잠을 안자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잠을 잘 자는 것은 이제 축복이다. 현대인의 불안, 우울증상은 대부분 수면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잠을 못자면 우울증상이 더 심해지고 정신적 불안이 더 심해진다.  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간관계의 해법, 어머니에게서 배우다

 

 

관계에 대해

사랑이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이다. 사랑은 관계성을 특징으로 한다. 사랑에도 방법이 있고 기술이 있듯이 관계에도 종류가 있다.

크게 소유론적 관계, 존재론적 관계인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 생각나는 학자가 있을 것이다.  바로 에리히 프롬이다.  많이 읽힌 그의 책에는 <사랑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 <자유로부터의 도피>등이 있다.  나의 대학교 시절 실연당한 학생들이 <사랑의 기술>이란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런데 그가 말한 소유와 존재의 차이, 소유론적 관계와 존재론적 관계의 차이는 아직도 연구되고 있고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래서 요즘 자기계발서를 보면 이 이야기를 많이 하고, 관계에 있어서 소유론적 관계가 아니라 이 존재론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함을 강조한다.

책 내용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거리의 꽃을 보고 아름다워 꺾어서 자기 방에 꽂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소유론적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사람인데 결국 꽃을 꺾으면 꽃은 파멸된다. 생명을 잃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꽃 자체로 아름답다 하면서 그냥 감상하고 즐기고 돌보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꽃을 파멸시키기보다 꽃과 일치되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론적 관계의 특징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관계를 소유 중심으로 보는 사람들은 상대로부터 얻는 것이 없다면 그날로 관계도 끝이다.  그리고 자기가 가진 것도 빼앗기지 않으려 한다.  상대를 적대적 혹은 이해 타산적으로 본다.

인간관계를 존재론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상대가 무엇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인격을 중심으로 관계를 규정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자체가 삶에 의미를 더해주고 타인의 입장을 수용하며 앞으로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해낼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을 중심으로 사람을 본다.

소유론적 관계와 존재론적 관계는 사랑에 있어서도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데, 소유론적 관계로 사랑에 접근하는 사람들은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최대한 매력적으로 보이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 사랑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할 이유가 사라지고 오히려 상대를 지배하고 구속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존재론적 관계에서의 사랑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하고 사랑한다.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기 때문에 상대의 약점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사랑한다.

이 존재론적인 관계, 참 매력적이다. 이렇게만 관계 맺는다면 이 세상에 인간관계로 상처 입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존재론적 관계로만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세상의 현실이 경쟁하고 서로 때리고 맞고 싸우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할 때, 항상 때리는 입장만 되는 것도 아니고 맞는 입장만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본의 아니게 때리는 입장도 될 수 있고 내가 당하는 입장도 될 수 있다.  영원한 강자도 없고 영원한 약자도 없다.  요즘 약자들도 무섭다.  연대를 통해서 더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권력 있는 자들도 물러나게 하는 것이 약자들의 연대의 힘이다.

 

인간관계의 해법, 어머니에게서 배우다

나는 어릴 적 어머니를 원망한 적이 많다. 내가 맞고 들어와도 나를 때린 사람을 욕을 하거나 찾아가서 보복을 해주거나 그러지 않았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겠지. 그게 전부였다. 나는 너무 억울했다. 그리고 항상 지는 것이 이기는 거야, 이 소리 뿐이셨다. 그 소리가 얼마나 듣기 싫었는지.

이제 나이가 들고 종교를 가지고 많은 일을 겪으면서 나는 어머니를 다시 생각해 본다.

어머니 하면 사랑이 생각나고 친밀함이 생각난다. 그러나 사랑하면 아버지는 생각이 안 난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방식대로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사랑의 방식이 달랐다. 아버지는 무섭고 권위적이셨고 항상 원칙을 이야기하셨고, 어머니는 친밀하고 희생적인 분이었다.

어머니를 또 정의하자면 어머니는 당하고 당하는 여자였다.

남편의 권위에 눌림 당하고, 자아중심적인 철없는 유년기의 아이들의 짜증에 당하고, 질풍노도의 시기인 반항기가 가득한 사춘기 자녀들에게 무시당하고, 자유와 독립을 외치는 청년기의 자녀들에게 외면당하고, 당하고 당하셨다.

그래도 밥 안 먹으면 밥 먹으라고 쫓아다니고 떠먹여 주시기까지 했다. 나는 밥 안 먹는 게 뭔 유세라고 툭하면 밥 안 먹는다고 그랬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제일 무서워했다.  쫓아다니면서 먹이셨다.

그런데 이젠 내가 나이를 먹어 어머니를 보니 그런 어머니가 너무 애틋해 눈물이 난다. 나뿐만 아니라 형제가 넷인데 우리 형제들 다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을 보인다. 아버지는 그렇게 찾지도 않고 아버지에게는 그런 애틋한 감정이 덜한 것이 사실이다.

모두 다 어머니를 찾는다. 어머니는 희생이고 사랑이고 인내하셨기 때문이다.  많이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걸 자식들이 나중에 깨닫고 성숙해 가는 것 같다.

 

그래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나는 당하고 손해만 본다, 억울하다, 어떻게 보복하지, 이런 생각이 들 때 어머니를 생각해본다.  당한 사람이 더 넓은 사람이고 더 큰 사람이다.  정말 지는 것이 이기는 거라는 것을 어머니를 통해 배운다.  나이가 들면서 인간관계의 해법은 내가 더 넓어지는 것이다.  당한만큼 더 넓어져 사람들을 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머니의 품에 깃들고 싶어 하고 어머니를 찾는 것처럼 지금 당장은 내가 당한 것 같지만 내 품이, 내 역량이 더 크고 넓어져 내가 더 필요한 사람이 된다.  나는 경험을 통해 알았고 이것이 진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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