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저항이다

 

 

 

삶은 저항이다. 저항과 순응 중 어떤 것이 삶의 태도인가 묻는다면 저항이 답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저항이란 단어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우리는 저항하면 우리나라의 독특한 역사 때문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데모운동을 떠올린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저항은 권력에의 저항뿐만 아니라 폭넓게 삶에의 의지가 저항이다.

즉,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으로부터의 저항, 삶의 장애물들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몸부림으로서의 저항, 삶의 어두운 곳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저항, 짓누르는 질병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저항, 무기력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저항, 주저앉고 싶을 때 일어서고자 하는 저항, 이 모든 것이 삶에의 의지이고 이것은 저항성의 성격을 띠고 있다. 현재보다 퇴보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원한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려는 몸부림, 그 속에서 우리는 저항성을 발견하게 된다.

저항은 꿈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종의 향상심(向上心)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니체가 먼저 한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러기 위해서 세상이라는 들판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불가피하게 경쟁 속에 뛰어든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항성을 키우지 않으면 안된다. 순응하고자 할 때 좋은 먹잇감이 되기 쉽다.

세상이라는 정글은 순응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허나 그들은 쉽게 먹잇감이 되고 상처입고 버려진다.  끊임없이 저항성을 길러야 한다. 자신의 무기력을 돌파해야 하고 삶의 장벽과 난관을 돌파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어떤 학자는 인간은 저항하는 본성을 가졌다고 한다. 이것이 동물의 실험에서 증명되었다.

한 행동심리학자가 실험을 했는데 동물들도 자신이 지배하지 못하고 즉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이 강요당할 때 그것에 저항하려는 욕구가 짝짓기나 먹는 것과 같은 생존 본능보다 더 강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 사이언스라는 논문에 그렇게 연구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한다.  흰밭 들쥐를 잡아서 실험실에 가둔 뒤 실험상자안의 불을 껐다.  그런데 들쥐들이 그 불을 켜기 위해 내내 안간힘을 쓰더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 불을 껐다.  그러니까 이제는 쥐들이 그 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쓰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쥐들은 어떤 실험조작을 하든 그 실험 조작에 저항하는 데 모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한다는 것이다.  쥐들은 단순히 저항을 위해 저항했다. 이유가 없다. 왜 들쥐는 이유 없이 실험 상황에 계속 저항하는 것일까? 이 현상에 대해 셀리그만이라는 학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능력에의 욕구나 외적 강제에 저항하려는 욕구는 바로 다름 아닌 무기력을 회피하려는 욕구다.  본능처럼 무기력으로부터 회피하고자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무기력하지 않고 능력 있음을 증명하려고 저항한다는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그러고보면 사람의 인생도 인류의 역사도 저항의 산물이다.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본능인 이상 사람은 끊임없이 저항해야 한다. 순응은 퇴보다.  끊임없는 저항성을 길러내는 것, 이것이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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