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와 느린 춤을>, 그 희생

<낯선 이와 느린 춤을>이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는 미국의 여기자이기도하고 토크쇼 진행자이기도 했던 여자인데 이 여자의 남편이 58세에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린 것이다. 이 여성은 직장을 그만두고 20년 동안 남편을 간병한 것을 에세이식으로 써서 발표했는데 이것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을 보고서 건강에 대한 특히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경각심보다는 이 여성이 사랑하는 남편을 간병하면서, 간병이라기보다는 전쟁 같은 삶을 살면서 그녀의 희생에 대해 감동을 느꼈다. 기억을 잃어가 소통도 불가능하고 때론 발작을 일으켜 자기를 공격하기도 하는 사람을 돌보면서 진작 자기는 10년 동안 건강진단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산 삶을 그녀는 어떤 낯선 이와 느린 춤을 추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죽어가는 남편 옆에서 남편 하비는 인생에서 중요한 모든 것, 사랑, 신뢰, 가족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이가 고맙다 라는 말을 남긴다.

그래서 잠시 희생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 책에 보면 어느 날 같은 침대에 누워 자던 남편이 이 아내에게 왜 자기 침실에 누워있냐고 대뜸 그러는 행동을 한다. 이 아내가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는 결혼한 사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줘도 남편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선 남편은 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아내의 희생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정말 내 아내라면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당신에게 너무 가혹해요"

남편도 남편이지만 그 아내의 인생은 뭔가. 그 간병하는 과정을 책을 통해 보면 가혹하다는 표현이 나올 만도 하다. 어쨌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의 선택은 자기희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변질되어 가는 희생의 가치

우리는 한국의 유교정서 문화 속에서 희생의가치가 가장 숭고한 가치로 배우고 익혀왔다. 아니 그렇게 주입되어 왔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 가정을 위해 희생한 사람을 영웅으로 큰 미덕으로 알고 살아왔다. 그리고 특히 여성에게 희생의 가치는 더욱 강조되어 왔다.

그런데 필자가 대학원을 와서 여성학을 공부하게 되었을 때, 이 희생의 가치가 전혀 전복되어 다가왔다. 즉 희생의 가치는 남녀 차별을 공고히 하는 이데올로기다.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고 여성자신의 존엄성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게 만드는 구시대적 가치이다 라는 것이다.즉 희생의 가치를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강조하고 주입해서 여성의 사회진출도 막고 여성의 자존감을 억눌리게 했다는 것이다. 특히 남성들은 여성의 희생을 매력적인 미덕인 것처럼 여기게 해서 남성중심적인 사회적 시스템을 잘 굴러가게 하려했다는 것이다. 결국 여성의 자기희생을 미덕으로 강조하는 분위기는 남과 녀의 지배와 복종, 차별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는 것이다.

 

솔직히 어렸을 때부터 가정에서 학교에서 교육이 이 차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가정에서도 나는 막내라 귀여움을 많이 받았지만 유교적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오빠들하고 차별을 많이 받았다.  맛있는 거는 항상 아버지 큰오빠 작은오빠 순이었고

지금도 기억에 나는 서러웠던 일은 작은 오빠가 장이 나빠 어머니가 지금의 야구르트를 매일 받아서 작은오빠만 먹였다.  근데 어린나이에 그것이 먹고 싶어 몰래 조금 먹고 물을 타서 채워놓았는데, 그것이 들켜 작은 오빠한테 뒈지게 혼났던 추억 아닌 추억이 있다.

지금의 나의 어머니 세대는 더 해서 고등학교 운동회 때 반바지를 입고 달리기를 했는데, 벌거벗고 뛴다고 할아버지가 책을 다 태우고 학교에 못 가게 하셨다는 일화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차이가 차별이 되어 버려 여성들은 직장에서 기를 못 펴고 결혼이나 임신이나 하면 눈치부터 먼저 보인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거세진 여성운동이 이젠 희생의 가치마저 변질시켜버리고, 왜 여성이 희생하고 나서냐하면서 들고 일어나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를 따뜻하게 하는 희생이야기

그래서 요즘 세대들은 자기 이익에 참 밝고 전혀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업문화도 수당을 더 준다 해도 30분도 더 초과근무하지 않고 자기 시간을 가지려고 하고 회식자리도 가지 않으려고 한다고 들었다.  손해 본다고 생각하면 철저히 따지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희생을 입에 올리려고도 하지 않는 현실이지만 아직도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동시키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의 이야기이다. <낯선 이와 느린 춤을>의 저자도 좋은 직장을 가진 커리어우먼이었는데 남편을 요양원에 보내고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 희생의 삶 속에서 고귀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희생이 더 이상 희생이 아니었다. 그 고귀한 것, 그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아마 그것은 사랑인 것 같다. 사랑이 희생을 희생으로 여기지 않게 한다. 오히려 감사하게 하고 고맙게 여기게 한다.

 

 

 

 

 

 

영화 <벤허>, 용서의 미학

 

 

2016년 리메이크 된 영화 <벤허>

벤허, 2016년 작품이 나왔다. 작년 추석 때 영화관에서 보았는데 50년 전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많은 논란이 있으나 어쨌거나 아주 감명 깊게 보았다. 그리고 말하려는 주제가 용서와 화해였다는 것에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모두 다 대충 아실 것이다. 예루살렘의 귀족 가문의 왕자인 유다 벤허와 그 가문에 입양된 메살라, 이 배다른 형제가 그 당시 사회 정치 구조 속에 얽히면서 원수가 되어 복수를 하는 내용이다.  유다 벤허는 억울하게 로마에 반대하는 극우파 세력을 도왔다는 누명으로 가문이 몰락하고 노예 신세가 된다.  그렇게 된 데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성공만을 향해 달리는 메살라의 역할이 컸다.  유다 벤허는 배의 노를 젓는 노예생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채찍질 맞아가며, 쇠사슬에 묶인 채로 짐승보다도 못한 그 생활을 견디며 복수를 다짐한다.  중간 생략하고 어쨌든 살아남아 복수를 할 기회가 생기는 데 그것이 바로 전차 경주이다. 이 장면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모두 다 공감하는 명장면이다.  그런데 그 경주에서 유다 벤허는 결국 승리하여 명예를 회복하고 부도 얻게 되는 데...

중요한 것은 그와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벤허가 인생에서 살짝살짝 마주쳤던 예수님, 돌에 맞고 있는 사람을 보호하는 예수님, 벤허가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고 있을 때 물을 먹여 주셨던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하고 말씀하시고 돌아가신 장면을 보고 유다 벤허는 흐느껴운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메살라가 있는 곳이다. 전차 경주에 져서 다리가 불구가 된 메살라, 이제는 자기한테 분노하고 또 자신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메살라, 그는 그에게 말한다. 메살라, 네가 우리가 이렇게 되기 전, 옛날 청년시절에 내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 의식을 잃은 나를 엎고 그 먼 거리를 달려 집으로 갔던 것, 그리고 내가 낫기를 바라면서 네가 믿고 있는 신상을 보며 기도했던 것, 그 때 기억나니, 더 이상 살생은 안 돼, 하면서 자기를 죽이려는 메살라는 부둥켜안고 벤허는 운다.  메살라도 같이 운다.  예수님의 사랑처럼, 예수님의 용서처럼 사랑과 용서와 화해가 일어나고 영화는 가족도 찾고 다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용서의 미학

<용서의 미학>을 쓴 루이스 스미디스는 용서는 3단계에 걸쳐 일어난다고 한다.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의 인간다움을 재발견하고 보복할 권리를 포기하며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빈다."

일단 용서가 일어나려면 원수에게서 인간다움을 재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도 불쌍한 마음이 들어야 한다. 유다 벤허는 자기를 노예로 만든 메살라 였지만, 그와 친했던 기억, 그가 자기를 살리려고 부단히 애썼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지금은 부상을 당해 처참해진 그에게 불쌍한 마음이 인다. 이것이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는 중요한 키포인트인 것 같다. 그리고 나서 보복할 권리도 포기하고 그 사람이 도리어 행복하게 되기를 빈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이 마음이 들기는 쉽지 않다. 원수는 죽이고 싶도록 미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의 힘을 빈다. 용서하면 사랑의 예수님을 떠올린다. 벤허에게도 용서의 매개가 된 것은 예수님이었던 것이다. 자기를 죽인 아무에게도 보복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놓고 가신 예수님.

그러고 보면 우리의 원수는 우리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다. 가족, 친구, 친지...

그들에게서 인간다움을 발견할 수 없는 극악모두한 사람이라도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불쌍한 마음이 일 때가 있다. 이것은 아무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종교의 힘이 필요하다.  그 불쌍한 마음이 일 때 용서가 가능한 것이 아닐까.

용서,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미움은 자신을 좀 갉아먹는 해로운 독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쨌든 우리가 종교를 찾지 않더라도 용서가 답이다. 분노와 갈등이 아닌 화해와 통합이 답이다. 우리의 인간관계, 사회, 정치에서 이러한 일들이 가능하게 되기를 바래본다.

 

 

 

 

 

 

억만장자 워렌 버핏의 가난한 아침식사, 패스트푸드

 

 

패스트푸드의 시작

패스트푸드의 시작은 고대 로마와 같은 도시에서 출발하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엌이 있는 공간을 가질 만한 여유가 못되어서 그 대신 조그마한 싼 길거리의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음식을 때웠다고 한다. 빵, 와인, 국수 등이 인기가 있는 음식이었다.

지금은, 패스트푸드의 개념이 다르다. 모든 사람이 부엌이라는 공간이 있지만 패스트푸드 음식점은 이전보다 점점 인기가 있다. 오늘날 패스트푸드는 공장에서 나와서 트럭으로 음식점에 배달된다. 주문이 되면 다시 데워져서 나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패스트푸드는 건강한 음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지방이고 섬유질이 약한 음식이다. 그리고 칼로리도 많고 크기도 크다. 이런 이유로 패스트푸드는 비만의 원인이 된다. 비만은 당뇨병과 심장병을 유발시킨다. 미국에서도 이것은 심각한 사회문제다.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이 비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스트푸드 산업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도 패스트푸드 산업인 매년 40 페센트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억만장자의 가난한 아침식사

얼마 전에 억만장자, 세계 갑부 3위인 워렌 버핏의 아침식사가 패스트푸드, 우리가 잘 아는 맥도날드 음식이라는 것에 놀란 적이 있다. 건강을 중요시 여기는 지금 패스트푸드는 부자들은 꺼리는 가난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침에 아내에게 3달러를 받아 직접 운전하여 맥도날드 매장으로 가서 햄버거를 주문한다고 한다. 특히 돈을 많이 벌은 날은 베이컨과 치즈가 들은 3.17달러짜리 햄버거를 먹고 그렇지 아니면 소시지만 들어간 2.61달러짜리 햄버거를 먹는다고 한다.

재산 70조의 갑부의 식생활, 정말 자신의 식습관 때문인지, 그 이전에 이것만 보아도 그의 가치관,  돈에 대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돈을 쫓았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사랑했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있었다고.

 그는 일이 즐거워 아침 출근길에 매일 탭댄스를 출 수 있을 만큼 일을 사랑한다고 한다.  또한 근검, 절약, 검소가 돈을 버는 것의 반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이야기 한다.

요즘은 세대의 가치관이 변하여 근검, 절약, 검소보다는 누리는 가치, 지금 한 순간에 가치 있는 일을 하자는 풍조가 더 세다. 그래서 재산이 많은 사람도 다 재산을 정리해 세계여행을 하는데 돈을 쓰고 보낸다. 욜로(Yolo)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현재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시대의 가치관이 변하고 있는 지금, 어떤 가치관을 따라야 할까. 근검, 절약, 검소는 부를 쌓게 하고 미래를 안정하게 만든다.

부를 쌓는 데는 다른 능력과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근검, 절약, 검소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어쨌든 시대의 가치관이 달라졌다 하나 워렌 버핏의 검소한 식습관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돈은 어떻게 버느냐보다는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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