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가족해체 위기의 실마리를 찾다.

 

 

진정한 가족이란

피를 나눈다는 것이 중요할까? 가슴으로 느끼는 애틋함이 중요할까?

형이라는 영화에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서로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았는데 무늬 상 형제이다. 그러나 동생은 국가 유도대표 경기 때 불의의 사고로 시신경을 잃고 장님이 된다. 그 형이라는 사람은 자기 친엄마가 새엄마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믿고 일찍이 가출하여 밑바닥 생활을 돌다가, 사기죄로 교도소에 갇혀 있다가 이 장님이 된 동생을 돌본다는 조건으로 1년 가석방된다. 진정 그 장애인 동생을 돌볼 마음이 아니라 자기가 세상에 나오고 싶어 일종의 사기를 친 거다. 어쨌든 이 형제 아닌 형제는 다 큰 어른이 되어서 서로 비참한 지경이 되어서 만난다. 그 만남은 전쟁이다. 서로 마음을 못 열고 쌍욕이 오가고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돈 한 푼 없는 이 형이란 사람이 동생이 가지고 있는 돈을 쓰기 위해서 연기를 한다. 진짜 형으로서 돌보기 시작하는데... 워낙 구라가 세고, 세상적이고, 흥이 많은 이 형은 동생에게 장애인이라도 당당하게 살 수 있다면서 세상맛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어둡고 우울했던 동생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동생이 장애인 올림픽 대회를 제안 받고 자신 없어 하고 있을 때, 이 형은 갑작스럽게 췌장암이라는 선고를 받는다. 이 형, 이젠 동생에 대한 마음이 진심으로 변해 가는데, 이젠 동생이 진짜 걱정되는데, 자신은 죽음을 맞아야 한다. 그는 받아들일 수 없어 몸부림치지만, 조용히 동생에게 장애인 올림픽 경기대회에 나갈 것을 격려하고 형으로서 할 수 있은 헌신을 조용히 해나간다. 자기가 죽는다는 것은 알리지 않은 채.

동생은 형 때문에 용기를 백 배 얻어, 열심히 연습해 장애인 올림픽 유도대회에 나가게 되고, 그러나 마지막 시합 전에 형의 아픔을 알게 된다. 그리고 결단한다. 눈물 흘리며 꼭 이기겠노라고.

결국에 경기에서 이긴 그는 무릎 꿇고 앉아서 형! ! ! 이라고 애타게 울부짖는다. 눈물은 범벅이 되고.

욕지거리만 하고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형이라는 말을 수 도 없이 외쳐댄다.

병원에서 tv로 이를 지켜보던 그 형도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진정한 형과 동생이 된 것이다. 이 영화는 진정한 가족이 무엇인가의 여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형은 동생에게 큰 사랑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그 동생은 이전의 자신을 비하하던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게 씩씩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는 가족해체라는 위기를 안고 있는 이 사회에 혈연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애틋함이 가족을 가족 되게 함을 느끼게 한다. 이젠 가족의 기준이 피를 나눴다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나눈 사랑이 있냐는 것이 기준이 될 것이다. 해체가족이 많은 지금 현실, 그리고 이복형제끼리 가족을 이루고 있는 현실도 증가 추세인데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다시 찾아야 한다.

 

가족해체라는 사회 문제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따뜻한 영화

가족해체는 우리 사회의 문제다. 그 원인은 부부간의 이혼, 가정폭력, 부모나 자녀의 유기, 어쩔 수 없는 사별 등 많은 사연들로 가족해체는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가족해체는 또 다른 폭력을 낳고 더 큰 사회문제를 우리에게 안겼다. 계모가 전처의 아들이나 딸을 폭력으로 죽이는 극악한 일들이 우리 사회에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혼가정의 아이들이 가출 등으로 비행청소년이 되고 범죄에 쉽게 노출되는 것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이 형이라는 영화에서도 가족해체의 현상은 큰 불행을 안겨주었음을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형이라는 사람은 가족의 끈을 버리고 삐딱하게 된 사람의 본보기다. 그러나 또 다른 불행을 맞은 배다른 동생, 피를 나누지 않은 동생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그는 그 동생을 헌신적으로 돌본다. 죽음을 맞지만 그의 헌신은 동생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세상을 등진, 자신 스스로를 우울의 감옥 속에 가두고 살고 있는 동생을 세상으로 나오게 하고 더 이상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씩씩하게 살아가게 한 장본인이 바로 그 형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보고 감동을 하게 된다.

 

 

진정한 가족은 돌봄의 책무가 필수요건

그러므로 진정한 가족이 되게 하는 것은 혈연이나 피가 아니라 가슴에서 나오는 정이고 서로 돌봄으로 증명이 되는 것이다. 정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 돌봄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사회문제의 근원이 아닐까.

정이 그립다. 누군가의 따뜻한 돌봄이 그립다. 나만이 아닐 것이다.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가 조금만 따뜻한 가슴을 열어둔다면. 우리가 조금만 돌봄의 의무를 다한다면.

 

 

 

영화 <재심>, 법의 역할을 다시 묻다

 

 

 

법의 역할을 묻는다

영화 재심은 '약촌 오거리 살인사건'의 피고인의 재심 판결을 승리로 이끌어 10년간 살인자로 감옥에서 복역한 주인공이 누명을 벗는, 실재 일어났던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필자는 법의 의미, 법의 역할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기득권 세력의 이권보호인가? 약자 보호인가? 여기서 등장하는 피고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의 변화가 그 답을 말해주는 것 같다.

그는 변호사의 역할은 자신의 고객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수익을 높이고 자신이 소속한 로펌의 수익을 올리는 것이 변호사의 역할이라고 말하며 극히 자신의 속물근성을 말한다. 그랬던 그가 로펌의 이미지를 위해 맡은, 그에게 있어 정말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그는 진정한 법의 역할을 깨닫는 변호사로 거듭난다. 한 미성년자, 가난해서 학교도 가지 않고 홀어머니랑 사는, 그때 당시 다방이라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나 하는 정말 가진 것으로 보았을 때, 약자 중의 약자, 막말로 놈팽이, 하찮은 사람으로 여겨질 만한 사람, 그러나 법의 보호도 필요 없을 만큼, 즉 남을 죽일 만큼 그렇게 악하지 않은 한 미성년자가 법을 수호하는 그 당시 형사들과 기득권을 가진 검사의 농간으로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14년간을 복역한다.  출소 후에는 자신이 죽이지도 않은 죽은 사람의 구상금까지 갚아야 하는 빚쟁이 신세가 된다.

 

 

인권과 사회정의 실현

이 변호사는 이 사람의 변호를 맡으면서 그의 둘레의 사람들, 그들의 따뜻함과 만나고, 그들의 억울함과 만나면서 진정한 변호인이 되어간다. 그러나 재심에 이르기까지 사건은 꼬이고 같이 일하는 변호사 친구의 배신으로 증인이 잡혀가고 결국 승산이 없어질 것 같은 절망까지 갔을 때, 그 변호사는 절망하지 않고 그 자신의 수익을 위해 배신한 친구에게 통쾌하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범법자다. 변호사의 임무, 1조는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 즉,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하고 법을 수호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인권과 사회정의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 영화가 주는 키포인트가 이 말인 것 같다.

인권과 사회정의, 우리는 법을 잘 믿지 못한다. 옛날부터 법은 기득권과 결탁되어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집단이 되었다. 이제는 돈과 결탁되어 황금이 곧 법이 되었다. 14년간의 억울한 누명을 쓴 그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살인자라는 낙인과 빚까지 지고, 사람들의 벌레 보듯 보는 시선과 가난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의 인생을 이렇게 만든 것이 누구인가?

그의 변호를 맡은 그 변호사는 살인자라고 누명을 씌운 형사를 찾아가 보복하려는 그를 막으며 눈물로 사과를 한다. "너를 이렇게 만든 건 우리라고... 나부터 사과한다. 나도 진정한 너의 편에 서서가 아니라 회사의 이미지를 살려 수익을 얻기 위해서 접근한 것이다. 미안하다. 너를 이렇게 만든 건 우리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재심이 일어난 재판정에서 그 변호사는 이렇게 첫마디로 입을 연다.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한 살인 누명을 쓴 피해자의 변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 사법부가 이 한 사람에게 사과를 해야 함을 표명하려고 나왔다고.

 

 

사과만으로 그들의 아픔이 치유될까

사과, 보상은 마땅하다. 그러나 사과, 보상 이것만으로 한 개인의 엉겨진 인생이, 한 개인의 억울함이 씻어질 수 있을까?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나 다시 묻고 싶다.

이 사건을 실재 맡았던 박준영 변호사는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어주는 재심만 맡는 변호사로 유명하다. 그는 한 매개체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재심이 증거 수집 과정부터 힘든 작업이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당사자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이다" 재심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피해을 입은 사람들은 약을 먹고 자살시도를 하여 대학병원에서 위세척을 한 경우도 있다며, 고통을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가 가장 숙제였다고 이 박준영 변호사는 털어놓는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의 처참함을 엿볼 수 있다. 나는 한 신앙서적에서 비슷한 경우를 당한 흑인의 경우를 소개하고 싶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인데 어떤 흑인남자가 성폭행이라는 죄로 기소를 당해 재판을 받았다. 당한 여자는 백인여자이고 그 재판의 배심원들은 다 백인 남자였다. 흑인 여자 네 사람이 그 흑인 남자의 알리바이를 다 증명해주었는데도 배심원들은 그것을 묵살하고 무기징역이라는 선고를 내렸다. 그런데 그렇게 그가 감옥에 갇힌 지 16년 만에 DNA유전자 검사가 도입돼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어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범죄자로 찍혀 감옥에서 보낸 세월 16년이 너무나 억울했을 텐데 그는 그에게 몰려든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를 범죄자로 찍은 판사와 배심원들을 증오하지 않습니다. 보복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분노와 증오는 나를 죽입니다. 나는 그들을 긍휼히 여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이었던 것이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기도했고 신앙의 힘으로 그의 고통을 참아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비슷한 피해자에게 종교가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나의 속이 보이는 안일한 대답인가. 그러나 어떻게든 그들의 고통이 치유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법의 이름으로

무엇보다도 법의 이름으로 차별이 일어나고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일은 다신 없어야 한다. 법이 곧 권력이고 곧 돈이 되어서도 안 된다. 법은 힘 없는 자, 돈 없는 자, 자신의 인권마저 요구할 수 없는 무지하고 어쩌면 너무 선량한 자의 편에 서야 한다. 그것이 법의 역할이다. 그것이 곧 사회정의다. 법을 제정하고 판단하고 변론하는 사람들은 이 사회의 엘리트들이다. 그 엘리트들의 올바른 인성과 사회관이 정립되어 있는지 그것이 시급한 사회의 근본 문제임을 다시 절실히 느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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