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벌, 교육상 필요한 것인가 또 하나의 폭력인가

 

 

체벌에 대해 생각해보며

이런 뉴스를 접했다. 친모와 외조모가 3살짜리 딸을 회초리로 체벌한다고 무자비하게 때려서 사망시켰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것은 체벌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폭행이고 학대라고 부르지, 체벌과 폭력의 기준은 무엇인가. 부모와 자녀, 그리고 스승과 제자사이에 일어나는 체벌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체벌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체벌을 하더라도 제한적이며 불가피한 경우에만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전에 선생이 체벌로 한 학생을 그 반에서 왕따가 되게 한 일이 있었던 것이 보도가 되었다. 이것도 정신적인 폭력이다 라면서 말이 많았다. 제도적으로 우리나라는 체벌을 금지하고 있지만 실제로 체벌은 자행되고 있어서 체벌은 방법, 정도의 심함 등으로 판단하여 폭력으로 규정되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지탄받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체벌이 없어진 후 교권이 무너져 학생들을 지도하기 어렵다고 말하기도 한다. 반면 체벌금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체벌교사들이 여전히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체벌은 충분한 유대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체벌은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 학교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유대관계가 즉, 신뢰관계가 형성이 된 상태에서 되어져야 한다. 사랑의 매는 있다고 본다. 그런데 매가 있기 전 전제조건이 사랑이라는 유대관계, 감정적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때 체벌이 가해져도 자기의 잘못을 돌이킬 수 있고 폭력이라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체벌 뒤에는 항상 돌봄이 따라야 한다. 가정에서는 부모님,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엄격한 가르침이 없었으면 우리는 올바른 사회인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체벌을 할 때 사랑의 유대관계가 있을 때만, 즉 체벌 후 돌봄이 따라줄 때만 비뚤어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모두 폭력으로 기억된다. 실제로 엄마와의 친밀감, 유대관계가 깊은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보고도 있다.

영유아들만 보아도 그렇다. 영유아들은 엄마에 대한 의존적 관계가 깊고 엄마가 체벌 뒤에도 안아주고 먹여주고 하는 돌봄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건강하다. 초등학교 때도 선생님들과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에 원칙과 규칙을 어겼을 때 체벌이 가해져도 아이들이 빨리 돌이킨다. 그러나 중학교, 고등학교, 사회에 나오면서 점점 그런 유대관계가 약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잘못했다고 체벌을 당할 때 폭력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학교생활을 돌이켜보면,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준 선생님께 맞은 매는 나를 돌이키게 했고 기분 좋게 기억된다. 그러나 아무 이유 없이 때리는 선생님이 있었다. 그럴 때는 매우 두려움으로 기억되고 수치심을 느끼게 한 것으로 기억된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미친개라는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을 개라고 불러서는 안 되지만 그 선생님의 별명이 그랬다. 이 선생님한테 걸리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맞는다. 실내화를 계단에서 신지 않았다고 맞고, 줄을 제대로 서지 않았다고 맞고, 줄을 제대로 섰는데 다른 데 쳐다봤다고 맞고, 그것도 회초리로 맞는 것이 아니라 신체부위를 손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리는 것이다.도 그 선생님한테 맞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기억이 아직도 수치감으로 기억된다.

 

체벌 한 사람의 마음도 아파야 진정한 체벌

중학교 때의 일이다. 우리 반이 단체로 국어선생님께 잘못한 적이 있다. 숙제를 안 해왔는지, 준비물을 안 챙겨왔는지 우리들의 잘못의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그 국어 선생님이(상담 선생님이시기도 하셨음)이 어떻게 하셨는지 아직도 내 가슴에 남을 정도로 작은 충격을 주었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의 잘못을 가르치기 위해서 당신의 손바닥으로 아이들의 손바닥을 치셨다. 그러면 때린 사람의 손바닥이나 맞은 사람의 손바닥이 모두 다 아프다. 한 대 맞았는데 정말 아팠다. 그렇게 아픈 걸..., 반 아이들 모두를... 선생님의 손바닥은 어땠을까.  중학교 당시 한 반에 60명 정도는 되었다. 선생님의 손바닥이 빨갛게 부어오른 것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을 때리면 나도 아프다. 아이들은 모두 머리를 숙였다.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부어오른 손바닥이 말해주고 있었다. 우리를 때리신 선생님은 몇 배, 몇 십 배 더 아프시다는 걸.

그리고 그 선생님은 사고로 돌아가셨다. 학교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전교생이 눈물바다를 이루었고 그 선생님은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장례에서 흘린 학생들의 눈물이 그 선생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 모두 체벌 받은 경험도 있고 체벌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법으로 금지해도 체벌은 일어나고 있다. 잘못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에서가 아니라, 체벌을 가한 사람은 내가 잘못을 고쳐야 한다는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원칙을 지켜야 하니까, 이런 논리에서가 아니라, 그리고 체벌 후 쾌감과 승리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넓은 사랑으로 잘못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체벌을 하는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 그래서 체벌을 한사람도 그만큼 아픔을 느낀다고 인지시켜야 한다. 그럴 때 사랑과 신뢰가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시킬 것이다.

영화 <노트북>, 남녀 간에 완전한 사랑이 가능할까

 

 

 

사랑은 삶의 이유이다

노트북이란 영화는 2004년에 한번, 201611월에 재개봉되었고, 실화를 바탕 으로 한 베스트셀러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인데 무척 감동적이었다. 한 남자는 상식적인 보통 남자이다. 그런데 한 여자를 평생 사랑하는 것을 사명으로 아는 사람이다. 여자는 부잣집 딸이었고 여름휴가차 시골에 왔다가 그 남자를 만나 서로 열렬하게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로 헤어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 사랑의 결실을 이룬다. 그런데 그 여자는 자기가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고 한 남자를 사랑했다는 것을 기억을 못한다. 노인성 치매에 걸린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된 그 남자가 치매에 걸린 여자에게 책을 읽어주겠다고 접근해 소설을 읽는 것처럼 자신과 치매를 앓는 부인의 사랑이야기를 들려준다. 잠깐 기억이 돌아왔다가 다시 기억을 잃는 자기 부인, 자기 부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지만 기억을 잃어 남이 되어 버린 그 장면들이 참 안타깝고 눈물겨웠다. 마지막 장면은 기억이 잠시 돌아온 그 여자와 남자주인공이 병원 한 침대에서 같이 잠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거였다.

 

나는 남녀 간에 지고지순한 사랑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영화를 보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렇게 평생 사랑을 할 수 있구나. 평생을 사랑하고 같이 죽음을 맞는다면... 그 사랑이 우리를 감동 시킨 것은 한 남자의 희생과 죽음마저 함께 한 축복 때문일 것이다. 치매를 앓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고 자식마저 남같이 되어 버린 것이 안타깝지만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노력이 사랑의 기억을 되돌리고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같이 죽음을 맞는 것. 너무 가슴 찡한 일이다. 실화에 있었다니 이런 사랑도 가능하다는 것에 나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사랑은 삶의 이유다. 누구나 완전한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인간이 하는 사랑에 완전한 사랑이 있을까. 이 영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랑이 삶의 이유이다. 사람은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웃기도 한다.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죽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곧 생명과도 같다. 인간은 사랑으로 태어나서 사랑하며 살다가 또 사랑하며 죽는다. 그래서 시와 노래, 문학의 주제는 대부분 사랑이다. 우리나라 가요의 가사내용도 대부분 사랑에 관한 것이다.

 

 

사랑이라고 해서 다 사랑은 아니다

그렇다고 사랑이라고 해서 다 사랑이 아니다. 동물의 사랑은 본능이라고 하지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도 여러 가지 사랑으로 분류될 수 있다.

20세기 기독교의 최고의 사상가라고 불리는 C.S.루이스라는 사람은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에서 사랑을 네 가지로 구분했다. 그것을 우리말로 애정(affection), 우정, 에로스, 자비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보편적인 사랑, 즉 가장 기본적인 사랑인, 필요를 채우기 위한 사랑을 애정이라고 말하고, 가장 덜 본능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같은 방향을 향하고 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을 우정이라고 했으며, 일반적으로 사랑에 빠지다 라고 표현되는 연인들 간의 사랑을 에로스로 나누었고, 마지막으로 위의 이 세 가지 사랑을 뛰어넘고, 가장 온전한 신의 사랑을 자비로 표현했다. 그는 애정과 우정 그리고 에로스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것들은 파괴적인 속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 파괴적인 속성들이 상대방을 구속하고 다른 이를 분리시키는 악한 이기적 집단이 되고 서로가 서로의 인격과 개별성을 무시하고 삼켜버리는 탐욕스러움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한다. "신이 되어 버린 사랑은 악마가 됩니다." 결국 애정, 에로스, 필리아 같은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으로 전락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그 사랑은 악마와 같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마지막으로 말한 자비는 모든 이전의 사랑이 끝까지 그 온전함을 잃지 않도록 만드는 것으로 오직 필요한 것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즉, 내가 고민했던 완전한 사랑은 인간의 사랑에선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완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성숙한다. 완전한 사랑으로

그렇다고 내가 절망을 느낀 것은 아니다. 남녀 간의 사랑, 인간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없다고 해서 실망한 것은 더욱 아니다. 분명히 인간들의 사랑은 이기적이고 파괴적이 될 수도 있다. 에로스의 사랑은 더욱 더.

그러나 얼마든지 성숙의 가능성이 있다. 사랑도 성숙한다. 에로스의 사랑이 완전한 사랑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다. 희생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나는 영화 <노트북>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착한 인성이 경쟁력이다

 

 

 

착함이란

어떤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걸까. 오늘날 착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칭찬으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착한 사람이라는 말이 좋게만 들리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착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 보통 자기 주관이 없는 사람, 개성이 없는 사람, 평범한 사람, 약한 사람,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극한 데까지 부정적인 사람은 착한사람을 위선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자기 계발서 들을 보면 이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라, 자기를 마음껏 사랑하고 색깔이 있는 사람이 되라, 이기적이 되라 이렇게 이야기들 하는 경우가 많다.

막상 젊은 남녀가 연애를 할 때도 착한여자, 착한 남자에게 끌리는 것보다 나쁜 남자 나쁜 여자에게 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보통 우리는 어떤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예를 들어 버스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거나 불쌍한 사람을 위해 봉사를 하거나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볼 때 그 사람을 우리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착함을 훌륭하게 여기면서도 나의 남자는 나의 여자는 남한테는 좀 이기적인 사람이 되길 원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희생하고 솔직하고 한 것이 어쩌면 바보같이 보이고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이 모자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우리는 권선징악의 사상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 소설, 동화에서 주인공, 즉 착한 사람은 잘 되고 이 착한 사람을 괴롭히는 악한 사람은 벌을 받기를 바란다. 이것 또한 우리의 인지상정의 마음이다.

그러나 방금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 남한테 너무 착한 사람은 솔직히 인정을 못 받고 있는 현실이다. 왜냐하면 이 착함이 성공적인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성공의 조건이 품성, 인격. 도덕적인 면보다는 일과 관련된 능력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보통 착한 사람은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남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을 잘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 불행해지는 사례가 많다.  양보와 희생정신 때문에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 당하는 경우가 많다.

착함이 불행으로 이어지지 않게 착한 사람도 자신의 권리, 표현, 주장, 등을 잘 할 수 있도록 강화되어야 할 인격적인 부분이 있다.  하지만 능력의 조건이 동등하다면 착한 사람이 더 많이 칭찬받고 더 크게 성공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착함이 경쟁력이다

시대가 변했다. 요즘에는 이 착함이 경쟁능력이다. 착한 사람 중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유재석 개그맨을 보더라도 그는 착한 사람, 겸손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만큼 성공한 사람도 없다. 이젠 착함이 경쟁능력이 되고 있다. 정직, 겸손, 자기희생, 이러한 가치가 그만큼 희소하기 때문에 훌륭함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그 가치가 성공의 기준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실제로 공부, 공부만 한 이기적인 아이들이 성공하는 케이스보다 뛰어놀고 함께하고 공동체성을 기르고 봉사가 뭔지, 희생이 뭔지, 이것을 가르친 아이들이 더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보는 경우가 많다.

내 조카를 보더라도 피부로 느낀다. 나에게는 공부 잘하는 조카도 있고, 공부를 못하는 조카도 있다. 어떤 조카는 전교에서 몇 등을 하고 공부를 잘하지만 나는 그런 조카보다 더 끌리고 사랑스러운 것은 공부를 못하는 조카들이다. 저지방우유를 하도 많이 먹어서 저 지방대학에 들어간 조카들이 나는 좋다. 그래도 인간성 하나는 끝내준다. 어른들 공경할 줄도 알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알고. 그런데 이 저 지방대학간 조카들이 보란 듯이 좋은데 취직이 다 되었다.  우리 사회에 학벌차별, SKY대학나온 사람, 유학 갔다 온 사람들 차별 심하다고 하는데 어쨌든 우리 조카들은 취직이 다 되었다.  조카들이 알게 모르게 노력도 많이 했겠지만, 이제는 면접점수가 중요하고 면접관이 중요하게 보는 것도 그 사람의 인성이었다고 한다.  소통이 가능한가. 공감능력이 있는가. 봉사경험이 있는가. 아무리 학벌 좋고 실력이 출중해도 인간성이 나쁘면 별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 조직사회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학부모들은 너무 너무 공부, 공부, 실력, 실력 하는데 착한인성도 어마어마한 실력이다. 성실한 인간성, 배려, 나눔, 공동체성을 가지는 것, 이것 아무나 되는 것, 아무나 갖추는 것 아니다. 이젠 실력의 개념이 달라졌다. 이제는 우수한 인재를 뽑는 것이 아니라 적합한 인재를 뽑는 것을 더 우선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제일 중요시한 것은 바로 인성

하버드대 인생학 명 강의를 책으로 묶은 <어떻게 인생을 살것인가>라는 책에 나온 예화인데 수많은 세상의 성공했다는 사람들, 부자들도 하나같이 착한 인성의 중요성을 이야기 했다.

투자계의 대부 모건이라는 사람한테 한 기자가 물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성공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그는 대답한다. "인성입니다".

기자는 다시 물었다. "그럼 자본과 자금 중에서는 어느 것이 더 중요하죠".

그러자 모건이라는 사람은 "자금보다는 자본이 더 중요하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인성입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세계적이니 부호 워렌 버핏과 빌게이츠도 이와 같은 대답을 했다고 한다. 19985월 즘 워싱턴 대학교에서 열린 초청강연에서 한 학생이 질문했다. "부자가 된 비결을 알고 싶습니다." 버핏이 대답했다. "비결은 좋은 머리가 아니라 인성입니다".

 그러자 빌게이츠가 그의 말을 거들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도 버핏의 말에 100퍼센트 동의합니다."

 

성공의 조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성이다. 착한 인성이 이제는 경쟁력이고 성공의 조건이다. 공부, 공부만 외쳐대는 교육이 이젠 바뀌어져야 한다. 국영수 실력 기를 때 봉사가 뭔지, 희생이 뭔지, 소통이 뭔지, 배려가 뭔지를 가르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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