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문화와 정()의 문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의 문화

한 디지털 뉴스에서 이런 정보를 접했다. 영어단어에 empathy 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의미로는 감정이입, 공감이라는 말인데 정확히 말하면 에 가깝다고 한다. 저사람 인정이 참 많다 라고 할 때 인정에 해당하는 말이 바로 이 Empathy라는 말이다. 미국 미시간대학 연구팀이 'empathy'를 기준으로 국가별 순위를 따져봤다는데 한국은 6위로 나왔다. 

우리나라가 6위에라도 들어간 것을 좋아해야할지 비판적 시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문제제기를 하고 싶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정()의 문화였다. 그러나 우리사회가 얼마나 삭막해졌는지 모두 피부로 느끼고 있다. 요즘에는 각종 혐오문화로 인해서 사람들의 말투부터가 달라지지 시작했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 얼굴이 혹으로 일그러진 사람의 사진이 올랐는데 거기에 댓글이 이런 것이 달려 놀란 적이 있다. 극혐이다 극혐. 구역질난다. 이런 말들이 서스럼 없이 달려 있었다.

극혐 이란 말은 극 혐오하다란 말의 줄임말이다. 이런 말 외에 여성혐오의 준말 여혐, 남성혐오의 준말 남혐이라는 말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혐오를 나타내는 말이 많은데 벌레를 뜻하는 접미사 충자를 써서 예를 들어 급식을 먹는 학생을 비하하는 급식충, 유난스럽게 아기를 키우는 젊은 엄마를 비하하는 맘충, 틀딱충이라는 말도 있다.  틀니 소리를 빗대어 노인을 비하하는 말이다. 이유도 없이 싫다. 그게 이유다. 이런 혐오현상으로 길거리 묻지마 살인도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왜 이렇게 까지 되었을까. 우리나라는 예부터 유교사상을 받아들여 효를 강조하고 정을 강조했다. 맹자의 측은지심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들 누구에게나 남의 불행을 차마 그대로 못 보는 마음이 있다고 했다. 그 까닭은 지금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 안으로 떨어지려 하는 것을 사람들이 본다면 모두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불쌍하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그 아이를 구하려고 하는 데, 그것이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귈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도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나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받기를 바라기 때문도 아니며, 어린아이의 위험을 보고만 있었다는 자기에 대한 평판이 싫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맹자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라고 까지 말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본래 착하고 선하다는 것인데...

사회가 왜 이렇게 까지 되었을까. 내가 초등학교 때 만에도 이웃과의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었다. 나에게는 그 추억이 많다.  누가 이사 오면 항상 떡을 가져와서 나눠먹고 김장도 이웃끼리 함께 해서 나눠먹고 학교 갔다 와서 엄마가 없으면 남의 이웃집 가서 한참 놀고 오고 자다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쩌다 이사 가면 그리워서 그 이사 간 집에 가서 며칠 있다오고 이런 식으로 정을 나누었는데 정말 이웃사촌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일 기대하기도 어렵고 서로 아파트 한 층에 살면서 인사도 안하고 소음난다고 서로 간에 죽이는 일도 벌어지는 현실이다.

 

 

()의 문화가 사라져 가는 이유

왜 이런 정의 문화가 사라져가는 걸까. 그것은 우리 안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 동정하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져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구조가 양극화되고 갑을문화가 고착화되면서 더 그런 현상이 더 나타나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에는 동정도 함부로 해서도 안 된다.

한 철학자의 책에서 본 내용이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MBA 과정을 통과한 동창이 동창회에 와서 자신이 대기업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동정을 표했다. 그 친구는 진심에서 표현했는데, 그런데 그 친구는 지방대를 나오고 중소기업을 다니는 친구였다. 명문대를 나온 그 동창은 위로받기는커녕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지방대도 간신히 졸업했고 영어도 못해서 변변찮은 중소기업에나 다니고 있는 친구가 동정을 보일 정도로 자신이 망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동창회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아무리 내가 실직자가 되어도 너희들의 위로나 받을 사람으로 보이니, 뭐 이런 거지같은 것들이 다 있어, 무능한 것들은 주제 파악도 못하지, 이제 아주 맞먹네." 이러고 나갔다는 실제 일화가 있다. 그러니까 아무나 동정했다가 욕을 보는 일도 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철학자는 사람들은 충분히 우리와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만 동정을 표현해야 한다. 선의의 동정이 잘못했다가는 이처럼 예상치 못한 반발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정()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온다.  동정이라는 말은 조금 부정적 의미가 있다.  갑을관계에 있을 때 동정은 더 부정적 현상을 초래한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과 동일시 여겨졌을 때, 그때만 동정심을 느껴야 한다면 동정이 아닐 것이다.  갑을 관계를 따져서 동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동창회를 박차고 나간 사람, 그 사람이 더 불쌍한 사람,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세상을 들썩였던 탈옥수 신창원이 교도소에 다시 수감되어 있었을 때, 이해인 수녀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신창원이 잔인한 살인마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 공과금 못 낼 정도로 가난했는데 하루는 공과금을 못내었다고 선생님이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 하러 와 빨리 꺼져"라고 망신을 주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신창원은 삐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선생님이 신창원의 가정형편을 알고 긍휼히 여겼다면 방법이 달랐을 텐데 어쨌든 간에 선생님의 혐오를 드러낸 말이 신창원을 악마로 만들었다.

 

 

이젠 정이 그립다

이젠 정이 그립다. 따뜻한 마음이 그립다. 사람들안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넘쳤으면 좋겠다. 측은지심이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다.

갑을 관계를 따지고 상하 구조 속에서 누가 누구를 동정하고가 아니라, 가진 자는 못가진자가 불쌍하고, 못가진자는 가진 자가 불쌍하고, 모두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측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사회의 혐오문화가 좀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릿>, 성공의 비밀

 

 

이영표 축구선수가 들려준 <그릿> 이야기

이영표 축구 국가대표선수가 어느 한 동영상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의 키워드는 노력, 끈기, 요즘 뜨는 단어 그릿이었다.

이영표 선수는 체격조건이 축구선수로서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닌 선수였다고 한다.  근데 그는 중학교시절부터 축구가 좋았고 그래서 잘하기 위해서 남보다 노력해야 겠구나 이런 생각을 품었다고 한다.  그래서 중학교 3년 내내 밤잠을 덜자고 매일 밤마다 드리블 연습을 했다. 그리고 몸을 기민하게 하기위해 매일 줄넘기 2단을 천개씩하고 훈련시간외에 더 체력단련을 하기 위해 남 보다 더 일찍 새벽에 일어나 산을 뛰어 나녔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을 갔는데 대학교 3학년 때쯤 축구부 주장이긴 했지만 국가대표는 아니었는데, 그때 5명의 자신의 친구가 국가 대표가 되었고, 1명은 후배가 국가대표가 되어있는 현실이었다. 이영표 선수는 주장이었지만 축구부에 면이 서지 않고, 자신은 그들이 잘 때 일어나 열심히 훈련하였는데, 자신은 국가 대표가 되지 않았다는 데에 대한 자괴감이 들고, 이건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고 재능이 우선하는 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3주후에 올림픽 대표단을 뽑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는 보란 듯이 뽑혔고 3개월 후에 국가대표가 되었고, 은퇴할 때까지 한 번도 경기를 뛰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의 노력, 끈기, 투지, 그릿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안정환의 멋진 골인, 박지성의 멋진 골인도 이 이영표의 멋진 어시스트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의 노력이 신화를 이루어 낸 것이다.

 

재능신화가 아닌 <그릿>이 성공의 비밀

필자도 어렸을 적부터 노력하면 된다, 노력하면 된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자랐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노력보다는 이 사회는, 이 시대는 재능 있는 창조적 소수자들이 이끌어가는 것이다 라는 소리를 하면서 재능신화를 말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 소리를 또 다시 뒤집는 노력과 끈기가 정답이라는 소리를 하는 주장이 나와 세상을 들썩이고 있다. Ted 강연으로 이미 천만이 넘었고 책도 나와 이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바로 <그릿>이라는 책인데, 그릿은 영어로 투지, 끈기, 집념, 노력 등의 뜻이 있는 단어라고 한다. 이 그릿이 바로 성공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연구한 저자가 여자인데 이름은 앤절라 더크워스이다. 이 여자도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너는 재능이 없어, 너는 머리가 나빠, 크게 성공하긴 어려울 거야, 이런 소리를 듣고 자랐다고 한다. 그것이 이 여자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녀는 그 연구로 전 세계 단 20명의 천재들만 받는 상, 맥아더상을 수상하게 된다.  머리 나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한 평범한 소녀가 한 끈질긴 연구로 천재가 받는 상을 받게 된 것이다. 그녀가 증명해낸 그 연구란 재능 없이도 성공할 수있다는 것이다. 즉 성공에는 재능보다 끈기, 투지, 집념,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해냈는데 하버드대학에서 한 가지 실험을 했다고 한다. 학생 130명을 대상으로 러닝머신을 타게 했는데 최대속도로 5분정도 달리게 했다. 그리곤 그들이 체력의 한계가 왔을 때 포기하지 않고 몇 발자국이라도 더 뛰었는가를 바탕으로 그릿점수를 측정했다. 그 후 그 학생들을 40년간 추적 조사했다. 그들 중 40년 후 성공한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그 공통점이 그릿점수가 높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릿점수가 높은 사람들이 40년 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노력하면 된다 라는 말을 자신 있게 조카들에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싶어 다행으로 여겨졌다. 자꾸 그런 말하면 이모는, 고모는 고리타분하다고 요즘 조카들은 나를 상대를 안 할려고 한다. 그 조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 돌봄 리더십을 말하다

 

리더십의 변화

세계적 베스트셀러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의 저자 TED 동영상의 최고 강사인 사이먼 사이넥의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리더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는 리더라는 존재를 얘기할 때 엄마라는 존재, 돌봄의 가치를 잘 이야기 하지 않았다. 좀 경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는 이제 새롭게 부상하는 리더십은 돌봄 리더십이라는 것이다. 조직의 성패가 경영의 수완이 아니라 뛰어난 리더십에 기초하는데 리더는 언제나 구성원들에게 집중해야 한다.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이먼은 미 육군, 특히 해병대를 예로 드는데, 미 해병대는 식사시간에 최하급자가 가장 먼저, 최상급자가 가장 나중에 배식을 받는다고 한다. 이것이 결코 명령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아주 간단한 행동 속에 리더십을 보는 해병대의 시각이 들어있다.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 이것은 자신의 필요보다는 부하들의 필요를 보다 우선하는 마음가짐의 표현이며 부하직원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자신의 사리사욕은 희생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필자는 이것을 읽으면서 엄마를 떠올렸다. 보통 엄마들은 남편이나 자식이 다 먹고 난 후 먹는다. 그래서 남은 음식, 찌꺼기를 먹는다. 그 양이 모자라도 신경 쓰지 않고 많아도 신경 쓰지 않고 그것이 내 몫이려니 하면서 먹는다. 그래서 처녀 때 그렇게 예쁘고 날씬했던 사람들이 엄마만 때면 펑퍼짐해진다.

 운동으로 신경 쓰지 않은 이상 운동할 시간도 없겠지만 어쨌든 다 뚱뚱하다. 이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돌봄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가 나의 엄마를 보면서 중요한 것을 깨달았는데 엄마는 항상 맛있는 거 다 양보하면서 내가 너를 위해서 주는 거야, 나는 찌꺼기만 먹는 신세, 하면서 불평불만 신세한탄 한번 하신 적이 없다.

 그래서 엄마는 원래 그러는 사람, 원래 마지막에 먹고 맛있는 거는 다 양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우리는 보통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데 아버지도 제일 먼저 식사를 하시면서 맛있는 것은 살짝 자녀들에게 밀어주시기도 하고 애정을 표현하시지만 엄마랑 차이점은 아버지는 이렇게 하시고 생색을 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깨달은 것이 희생에서 나오는 돌봄은 여성에겐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남자는 본능은 아니라는 것.

 

돌봄 리더십이 성공한 실제 이야기

그런데 이 돌봄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실제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라는 책에 예화가 나오는데 회사를 돌봄의 환경으로 전환하여 죽어가는 회사의 매출액을 2배 이상 증가시킨 이야기가 나온다. 밥 채프먼 이라는 사람이 배리웨밀러 사의 CEO인데 재무상태가 부실하고 기업문화가 아주 형편없는 회사를 사들였다. 이 사람이 제일 먼저 한 것이 직원들과 함께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다. CEO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조직의 리더가 먼저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고 먼저 신뢰를 얻기 위해 실천 했다. 사람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말이 뭐가 대단한 도덕적 가치이냐 할지 모르지만 조직에서 사람들은 매출액 향상을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밖에 안 여기는 리더도 많다. 이 사람의 사고방식은 리더는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한다. 한 직원이 회사에 들어오는 것은 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회사는 마치 한 집안처럼 느껴지게 되고 직원들 사이에서 서로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소속감을 느끼고 편안하고 존중받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직원들은 내가 돌봄을 받는다고 느끼는 만큼 다른 사람을 돌보기 시작했고, 이렇게 서로 돌보는 환경덕분에 직원들은 머리와 가슴을 모두 회사에 헌신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회사도 매출도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례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이 회사에 하나 더 있다. 시간제 직원 한명이 아내가 당뇨병을 앓고 있어 다리를 잃게 되었다고 한다. 이 직원은 아내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가뜩이나 시간제로 근무하는데 시간을 줄인다면 임금이 줄어 들 것 같아 일을 줄일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도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동료들이 서둘러 대책을 세워 이 직원이 휴가를 더 쓸 수 있도록 자신들의 유료 휴가일을 넘겨준 것이다.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어 직원들이 회사에 더 헌신했고 그 이유가 매출액이 오르고 회사가 성장한 큰 이유라고 저자는 말해주고 있다.

 

 돌봄 리더십의 부상, 여성에게 배워야 한다

이제 이 돌봄의 가치는 이 세상에서 부상되고 있는 가치이다. 이 돌봄의 가치는 이미 논의 되어 온 것이다. 필자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여성학 강의를 들었는데 여성도덕철학자 길리건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여성은 여성의 도덕성은 남성과 다르다. 여성은 돌봄의 윤리, 남성은 정의의 윤리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정의 내렸다. 정의의 윤리는 개별적이고 분리된 자아 개념과 공평한 객관성, 공평무사한 규칙 혹은 원리에 대한 선호로 특징지어질 수 있고 반면 여성의 돌봄의 윤리는 타인과 연결되고 상호의존적인 자아 개념, 친밀한 관계에 기초한 정체성, 타인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해롭게 하지 않으려는 민감성, 자신 및 타인의 행복에 대한 관심, 구체적인 상황에서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관심을 특징으로 한다고 보았다. 이 여성철학자는 도덕적 성숙은 이러한 두 지향성의 종합, 혹은 통합에 의한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돌봄과 돌봄이 없는 정의는 도덕적으로 불충분하다고 정의를 했다. 그러나 이 여성의 후기저작에 보면 도덕적 성숙은 정의 지향성보다는 돌봄 지향성이 더 우월한 것이고 우선적으로 획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의 지향적인 것이 더 성숙한 걸까. 돌봄 지향적인 것이 더 성숙한 걸까. 글을 읽는 분마다 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솔직히 옛날에는 여성은 도덕성과도 거리가 멀었다. 도덕적으로 결핍된 열등한 존재로 보았다. 이제는 여성의 가치, 여성의 도덕성을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기업 문화과 모든 조직의 문화는 원칙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기초한다. 이것을 성숙한 것으로 여기는데 이제 대세는 달라졌다. 관계가 중요하고 돌봄이 중요함을 이젠 설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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