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1절에 보면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하면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 네로 황제의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가장 극심한 때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마도 종말을 준비하라는 말이겠지요. 그러면서 그는 종말이 다가올 때 맨 먼저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라고 말합니다. 즉 종말 때 기독교인의 할 바, 지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8절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말하면서 사랑이 가장 중요함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종말, 만물의 종말을 말하기 전에 개인의 종말을 말한다면 그것은 죽음이겠지요. 여러분은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보라고 했습니다. 어떤 위암말기 환자는 죽기 전에 봉사활동하고 싶다. 사과 한쪽을 먹고 싶다. 블랙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다. 시원하게 똥을 한번 누고 싶다.

간암말기 환자는 그동안 고생만 한 아내에게 면사포를 씌워주고 싶다. 3분만 속 시원하게 웃고 싶다. 어떤 에이즈 환자는 아내와 함께 낚시를 가고 싶다. 설악산을 오르고 싶다. 친구들과 밤새 수다를 떨고 싶다. 이런 것들을 작성하였습니다. 이런 리스트들이 그들에게는 절실했나 봅니다. 그리고 살펴보면 아내와 친구들, 그동안 사랑을 나누지 못했던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은 욕망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는 아주 가까운 사람이 죽은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도 아직 젊다면 젊은 나이라 죽음에 대해서 이전까지는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고 솔직히 인류의 종말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사랑하는 교회교우들이 임종을 맞을 때, 아니 제 노쇠한 어머니가 아프실 때 죽음을 생각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찾아오는 생각은 살아계실 때 많이 사랑할 걸, 잘 해드릴걸, 이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는 끔직한 9.11 테러 사건과 세월호 사건을 뉴스를 통해서 접했습니다. 그 당시 죽은 사람들이 죽음이 다가오는 공포를 느끼면서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했는데 그 내용이 다 사랑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돈 꿔준 것 받아내라. 엄마 공부만 하라더니 이렇게 허무하게 죽잖아요. 그런 원망도 아니고 사랑해이 한 마디였습니다. 엄마 내가 말 못할까봐 보내 놓는다. 사랑한다. 엄마아빠 배가 기울고 있어 보고 싶어 사랑해, 얘들아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다 용서해줘 사랑한다.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 같아 근데 나는 아마 살 수 없을 것 같아. 여보 사랑해, 아이들 잘 부탁해.

 

 

StartFragment 20세기 기독교의 최고의 사상가라고 불리는 C.S. 루이스라는 사람은 그의 책 <네 가지 사랑>에서 사랑을 네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말로 애정(affection), 우정, 에로스, 자비입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사랑, 즉 가장 기본적인 사랑인 필요를 채우기 위한 사랑을 애정으로, 그리고 가장 덜 본능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같은 방향을 향하고 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을 우정으로, 일반적으로 사랑에 빠지다 라고 표현되는 연인들 간의 사랑을 에로스로, 그리고 위의 이 세 가지 사랑을 뛰어넘고 가장 온전한 신의 사랑을 자비로 나누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애정과 우정 그리고 에로스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괴적인 속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 파괴적인 속성들이 상대방을 구속하고 다른 이를 분리시키는 악한 이기적 집단이 되고 서로가 서로의 인격과 개별성을 무시하고 삼켜버리는 탐욕스러움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신이 되어 버린 사랑은 악마가 됩니다.” 결국 애정, 에로스, 필리아 같은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으로 전락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그 사랑은 악마와 같은 것이 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마지막으로 말한 자비는 모든 이전의 사랑이 끝까지 그 온전함을 잃지 않도록 만드는 것으로 오직 필요한 것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즉 제가 고민했던 완전한 사랑은 인간의 사랑에선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라고 해서 다 사랑은 아닙니다. 동물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다릅니다. 동물의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을 붙일 수도 없죠. 그들은 철저히 본능에 이끌리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본능에 따라 배고픈 충동, 암놈을 보면 일어나는 충동만 만족시키면 그만 이예요. 거기에 이성이나 감성은 없습니다. 여러분 동물의 왕국을 잘 보십니까? 저는 가끔씩 보는데 동물의 왕 사자에 관한 것을 보게 되었어요. 사자들은 10에서 20마리 정도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가장 힘센 사자가 암놈사자 여러 마리를 거닐고 다니는 데 그래보았자 그 우두머리 사자가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길어야 2년밖에는 가지 않는데요. 조금만 힘이 약해지면 다른 젊은 숫 사자가 와서 덤벼서 점령을 해버린 답니다. 그런데 이 새 숫 사자가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젖먹이 새끼 사자들을 모두 물어 죽인답니다. 그리고 이전의 암사자들은 새 우두머리 사자의 아내가 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사자들의 세계는 이성과 감성이 통하는 세계가 아니라 본능과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또 재미있게 본 것은 아프리카 대지에 가뭄이 들어서 모든 짐승들이 굶주리는 상황이었는데 한 암사자가 들소 같은 것을 사냥해서 잡았어요. 그런데 땅에서 먹으면 하이에나 같은 동물들이 달려들어 먹잇감을 뺏기니까 먹이를 물고 나무에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 카메라가 클로즈업해서 보니까 그 암사자가 등뼈가 부러져서 나뭇가지에 축 늘어져서 죽어 있는 거예요. 내려오다가 나뭇가지에 등뼈가 부러졌나봅니다. 그런데 그 먹잇감은 다른 동물들(치이타, 표범같이 생긴 것이)이 와서 뺏어가고 암사자의 시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른 사자들이 어슬렁거리더니 와서 뜯어먹더라고요. 동물들의 세계는 이렇습니다. 정에 이끌리는 세계가 아니고 이성이 없고 본능과 욕구만 만족하면 되는 세계입니다.

반면 우리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고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본능을 이성에 의해서 통제할 수 있고 감성에 이끌리는 사랑입니다. 가끔 동물보다 못한 사람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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