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이란 영화를 아시는지요, 2004년에 한번, 201611월에 재개봉되었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베스트셀러소설을 영화화 한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인데 저는 감동적으로 봤습니다. 한 남자는 상식적인 보통 남자입니다. 그런데 한 여자를 평생 사랑하는 것을 사명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여자는 부잣집 딸이었고 여름휴가차 시골에 왔다가 그 남자를 만나 서로 열렬하게 사랑을 하게 되고 집안의 반대로 헤어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 사랑의 결실을 이룹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자기가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고 한 남자를 사랑했다는 것을 기억을 못합니다. 노인성 치매에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된 그 남자가 치매에 걸린 여자에게 책을 읽어주겠다고 접근해 소설을 읽는 것처럼 자신과 치매를 앓는 부인의 사랑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잠깐 기억이 돌아왔다가 다시 기억을 잃는 자기 부인, 자기 부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지만 기억을 잃어 남이 되어 버린 그 장면들이 참 안타깝고 눈물겨웠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기억이 잠시 돌아온 그 여자와 남자주인공이 병원 한 침대에서 같이 잠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거였습니다.

 

저는 남녀 간의 사랑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화를 보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렇게 평생 사랑을 할 수 있구나. 평생을 사랑하고 같이 죽음을 맞는다면. 그것도 축복받은 인생 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치매를 앓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고 자식마저 남같이 되어 버린 것이 안타깝지만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노력이 사랑의 기억을 되돌리고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같이 죽음을 맞는 것. 실화에 있었다니 이런 사랑도 가능하단 이야기겠죠.

 

그래서 저는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이 하는 사랑에 완전한 사랑이 있을까. 뭐가 사랑일까. 이 영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랑이 삶의 이유입니다. 사람은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웃기도 합니다.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죽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곧 생명과도 같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사랑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으로 태어나서 사랑하며 살다가 또 사랑하며 죽습니다. 시와 노래, 문학의 주제는 대부분 사랑입니다. 우리나라 가요의 가사내용도 대부분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원수에게도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저는 영화 벤허를 보고 그것을 느꼈습니다.

벤허, 2016년 작품이 나온 것 아십니까. 저는 2016년 추석 때 영화관에서 보았는데 50년 전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것입니다. 많은 논란이 있으나 저는 어쨌거나 아주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하려는 주제가 용서와 화해였다는 것에 많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 아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귀족 가문의 왕자인 유다 벤허와 그 가문에 입양된 메살라, 이 배다른 형제가 그 당시 사회 정치 구조 속에 얽히면서 원수가 되어 복수를 하는 내용입니다. 유다 벤허는 억울하게 로마에 반대하는 극우파 세력을 도왔다는 누명으로 가문이 몰락하고 노예 신세가 됩니다. 그렇게 된 데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성공만을 향해 달리는 메살라의 역할이 컸습니다. 유다 벤허는 배의 노를 젓는 노예생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채찍질 맞아가며, 쇠사슬에 묶인 채로 짐승보다도 못한 그 생활을 견디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중간 생략하고, 어쨌든 살아남아 복수를 할 기회가 생기는 데 그것이 바로 전차 경주입니다. 참 명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경주에서 유다 벤허가 결국 승리하여 명예를 회복하고 부도 얻게 되는 데 중요한 것은 그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벤허가 인생에서 살짝살짝 마주쳤던 예수님, 돌에 맞고 있는 사람을 보호하셨던 예수님, 벤허가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고 있을 때 물을 먹여 주셨던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말씀하시고 돌아가신 장면을 보고 유다 벤허는 흐느껴 웁니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메살라 한테 입니다. 전차 경주에 져서 다리가 불구가 된 메살라, 이제는 자기한테 분노하고 또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메살라. 그에게 벤허는 말합니다. 메살라, 네가 우리가 이렇게 되기 전, 옛날 청년시절에, 내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 의식을 잃은 나를 엎고 그 먼 거리를 달려 집으로 갔던 것, 그리고 내가 낫기를 바라면서 네가 믿고 있는 신상을 보며 기도했던 것, 그 때 기억나니, 더 이상 살생은 안 돼 하면서 자기를 죽이려는 메살라를 부둥켜안고 벤허는 웁니다. 그들은 같이 웁니다. 예수님의 사랑처럼 예수님의 용서처럼 사랑과 용서와 화해가 일어나고 영화는 가족도 찾고 다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우리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가족입니까. 친구입니까. 친지입니까. 교회교우들입니까. 원수라고 하지만 잘 기억해 보세요. 그들과 사랑을 나눈 기억들, 사랑을 받은 기억들이 꼭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못할 원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빚진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의 사랑으로 이렇게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왜곡해서 잘해주고 그것을 이용해서 자기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이 말씀의 뜻을 잘 새겨야 합니다. 사랑의 빚은 제일 우선적으로 복음의 빚을 말합니다. 우리에겐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해야 할 이유, 이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성공의 멋진 이유, 멋진 목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사랑해야 하는지 항상 숙제처럼 우리의 의무처럼 마음에 새기고 간직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제로섬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시스템이나 사회전체의 이익이 일정하여 한쪽이 득을 보면 반드시 다른 한쪽이 손해를 보는 상태를 제로섬이라고 합니다. 게임에서 이 이론 이 나왔는데 서로 영향을 받는 관계 안에서 모든 이익의 총합이 항상 제로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10억을 가졌다면 어떤 사람은 마이너스 10억입니다. 그래서 총합은 0입니다. 게임에선 내가 승자가 되면 10억을 가질 수 있더라도 패자는 마이너스 10억입니다. 그래서 이 이론으로 미국경제를 점검한 제로섬 사회라는 책도 있습니다.

저는 제로섬이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우리 안에 빚진 자의 마음이 정말로 절실히 필요한 시대임을 절감했습니다. 우리의 가진 것이 모두 우리의 노력만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회에 대한 채권자 의식이 있을 때 사회가 밝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선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가진 자들의 도덕적 의무입니다. 이 어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14세기 백년 전쟁 때 프랑스의 도시 칼레가 영국군에게 항복을 하게 됩니다. 영국왕은 항복 사절단을 보내서 칼레의 모든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는 그동안의 반항에 책임을 져야한다. 그러니 이 도시의 대표 6명은 목을 매 처형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래서 칼레시민들이 모두 혼란에 빠졌는데 그때 칼레시 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처형을 자청하고 뒤이어 시장, 상인, 법률가등의 귀족들이 처형을 받겠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영국 왕과 왕비가 이들의 희생정신에 감복하여 살려주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도 빚진 자의 마음, 채권자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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