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면 누구나 승리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어떻게 해야 승자로 살 수 있는 걸까요. 혹자는 유전자에 의해 승자 혹은 패자가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승자효과 winner effect라는 것이 있다 라고 주장하는 책이 있습니다. <승자의 뇌>라는 책인데요, 이 책의 저자는 동물실험을 통해서 한 번 싸움에서 이긴 경험이 다음 싸움에서 이길 확률을 높여준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바로 승자효과입니다. 한번승리가 다음번의 승리도 보장해 준다는 것입니다. 한번 승리한 경험은 뇌에서 테스토스테론을 분출하는데 이 맛을 본 동물이 다음 번 대결에서도 승리를 거둘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다음 번 대결에서 이 테스토스테론이 보다 더 많이 분출된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그 동물은 덜 불안해지고 더 공격적으로 바뀌며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임계점도 더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즉 테스토스테론이 승리를 거두는 동물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바로 승리한 쾌감을 뇌가 기억하는 것이죠. 그래서 뇌가 다음번 싸움에 더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돕는다는 것입니다. 한번 이긴 경험을 맛본 사람은 다음번 경쟁에서도 이긴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한번 승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그 끝이 절망적이진 않다는 것입니다. 승리한 경험을 계속 간증하는 사례를 보면 그렇습니다. 승리한 맛을 본 사람이 계속 승리하고 전도도 그렇습니다. 전도를 한 사람이 계속합니다. 전도의 맛을 알기 때문이죠.

 

책에서 보면 이런 예가 있습니다. 아카데미상 수상 후보자로 지명된 성공한 배우들을 대상으로 해서 수명을 분석한 결과, 아카데미상 수상자들이 후보로만 지명만 되고 그 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서 평균적으로 4년 더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노벨 수상자들도 마찬가지인데 노벨상 수상자들이 후보에 오르긴 했지만 결국 그 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서 평균적으로 1-2년을 더 오래 살았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결과가 왜 나왔는지 다음과 같이 분석했습니다. 아카데미상 수상이라는 경험이 세상에 대한 통제력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강화하기 때문에 이것이 스트레스의 해로운 효과를 차단해서 더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승리의 경험은 승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한다고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이 통제감은 승자를 스트레스로부터 막아주며 그가 보다 나은 성공을 거두고 보다 오래 살며 또 보다 행복해지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승자는 행복합니다. 승리의 경험은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수명도 연장시켜줍니다. 이기는 삶, 승리하는 삶 이것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줍니다.

 

우리가 종말을 맞을 때, 죽음을 맞을 때 정말 악인이라도 사람을 죽인 사형수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종말을 생각하면 사형수라도 불쌍한 것입니다. 너는 죽어도 싸 그런 마음이 들겠습니까.

페이스북에서 미국에 49명을 죽인 살인마가 재판을 받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살인마는 49명을 죽여 놓고도 그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어디에 매장시켰는지 기억하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판사가 당신의 죄를 인정합니까 라는 말에 영어로 guilty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뻔뻔한 모습에 사람들이 다 경악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종신형을 받았는데 판사가 이 사람 때문에 죽은 유가족에게 한마디씩 이 살인마에게 하라고 기회를 주었습니다. 유가족이 한사람씩 나와서 한마디씩 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죽인 사람을 기억 못할지 몰라도 당신에겐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그 사람은 우리에게 전부였다. 우리의 엄마이자 언니이자 친구였다. 어떤 유가족은 너는 짐승이다 지옥에나 가라 하면서 저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살인마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다 듣고 있더니 어떤 한 사람의 말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거였습니다. 그 어떤 한 사람은 그 살인마에게 자식을 잃은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은 다 당신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번 일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You are forgiven. 그러니까 이 악마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49명을 죽인 악마의 마음도 녹였습니다. 그 죄도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말에 희망을 말해야 하는데 그 희망의 필요조건은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서함 받고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만 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된다 하시면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어떤 임금이 불쌍히 여겨 용서해주었더니 이 사람 자기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그 빚을 갚으라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이 괘씸하게 여겨 용서하지 못한 그 사람을 옥에 다시 가두어 둡니다. 이 비유를 드시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아마도 베드로가 <베드로 전서> 오늘 말씀 속에서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한 것 같습니다. 용서가 답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고 가르쳐 주신 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덮어야 우리의 죄도 덮어지는 것입니다. 허물을 자꾸 들춰내는 것 예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런 말씀하신 것이 수두룩합니다. 간음한 여자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돌로 친 사람이 없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누누이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여야 하나님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14-15절에 대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허물을 다 덮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들춰내는 것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타인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그러나 그것이 또 얼마나 무익한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다 압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그리고 직접 예수님께 용서를 받은 체험을 통해서 마지막 종말에는 이것뿐이다. 이것이 희망이다 하면서 오늘 말씀을 내놓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희망의 조건은 사랑이고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비판 정죄의 문화 속에서 오늘도 상처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이 나의 종말이라고 생각할 때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불쌍히 여겨야죠. 생각하면 모두 불쌍합니다. 그 때 우리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아끼면서 살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이라 믿습니다.

하루하루가 새날이지만 종말이기도 합니다. 내일일은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항상 이런 의식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기에 힘쓰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베드로가 다른 무엇보다 뜨겁게 사랑하라고 한 이유는 예수님과의 추억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왜 다른 것보다 사랑을 강조했을까를 생각해봤더니 예수님께 정말 사랑받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고 특히 베드로는 황송해서 완강히 거부했는데도 그 더러운 발을 씻겨주시고 제자 중에 유다는 배신할 것도 다 아시면서 발을 씻겨주시고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을 통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 그것도 뜨겁게 사랑하는 것, 모든 허물을 다 덮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나타나셔서 조반을 준비해서 제자들을 먹이시고 특히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십니다. 그 때 베드로가 그러하나이다 하면서 얼마나 찔렸을까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 예수님도 다 아시면서 배신했기 때문에 더 아픈 마음이 깊어져 사랑이 된 것을 예수님은 뚫어보시고 이런 것 저런 것 말씀 다 안하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용서, 깊은 사랑을 다시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속으로 울었을 것입니다.

이 기억 때문에 베드로는 그렇게 핍박을 받으며 종말을 이야기하면서도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해야 하며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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