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크리스천이라면 우리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근원, 본질, 원천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보면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신비하게 느끼기도 하고 때론 소름이 끼칠 만큼 뭔가 특별한 감정은 그 아름다움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세기 유명한 신학자이며 문학가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름다움은 왜 존재하는가, 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의 기원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즉 아름다움의 원천에 대해서 골몰히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는 답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하고 하나님을 평생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에서 삶의 목적과 존재의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보이는 것에서만이 아니라 선하고 참되고 덕스러운 모든 것에서, 아름답고 순결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어른거리고 반사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삶이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비축하는 과업의 연속이며 그것은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을 봄으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믿는 우리들은 창문 밖 풍경을 보듯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순간적으로 힐끗 보고 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아름다움을 아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평생 연구한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 우리도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움 하면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릅니까. 저는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 시골벌판의 밤하늘의 빛나는 별빛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로 채워진 정원, 장엄함을 느끼는 그랜드캐넌의 멋진 자연환경, 그리고 결혼을 앞두고 드레스를 입은 볼이 발그스레한 신부의 얼굴, 엄마의 젖을 물고 새록새록 잠자는 아가의 얼굴, 저는 이런 것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고 잠간 등을 펴고 자신의 땀을 닦는 어느 아낙네의 얼굴, 무언엔가 감동되어 흘리는 눈물 한 방울 저는 이런 것들을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그렇게 보면 아름다움은 예쁘다, 좋다 이런 단순한 말과는 다른 어떤 가치를 품고 있고 숭고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아름다운 것을 다 좋아하고 다 추구합니다. 아름다움은 우리 생존본능과도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니체는 또 우리 마음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생존 본능은 사실 아름다움이라는 자극에 의해 북돋아진다고 설명합니다. 한마디로 미적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생존 본능을 일으켜 세우는 강력한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인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이 아름다움을 지키고 보존하고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당연지사가 되어야합니다.

 

 

아름다움의 근본은 하나님

그런데 크리스천이라면 우리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근원, 본질, 원천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보면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신비하게 느끼기도 하고 때론 소름이 끼칠 만큼 뭔가 특별한 감정은 그 아름다움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세기 유명한 신학자이며 문학가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름다움은 왜 존재하는가, 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의 기원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즉 아름다움의 원천에 대해서 골몰히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는 답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하고 하나님을 평생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에서 삶의 목적과 존재의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보이는 것에서만이 아니라 선하고 참되고 덕스러운 모든 것에서, 아름답고 순결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어른거리고 반사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삶이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비축하는 과업의 연속이며 그것은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을 봄으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믿는 우리들은 창문 밖 풍경을 보듯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순간적으로 힐끗 보고 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아름다움을 아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평생 연구한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 우리도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인상 깊게 본 영화가 있습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라는 영화입니다. 영화에 많은 커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삶의 크고 작은 고통 때문에 그리고 사랑 때문에 아파하지만 그로 인해서 행복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사건, 사고를 그린 것이 이 영화의 특색입니다.

저는 이 영화의 주제가 제 귀속에 맴도는 몇 가지 대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대사가 따뜻하지만 여우같은 정신과 의사인 이혼녀(엄정화 분)가 한 촌스런 형사와 사랑에 빠져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이렇게 자뻑을 합니다. "Are you ready to die for me?" 우리 말로 옮기면 너 나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니?”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 하는 일이라면 죽을 준비라도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인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 연인이든, 부부이든, 자식이든 어떤 관계로 엮어졌든,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노력의 노력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내 머릿속에 맴도는 또 하나의 대사가 있습니다. 이 투박한 형사가 그 이혼녀의 아이와 놀다 아이를 잃어버립니다. 결국 그 형사는 죽어라 아이를 찾다가 임신한 여자 유괴범(실제 유괴범이 아니고, 아이가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유괴인 것처럼 꾸민 것, 실제 이 유괴범도 너무 선하디 선한 자기가 사랑하는 남편의 애를 낳고 싶어 하는 착한 여자임, 그래서 나중에 모두 헤피 엔딩을 맞음)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무릎 꿇고 있는 유괴범을 향해, 그 특유의 투박한 사투리로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세상에 니로 인해 행복해 하는 사람,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내, 니 살려 준다

저는 그 대사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어쩌면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도 나에게 그렇게 묻지 않으실까? “너 때문에 행복해 했던 사람, 아니 지금 행복해 하는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대라, 많은 사람도 필요 없다. 딱 한 사람만 있다면 너는 더 이상 죄인도 아니고 약자도 아니고 나의 사랑하는 강자이고 내 자녀이다.”

나 때문에 행복해하는 한 사람이 있다. 그것 때문에 이미 나는 존재 가치가 있고 더 이상의 약자가 아닌 것입니다. 영화 속에, 모든 삶의 비애로 아파하는 사람들, 더 이상 당한 자, 괴로운 자, 연약한 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너무나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을 주는 사람, 남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 그들은 강자들입니다.

 

누가 강자입니까. 나는 강자입니까. 나는 약자입니까. 자신에게 물음표를 던져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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