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리더십은 엄마 리더십이었습니다. 먹이시고 씻기시고 자녀를 돌보기 위해서는 목숨도 내거는 엄마와도 같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서 어머니의 이미지, 엄마의 이미지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은데 구약성서에서도 하나님은 단지 부성적 요소만이 아니라 모성적 요소도 지닌 분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식을 위로하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십니다.

구약의 이사야서에서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49:15).

하나님 아버지를 어머니로 이스라엘을 젖먹이로 비유하시고 그만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10개월을 자기 태에서 품고 자신의 젖을 물린 자식을 어찌 사랑하지 않으며 어찌 불쌍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애간장이 끊어지는 사랑이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 어머니는 설혹 자식을 잊을 수가 있어도 하나님은 절대 잊으시지도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사랑의 절대성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호세아서에도 하나님을 어머니로 묘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호세아서 11장 첫째부분을 보면 하나님을 어린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의 일상적 행위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111절에,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 3절에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것을 어머니가 지금 걸음마를 하고 있는 자식을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십니다. 이것은 개역개정의 표현이고 공동번역을 보면 더 적나라하게 표현이 됩니다.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그러나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바알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향을 피워 올렸다. 걸음마를 가르쳐주고 팔에 안아 키워주고 죽을 것을 살려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 인정으로 매어 끌어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에 비비기도 하며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호세아서 11:1-4, 공동번역).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할 때 안아주고 걸음마, 걸음마 하면서 가르쳐주고 너무 귀여워 볼에 비비기도 하고 먹을 것을 입에 넣어주고 하는 행동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사랑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이것을 몰라주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제시한 하나님은 어린아이를 자궁의 진통 끝에 출산하여 가슴에 고이 품어 젖을 먹이며, 팔에 안아 키워주고 걸음마를 가르쳐 주며, 우는 아이를 달래주고 양육하는 자상한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부성적인 하나님, 불의에, 우리의 죄에 진노하고 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녀를 너무 사랑하고 아껴 목숨까지도 버리는 어머니 아니 엄마의 이미지로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자녀를 사랑하듯이 우리를 보호하고 돌보시는 예수님을 닮는다면 예수님에게서 배운다면 우리 가정도 기업도 이 사회도 이 나라도 하늘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겐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겐 엄마가 필요합니다. 따뜻하게 품어주는 엄마, 말없이 희생하는 엄마, 나를 언제나 배려하는 엄마, 그런 엄마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그런 엄마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이 돌봄의 가치는 기독교에서가 아니라 이제 이 세상에서 부각되고 있는 가치입니다. 이 돌봄의 가치는 이미 논의 되어 온 것입니다. 여성도덕철학자 길리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여성은 여성의 도덕성은 남성과 다르다. 여성은 돌봄의 윤리, 남성은 정의의 윤리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의의 윤리는 개별적이고 분리된 자아 개념과 공평한 객관성, 공평무사한 규칙 혹은 원리에 대한 선호로 특징지어질 수 있고 반면 여성의 돌봄의 윤리는 타인과 연결되고 상호의존적인 자아 개념, 친밀한 관계에 기초한 정체성, 타인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해롭게 하지 않으려는 민감성, 자신 및 타인의 행복에 대한 관심, 구체적인 상황에서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관심을 특징으로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여성철학자는 도덕적 성숙은 이러한 두 지향성의 종합, 혹은 통합에 의한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돌봄과 돌봄이 없는 정의는 도덕적으로 불충분하다고 정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성의 후기저작에 보면 도덕적 성숙은 정의 지향성보다는 돌봄 지향성이 더 우월한 것이고 우선적으로 획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의 지향적인 것이 더 성숙한 걸까요. 돌봄 지향적인 것이 더 성숙한 걸까요. 솔직히 옛날에는 여성은 도덕성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도덕적으로 결핍된 열등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이제는 여성의 가치, 여성의 도덕성을 새롭게 부각시킵니다. 그러나 아직도 기업문화는 원칙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기초합니다. 이것을 성숙한 것으로 여기는데 이제 대세는 달라졌습니다. 관계가 중요하고 돌봄이 중요합니다.

 

 

이 모성에서 나오는 돌봄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라는 책에 예화가 나오는데 회사를 돌봄의 환경으로 전환하여 죽어가는 회사의 매출액을 2배 이상 증가시킨 이야기가 나옵니다. 밥 채프먼 이라는 사람이 배리웨밀러 사의 CEO인데 재무상태가 부실하고 기업문화가 아주 형편없는 회사를 사들였습니다. 이 사람이 제일 먼저 한 것이 직원들과 함께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CEO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조직의 리더가 먼저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고 먼저 신뢰를 얻기 위해 실천을 했습니다. 사람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말이 뭐가 대단한 도덕적 가치이냐 할지 모르지만 조직에서 사람들은 매출액 향상을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밖에 안 여기는 리더도 많습니다. 이 사람의 사고방식은 리더는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한다. 한 직원이 회사에 들어오는 것은 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회사는 마치 한 집안처럼 느껴지게 되고 직원들 사이에서 서로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소속감을 느끼고 편안하고 존중받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직원들은 내가 돌봄을 받는다고 느끼는 만큼 다른 사람을 돌보기 시작했고 이렇게 서로 돌보는 환경덕분에 직원들은 머리와 가슴을 모두 회사에 헌신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회사도 매출도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일례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이 회사에 있습니다. 시간제 직원 한명이 아내가 당뇨병을 앓고 있어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 직원은 아내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가뜩이나 시간제로 근무하는데 시간을 줄인다면 임금이 줄어 들 것 같아 일을 줄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동료들이 서둘러 대책을 세워 이 직원이 휴가를 더 쓸 수 있도록 자신들의 유료 휴가일을 넘겨준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어 직원들이 회사에 더 헌신했고 그 이유가 매출액이 오르고 회사가 성장한 큰 이유라고 저자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