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이 희생양이 된 여자를 구하고 어떻게 이 시험을 빗겨갈 수 있을까. 이제부터 예수님의 행동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여성해방운동선언문. 어떤 사람은 돌로 치려 한 사람들의 죄목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무엇을 쓰셨던 간에 예수님은 시간을 버셨습니다.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응대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판단 보류하셨다는 것입니다. 흥분한 무리들 앞에서 예수님도 흥분에서 네 까짓것들이 나를 시험하려 드느냐, 간음한 남성은 어디 있느냐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렇게 했어요. 예수님은 저 같은 일차원적 사람이 아니고 수가 대단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의 지연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일단 흥분한 군중의 마음이 수그러들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일말의 여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판단을 유보하게 됩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그 틈을 비집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돌을 놓고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예수님 너무 멋지지요. 희생양이 될 뻔한 여성도 구하고 시험도 통과하고 심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까지 느끼게 하셨으니 까요.

그런데 이 다음 행동이 더 아름답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이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상담을 하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저는 이 말씀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이었고 그런 위치에 계신 분이었지만 아무런 판단 없이 이 여자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십니다. 상담학에서 무조건적인 수용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상담자가 좀 더 조건적이고 요구하는 태도를 가지면 상대방의 행동을 치료하고 변화시키는데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상담을 행동을 변화시키는 활동이라고 본다면 이 주장이 맞지만 상담을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라고 보고 인격의 변화까지 꾀할 때는 무조건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건을 걸고 행동은 치료할 수 있지만 그 인격은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수용이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죄에 대한 처벌 보다는 한 영혼의 변화가 중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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