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수님의 무조건적 수용을 받은 그 여자 어떻게 되었나요. 학자들은 이 간음한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눈물로 예수의 발을 닦은 사람이 이 사람이라 말하고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을 끝까지 지켜보고 따라다니며 장사하고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까지 처음 직접 목격한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돌에 맞는 처벌을 받았다면 다시는 그 트라우마 때문에 간음을 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행동은 고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영혼은 자기를 때린 사람들을 저주하며 고통 속에서 살았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사랑 많은 사람, 사랑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는 이 여성의 예수님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 순수한 사랑 한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자 제자들과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가롯 유다 돈 몇 푼에 예수님 팔았습니다. 그렇게 사랑한다던 베드로, 예수님 세 번 부인하고 도망쳤습니다. 다른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왜 그랬냐면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 순수하게 따라 다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대단한 것 같고 민중들이 쫓아다니니까 자기도 뭐가 된 것 같고 나도 한자리 하겠지 이런 생각이 내심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힘없이 잡히시니까 다 도망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끝까지 지켜보았던 막내제자 요한은 어떻습니까. 이 사람은 뭐가 달랐을까요. 아닙니다. 어머니를 시켜 예수께 주의 나라에서 높은 직책을 달라고 대놓고 요구할 만큼 야심이 큰 자였습니다. 한자리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남자제자들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남자는 power 지향적, 목적 지향적이고 여자는 관계 지향적입니다. 이미 다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남자 제자들이 나중에는 다 변했지요. 나중에는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막달라 마리아라고 추측되는 이 여성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성은 자기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해 준 예수님이 그냥 좋아서, 그저 감사해서 그리고 그 십자가의 고통을 지신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파서 끝까지 곁에 있어드리고 싶어서 따라다닌 것입니다. 한자리 하고 싶고 나도 예수님 잘 따라다녀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려야지 이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간음하다 잡혀 돌에 맞아 죽을 뻔한 나를 살려주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을 때도 그 여자에 대한 무리들의 시선이 오죽했을까요, 그 온갖 소리 없이 날라드는 선입견, 편견의 돌들로부터 나를 막아주고 감싸주고 수용해 주신 예수님, 그저 그것이 고마워서 그것이 감사해서 따라다니게 되었고 곁에 있어드리고 싶고 그 곁을 떠나고 싶지 않고 예수님의 고통 다 이해할 수 없어도 고통당하는 그 모습 그저 그것이 너무 가슴 아파서 눈물겨운 사랑이 되어 버리지 않았을까요. 남자 제자들처럼 한자리 하고 싶고 영광을 받고 싶고 그것은 안중에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고 봅니다. 너무나 순수한 사랑이고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그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값비싼 옥합을 깨뜨려 눈물로 발을 닦아 드리고 예수님이 온갖 천대와 멸시와 모욕을 받을 때도 채찍에 맞을 때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을 때도 끝까지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이 부활해서 나를 인정해 주시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끝까지 함께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님을 제일 사랑한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부활한 모습을 제일 먼저 보이십니다. 이제 이 여인에게 주목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 소중한 사랑, 우리 가슴 속에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정말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중의 희생양이 될 뻔한 한 여인이 이젠 예수님의 곁을 지켜드린 그리고 처음으로 부활을 목격하고 그것을 전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간음한 여자를 사랑 많은 여자로 변화시킨 예수님도 대단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소리 없이 날라드는 돌들, 보이지 않는 돌들에 맞아 아직도 고통 받는 여성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된다고 봅니다. 처벌과 정죄가 답이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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