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베스트셀러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의 저자 TED 동영상의 최고 강사인 사이먼 사이넥의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리더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는 리더라는 존재를 얘기할 때 엄마라는 존재, 돌봄의 가치를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좀 경시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새롭게 부상하는 리더십은 돌봄 리더십 이라는 것입니다. 조직의 성패가 경영의 수완이 아니라 뛰어난 리더십에 기초하는데 리더는 언제나 구성원들에게 집중해야 한다.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이먼은 미 육군, 특히 해병대를 예로 드는데, 미 해병대는 식사시간에 최하급자가 가장 먼저, 최상급자가 가장 나중에 배식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결코 명령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아주 간단한 행동 속에 리더십을 보는 해병대의 시각이 들어있습니다. 리더는 마지막에 먹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필요보다는 부하들의 필요를 보다 우선하는 마음가짐의 표현이며 부하직원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자신의 사리사욕은 희생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저는 이것을 읽으면서 엄마를 떠올렸습니다. 보통 엄마들은 남편이나 자식이 다 먹고 난 후 먹습니다. 그래서 남은 음식, 찌꺼기를 먹습니다. 그 양이 모자라도 신경 쓰지 않고 많아도 신경 쓰지 않고 그것이 내 몫이려니 하면서 먹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엄마들은 뚱뚱합니다. 처녀 때 그렇게 예쁘고 날씬했던 사람들이 엄마만 되면 펑퍼짐해집니다. 운동으로 신경 쓰지 않은 이상 운동할 시간도 없죠. 어쨌든 다 뚱뚱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돌봄 때문 입니다.

그런데 제가 중요한 것을 깨달았는데 엄마는 항상 맛있는 거 다 양보하면서 내가 너를 위해서 주는 거야, 나는 찌꺼기만 먹는 신세, 하면서 불평불만 신세한탄 한번 하신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엄마는 원래 그러는 사람 원래 마지막에 먹고 맛있는 거는 다 양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어요. 우리는 보통 그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아버지도 제일 먼저 식사를 하시면서 맛있는 것은 살짝 우리들에게 밀어주시기도 하고 애정을 표현하시지만 엄마랑 차이점은 아버지는 이렇게 하시고 생색을 내십니다. 그래서 제가 깨달은 것이 희생에서 나오는 돌봄은 여성에겐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남자는 본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무조건적 수용을 받은 그 여자 어떻게 되었나요. 학자들은 이 간음한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눈물로 예수의 발을 닦은 사람이 이 사람이라 말하고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을 끝까지 지켜보고 따라다니며 장사하고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까지 처음 직접 목격한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돌에 맞는 처벌을 받았다면 다시는 그 트라우마 때문에 간음을 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행동은 고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영혼은 자기를 때린 사람들을 저주하며 고통 속에서 살았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사랑 많은 사람, 사랑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는 이 여성의 예수님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 순수한 사랑 한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자 제자들과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가롯 유다 돈 몇 푼에 예수님 팔았습니다. 그렇게 사랑한다던 베드로, 예수님 세 번 부인하고 도망쳤습니다. 다른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왜 그랬냐면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 순수하게 따라 다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대단한 것 같고 민중들이 쫓아다니니까 자기도 뭐가 된 것 같고 나도 한자리 하겠지 이런 생각이 내심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힘없이 잡히시니까 다 도망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끝까지 지켜보았던 막내제자 요한은 어떻습니까. 이 사람은 뭐가 달랐을까요. 아닙니다. 어머니를 시켜 예수께 주의 나라에서 높은 직책을 달라고 대놓고 요구할 만큼 야심이 큰 자였습니다. 한자리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남자제자들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남자는 power 지향적, 목적 지향적이고 여자는 관계 지향적입니다. 이미 다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남자 제자들이 나중에는 다 변했지요. 나중에는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막달라 마리아라고 추측되는 이 여성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성은 자기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해 준 예수님이 그냥 좋아서, 그저 감사해서 그리고 그 십자가의 고통을 지신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파서 끝까지 곁에 있어드리고 싶어서 따라다닌 것입니다. 한자리 하고 싶고 나도 예수님 잘 따라다녀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려야지 이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간음하다 잡혀 돌에 맞아 죽을 뻔한 나를 살려주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을 때도 그 여자에 대한 무리들의 시선이 오죽했을까요, 그 온갖 소리 없이 날라드는 선입견, 편견의 돌들로부터 나를 막아주고 감싸주고 수용해 주신 예수님, 그저 그것이 고마워서 그것이 감사해서 따라다니게 되었고 곁에 있어드리고 싶고 그 곁을 떠나고 싶지 않고 예수님의 고통 다 이해할 수 없어도 고통당하는 그 모습 그저 그것이 너무 가슴 아파서 눈물겨운 사랑이 되어 버리지 않았을까요. 남자 제자들처럼 한자리 하고 싶고 영광을 받고 싶고 그것은 안중에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고 봅니다. 너무나 순수한 사랑이고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그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값비싼 옥합을 깨뜨려 눈물로 발을 닦아 드리고 예수님이 온갖 천대와 멸시와 모욕을 받을 때도 채찍에 맞을 때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을 때도 끝까지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이 부활해서 나를 인정해 주시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끝까지 함께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님을 제일 사랑한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부활한 모습을 제일 먼저 보이십니다. 이제 이 여인에게 주목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 소중한 사랑, 우리 가슴 속에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정말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중의 희생양이 될 뻔한 한 여인이 이젠 예수님의 곁을 지켜드린 그리고 처음으로 부활을 목격하고 그것을 전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간음한 여자를 사랑 많은 여자로 변화시킨 예수님도 대단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소리 없이 날라드는 돌들, 보이지 않는 돌들에 맞아 아직도 고통 받는 여성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된다고 봅니다. 처벌과 정죄가 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이 희생양이 된 여자를 구하고 어떻게 이 시험을 빗겨갈 수 있을까. 이제부터 예수님의 행동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여성해방운동선언문. 어떤 사람은 돌로 치려 한 사람들의 죄목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무엇을 쓰셨던 간에 예수님은 시간을 버셨습니다.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응대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판단 보류하셨다는 것입니다. 흥분한 무리들 앞에서 예수님도 흥분에서 네 까짓것들이 나를 시험하려 드느냐, 간음한 남성은 어디 있느냐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렇게 했어요. 예수님은 저 같은 일차원적 사람이 아니고 수가 대단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의 지연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일단 흥분한 군중의 마음이 수그러들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일말의 여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판단을 유보하게 됩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그 틈을 비집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돌을 놓고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예수님 너무 멋지지요. 희생양이 될 뻔한 여성도 구하고 시험도 통과하고 심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까지 느끼게 하셨으니 까요.

그런데 이 다음 행동이 더 아름답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이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상담을 하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저는 이 말씀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이었고 그런 위치에 계신 분이었지만 아무런 판단 없이 이 여자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십니다. 상담학에서 무조건적인 수용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상담자가 좀 더 조건적이고 요구하는 태도를 가지면 상대방의 행동을 치료하고 변화시키는데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상담을 행동을 변화시키는 활동이라고 본다면 이 주장이 맞지만 상담을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라고 보고 인격의 변화까지 꾀할 때는 무조건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건을 걸고 행동은 치료할 수 있지만 그 인격은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수용이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죄에 대한 처벌 보다는 한 영혼의 변화가 중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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