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삶은 끊임없는 저항입니다. 하나님은 패배의식, 열등감, 무기력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저항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주저앉고 무기력해 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저항하고 도전하는 것이 가능하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믿음자체가 무기력, 패배의식, 열등감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저항을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행동이 동물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실제 실험한 것이 있습니다. 한 행동심리학자가 실험을 했는데 동물들도 자신이 지배하지 못하고, 즉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이 강요당할 때, 그것에 저항하려는 욕구가 짝짓기나 먹는 것과 같은 생존 본능보다 더 강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 <사이언스>라는 논문에 그렇게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흰밭 들쥐를 잡아서 실험실에 가둔 뒤 실험상자안의 불을 껐습니다. 그런데 들쥐들이 그 불을 켜기 위해 내내 안간힘을 쓰더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 불을 켰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쥐들이 그 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쓰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쥐들은 어떤 실험조작을 하든 그 실험 조작에 저항하는 데 모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한다는 것입니다. 쥐들은 단순히 저항을 위해 저항했습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왜 들쥐는 이유 없이 실험 상황에 계속 저항하는 것일까? 이 현상에 대해 셀리그만이라는 학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능력에의 욕구나 외적 강제에 저항하려는 욕구는 바로 다름 아닌 무기력을 회피하려는 욕구다. 본능처럼 무기력으로부터 회피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무기력하지 않고 능력 있음을 증명하려고 저항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인생도 인류의 역사도 저항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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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신앙은 저항이다. 믿음은 저항이다. 감히 이런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저항과 순종 중 어떤 것이 믿음의 태도인가 묻는다면 저는 저항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항이란 단어에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항하면 우리나라의 독특한 역사 때문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데모운동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저항은 권력에의 저항뿐만 아니라 폭넓게 삶에의 의지, 주님께 나아가려는 의지조차도 저항이라고 봅니다.

,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으로부터의 저항, 삶의 장애물들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몸부림으로서의 저항, 삶의 어두운 곳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저항, 짓누르는 질병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저항. 무기력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저항, 주저앉고 싶을 때 일어서고자 하는 저항. 이 모든 것이 삶에의 의지이고 이것은 저항성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현재보다 퇴보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원합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려는 몸부림, 그 속에서 우리는 저항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은 일종의 소망, 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될까요? 꿈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종의 향상심(向上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니체가 먼저 한 말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그러기 위해서 세상이라는 들판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불가피하게 경쟁 속에 뛰어듭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저항적 신앙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우리는 현실의 무서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을 빌려오고자 하는 의지가 생깁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그래서 신앙은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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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자기의 고향을 떠났습니다.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한 민족이 태동되었습니다. 이삭은 매번 우물을 팠으나 방해군의 공작에 반응하지 않고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우물 판 모든 지역의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한나는 자기의 애지중지한 자식, 하나님께 절절히 기도드려 낳은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고 포기했는데 그로 인해 한 민족의 지도자, 선지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고난으로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자신을 인신매매했던 형들에 대한 미움을 버렸는데, 그로 인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 자신의 아들들까지 상속을 받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에스더는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각오하고 기도로 왕에게 나아가 자신의 유대민족을 살리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욥은 끝까지 쥐고 있었던 자기 의를 버리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갔는데 마침내 축복을 갑절로 받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지배국의 장군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한 선지자의 말에 복종했는데 그로 인해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업으로 삼았던 그물을 버렸는데, 그로 인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던 율법을 버렸는데 그로인해 사울이 바울이 되고 그리스도를 위한 사람으로 변해, 대륙을 누비며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영광을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그로 인해 기독교가 탄생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적인 집착을 포기해야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집착 그것이 뭘까요. 자기가 아끼는 소유물일 수도 있고, 자식, 부모일수도 있고, 자신의 자존심일 수도 있고, 세상에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자신의 능력, 실력일 수도 있고, 자신의 오만에서 나오는 미움, 증오 일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흔드실 때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적인 집착, 타성, 아집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더 정결하게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더 큰 복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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