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종말을 맞을 때, 죽음을 맞을 때 정말 악인이라도 사람을 죽인 사형수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종말을 생각하면 사형수라도 불쌍한 것입니다. 너는 죽어도 싸 그런 마음이 들겠습니까.

페이스북에서 미국에 49명을 죽인 살인마가 재판을 받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살인마는 49명을 죽여 놓고도 그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어디에 매장시켰는지 기억하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판사가 당신의 죄를 인정합니까 라는 말에 영어로 guilty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뻔뻔한 모습에 사람들이 다 경악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종신형을 받았는데 판사가 이 사람 때문에 죽은 유가족에게 한마디씩 이 살인마에게 하라고 기회를 주었습니다. 유가족이 한사람씩 나와서 한마디씩 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죽인 사람을 기억 못할지 몰라도 당신에겐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그 사람은 우리에게 전부였다. 우리의 엄마이자 언니이자 친구였다. 어떤 유가족은 너는 짐승이다 지옥에나 가라 하면서 저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살인마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다 듣고 있더니 어떤 한 사람의 말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거였습니다. 그 어떤 한 사람은 그 살인마에게 자식을 잃은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은 다 당신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번 일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You are forgiven. 그러니까 이 악마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49명을 죽인 악마의 마음도 녹였습니다. 그 죄도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말에 희망을 말해야 하는데 그 희망의 필요조건은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서함 받고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만 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된다 하시면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어떤 임금이 불쌍히 여겨 용서해주었더니 이 사람 자기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그 빚을 갚으라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이 괘씸하게 여겨 용서하지 못한 그 사람을 옥에 다시 가두어 둡니다. 이 비유를 드시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아마도 베드로가 <베드로 전서> 오늘 말씀 속에서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한 것 같습니다. 용서가 답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고 가르쳐 주신 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덮어야 우리의 죄도 덮어지는 것입니다. 허물을 자꾸 들춰내는 것 예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런 말씀하신 것이 수두룩합니다. 간음한 여자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돌로 친 사람이 없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누누이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여야 하나님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14-15절에 대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허물을 다 덮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들춰내는 것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타인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그러나 그것이 또 얼마나 무익한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다 압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그리고 직접 예수님께 용서를 받은 체험을 통해서 마지막 종말에는 이것뿐이다. 이것이 희망이다 하면서 오늘 말씀을 내놓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희망의 조건은 사랑이고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비판 정죄의 문화 속에서 오늘도 상처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이 나의 종말이라고 생각할 때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불쌍히 여겨야죠. 생각하면 모두 불쌍합니다. 그 때 우리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아끼면서 살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이라 믿습니다.

하루하루가 새날이지만 종말이기도 합니다. 내일일은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항상 이런 의식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기에 힘쓰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베드로가 다른 무엇보다 뜨겁게 사랑하라고 한 이유는 예수님과의 추억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왜 다른 것보다 사랑을 강조했을까를 생각해봤더니 예수님께 정말 사랑받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고 특히 베드로는 황송해서 완강히 거부했는데도 그 더러운 발을 씻겨주시고 제자 중에 유다는 배신할 것도 다 아시면서 발을 씻겨주시고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을 통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 그것도 뜨겁게 사랑하는 것, 모든 허물을 다 덮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나타나셔서 조반을 준비해서 제자들을 먹이시고 특히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십니다. 그 때 베드로가 그러하나이다 하면서 얼마나 찔렸을까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 예수님도 다 아시면서 배신했기 때문에 더 아픈 마음이 깊어져 사랑이 된 것을 예수님은 뚫어보시고 이런 것 저런 것 말씀 다 안하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용서, 깊은 사랑을 다시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속으로 울었을 것입니다.

이 기억 때문에 베드로는 그렇게 핍박을 받으며 종말을 이야기하면서도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해야 하며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절에 보면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하면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 네로 황제의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가장 극심한 때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마도 종말을 준비하라는 말이겠지요. 그러면서 그는 종말이 다가올 때 맨 먼저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라고 말합니다. 즉 종말 때 기독교인의 할 바, 지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8절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말하면서 사랑이 가장 중요함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종말, 만물의 종말을 말하기 전에 개인의 종말을 말한다면 그것은 죽음이겠지요. 여러분은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보라고 했습니다. 어떤 위암말기 환자는 죽기 전에 봉사활동하고 싶다. 사과 한쪽을 먹고 싶다. 블랙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다. 시원하게 똥을 한번 누고 싶다.

간암말기 환자는 그동안 고생만 한 아내에게 면사포를 씌워주고 싶다. 3분만 속 시원하게 웃고 싶다. 어떤 에이즈 환자는 아내와 함께 낚시를 가고 싶다. 설악산을 오르고 싶다. 친구들과 밤새 수다를 떨고 싶다. 이런 것들을 작성하였습니다. 이런 리스트들이 그들에게는 절실했나 봅니다. 그리고 살펴보면 아내와 친구들, 그동안 사랑을 나누지 못했던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은 욕망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는 아주 가까운 사람이 죽은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도 아직 젊다면 젊은 나이라 죽음에 대해서 이전까지는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고 솔직히 인류의 종말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사랑하는 교회교우들이 임종을 맞을 때, 아니 제 노쇠한 어머니가 아프실 때 죽음을 생각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찾아오는 생각은 살아계실 때 많이 사랑할 걸, 잘 해드릴걸, 이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는 끔직한 9.11 테러 사건과 세월호 사건을 뉴스를 통해서 접했습니다. 그 당시 죽은 사람들이 죽음이 다가오는 공포를 느끼면서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했는데 그 내용이 다 사랑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돈 꿔준 것 받아내라. 엄마 공부만 하라더니 이렇게 허무하게 죽잖아요. 그런 원망도 아니고 사랑해이 한 마디였습니다. 엄마 내가 말 못할까봐 보내 놓는다. 사랑한다. 엄마아빠 배가 기울고 있어 보고 싶어 사랑해, 얘들아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다 용서해줘 사랑한다.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 같아 근데 나는 아마 살 수 없을 것 같아. 여보 사랑해, 아이들 잘 부탁해.

 

 

StartFragment 20세기 기독교의 최고의 사상가라고 불리는 C.S. 루이스라는 사람은 그의 책 <네 가지 사랑>에서 사랑을 네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말로 애정(affection), 우정, 에로스, 자비입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사랑, 즉 가장 기본적인 사랑인 필요를 채우기 위한 사랑을 애정으로, 그리고 가장 덜 본능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같은 방향을 향하고 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을 우정으로, 일반적으로 사랑에 빠지다 라고 표현되는 연인들 간의 사랑을 에로스로, 그리고 위의 이 세 가지 사랑을 뛰어넘고 가장 온전한 신의 사랑을 자비로 나누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애정과 우정 그리고 에로스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괴적인 속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 파괴적인 속성들이 상대방을 구속하고 다른 이를 분리시키는 악한 이기적 집단이 되고 서로가 서로의 인격과 개별성을 무시하고 삼켜버리는 탐욕스러움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신이 되어 버린 사랑은 악마가 됩니다.” 결국 애정, 에로스, 필리아 같은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으로 전락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그 사랑은 악마와 같은 것이 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마지막으로 말한 자비는 모든 이전의 사랑이 끝까지 그 온전함을 잃지 않도록 만드는 것으로 오직 필요한 것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즉 제가 고민했던 완전한 사랑은 인간의 사랑에선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라고 해서 다 사랑은 아닙니다. 동물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다릅니다. 동물의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을 붙일 수도 없죠. 그들은 철저히 본능에 이끌리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본능에 따라 배고픈 충동, 암놈을 보면 일어나는 충동만 만족시키면 그만 이예요. 거기에 이성이나 감성은 없습니다. 여러분 동물의 왕국을 잘 보십니까? 저는 가끔씩 보는데 동물의 왕 사자에 관한 것을 보게 되었어요. 사자들은 10에서 20마리 정도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가장 힘센 사자가 암놈사자 여러 마리를 거닐고 다니는 데 그래보았자 그 우두머리 사자가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길어야 2년밖에는 가지 않는데요. 조금만 힘이 약해지면 다른 젊은 숫 사자가 와서 덤벼서 점령을 해버린 답니다. 그런데 이 새 숫 사자가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젖먹이 새끼 사자들을 모두 물어 죽인답니다. 그리고 이전의 암사자들은 새 우두머리 사자의 아내가 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사자들의 세계는 이성과 감성이 통하는 세계가 아니라 본능과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또 재미있게 본 것은 아프리카 대지에 가뭄이 들어서 모든 짐승들이 굶주리는 상황이었는데 한 암사자가 들소 같은 것을 사냥해서 잡았어요. 그런데 땅에서 먹으면 하이에나 같은 동물들이 달려들어 먹잇감을 뺏기니까 먹이를 물고 나무에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 카메라가 클로즈업해서 보니까 그 암사자가 등뼈가 부러져서 나뭇가지에 축 늘어져서 죽어 있는 거예요. 내려오다가 나뭇가지에 등뼈가 부러졌나봅니다. 그런데 그 먹잇감은 다른 동물들(치이타, 표범같이 생긴 것이)이 와서 뺏어가고 암사자의 시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른 사자들이 어슬렁거리더니 와서 뜯어먹더라고요. 동물들의 세계는 이렇습니다. 정에 이끌리는 세계가 아니고 이성이 없고 본능과 욕구만 만족하면 되는 세계입니다.

반면 우리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고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본능을 이성에 의해서 통제할 수 있고 감성에 이끌리는 사랑입니다. 가끔 동물보다 못한 사람도 있죠.

 

노트북이란 영화를 아시는지요, 2004년에 한번, 201611월에 재개봉되었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베스트셀러소설을 영화화 한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인데 저는 감동적으로 봤습니다. 한 남자는 상식적인 보통 남자입니다. 그런데 한 여자를 평생 사랑하는 것을 사명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여자는 부잣집 딸이었고 여름휴가차 시골에 왔다가 그 남자를 만나 서로 열렬하게 사랑을 하게 되고 집안의 반대로 헤어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 사랑의 결실을 이룹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자기가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고 한 남자를 사랑했다는 것을 기억을 못합니다. 노인성 치매에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된 그 남자가 치매에 걸린 여자에게 책을 읽어주겠다고 접근해 소설을 읽는 것처럼 자신과 치매를 앓는 부인의 사랑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잠깐 기억이 돌아왔다가 다시 기억을 잃는 자기 부인, 자기 부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지만 기억을 잃어 남이 되어 버린 그 장면들이 참 안타깝고 눈물겨웠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기억이 잠시 돌아온 그 여자와 남자주인공이 병원 한 침대에서 같이 잠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거였습니다.

 

저는 남녀 간의 사랑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화를 보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렇게 평생 사랑을 할 수 있구나. 평생을 사랑하고 같이 죽음을 맞는다면. 그것도 축복받은 인생 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치매를 앓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고 자식마저 남같이 되어 버린 것이 안타깝지만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노력이 사랑의 기억을 되돌리고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같이 죽음을 맞는 것. 실화에 있었다니 이런 사랑도 가능하단 이야기겠죠.

 

그래서 저는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이 하는 사랑에 완전한 사랑이 있을까. 뭐가 사랑일까. 이 영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랑이 삶의 이유입니다. 사람은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웃기도 합니다.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죽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곧 생명과도 같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사랑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으로 태어나서 사랑하며 살다가 또 사랑하며 죽습니다. 시와 노래, 문학의 주제는 대부분 사랑입니다. 우리나라 가요의 가사내용도 대부분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원수에게도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저는 영화 벤허를 보고 그것을 느꼈습니다.

벤허, 2016년 작품이 나온 것 아십니까. 저는 2016년 추석 때 영화관에서 보았는데 50년 전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것입니다. 많은 논란이 있으나 저는 어쨌거나 아주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하려는 주제가 용서와 화해였다는 것에 많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 아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귀족 가문의 왕자인 유다 벤허와 그 가문에 입양된 메살라, 이 배다른 형제가 그 당시 사회 정치 구조 속에 얽히면서 원수가 되어 복수를 하는 내용입니다. 유다 벤허는 억울하게 로마에 반대하는 극우파 세력을 도왔다는 누명으로 가문이 몰락하고 노예 신세가 됩니다. 그렇게 된 데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성공만을 향해 달리는 메살라의 역할이 컸습니다. 유다 벤허는 배의 노를 젓는 노예생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채찍질 맞아가며, 쇠사슬에 묶인 채로 짐승보다도 못한 그 생활을 견디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중간 생략하고, 어쨌든 살아남아 복수를 할 기회가 생기는 데 그것이 바로 전차 경주입니다. 참 명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경주에서 유다 벤허가 결국 승리하여 명예를 회복하고 부도 얻게 되는 데 중요한 것은 그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벤허가 인생에서 살짝살짝 마주쳤던 예수님, 돌에 맞고 있는 사람을 보호하셨던 예수님, 벤허가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고 있을 때 물을 먹여 주셨던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말씀하시고 돌아가신 장면을 보고 유다 벤허는 흐느껴 웁니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메살라 한테 입니다. 전차 경주에 져서 다리가 불구가 된 메살라, 이제는 자기한테 분노하고 또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메살라. 그에게 벤허는 말합니다. 메살라, 네가 우리가 이렇게 되기 전, 옛날 청년시절에, 내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 의식을 잃은 나를 엎고 그 먼 거리를 달려 집으로 갔던 것, 그리고 내가 낫기를 바라면서 네가 믿고 있는 신상을 보며 기도했던 것, 그 때 기억나니, 더 이상 살생은 안 돼 하면서 자기를 죽이려는 메살라를 부둥켜안고 벤허는 웁니다. 그들은 같이 웁니다. 예수님의 사랑처럼 예수님의 용서처럼 사랑과 용서와 화해가 일어나고 영화는 가족도 찾고 다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우리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가족입니까. 친구입니까. 친지입니까. 교회교우들입니까. 원수라고 하지만 잘 기억해 보세요. 그들과 사랑을 나눈 기억들, 사랑을 받은 기억들이 꼭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못할 원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빚진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의 사랑으로 이렇게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왜곡해서 잘해주고 그것을 이용해서 자기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이 말씀의 뜻을 잘 새겨야 합니다. 사랑의 빚은 제일 우선적으로 복음의 빚을 말합니다. 우리에겐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해야 할 이유, 이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성공의 멋진 이유, 멋진 목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사랑해야 하는지 항상 숙제처럼 우리의 의무처럼 마음에 새기고 간직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제로섬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시스템이나 사회전체의 이익이 일정하여 한쪽이 득을 보면 반드시 다른 한쪽이 손해를 보는 상태를 제로섬이라고 합니다. 게임에서 이 이론 이 나왔는데 서로 영향을 받는 관계 안에서 모든 이익의 총합이 항상 제로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10억을 가졌다면 어떤 사람은 마이너스 10억입니다. 그래서 총합은 0입니다. 게임에선 내가 승자가 되면 10억을 가질 수 있더라도 패자는 마이너스 10억입니다. 그래서 이 이론으로 미국경제를 점검한 제로섬 사회라는 책도 있습니다.

저는 제로섬이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우리 안에 빚진 자의 마음이 정말로 절실히 필요한 시대임을 절감했습니다. 우리의 가진 것이 모두 우리의 노력만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회에 대한 채권자 의식이 있을 때 사회가 밝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선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가진 자들의 도덕적 의무입니다. 이 어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14세기 백년 전쟁 때 프랑스의 도시 칼레가 영국군에게 항복을 하게 됩니다. 영국왕은 항복 사절단을 보내서 칼레의 모든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는 그동안의 반항에 책임을 져야한다. 그러니 이 도시의 대표 6명은 목을 매 처형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래서 칼레시민들이 모두 혼란에 빠졌는데 그때 칼레시 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처형을 자청하고 뒤이어 시장, 상인, 법률가등의 귀족들이 처형을 받겠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영국 왕과 왕비가 이들의 희생정신에 감복하여 살려주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도 빚진 자의 마음, 채권자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엄마 리더십이었습니다. 먹이시고 씻기시고 자녀를 돌보기 위해서는 목숨도 내거는 엄마와도 같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서 어머니의 이미지, 엄마의 이미지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은데 구약성서에서도 하나님은 단지 부성적 요소만이 아니라 모성적 요소도 지닌 분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식을 위로하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십니다.

구약의 이사야서에서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49:15).

하나님 아버지를 어머니로 이스라엘을 젖먹이로 비유하시고 그만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10개월을 자기 태에서 품고 자신의 젖을 물린 자식을 어찌 사랑하지 않으며 어찌 불쌍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애간장이 끊어지는 사랑이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 어머니는 설혹 자식을 잊을 수가 있어도 하나님은 절대 잊으시지도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사랑의 절대성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호세아서에도 하나님을 어머니로 묘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호세아서 11장 첫째부분을 보면 하나님을 어린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의 일상적 행위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111절에,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 3절에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것을 어머니가 지금 걸음마를 하고 있는 자식을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십니다. 이것은 개역개정의 표현이고 공동번역을 보면 더 적나라하게 표현이 됩니다.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그러나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바알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향을 피워 올렸다. 걸음마를 가르쳐주고 팔에 안아 키워주고 죽을 것을 살려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 인정으로 매어 끌어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에 비비기도 하며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호세아서 11:1-4, 공동번역).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할 때 안아주고 걸음마, 걸음마 하면서 가르쳐주고 너무 귀여워 볼에 비비기도 하고 먹을 것을 입에 넣어주고 하는 행동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사랑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이것을 몰라주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제시한 하나님은 어린아이를 자궁의 진통 끝에 출산하여 가슴에 고이 품어 젖을 먹이며, 팔에 안아 키워주고 걸음마를 가르쳐 주며, 우는 아이를 달래주고 양육하는 자상한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부성적인 하나님, 불의에, 우리의 죄에 진노하고 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녀를 너무 사랑하고 아껴 목숨까지도 버리는 어머니 아니 엄마의 이미지로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자녀를 사랑하듯이 우리를 보호하고 돌보시는 예수님을 닮는다면 예수님에게서 배운다면 우리 가정도 기업도 이 사회도 이 나라도 하늘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겐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겐 엄마가 필요합니다. 따뜻하게 품어주는 엄마, 말없이 희생하는 엄마, 나를 언제나 배려하는 엄마, 그런 엄마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그런 엄마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이 돌봄의 가치는 기독교에서가 아니라 이제 이 세상에서 부각되고 있는 가치입니다. 이 돌봄의 가치는 이미 논의 되어 온 것입니다. 여성도덕철학자 길리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여성은 여성의 도덕성은 남성과 다르다. 여성은 돌봄의 윤리, 남성은 정의의 윤리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의의 윤리는 개별적이고 분리된 자아 개념과 공평한 객관성, 공평무사한 규칙 혹은 원리에 대한 선호로 특징지어질 수 있고 반면 여성의 돌봄의 윤리는 타인과 연결되고 상호의존적인 자아 개념, 친밀한 관계에 기초한 정체성, 타인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해롭게 하지 않으려는 민감성, 자신 및 타인의 행복에 대한 관심, 구체적인 상황에서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관심을 특징으로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여성철학자는 도덕적 성숙은 이러한 두 지향성의 종합, 혹은 통합에 의한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돌봄과 돌봄이 없는 정의는 도덕적으로 불충분하다고 정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성의 후기저작에 보면 도덕적 성숙은 정의 지향성보다는 돌봄 지향성이 더 우월한 것이고 우선적으로 획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의 지향적인 것이 더 성숙한 걸까요. 돌봄 지향적인 것이 더 성숙한 걸까요. 솔직히 옛날에는 여성은 도덕성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도덕적으로 결핍된 열등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이제는 여성의 가치, 여성의 도덕성을 새롭게 부각시킵니다. 그러나 아직도 기업문화는 원칙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기초합니다. 이것을 성숙한 것으로 여기는데 이제 대세는 달라졌습니다. 관계가 중요하고 돌봄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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