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성에서 나오는 돌봄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라는 책에 예화가 나오는데 회사를 돌봄의 환경으로 전환하여 죽어가는 회사의 매출액을 2배 이상 증가시킨 이야기가 나옵니다. 밥 채프먼 이라는 사람이 배리웨밀러 사의 CEO인데 재무상태가 부실하고 기업문화가 아주 형편없는 회사를 사들였습니다. 이 사람이 제일 먼저 한 것이 직원들과 함께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CEO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조직의 리더가 먼저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고 먼저 신뢰를 얻기 위해 실천을 했습니다. 사람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말이 뭐가 대단한 도덕적 가치이냐 할지 모르지만 조직에서 사람들은 매출액 향상을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밖에 안 여기는 리더도 많습니다. 이 사람의 사고방식은 리더는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한다. 한 직원이 회사에 들어오는 것은 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회사는 마치 한 집안처럼 느껴지게 되고 직원들 사이에서 서로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소속감을 느끼고 편안하고 존중받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직원들은 내가 돌봄을 받는다고 느끼는 만큼 다른 사람을 돌보기 시작했고 이렇게 서로 돌보는 환경덕분에 직원들은 머리와 가슴을 모두 회사에 헌신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회사도 매출도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일례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이 회사에 있습니다. 시간제 직원 한명이 아내가 당뇨병을 앓고 있어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 직원은 아내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가뜩이나 시간제로 근무하는데 시간을 줄인다면 임금이 줄어 들 것 같아 일을 줄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동료들이 서둘러 대책을 세워 이 직원이 휴가를 더 쓸 수 있도록 자신들의 유료 휴가일을 넘겨준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어 직원들이 회사에 더 헌신했고 그 이유가 매출액이 오르고 회사가 성장한 큰 이유라고 저자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의 저자 TED 동영상의 최고 강사인 사이먼 사이넥의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리더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는 리더라는 존재를 얘기할 때 엄마라는 존재, 돌봄의 가치를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좀 경시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새롭게 부상하는 리더십은 돌봄 리더십 이라는 것입니다. 조직의 성패가 경영의 수완이 아니라 뛰어난 리더십에 기초하는데 리더는 언제나 구성원들에게 집중해야 한다.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이먼은 미 육군, 특히 해병대를 예로 드는데, 미 해병대는 식사시간에 최하급자가 가장 먼저, 최상급자가 가장 나중에 배식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결코 명령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아주 간단한 행동 속에 리더십을 보는 해병대의 시각이 들어있습니다. 리더는 마지막에 먹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필요보다는 부하들의 필요를 보다 우선하는 마음가짐의 표현이며 부하직원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자신의 사리사욕은 희생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저는 이것을 읽으면서 엄마를 떠올렸습니다. 보통 엄마들은 남편이나 자식이 다 먹고 난 후 먹습니다. 그래서 남은 음식, 찌꺼기를 먹습니다. 그 양이 모자라도 신경 쓰지 않고 많아도 신경 쓰지 않고 그것이 내 몫이려니 하면서 먹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엄마들은 뚱뚱합니다. 처녀 때 그렇게 예쁘고 날씬했던 사람들이 엄마만 되면 펑퍼짐해집니다. 운동으로 신경 쓰지 않은 이상 운동할 시간도 없죠. 어쨌든 다 뚱뚱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돌봄 때문 입니다.

그런데 제가 중요한 것을 깨달았는데 엄마는 항상 맛있는 거 다 양보하면서 내가 너를 위해서 주는 거야, 나는 찌꺼기만 먹는 신세, 하면서 불평불만 신세한탄 한번 하신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엄마는 원래 그러는 사람 원래 마지막에 먹고 맛있는 거는 다 양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어요. 우리는 보통 그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아버지도 제일 먼저 식사를 하시면서 맛있는 것은 살짝 우리들에게 밀어주시기도 하고 애정을 표현하시지만 엄마랑 차이점은 아버지는 이렇게 하시고 생색을 내십니다. 그래서 제가 깨달은 것이 희생에서 나오는 돌봄은 여성에겐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남자는 본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무조건적 수용을 받은 그 여자 어떻게 되었나요. 학자들은 이 간음한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눈물로 예수의 발을 닦은 사람이 이 사람이라 말하고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을 끝까지 지켜보고 따라다니며 장사하고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까지 처음 직접 목격한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돌에 맞는 처벌을 받았다면 다시는 그 트라우마 때문에 간음을 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행동은 고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영혼은 자기를 때린 사람들을 저주하며 고통 속에서 살았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사랑 많은 사람, 사랑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는 이 여성의 예수님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 순수한 사랑 한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자 제자들과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가롯 유다 돈 몇 푼에 예수님 팔았습니다. 그렇게 사랑한다던 베드로, 예수님 세 번 부인하고 도망쳤습니다. 다른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왜 그랬냐면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 순수하게 따라 다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대단한 것 같고 민중들이 쫓아다니니까 자기도 뭐가 된 것 같고 나도 한자리 하겠지 이런 생각이 내심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힘없이 잡히시니까 다 도망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끝까지 지켜보았던 막내제자 요한은 어떻습니까. 이 사람은 뭐가 달랐을까요. 아닙니다. 어머니를 시켜 예수께 주의 나라에서 높은 직책을 달라고 대놓고 요구할 만큼 야심이 큰 자였습니다. 한자리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남자제자들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남자는 power 지향적, 목적 지향적이고 여자는 관계 지향적입니다. 이미 다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남자 제자들이 나중에는 다 변했지요. 나중에는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막달라 마리아라고 추측되는 이 여성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성은 자기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해 준 예수님이 그냥 좋아서, 그저 감사해서 그리고 그 십자가의 고통을 지신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파서 끝까지 곁에 있어드리고 싶어서 따라다닌 것입니다. 한자리 하고 싶고 나도 예수님 잘 따라다녀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려야지 이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간음하다 잡혀 돌에 맞아 죽을 뻔한 나를 살려주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을 때도 그 여자에 대한 무리들의 시선이 오죽했을까요, 그 온갖 소리 없이 날라드는 선입견, 편견의 돌들로부터 나를 막아주고 감싸주고 수용해 주신 예수님, 그저 그것이 고마워서 그것이 감사해서 따라다니게 되었고 곁에 있어드리고 싶고 그 곁을 떠나고 싶지 않고 예수님의 고통 다 이해할 수 없어도 고통당하는 그 모습 그저 그것이 너무 가슴 아파서 눈물겨운 사랑이 되어 버리지 않았을까요. 남자 제자들처럼 한자리 하고 싶고 영광을 받고 싶고 그것은 안중에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고 봅니다. 너무나 순수한 사랑이고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그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값비싼 옥합을 깨뜨려 눈물로 발을 닦아 드리고 예수님이 온갖 천대와 멸시와 모욕을 받을 때도 채찍에 맞을 때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을 때도 끝까지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이 부활해서 나를 인정해 주시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끝까지 함께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님을 제일 사랑한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부활한 모습을 제일 먼저 보이십니다. 이제 이 여인에게 주목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 소중한 사랑, 우리 가슴 속에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정말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중의 희생양이 될 뻔한 한 여인이 이젠 예수님의 곁을 지켜드린 그리고 처음으로 부활을 목격하고 그것을 전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간음한 여자를 사랑 많은 여자로 변화시킨 예수님도 대단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소리 없이 날라드는 돌들, 보이지 않는 돌들에 맞아 아직도 고통 받는 여성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된다고 봅니다. 처벌과 정죄가 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이 희생양이 된 여자를 구하고 어떻게 이 시험을 빗겨갈 수 있을까. 이제부터 예수님의 행동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여성해방운동선언문. 어떤 사람은 돌로 치려 한 사람들의 죄목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무엇을 쓰셨던 간에 예수님은 시간을 버셨습니다.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응대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판단 보류하셨다는 것입니다. 흥분한 무리들 앞에서 예수님도 흥분에서 네 까짓것들이 나를 시험하려 드느냐, 간음한 남성은 어디 있느냐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렇게 했어요. 예수님은 저 같은 일차원적 사람이 아니고 수가 대단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의 지연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일단 흥분한 군중의 마음이 수그러들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일말의 여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판단을 유보하게 됩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그 틈을 비집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돌을 놓고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예수님 너무 멋지지요. 희생양이 될 뻔한 여성도 구하고 시험도 통과하고 심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까지 느끼게 하셨으니 까요.

그런데 이 다음 행동이 더 아름답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이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상담을 하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저는 이 말씀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이었고 그런 위치에 계신 분이었지만 아무런 판단 없이 이 여자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십니다. 상담학에서 무조건적인 수용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상담자가 좀 더 조건적이고 요구하는 태도를 가지면 상대방의 행동을 치료하고 변화시키는데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상담을 행동을 변화시키는 활동이라고 본다면 이 주장이 맞지만 상담을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라고 보고 인격의 변화까지 꾀할 때는 무조건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건을 걸고 행동은 치료할 수 있지만 그 인격은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수용이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죄에 대한 처벌 보다는 한 영혼의 변화가 중요했습니다.

 

 

오늘 성경의 이 간음한 여자는 결국 이중 잣대의 희생양이었습니다. 부끄럽게도 현장에서 그냥 잡혀 끌려왔습니다. 사람들이 이 여자만 돌로 쳐 죽이려 합니다. 그렇다고 드라마에서는 여자가 주인공이라도 했지만 이 여자는 주인공도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여자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관심의 대상은 예수님, 최종적으로 죽이려고 했던 대상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솔직히 간음은 모르는 비밀공간에서 합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붙잡혔고 더군다나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붙잡혔다는 것은 계획적이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빌미를 잡으려고 벌인 교활한 음모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가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지 시험해서 그것을 빌미로 예수를 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여자는 중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이 간음한 여자는 이중 잣대의 희생양 그리고 교활한 음모의 또 한 번의 희생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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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간음한 여자이야기가 있습니다. 보통 이 이야기의 주제를 간음한 여자라도 용서해주시는 예수님, 정죄하지 않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으로 단순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은 이 점을 많이 부각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생각해 볼 것이 많습니다.

일단 이 여자는 간음한 현장에서 잡혀 왔습니다. 그런데 간음한 남자는 어디 갔는지 여자만 끌려왔습니다. 율법에 간음한 여자와 남자는 다 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010절 말씀에 보면,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기록하고 있고 신명기 2222절에도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에 대해서 남자에게는 관대하고 여자에게는 엄격한 이중 잣대가 그 당시 현실이었습니다. 요즘은 어떤가요. 저는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얼마 전에 인터넷 기사를 읽고 작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요즘엔 남녀 간의 새로운 이중 잣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즘 나이 많은 여자 연예인들은 살아남기가 힘들답니다. 작가들 사이에서도 예능에서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자 A급보다 남자 B급을 쓰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즉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자들은 주로 여자인데 여성시청자들은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 시청자들도 예쁜 여자가 아니면 무관심하고, 나이든 여자나 똑똑한 여자는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나이 들고, 똑똑하고, 예쁘지 않은 여자가 망가지고 몸 개그를 하면 나댄다고, 상스럽다고 욕하고, 남성 출연자가 하면 와 제대로 한다고 칭찬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남자는 비난을 받더라도 그걸 아예 토크나 코미디 소재로 써먹으면서 치고 나가는 반면, 여자는 뭘 해도 남자보다 훨씬 욕을 많이 먹기 때문에 나쁜 경험이 쌓이면서 위축된다는 것입니다. 남성 출연자가 세수 못하고 부스스한 머리로 나오면 귀엽다고 하지만 여성 출연자가 화장 안하면 못생겼다고, 또 화장을 하고 나오면 작위적이라고 비난한답니다. 즉 같은 B급의 남자, B급의 여자 연예인이라도 다른 이중 잣대가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남자에게는 진정성을 부여하고 여자는 그 가치를 폄하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글을 읽고 남 얘기가 아니다. 나도 세상에 나가면 B급도 안되고 C, D급인데. 온갖 가치폄하와 선입견과 편견에 시달리겠구나. 이런 현실을 새롭게 각인하게 되어 서글퍼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남녀 간의 이중 잣대가 사회적으로 이슈화 된 적이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애정의 조건이라는 드라마 때문이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30%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많은 화제가 된 드라마입니다. 드라마 주인공이 채시라이고 채시라 동생으로 나오는 사람이 한가인 이었습니다. 이 두 여성의 삶이 기구해지고 위험에 처하게 되는 스토리입니다. 이야기인 즉은, 채시라의 남편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외도에 충격을 느낀 이 채시라가 옛 남자 친구와 밤을 보냅니다. 이게 발각되어서 남편으로부터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한 채 이혼을 당하는 데 어찌어찌 우여곡절 끝에 재결합을 합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바람피운 사실에 기겁을 하면서 이 여자를 다시 내치려하고 결국 이 여자에게 풍파가 지속됩니다. 시어머니는 남자의 외도는 가당해도 여자의 맛 바람은 가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같은 여자가 더 무섭습니다. 동생으로 나온 한가인도 어릴 적에 동거하고 유산한 경험이 있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이 여자의 순수하고 청순한 모습에 반해서 결혼하자고 쫓아다니는 남자가 있었고 둘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비밀이 유지되지 못하고 드러나면서 이 여자는 눈물이 마르지 않는 날을 보냅니다. 이 드라마는 해피엔딩이었을까요. 불행으로 치닫고 말았을까요. 결말을 어떻게 그리냐는 것도 그때당시 화제가 되었는데. 그때 여성시청자들이 많이 분노했습니다. 작가가 그 세태를 반영하여 드라마는 결국 해피 엔딩으로 끝났습니다.

 

 

사람들이 변화되는 데는 저마다의 각성사건이 있습니다. 위대한 일을 한 인물도 변화의 모티브가 된 각성사건이 있습니다. 간디 같은 경우는 1893년 압둘라 회사의 초청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여행할 때였습니다. 간디는 이 회사가 끊어준 일등칸 표를 가지고 기차에 올랐는데 한 승객이 간디가 유색인이라고 역무원을 불러 다른 칸으로 옮기라고 시킨 것입니다. 이에 간디가 거절을 하자 그 역무원이 경찰을 불렀습니다. 그 경찰은 간디와 간디의 짐을 기차 밖으로 내동댕이쳤습니다. 이 때 간디의 뇌리 속에 떠오른 것이 자신의 비참한 모습이 아니라 인도인들을 비롯해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유색인종들의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간디는 남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유색인종 전체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금세기 최고의 CEO로 떠오른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영입한 경영진에 의해 퇴출당한 일이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각성사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사건, 위대한 일을 하게 된 동기가 된 사건을 우리는 각성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어쩌면 삶은 끊임없는 저항입니다. 하나님은 패배의식, 열등감, 무기력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저항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주저앉고 무기력해 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저항하고 도전하는 것이 가능하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믿음자체가 무기력, 패배의식, 열등감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저항을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행동이 동물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실제 실험한 것이 있습니다. 한 행동심리학자가 실험을 했는데 동물들도 자신이 지배하지 못하고, 즉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이 강요당할 때, 그것에 저항하려는 욕구가 짝짓기나 먹는 것과 같은 생존 본능보다 더 강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 <사이언스>라는 논문에 그렇게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흰밭 들쥐를 잡아서 실험실에 가둔 뒤 실험상자안의 불을 껐습니다. 그런데 들쥐들이 그 불을 켜기 위해 내내 안간힘을 쓰더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 불을 켰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쥐들이 그 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쓰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쥐들은 어떤 실험조작을 하든 그 실험 조작에 저항하는 데 모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한다는 것입니다. 쥐들은 단순히 저항을 위해 저항했습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왜 들쥐는 이유 없이 실험 상황에 계속 저항하는 것일까? 이 현상에 대해 셀리그만이라는 학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능력에의 욕구나 외적 강제에 저항하려는 욕구는 바로 다름 아닌 무기력을 회피하려는 욕구다. 본능처럼 무기력으로부터 회피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무기력하지 않고 능력 있음을 증명하려고 저항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인생도 인류의 역사도 저항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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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신앙은 저항이다. 믿음은 저항이다. 감히 이런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저항과 순종 중 어떤 것이 믿음의 태도인가 묻는다면 저는 저항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항이란 단어에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항하면 우리나라의 독특한 역사 때문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데모운동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저항은 권력에의 저항뿐만 아니라 폭넓게 삶에의 의지, 주님께 나아가려는 의지조차도 저항이라고 봅니다.

,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으로부터의 저항, 삶의 장애물들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몸부림으로서의 저항, 삶의 어두운 곳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저항, 짓누르는 질병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저항. 무기력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저항, 주저앉고 싶을 때 일어서고자 하는 저항. 이 모든 것이 삶에의 의지이고 이것은 저항성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현재보다 퇴보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원합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려는 몸부림, 그 속에서 우리는 저항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은 일종의 소망, 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될까요? 꿈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종의 향상심(向上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니체가 먼저 한 말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그러기 위해서 세상이라는 들판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불가피하게 경쟁 속에 뛰어듭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저항적 신앙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우리는 현실의 무서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을 빌려오고자 하는 의지가 생깁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그래서 신앙은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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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자기의 고향을 떠났습니다.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한 민족이 태동되었습니다. 이삭은 매번 우물을 팠으나 방해군의 공작에 반응하지 않고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우물 판 모든 지역의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한나는 자기의 애지중지한 자식, 하나님께 절절히 기도드려 낳은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고 포기했는데 그로 인해 한 민족의 지도자, 선지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고난으로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자신을 인신매매했던 형들에 대한 미움을 버렸는데, 그로 인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 자신의 아들들까지 상속을 받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에스더는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각오하고 기도로 왕에게 나아가 자신의 유대민족을 살리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욥은 끝까지 쥐고 있었던 자기 의를 버리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갔는데 마침내 축복을 갑절로 받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지배국의 장군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한 선지자의 말에 복종했는데 그로 인해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업으로 삼았던 그물을 버렸는데, 그로 인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던 율법을 버렸는데 그로인해 사울이 바울이 되고 그리스도를 위한 사람으로 변해, 대륙을 누비며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영광을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그로 인해 기독교가 탄생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적인 집착을 포기해야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집착 그것이 뭘까요. 자기가 아끼는 소유물일 수도 있고, 자식, 부모일수도 있고, 자신의 자존심일 수도 있고, 세상에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자신의 능력, 실력일 수도 있고, 자신의 오만에서 나오는 미움, 증오 일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흔드실 때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적인 집착, 타성, 아집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더 정결하게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더 큰 복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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