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이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신의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쓴 책 <인생수업> 처음부분에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어느 40대 초반의 여성의 경험담입니다. 혼자서 차를 몰고 시내 외곽을 달리고 있는데 고속도로 중간쯤 갔을 때 앞서 달리던 차들이 갑자기 멈춰 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미러를 보니 뒤에 따라오던 차 한 대가 전혀 정지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달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차는 전속력으로 돌진해 왔습니다. 아마도 그 차의 운전자가 순간적으로 한눈을 팔았던 것 같은데 곧 그 자기 차를 강하게 들이받으리라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험한 상황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때 그 여성은 의식적으로 운전대를 꼭 움켜쥐고 있던 자기 손을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여성은 이것이 내가 이때까지 살아온 방식이구나 싶어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도 않고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에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운전대를 움켜쥐고 있던 양손을 내려놓았습니다. 운전대를 놔버린 것입니다. 그리곤 삶에 아니 죽음에 순순히 자신을 맡겼다고 합니다. 그리곤 뒤이어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는데. 그 여성 어떻게 되었을까요. 차는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는데 그 여성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몸에 힘을 뺀 것, 몸의 긴장을 푼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고 말했답니다. 몸이 긴장했으면 크게 다쳤을 거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여성이 늘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살아왔지만 이제는 손바닥 위에 부드러운 깃털이 놓인 것처럼 평화롭게 손을 편 채로도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쥐면 쥘수록 잃고 다치고 멀리 못가는 것이 인생인 것 같습니다. 움켜진 손을 폈을 때, 힘을 뺐을 때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가 힘을 뺄 때, 내려놓을 때, 우리의 권리를 포기할 때 오는 것입니다.

유명한 정신의학자 데이비드 호킨스박사는 그의 책 <놓아버림>에서 놓아버리면 성공할 수 있다이렇게 말합니다. 항복이야 말로 완전한 성취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가 노력기제라는 밧줄을 이미 끝까지 당겨 보았다, 그러나 원하는 곳에 닿기 위해 열심히 당겨 봤자 밧줄만 점점 더 너덜너덜해질 뿐이다. 이제는 더 쉽고 편한 길이 있다, 바로 그것이 그 밧줄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심리학의 용어로 노력기제 대신 항복 기제를 써보라는 것입니다. 고통의 주 원인이 우리가 뭔가에 집착하는 것, 애착하는 것이라면 놓아버림 기법은 마음속 애착과 걸림돌을 없앨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하면 일단은 육체적인 면에서 건강에 이롭고, 행동 면에서 부정적 감정이 점차 줄어들면서 약물, , 오락, 지나친 수면들에 의존했던 사람들은 그것에 벗어나고 활력과 기운을 찾고 그럼으로 인해 대인관계도 좋아지고 이것을 끊임없이 실천하면 의식과 자각, 영성에 눈을 뜬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점차 놓아버림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놓아버림의 방법은 높은 영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중에서 가장 효과가 뛰어나다 라고 말합니다.

 

 

인생을 사는 목적이 뭘까요. 편안한 삶, 안락한 삶, 행복한 삶, 이러한 삶을 누리기를 갈망하면서 우리는 인생을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 안주하면 변화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느새 편안함과 안락함이 주는 타성에 젖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성장도 멈추어 버리지는 않는지요. 하버드대 인생학 명 강의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변화하려고 굳이 애를 쓰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되는 대로 살아가지요. 물론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근본 원인을 꼽자면 바로 우리의 안락지대(Comfort Zone) 때문입니다. “안락지대란 익숙한 환경과 자신이 잘하는 일, 친한 사람들과의 교류등 한 개인이 살면서 편안함을 느끼는 범위를 말하는데, 사람은 일단 이곳을 벗어나면 불편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안락함이 우리 삶에 독이 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변화가 없고 그에 따라 성장의 기회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개구리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끓는 물속에 개구리를 집어넣으면 개구리는 단번에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따뜻한 물에 집어넣으면 그 따뜻함을 만끽하다가 물속에서 튀어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물은 조금 씩 조금 씩 계속 가열됩니다. 결국 개구리는 소리 없이 익혀져 죽어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물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즐기고 안주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편안함과 안락함에 길들여진다면 우리는 타성에 젖고 게으름과 안주하는 삶에 빠져 성장을 멈추게 되고 멈추는 정도가 아니라 퇴보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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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tFragment 이제는 21세기라, 21세기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드러내야 할 하나님의 이미지는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덕목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뭐가 있을까요.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성경의 인물 속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네 가지인데 바로 따뜻함, 착함, 당당함, 반듯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이미지를 좌우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이미지로 전도하면 전도도 잘되고 세상에 나가서도 승리하고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욕을 먹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이미지 전략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형상 닮은 이미지로 세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제가 성경에서 힌트를 얻은 인물은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이미지를 어떻게 드러내고 그들의 무엇이 하나님 닮은 것인지 그들의 비하인드 스토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 말고 잘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 느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의 이미지, 따뜻함 우선 아브라함은 대표적인 이미지가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훌륭하지만 물론 인간적인 실수도 했지요. 그러나 그는 참 따뜻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씨가 없자 엘리에셀이라는 자신의 종을 상속자로 삼으려 합니다. 요즘에 이런 일이 있으면 따뜻한 이야기 훈훈한 이야기하면서 신문에 나고 매스컴에 났을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었냐면 종을 고향땅으로 보내 아들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데려오게 합니다. 며느리를 구하는 일을 직접 나서지 않고 종에게 의뢰합니다. 자신이 부리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정말 단단합니다. 참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도 참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고향 아비집을 떠날 때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고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을 때 먼저 땅을 양보하고 또한 롯이 다른 족속의 왕에게 사로잡혔을 때 훈련된 자 삼백십팔명을 거느리고 가서 조카 롯을 구하고 결국은 조카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되자 하나님께 의인이 50명이 있으면 됩니까, 45명이 있으면 됩니까, 그러다가 10명만 있으면 됩니까, 이렇게 끝까지 타협하는 끈질긴 기도를 한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정말 깊습니다. 요즘에 피를 나눈 가족도 해체되고 있는 판에 자신의 종에게, 자신의 조카에게 이렇게 따뜻한 사람 찾기 드뭅니다. 이삭의 이미지, 착함 이삭은 어떻습니까? 그의 대표적 이미지는 온유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착함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삭은 참 착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사건, 정말 큰 트라우마였을 텐데 그런데도 아버지께 순종합니다. 아버지가 결혼하라는 리브가라는 여자와 아무 말 없이 결혼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그런 일 당하면 아버지 슬슬 피하거나 가출했을 것입니다. 그 때 당시 아버지의 믿음, 아버지의 이상한 행동을 다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착함은 우물 사건에서도 드러납니다. 이삭이 부자가 되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이삭이 우물만 파면 거기를 흙으로 메우는 얄미운 짓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삭이 아무 대응도 하지 않고 다른 데로 옮겨가서 파고 또 파고 그렇게 네 번을 양보하고 결국은 다섯 번째에 가서는 아무다툼이 일어나지 않아 이삭의 지경이 거기까지 넓어지게 된 사건이 있습니다. 이삭은 전쟁을 싫어했습니다. 평화하려고 했습니다. 이삭의 착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야곱의 이미지, 당당함 야곱은 보통 끈기의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보다 야곱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당당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창세기 47장에 보면 요셉이 애굽 총리가 되어 요셉의 형제에 이어 아버지까지 상봉하고 이제는 아버지 야곱을 바로 왕에게 대면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야곱이 얼마나 당당한지, 우리는 보통 왕이 지금 난민의 처지가 되어온 야곱을 축복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이 상식을 뒤엎습니다. 야곱이 바로를 두 번이나 축복을 합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내 나그네 길이 백삼십년인데 짧은 세월이었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면서 당당히 말합니다. 기근을 피해서 양식을 얻으러 온 가난한 이주민이요 난민의 입장인데 조금도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아들 요셉이 애굽의 2인자 총리대신이었다 하나 여전히 바로는 왕이었고 그 당시 왕은 신으로 떠받들던 시대였고 그의 아들의 생명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들 요셉을 위해서라도 바로에게 굽신거려야 할 텐데 그런 모습은 전혀 없고 오히려 바로를 당당히 축복합니다. 야곱은 베짱이 두둑했습니다. 비록 가난했을망정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품위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바로에게 구차하게 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아들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아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들 잘 부탁 드립니다. 굽신 굽신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고 오히려 바로에게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야곱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 모습 속에서도 이러한 당당함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크리스천이라도 고난을 오래당하면 주눅이 들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저는 체험을 통해 이것을 알았습니다. 크리스천은 죽어도 당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이 나에게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내 목을 쥐고 있는 것처럼 세상에 비굴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당당하고 배짱 두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야곱의 세상에 대한 당당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요셉의 이미지, 반듯함 또한 마지막으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 말고 저는 요셉의 반듯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요셉의 삶이 얼마나 기구했습니까. 형제들의 계략으로 노예로 팔려 갔는데 거기서 이젠 좀 인정받으려고 하니까 이제는 그 집의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을 받습니다. 요셉은 그 때 당시 성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인 젊은 남자였습니다. 성에 대해 흔들릴 수 있는 나이였기도 했지만 노예였기 때문에 힘 있는 주인 아내를 감히 거절을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얼마나 반듯한지 이 유혹을 뿌리쳤을 때 자신에게 얼마나 불이익이 온다는 것을 알고서도 유혹을 뿌리치고 억울하게 옥에 갇혀 고생을 합니다. 옥에 갇혀 고생을 하면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감옥에서도 최선을 다해 성실하여 인정받고 형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요셉에게 기회가 오게 됩니다. 요셉은 정말 반듯합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애굽 총리가 되어서도 자신을 팔았던 형제들을 용서하고 끌어안고 우는 요셉을 보면서 이것이 하나님 닮은 이미지지 라고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21세기를 사는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 닮은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람 되길 바랍니다. 저는 그 이미지를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서 찾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따뜻함, 이삭의 착함, 야곱의 당당함, 요셉의 반듯함. 우리가 이 이미지를 닮고 이 성품을 닮아 갈 때 훌륭한 크리스천이 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새 시대의 전도전략은 이미지 전략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 닮으면 우리의 외모도 하나님을 닮아지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이미지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닮아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요즘 취업경쟁이 심하다는 것 아시죠. 저에게는 20대인 조카가 있습니다. 취업준비로 고생을 참 많이 했어요. 그런데 제 조카뿐만 아니라 이 취업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려면 취업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보시면 압니다. 이 나이에 준비해도 되나요 등 별 내용이 많은 데 가슴 아픈 내용도 많습니다. 제 조카도 서류심사에서도 떨어지기도 하고 필기시험에서도 떨어지기도 하고 면접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그런 과정을 겪다가 이 조카가 철저히 준비를 하고 온갖 자격증을 다 따고 영어 토익점수를 높이고 그래서 드디어 서류심사 필기시험까지 합격을 했습니다. 이제 면접이 문제인데 제 조카는 말 주변이 없습니다. 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스타일이 아니예요. 그래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요즘 면접도 중요합니다. 모집정원의 배수를 뽑아 면접에서도 많이 떨어뜨립니다. 제 조카가 필기심사에 합격한 직장도 모집정원의 3배수를 뽑아서 면접에서도 부지기수로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면접 갑질이라는 사설을 신문에서 보았는데 대기업에서는 면접관이 거의 폭력수준으로 취업자들을 비하하고 지방대는 아예 말할 기회도 안주고 성차별은 보통이고 외모를 비하 하는 등 많은 일이 벌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카가 그렇게 면접시험을 걱정했는데 아 글쎄 면접에서도 통과를 하고 취직이 된 겁니다. 그런데 조카가 하는 말이 자신과 함께 서류심사, 필기시험에 통과한 친구는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하는 거예요. 그 친구는 유창하게 말을 잘하는 친구였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 너가 왜 통과한 것 같니, 라고 조카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조카는 자기가 말을 유창하게 잘 못한다는 것을 아니까 이 회사에 들어오면 자기가 얼마나 행복할까 그것을 상상하고 내내 그 표정을 짓고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아마 표정에서, 인상에서 점수를 땄나 봐요. 그래서 유창하게 말은 잘 못하더라도 그 간절한 마음이 전해진 것은 아닐까. 질문에 완벽하게 대답은 못했으나 진정성이 전해진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미스터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카의 믿음 때문이라면 마음이 표정에서 드러나고 마음이 전달된다는 것이 참 중요하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첫인상, 이미지가 중요하다 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사람의 첫인상은 6초 만에 결정되는데 얼굴을 보고 판단하는 시간은 겨우 1초고 나머지 5초 이내에 목소리와 자세, 태도 등을 통해 첫인상이 결정된답니다. 불과 몇 초 동안의 짧은 시간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대에게 이미지가 전달되기도 하고 상대를 판단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세기는 이미지 시대다. 이미지 리더십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이미지가 중요한 경쟁력이 됨을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이미지로 대통령이 된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이미지 리더십이라는 말이 아마 노무현대통령 때문에 나온 말일 것입니다. 청문회에서 5.18 광주사태의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그 때 당시 관련된 정치인들을 날카롭게 청문하는 것이 통쾌했고 약자에 편에선 그 이미지로 인해서 인기가 엄청났습니다. 그것이 대통령이 된 요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이미지가 백 마디 말보다 더 효과가 크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 라고 말씀했는데 솔직히 이 말씀은 엄밀히 말해서 이 시대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판단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은 그 내면이 즉 중심이 외모로, 겉으로, 이미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각각 따로 노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미지는 그 사람의 내면에서 결정되며 그 사람의 내면 상태에 따라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표정을 보더라도 진정 아름다운 표정은 내 의지로 절대 만들 수 없습니다. 진정 아름다운 표정의 열쇠는 하나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선한 이미지를 가지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선한 크리스천의 이미지는 선한 얼굴에서 나옵니다. 선한 얼굴은 선하신 주님의 영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때 우리의 겉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 닮은 이미지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죄책감, 죄의식은 인간에게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의식혁명>이라는 책을 쓴 데이비드 레이먼 호킨스(David Ramon Hawkins, 192763~ 2012919)박사는 모든 의식수준을 척도로 나타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주장은 만물과 사람은 모두 에너지를 방출하는데 그 에너지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라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나오는 사람이 있고 부정적인 에너지가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직감적으로 아는데 예를 들어 테레사 수녀의 에너지는 아돌프 히틀러와 분명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의식수준을 척도로 나타냈는데, 그 에너지 힘을 1에서 1000사이로 나타내고 완전한 깨달음의 수준은 1000인데. 예수나 부처를 1000이라고 한다면 의식의 수준 맨 아래에서 죽음 가까이에 있는 죄의식은 30이고 수치심의 수준은 20입니다. 가까스로 생존하는 정도입니다. 이 죄책감이 의식수준에서 얼마나 나쁘냐면 죄책감은 수치심까지 동반합니다. 그리고 죄책감은 누군가에게 벌을 주고 싶거나 스스로 받고 싶어 하는 감정이고 자기거부나 자기 학대, 자기 파괴에 빠지고 회한과 낙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다 내 탓이다 하면서 잘못을 자기에게 돌리고 자살행위, 자기혐오까지 그리고 어떤 경우는 자기혐오를 사악한 타인에게 뒤집어씌우는 투사 현상도 흔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인성 육체 질환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죄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근력을 시험해 달라고 하면 근육이 순간적으로 약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죄책감의 본성은 파괴적입니다.

그런데 죄책감, 죄의식을 찬양하는 옹호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죄책감은 우리에게 좋다라는 것입니다. 적절한 죄책감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예는 우리가 어렸을 때 조심성 없이 길을 건너는 것은 나쁜 행동이라고 배웁니다. 그래서 신호를 어기거나 길을 잘못 건넜을 때 아이의 미숙한 마음에는 현실을 보는 눈 대신 죄책감이 들어앉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잘못하거나 실수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책감의 99퍼센트는 현실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가장 경건하고 온화하고 악의 없는 사람들이 죄책감으로 만신창이가 됩니다. 죄책감은 자신을 비난해 쓸모 있고 가치 있는 인간이 되지 못했다며 스스로 못을 박는 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자기과잉시대 자기과시시대에 이런 죄의식이 이젠 좀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래야 겸손해지고 인격수양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내적인 죄에 맞서서 싸우면서 인격을 닦았는데 자신의 악을 대적함으로써 겸손하면서 안정적이고 온유한 사람이 되며 그 품성에 걸맞은 자존감을 갖는 사람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라는 개념을 없애 버리면 선한 사람으로서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을 없애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랑이 삶을 상징하듯, 죄책감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죄의식에 빠져 있으면 가족이나 친구, 이웃사람이 던진 부정적 한마디에도 죽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육체적 질병과 연결됩니다. 죄의식은 우리가 하나님 형상 닮은 존재이고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리의 본성은 본래 천진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만듭니다.

저는 죄의식은 본능처럼 갖고 있는 것이고, 적절한 죄의식은 도덕의식에 좋지만 이것은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이라 이것을 기독교가 부축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특히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란 말씀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사랑은 한 개인의 윤리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회의 윤리까지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실천 운동이 사회로 까지 번지는 것, 우리 현실에서도 그 예가 있습니다만 저는 한 책이 생각이 났습니다. 바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란 책입니다. 실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책은 수천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소설입니다. 이 책의 반향이 얼마나 컸는지 20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아직까지도 읽히는 기독교고전중의 고전입니다.

이 소설은 한 목사의 개인적인 결단이 한 도시의 변화로 번지는 예수운동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편안하게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지금의 기독교인에게도 충격을 던지고 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어느 교회에 한 거렁뱅이, 즉 지금의 노숙자인 인쇄공의 등장으로 일어납니다. 그는 쇠약해 져있었고 자신이 실직자이고 자신의 아내는 몇 달 전에 죽었고 자신의 딸은 아는 사람한테 더부살이를 시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처가 죽을 때 엄마 없이 살 자기 딸이 안타까워 딸과 함께 하나님께 가게 해달라고 빌었답니다.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현실은 비참의 비참 연속이었습니다. 아무리 일자리를 구하려 해도 문전박대당하고 자기한테 그래도 미안하다고 말 한 마디라도 했던 사람은 목사님 한분이었다라고 말하면서 제가 교회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주를 따른다는 것이 큰 교회에 다니고 좋은 옷을 입고, 호화주택에 살고, 여름휴가를 즐기기 위해 멀리 떠나는 것일까 자꾸 의구심이 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다니지 못하는 수백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셋방에서 죽어가고 일자리를 찾아 거리를 헤매고 술과 죄악에 점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현실인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요. 이런 질문과 함께 그는 쓰러지고 며칠 후에 목사사택에서 자신의 딸도 보지 못한 채 죽습니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주인공인 헨리 맥스웰 목사는 교인들에게 앞으로 1년 동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것을 자문자답하지 않고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자고 그 교회전체가 결단을 하게 됩니다. 교인 한 명 한 명이 진지한 물음 속에서 답을 찾아 나가자 개인이 변화되고 일터가 변화되고 도시가 변화됩니다. 신문사 사장이 양심적으로 상업적인 기사를 실지 않기 시작하고 한 노무자가 돈과 명예의 유혹을 이겨내고 조직의 비리를 밝히고, 술집추방운동이 일어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하여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속출하는 등 예수님의 사랑이 이 땅에 실현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조금 자극이라도 받고 흉내라도 내면 어떨까 싶어서 이 책을 다시 읽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루에 한번만이라도 자신에게 되물어 보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거라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날마다 새로워지고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고 이 사회에 예수님의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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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음, 겸손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한 마디로 얘기하라면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자기를 낮추고 낮추셔서 사람이 되어오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낮아지는 마음, 나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높은 사람이 되어서 떵떵거리겠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진정 리더가 되고 싶은 사람은 나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겠다. 이렇게 마음먹어야 합니다. 그래도 리더가 될까 말까입니다. 예수님도 으뜸이 되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공, 사람 잘 부린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요즘 어떤 세상인데 사람을 부리려고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솔선수범하고 모든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모든 사람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할 때 성공한다고 생각합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 다른 사람보다 내가 나아야 한다는 생각, 내가 어떤 이보다도 돋보여야 해, 그래서 누가 나한테 조금만 자존심 상하게 해도 참지 못하는 것,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인지 검토해보셔야 합니다. 나의 부족함, 나의 모자람, 나의 한계가 나에게 위안이 될 때가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선물이 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사랑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말합니다.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3:14-19)

 

위의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믿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면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되길 원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정원과 같다 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 아파트에 살지만 정원이 있는 집에 살아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원에는 예쁜 꽃도 피기도 하고 좋은 유실수가 있기도 하지만 이상한 것은 잡초도 자란다는 겁니다. 심지도 않았는데 가꾸지도 않았는데 그대로 놔두면 얼마나 무성하게 자라는지 모릅니다. 예쁜 꽃이나 유실수는 정성스럽게 심고 가꾸고 물을 줘야 자라는데 잡초는 왜 그렇게 어디서 나서 잘 자라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정원 있는 집을 가진 사람들의 일입니다. 마음의 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잡초 같은 알게 모르게 못된 생각, 부정적 마음은 그냥 놔두면 무성하게 자랍니다. 별 노력 없이도 잘 자라서 애써 지켜보려고 했던 애써 보전하려고 했던 착한 마음이 그만 시들어 버리고 합니다. 그래서 온통 부정적인 마음, 나쁜 마음으로 채워 결국 파괴적이 되는 현상도 많이 보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정원을 가꾸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 지침을 알려줍니다. 바로 빌립보서 2,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 그 마음의 정원에 예수 그리스도를 심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우리가 하나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뭘까요. 신앙생활 오래하신 분은 대충 대답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이런 것이라고. 그런데 현실의 실생활에서 매번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런 것이다 라고 구체적으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분은 얼마 없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에겐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성경에 지침이 다 나와 있어요.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은 이런 것이다 라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KBS 스페셜 <마음>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KBS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여자 7-8명 정도를 선출해서 다이어트 우유를 시음하는 실험을 했는데 모두 다 먹고 신선하다, 맛있다, 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 2명의 여자가 프로듀서랑 짜고 연극을 했어요. 어떤 연극이냐면 똑같은 우유였는데 너무 비릿해요. 이상해요, 하면서 토까지 하는 연기를 하는 거였습니다. 그 다음 시음하는 여성들에게 똑같은 우유를 두 번째 먹이고서 반응을 보았는데 모두 다 이상하다, 비릿하다, 이런 말을 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그 중 한명은 그 다음 날 몸에 두드러기 같은 피부병이 나서 병원에까지 갔습니다. 우유는 첫 번째나 두 번째나 똑같이 신선한 거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부정적인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자 똑같은 우유의 맛도 다르게 느끼게 한 것입니다. 즉 똑같은 물질을 보고도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냐에 따라서 판단이 달라지고 그에 따른 신체적 반응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신선하다고 잘 먹던 여자가 부정적 마음이 생기자 몸에 두드러기 까지 생긴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가 봅니다. 우리 건강, 신체도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다시 한 번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우리는 마음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먹기 정말 쉽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도 우리 마음을 하나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원칙을 세워놓으셨는데 하와의 마음은 먹음직도 보암직도 한 선악과에 끌려 하나님의 원칙을 어기고 맙니다.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로봇같이 만드시지 않으시고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을 하는데 어쨌든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조종하지 못하시고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만드셨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과 소유를 빼앗아 가실 수도 있는 분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어쩌지 못하세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할 수 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 마음을 보신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 유리잔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 이거 훔쳐가고 싶어요. 하나님이 좀 말려주세요. 하나님 못 말립니다. 마음 한 번 잘 먹어서 우리는 흥하기도 하고 마음한 번 잘 못 먹어서 망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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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시지를 오늘날 너무 팽창주의 능력주의 성과주의에 물든 이 시대가 다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기독교는 세속화되어 이 메시지를 말하는 것을 꺼리고 세상에서는 이 메시지를 다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과잉의 시대에 이제는 자기 낮춤과 겸손으로 돌아가자. Big Me 가 아니라 Little me 로 돌아가자. 그래서 이제는 다른 사람을 제압하는 카리스마를 말하지 않고 인격을 말하고 품격을 말하고 품성을 말합니다. 리더십에도 이런 변화가 있습니다. 이것을 말한 책들이 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인격론> <인간의 품격> <콰이어트> 등 많은 책들이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과거에 비해서 오늘날의 문화가 이제는 자신을 낮추는 문화가 아니라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도록 권장하는 문화가 되어있음을 경험합니다. 섬김, 겸손, 자기 낮춤은 단어사용도 현격히 줄어들고 오히려 경시되어가고 있는 풍조입니다.

<인간의 품격>이란 책에 보면 미국의 예가 잘 나오고 있습니다. 1948년부터 1954년까지 심리학자들은 1만 명이 넘는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에게 자신을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기는지 물었는데 12퍼센트가 그렇다고 대답했답니다. 그런데 1989년 같은 질문을 받은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은 남학생 중 80퍼센트가, 여학생 중에는 72퍼센트가 자신을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여긴다고 대답했다는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30, 40년 상간에 수치가 12퍼센트에서 80퍼센트로 늘어난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도 자아도취테스트라는 것이 있는데 이 테스트에서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와 나는 내 몸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라는 문장에서 지난 20년 사이 수치가 30퍼센트가 올라갔다고 합니다. 조사에 의하면 자신에 대한 평가가 현격히 높아진 것과 더불어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구도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 중 명성은 우선순위가 상당히 낮은 편이었습니다. 1976년 사람들에게 인생의 목표를 나열하라는 질문을 했을 때 명성은 16개 항목 중 15위를 기록했는데 2007년에는 젊은 사람들 가운데 51퍼센트가 유명해지는 것이 자신의 가장 큰 개인적 목표라고 답했습니다.

우리사회에 언제부터인가 긍정의 심리학이 꽃피면서 다음에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기를 과시하는 풍조 그리고 능력을 강조하는 경쟁이 너무 심한 사회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과도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주는 사회풍토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 요즘입니다. 많은 출판물 강의 등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현실의 자기 낮춤, 겸손, 양심, 인격, 섬김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줄어들고 사회적으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증가하고 자살률이 증가하고 도덕성의 감소 등, 살인, 학대, 폭력의 사회악의 현상이 말해주듯이 하나님께 가까이는 공허한 소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가까이를 다시 외치고 그 방법이 자기 낮춤, 겸손에 있음을 다시 설파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세상에서도 이런 조짐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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