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갓 오십 세를 넘은 싱글여성이다. 오십을 넘으면 인생에 처연해질 나이가 된다고 말들 한다. 나이 사십은 불혹(不惑)이라하고 오십은 지천명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나이되면 종교에 귀화하는 것도 의례적이다. 

난 여성이고 가정에선 막내이고 현실경험도 많이 없고 여러 가지 나의 환경적 특성상, 유전적 특성상 나는 감정이입을 잘하고 이성적인 면보단 감성적인 면이 강한 사람이었던 같다. 그래서 항상 타인에게 끌려가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감정이입이 안 되면 상처입고 집착을 하거나 아예 관계를 단절하거나 극과 극의 결단을 하는 사람이었다. 상처를 입어 집착을 하면 보통 애()보다는 증()이 커져 많은 감정적 손실, 영혼의 괴로움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아예 관계를 단절하면 사회생활에 많은 손해를 보게 된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관계의 탄력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지만 이게 잘 안 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또한 거기에는 개똥철학이나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정의감도 한 몫 한다.

그래서 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인간관계엔 거리감을 두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난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다다가 나이 40대에 이것도 지혜로운 거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릴때부터 교육받아 사람을 이용가치로 사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감과 위로, 칭찬이 인간관계에선 제일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론 인간관계에 모든 문제가 풀릴 줄 알았는데 난 지금 돌아보아도 인간관계에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매일매일 칭찬하고 같이 공감하고 때론 위로해 주어도 싸구려 취급을 하거나 아님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거나 즉 상대가 대가를 바라고 저란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항상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신을 이용가치로 대한다고 불만을 갖거나 아님 자신을 이용가치로 생각하라고 접근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사람을 대할 때, 이부터 떠올리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씩 만나다 보면 이 오해로 관계가 어려워지고 불쾌해져서 관계를 끊게 된다.

또한 인간관계에 더 서툴렀던 20, 30대 초반에는 무조건 집착에 빠지기도 했다. 판단력이 흐려진 채. 집착이 얼마나 영혼을 파괴시키는 지, 성인이라면 다 경험했을 것이다.

나는 일련의 인간관계의 실패를 통해 거리감을 두라는 표현보단 인간관계에서도 성인으로서 기술적으로든지, 감정적으로든지 독립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많은 자유로움을 느낀다. 많은 우울감, 상처들이 감정적 독립을 이루지 못해서 생기는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터득하지만 세상을 혼자 살 수 만은 없는 법, 서로 어울려야 하는데, 아님, 가족이라도 함께 잘 지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에 우울해 하고 슬퍼하고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현대인에게 무서운 병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이 해결책과 대안을 찾아야 한다. 어디서 찾을까? 종교일까? 삶의 경험을 통한 지혜일까? 아님 또 깨어지고서라도 사람에게서 찾을까? 아님 돈으로 해결할까?

받아들임, 즉 수용과 피안으로의 도피 기독교에서는 천국에 대한 소망 이런 것들이 살다보니 정말 중요한 것을 알았다. 이 나이에 이젠 종교가 악세사리쯤이 아니라 정말 절실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종교라고 표현했지만 모든 종교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기독교엔 그 답이 있다. 기독교는 현대인이 제일 두려워하는 외로움, 죽음에도 답을 준다. 그답은 사람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감정적 독립과 자유로움을 맛볼 때 외로움도, 죽음도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대안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물질과 돈, 사람에게서 대안을 찾지 않고 그것들에서 독립을 이룬다면 멋진 성인(成人), 성인(聖人)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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