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는 저항이다

 

 

예술에서는 순수성 자체가 가장 큰 저항이다. 그래서 우리는 순수 시인을 저항시인이라고도 부른다. 예를 들면 윤동주는 일제시대의 식민주의에 저항한 시인으로 우리나라의 민족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시를 드려다 보면 별과 바람과 시를 노래한 그의 어린아이같음과 맑음이 오롯이 들어날 뿐 저항이라는 단어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 같은 맑음,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깨끗한 양심을 가진 마음, 별을 바라보고 죽어가는 것들을 생각한 생명에 대한 사랑은 그저 그거 하나로 일제의 폭력성, 아니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폭력성, 공격성, 패권주의에 대한 저항을 일깨우고도 남음이 있다. 그 여림이 그 맑음이 그 생명이 죽음으로 비참으로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세상을 조금이나마 끌어올려주고 있는 것이다. 강성에 강성이 아닌 강성에 맑음이 강성에 여림이 당신은 옳지 않다고 양심의 소리로 들려 주는 것이다. 자유니 평등이니 인권이니 이 한 마디 담지 않고 그는 조용히 우리의 폐부를 찌르며 상대의 악함을 드러내준다.

오늘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의 출판사, 선교단체의 상호명이 순수의 자리이다. 난 이 자리를 교회를 염두에 두고 지었다. 이 험한 세상에 교회라도 순수의 자리로 남아야 되지 않을까해서이다. 그러고 보니 나 자신조차 순수함에 회의가 들 때가 있다. 그러나 끝까지 남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 이것 자체가 세상에 대한 저항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나의 저항은 밝은 저항이다. 긍정적 저항이다. 희망을 바라보며 하는 저항이다. 우리 안에 윤동주 시인의 시처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그런 순수한 양심이 있다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그 순수성은 영원할 것이다. 우리 모두 안에 그 어딘가에 이것이 남아 있다.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난 그 순수성이 전염되길 바라며 나의 순수의 자리를 이 세상에 남기고자 한다.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 그 어딘가에서 그 순수성에 눈물 한 방울이 흐르고, 그 순수성에 해맑은 웃음이 번진다면 그래도 험한 세상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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