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고난을 이긴 사람들 중, 요셉만큼 큰 고난을 당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요셉은 성공신화의 대표적 인물이고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요셉이야기는 꿈, 하나님의 섭리, 구원, 용서 등 이야기할 주제도 아주 많고 많은 목사들의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저는 요셉의 이야기는 다 아실 줄로 알고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고난의 특징에 주목하여 삶에 고난이 닥쳤을 때, 그 대처법을 연구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요셉이 당한 고난을 살펴보면, 이복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고 인신매매당하여 노예로 팔려간 일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생활을 하게 된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찾아 읽어보면 이 고난의 세월동안 요셉의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 고난의 세월 두 대목이 나와 있는 성경구절에 공통적으로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39:21-23).

, 고난의 세월 동안에도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요셉의 편에서 보면, 요셉은 고난을 피하려거나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모든 상황에서 성실하고 충성스러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형제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인신매매까지 한 것, 큰 상처일 텐데, 그리고 왕자같이 자라다가 노예생활로 전락한 것도, 신세 한탄할 만한데, 거기다가 억울한 누명까지 쓰고 감옥생활을 한 것, 거의 죽고 싶었을 텐데.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께 울부짖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원수갚아달라고 그러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부끄러움을 느끼십니까. 제가 처음 부끄러움을 느낀 것은 정말 어릴 적 몇 살인지 기억이 안 나는데, 유치원도 안다녔던 어린 나이였던 것 같습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기를, 화장실에 가서입니다. 그 화장실은 사방이 막혀있었는데, 위가, 하늘이 뚫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부끄러웠을까요. 그 어린나이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들여다보시면 어떡하지그 언뜻 든 생각이 아직도 기억에 납니다.

그런데 왜 제가 그런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수치심을 느낍니다. 원죄와 연관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살던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자연스런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을 알 수 있는 선악과를 먹은 후부터는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수치심은 죄의식과도 맛 물려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죄를 저지를 때 부끄러움, 수치심을 느낍니다.

그런데 죄의식과 수치심은 좀 다르다고 합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 둘을 구분지어 설명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수치심은 죄의식과 달리 자기중심적인 감정과 타인에 대한 적의를 불러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죄의식은 종종 회복을 추구하는 태도, 즉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는 행동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즉 수치심은 자기가치감정 즉 self-esteem과 관련이 있어서 자기 존재(being)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인에 대해서도 적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식은 자기 행동(doing)에 대하여 괴로워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한 행동을 교정하고, 또는 용서하고 용서받음으로 해결이 되는데, 문제는 수치심입니다. 죄의식보다 이 수치심을 치유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도 수치심을 느낍니다. 중학교 시절 제 친구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 친구는 중학교시절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당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 수치심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생긴 물질적 어려움보다도 더 싫었던 것이 바로 아이들 앞에서 느낀 수치심의 감정이었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아버지의 죽음 앞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 부끄러움 때문에 그는 친구들과도 더 멀어지고 본인이 스스로 사람들 눈치만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친구의 수치심은 자기가치 감정을 낮아지게 했고 그것이 열등감으로 연결되어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을 못 열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이 친구가 신앙을 가지고 자신에게 닥친 이러한 고난에도 이유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자신의 신앙적 해석을 통해 치유가 되면서 이제는 부끄럽지 않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기에게 닥친 고난에 대한 이유를 모른 채 어려움을 당한다면 사람들은 자기 존재에 대해서 자기가치에 대해서 열등함을 느끼고 수치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 뜻, 그 이유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다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난에도 자기 죄로 받는 고난이 있고 하나님 뜻에 의한 고난이 있습니다. 자기 죄로 인한 고난은 부끄러운 고난이지만 하나님 뜻에 의한 고난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후 40년 동안을 나그네 되어 평범한 인생을 삽니다. 이 시간 동안 모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 긴 시간, 이 기다림의 시간 모세는 어떻게 변하게 된 걸까요. 모세는 자기가 붙들고 있었던 것, 자기가 해보려고 했던 것, 자기의 육신의 힘을 믿었던 것, 그것들을 다 비워내고 그 자리를 하나님으로 채워갔을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이것을 깨달아가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오늘 모세는 그 뼈저린 경험 때문에 하나님 없이는 안 된다고 하나님을 있는 힘을 다해서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가 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면 우리에겐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하나님 없이 우리는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이런 간절한 기도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성숙 아닐까요. 이것이 모세를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만든 원동력이 되게 한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 없이는 안 되겠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인생의 성패는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려고 애쓰는 것, 저는 이것이 우리를 영적 성숙의 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응답하십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하루를 시작하면서, 한 주를 시작하면서, 또한 한 달을 시작하면서, 무슨 일을 시작하든지, 우리가 제일 먼저 이 말씀을 듣도록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을 붙들 때,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꾸준히 성장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의 시작이 이 약속의 말씀과 함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세의 인생을 다 아실 것입니다. 그는 40여 년 전의 실패를 또 다시 반복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젊었을 적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자랐지만 유모였던 자신의 유대인 어머니의 무릎에서 자라면서, 유대인들의 역사와 그들의 신앙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분은 애굽의 왕자였지만 마음속으로는 동족의 당함을 괘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부당함을 바로잡으리라 하면서 의욕을 불태웠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어쨌든 그러한 영향으로 그는 어느 날 들에서 자기 동족이 애굽 사람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해 그 애굽 사람을 주먹으로 쳐 죽입니다.

그리고 나서 모세는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요. ‘나의 의로운 일을 우리 동족들은 알아주겠지. 내가 얼마나 동족들을 사랑하고 이 압제를 안타깝게 보고 있는지 나의 마음을 알아주겠지. 나는 의로움을 행한 것일 뿐이야. 나의 동족들은 나의 마음을 알아줄거야.’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땠습니까. 정반대였습니다. 동족들은 오히려 삐딱한 시선으로, 경계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이튿날 모세는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끼리, 동족끼리 싸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을 화해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싸우던 히브리 동족들이 모세를 보고 대뜸 이렇게 따져 묻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로 세웠습니까. 당신이 애굽 사람을 주먹으로 쳐 죽인 것처럼 우리도 죽이려고 그럽니까.’ 이런 말을 듣습니다. 제가 지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 내용이 사도행전 723절에서 29절까지 나옵니다. 그 말씀을 한 번 보겠습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모세가)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이스라엘 민족)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그는 그의 형제들이(즉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모세는 여기서 인생의 전환점을 겪게 됩니다. 자기는 의롭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편으로 생각했던 동족들조차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이 내 생각대로 움직여 주질 않는구나, 사람들의 생각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는구나, 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심한 무력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저처럼 하나님 앞에 더 의존적이 되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정말 위대한 영적 지도자인데 어린아이 같다고 표현해서 이상하게 느끼실 수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표현입니다.

오늘 말씀가운데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와 또한 그의 민족과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께 간절히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떼를 쓰는 모습입니다.

15절에 보시면,

주여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 하나님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우리를 홀로 보내지 마옵소서이런 뜻입니다.

이 말씀이 나오기까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이릅니다. 그때 당시 모세는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기 위해 산에 올라가 있고, 불안해진 백성들은 아론을 몰아세워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 달라 충동질을 해, 급기야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를 하고 축제를 벌입니다. 이런 백성들의 모습에 하나님께서는 크게 실망하시고 분노하십니다. 이에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곳을 떠나 가나안땅으로 저들을 이끌고 가라.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을 것이다. 너희 같은 목이 곧은 백성은 내가 데리고 갈 수가 없다. 너희 같은 목이 곧은 백성을 내가 길에서 이러다가 진멸할까 두렵다. 도저히 너희와 같이 갈 수 없으니 너희들끼리 가라아주 준엄한 말씀입니다. 이 말을 백성들이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한 사람이 없다고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장신구를 떼어내면 당신이 어떻게 하실지, 즉 진멸하실지 분노를 푸실지 결정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이 몸에서 장신구를 다 떼어내고 모세가 하나님을 달래드리려 하나님께 접근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친구와 같이 이야기하듯이 모세와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세는 어린아이같이 매달렸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같이 가시지 않으시면, 우리도 안가겠다고 버티며 애원한 것입니다. 은총을 입게 해달라고, 이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여겨달라고 떼를 쓴 것입니다.

그 당시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이미 백성들을 이끌었던 경험도 있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능력도 있고 모세의 추종자도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 경험과 능력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믿고 그것을 신뢰하고 우쭐했다면, ‘정 하나님께서 가지 않으시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어쩔 수 없지요.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해봐야지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모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미 모세는 뼈저리게 경험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뼈저린 경험으로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길이 사람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 없는 삶이 얼마나 불안하며 비참할 수 있는지 그는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적 성숙이 뭘까 책을 뒤져보다가 공감이 가는 글을 보아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공감하시는지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영성의 중심은 사랑입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다 소개 할 수는 없고, 키포인트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특징이 있는데, 그 첫째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사람들의 마음에 민감해진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일방적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이나 느낌에는 몹시 둔감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사람의 마음에 민감하고 공감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꿈과 야망에 대해서 자유로워진다고 합니다. 어떤 아집이나 욕망, 집착에 별로 사로잡혀 있게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셋째로 성숙한 사람은 점차로 편안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옆에 있을 때,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뭔가를 잘 못해도, 실수해도, 이 사람이 그들을 그대로 받아 줄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이 제일 어려운 부분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공감하십니까. 영적 성숙의 길은 멀고도 멀구나 하고 느끼십니까. 아니면 영적 성숙을 좀 다르게 정의내리고 싶으십니까.

 

 

 

신앙적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신앙적으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20대 때와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를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나이는 먹었는데 달라진 점이 무엇일까? 제가 20대와 비교해서 제자신이 달라진 점을 뽑으라면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20대 때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줄어들었다 라는 것입니다.

20대 때는 세상을 바꿀 것 같은 용기와 자신감이 충만했습니다. 성공할 것 같았습니다. 성공하기 위해 잠을 줄여야 한다면서 3시간 수면법이란 책을 사보고 실천해보고, 자기 계발서를 찾아서 사보고, 성공한 사람들의 글을 읽고 본받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20대 때는 제가 참 정의로운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이 잘못되어간다고 울분을 터뜨리고 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성공이 쉽지 않더라구요. 결국 꺾이고 꺾여 알게 된 것은 이 세상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감이 없어졌다고 제가 시라소니 같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이 없어진 자리를 지금은 하나님이 대신 채워주고 계십니다. 자신감이 없어지니까 하나님께 더욱 의존적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제가 달라진 점을 다시 말하고 싶습니다. 즉 내가 해보려고 했던 것을 이제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도록 내버려두게 된 것, 그것입니다. 이것이 달라진 점입니다.

 

성령을 좇아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라 라는 것은 성령이 먼저 우리 안에 계시고 인도하고 계시고 있다 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육체의 소욕 때문에 우리가 자꾸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충만을 불러 불러 하면서 간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충만한 역사를 거슬리지 말고 그 역사를 따라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서 운전하고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통경찰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교통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역하지 말고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강가에 사는 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그렇게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도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라는 길에 의해 인도되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를 거슬리지만 않아도 우리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조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그런 책들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조건들이 다 이루어져야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중 아무도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성령의 내재하시는 역사에 순종하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부어주시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편에서 우리가 거스르는 것이고 우리가 따르지 않아서입니다.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원치 않아서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로마서 8: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탄식하십니다. 성령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안타까움과 괴로움과 아쉬움과 근심을 가지고 우리 안에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령은 내 안에 임재하고 계십니다. 그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방해했던 나의 육체의 소욕, 죄악의 요소들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운전을 잘 한다고 했을 때, 그 흐름을 방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의 이기심과 자존심으로 남의 가는 길을 막지 않고, 신호를 무시한 채 달리다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그렇게만 해도 잘했다칭찬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거스르지 않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아, 삶에 많은 열매가 있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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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개신교 교회가 왜 욕을 먹고 있냐면 모두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앙생활 때문일 것입니다. 육체의 일을 도모하는 데 온 기력을 소진하여 버리고 성령의 흐름을 따라 가는 것은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고 했는데 욕심과 이기심은 우리의 마음을 거칠게 합니다. 모든 대상을 경쟁자로 여기고 자기가 손해 볼까 불안 해 합니다. 그래서 육체의 일,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이런 이들이 일어납니다.

운전할 때도 보십시오. 우리를 방해하는 자가 나타나거나, 끼어들기라도 할라치면 뭐 XXX가 되는 것입니다. 싸움이 일어납니다. 아줌마 솥뚜껑운전이나 하지, 왜 기어 나와서 난리야. 저도 별 험한 소리 다 들었습니다. 문 열고 나와 육탄전을 버리는 것도 다반사로 봅니다.

그러나 성령을 쫓아 사는 사람, 성령의 인도하는 바에 따라, 즉 흐름에 거슬리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열매가 있습니다,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위해서는 우리는 성령님의 통제에 맡겨야 됩니다. 운전을 할 때는 어쨌든 교통경찰에 따라야 되듯, 성령님의 통제에 따라야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통제는 자기가 하는 것이지 무슨 성령님의 통제입니까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를 잘 보십시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것들이 자기 통제로 가능한 것입니까.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힘으론 안 되지 어떤 영이 내 마음을, 나의 행동을 움직여 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그러나 이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해 바른 이해가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좀 연구를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운전을 잘하십니까. 운전을 잘한다는 것은 뭘까요?

제가 처음 운전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처음 고속도로를 100km로 달렸다고 교회식구들에게 자랑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강남대로와 연결된 경부고속도로를 타다 끼어들기를 못해서 부산까지 갔다 올 뻔 했습니다. 초보운전시절, 실수도 많았고 자랑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 차를 타면 사람들이 운전을 잘한다, 편하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답답해 죽겠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으십니다.

싹싹 빠져나가고 끼어들기도 잘하고 지리도 잘 알아서 척척 운전을 하면 좋은데, 저는 지리도 잘 모르고 좀 벙벙합니다. 오직 네비 마님에게 순종을 잘합니다. 그래서 운전을 잘한다고 자신 있게 말을 못하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신문 칼럼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운전을 잘한다는 것은 차의 흐름에 잘 맞춰 하는 운전이라는 것입니다. 즉 도로사정이나 자동차의 경로를 방해하지 않고 잘 통하게 하는 것”, 이것이 잘하는 운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좀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흐름에 방해되지 않는 것, 말은 쉽지 실제는 어떻습니까. 교통법규, 신호등도 우리의 조바심 앞에서는 다 무시되는 현실입니다. 앞지르기, 끼어들기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익숙한 일입니다. 그런데 흐름에 잘 맞춰하는 운전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는 길을 막지 않고, 신호를 무시한 채 달리지 않겠다는 결심만 하더라도 잘하는 운전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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