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미국의 대통령 링컨도 우울증을 앓은 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우울증을 분석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링컨이 그 우울증을 벗어나기 위해 유머를 개발하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목표의식을 가지려고 노력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목표의식이 마음의 감옥의 문을 여는 열쇠다 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그 책에 멋있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우울증은 더 강력한 힘으로 그를 잡아 당겼으나 그는 새로운 목표의식과 그 잡아당기는 힘을 연계시킴으로써 사태에 대응해 나갔다. 문제 있는 곳에서 의미를 찾고, 불완전한 것을 둘러보면서 구원을 추구했다.”

이 말을 풀이해 보면 링컨에게서 단순히 무엇을 성취하고 목표의식이 생겼다고 마음의 고통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우울증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그것은 더 강력한 힘으로 그를 끌어내렸지만 목표의식 때문에 삶을 지탱해 나가면서 그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더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성취의 문을 향해 올라갔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울증은 한 사람의 인생에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우울증을 통해 관심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고 그 내면 속에서 깊은 영적 사유를 건져내고, 풍부한 내적 감성을 퍼 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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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기질은 크게 다혈질’, ‘우울질’, ‘담즙질’, ‘점액질4가지가 있는데 성경의 엘리야는 우울질이라고 합니다. 우울질은 아주 민감하고 예민하며,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가지며 생각하는 대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체질이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라 내향적인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내향적인 성격의 사람이 영적침체나 우울증에 더 빠지기 쉽다고 합니다.

내향적, 외향적이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몇 달 전에 어느 교우와 책을 소개 받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콰이어트>라는 책입니다. 그분도 저도 모두 내향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인데 이것 때문에 둘 다 기를 못 펴고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어릴 적 가정통신문에 제일 많이 적혀져 있던 것이 얌전하고 내성적인 아이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읽어보시고 혼을 내셨어요. 매사에 적극적이고 활동적이고 긍정적이어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한 것을 꾸짖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내심 내성적인 것은 열등한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아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미국사회에서도 있고 모든 성공의 기준이 외향성에 두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 모두가 외향성 이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향적인 사람들도 본래의 자기보다 더 외향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외향성 이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중대한 실수를 하는 것이다 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 예술, 발명품 중 진화론과 반 고흐의 <해바라기>에서 개인용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것들이 내향적인 사람들에게서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중력의 법칙, 상대성의 법칙, 구글, 해리포터 등 이 외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것들만 보아도 내향적인 사람이 더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갖고 있으며 창의적임을 이 책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엘리야도 내향적인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음성에 더 민감해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었고 그래서 그렇게 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제는 내향성과 내향성 기질에 더 찾아오기 쉬운 우울증에 대한 편견, 선입견이 없어져야 된다고 봅니다. 더 이상 기피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새로운 시각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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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월 달 즘이었을까요. 우연하게 12일 이라는 예능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해 했던 윤시윤이라는 연예인이 나오는 거예요. 이름 들으면 잘 모르실텐데. <제빵왕 김탁구>라는 드라마는 다 아실 것입니다. 주인공 김탁구 역으로 나온 사람인데, 시청률이 50%넘는 대박을 친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대박을 쳤는데도 그 후로 이 사람은 광고나 예능프로그램에 잘 안 나오는 거예요. 보통 연예인들은 떴다 하면 광고다, 예능프로그램이다 안 나오는 데가 없는데. 그래서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는 데 아, 이 사람이 12일에 나와 특강미션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이 사람은 데뷔 때부터 운 좋게 시청률이 잘나오는 드라마를 하다가 결국 <제빵왕 김탁구>로 대박을 쳤습니다. 성공에 성공을 했지요. 그런데 그 후로 찾아온 것은 두려움이었다는 거예요. 이 성공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숨었다는 거예요. 이것이 겸손인지 두려움인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은 숨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군대에 가서 육체적으로도 단련되고 험한 일도 겪으면서 자신감이 생겼는지. 그리고 동료 연예인들이 많은 장르에 부딪쳐서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용기를 얻었는지, 어쨌든 그래서 나도 이젠 숨는 방법이 아니라 도전하는 방법을 택해야겠다 하고 결단을 했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인생에는 내리막길도 있고 오르막길도 있다. 내 삶에 오르막과 내리막을 한 번 보고 싶어서 나는 12일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 모습이 당차보이고 다른 연예인과 달라보여서 좋았습니다.

 

 

어느 교우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생은 일희일비인 것 같다고. 좋은 날만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나쁜 날만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어느 하루는 우연치 않은 기쁨이 찾아와서 웃기도 하고 어느 하루는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터져서 울기도 하고 그 말을 하면서 그 교우가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정말 만만치 않고 녹록치 않다는 것을 서로 공감하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등산을 생각했습니다. 등산을 하다보면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데 이젠 다 왔다 싶으면 또 올라가야 하고 또 다 왔다 싶으면 또 올라가야 하고 헉헉되고 정말 힘겹습니다. 그런데 더 힘든 것은 정상을 밟았다 싶으면 어느새 또 내리막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끔 위안이 되는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끔가다 평탄한 등성이 길도 거닐기 때문입니다.

 

 

저는 감사하면 이지선씨가 생각납니다. 이전부터 이 사람이라면 하나님 백번 원망해도 된다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2000년 여름 서울의 도심, 한 음주운전자로 인해 많은 사람이 다치는 끔찍한 6중 추돌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사고 현장에는 이제 대학 졸업을 앞둔 24살의 이지선 자매가 있었고 그 사고로 인해 그녀는 온 몸의 반 이상이 화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화상으로 그 이뻤던 온 얼굴이 일그러지고 20번이상의 수술을 받았는데 그 고통을 이겨내고 많은 사람들이 괴물 취급하는데도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을 썼습니다. 지금은 박사학위도 받고 수술 후 많이 달라지고 이뻐졌지만, 그때 처음 수술 받고 괴로웠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한 대목이 너무 감동적이라 제가 그 부분을 타이핑해 가지고 다닙니다 화상을 입은 자신의 몸을 보고 쓴 것입니다.

 

짧아진 여덟 개의 손가락을 쓰면서 사람에게 손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고, 110역을 해내는 엄지손가락으로 생활하고 글을 쓰면서는 엄지손가락을 온전히 남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눈썹이 없어 무엇이든 여과 없이 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며 사람에게 이 작은 눈썹마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알았고, 막대 같아져버린 오른팔을 쓰면서 왜 하나님이 관절이 모두 구부러지도록 만드셨는지, 손이 귀까지 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온전치 못한 오른쪽 귓바퀴 덕분에 귓바퀴란 게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나님이 정교하게 만들어주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잠시지만 다리에서 피부를 많이 떼어내 절뚝절뚝 걸으면서는 다리가 불편한 이들에게 걷는다는 일 자체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건강한 피부가 얼마나 많은 기능을 하는지, 껍데기일 뿐,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피부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남겨주신 피부들이 건강하게 움직이는 것에 감사했으며,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얼마나 정교하고 세심한 계획아래 만드셨는지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감히 내 작은 고통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백만분의 일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고, 너무나 비천한 사람으로, 때로는 죄인으로, 얼굴도 이름도 없는 초라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그 기분 또한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지난 고통마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남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가슴이 없었을 테니까요.

 

저는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원망하는 내 자신을 돌아봅니다. 하나님이 고통을 주신 것도 실패를 주신 것도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고통 때문에 그 실패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고 이웃의 고통에도 함께 눈물 흘릴 수 있는 공감할 수 있는 사랑과 위로의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나마 하나님 닮은 사람 되기 때문입니다

2016년 가을에 서울시에서 하는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 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서로 공감하고 그 속에서 치유가 일어나는 힐링치유프로그램 입니다. 저는 그 때 많은 사람들을 만나 내 자신의 이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들으면서 우리가 인생 살면서 많은 고통을 당하는데 어느 종교를 가지고 있던지 사람이면 하나님을 원망한 경험이 다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은 아들이 하나있었는데 참 성실한 아이였다고 합니다. 열심히 취직시험을 준비해서 드디어 취직이 되어 그 엄마가 아들에게 기념으로 차를 사주었는데 글쎄 그만 음주운전자의 차에 부딪쳐 즉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 엄마가 아연실색이 되어서 취직시험 준비 때까지 그렇게 고생하고 취직이 되어 보기만 해도 대견스러웠는데 죽었다고 하니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하필이면 자기 아들이 죽어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켜주시는 분이라고 항상 신앙 고백하는 것을 보았는데 하필 내 아들이 죽어갈 때 하나님은 무얼 하셨나. 졸고 계셨나, 하나님을 간증하는 사람들 많고 많은데 왜 내 아들에게만 무심하셨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이유, 자기가 그렇게 해서 돈을 벌려고 고생한 이유가 다 자식 하나 잘되라고 한 것인데 그 자식을 죽게 하셨다고 생각하니 삶의 소망도 끊어지고 더 이상 하나님도 믿고 싶지도 않고 믿어야 할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뭐라고 말해 줄 말이 없었습니다. 들어주는 수밖에.

 

성경에 정말 비참하고 비참한 고난을 당한 사람 욥이 나옵니다. 자식 다 죽고 재산 다 잃고 생명은 있었지만 자기 몸도 성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비참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결말은 좋았습니다. 축복을 갑절이나 받았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욥이 축복받은 것은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나요. 부인이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을 때도 저주하지 않았지요. 하나님한테 대놓고 원망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이 말이 얼마나 처절한지 들어보십시오. 욥기 3,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정말 처절합니다. 저는 이것이 욥이 하나님께 처절하게 원망한 말로 들립니다. 부모한테 왜 나 태어나게 했어. 이 말같이 저주스러운 말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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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통해서 저는 두 가지 결론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무수한 자유의 정의와 개념이 있고 종류도 다양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사랑과 용서, 은혜를 통한 자유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보듯 아무리 그 노예 취급당하는 지옥 같은 곳을 탈출해도 백인을 미워하고 도망자 신세라고 불안해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그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육체의 자유가 있었지만 그는 영혼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영혼의 자유이고 그 영혼의 자유는 사랑과 용서의 은혜를 통해서 가능하다 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얻은 결론은 우리의 영혼은 끝까지 자유로울 수 없는가? 죽음을 봐야, 희생을 꼭 봐야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의 희생을 꼭 봐야지 용서가 가능한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져야만 했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영혼의 자유이고 그 자유를 줄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주기위해,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포로 된 자라고 했는데 꼭 감옥에 갇혀 있어야만 포로가 아니지요. 우리는 죄악에 습관에 병마에 온갖 것에 갇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먼 자처럼 무지합니다. 참된 자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권위에 눌리고, 경제적 압박에 눌리고, 과거의 상처에 눌리고, 깨어진 관계 때문에 눌리고 눌려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 참된 자유를 알고 깨닫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프리덤>이라는 영화에 보면 주인공 사무엘 가족의 탈출을 도운 연극배우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들은 비평가의 노예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뭔가에 매여 노예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돈의 노예, 습관의 노예, 죄의 노예.

혹시 목사는 교인들의 노예, 교인들은 목사들의 노예,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옥을 살고 있진 않은지 누가 알겠습니까.

오늘 진정한 자유는 사랑과 용서가 주는 자유이고 그것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됩니다.

 

 

 

 

자유에 관련한 영화 중 두 영화가 기억납니다. 하나는 20년도 전에 본 것 같은 데 <브레이브 하트>라는 영화이고 하나는 최근에 본 영화 2015년에 본 <프리덤>이라는 영화입니다.

<브레이브 하트>는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로 아카데미 5개 부문에서 상을 탄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영국 왕 에드워드 1세에 저항해 민중반란을 일으킨 스코틀랜드의 지도자 윌리엄 윌리스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스코틀랜드가 무참히 짓밟히는 장면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의 연인이 주인공이 보는 앞에서 살해를 당합니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남자 주인공 스코틀랜드의 민중지도자 윌리엄 윌리스는 반군을 형성하여 영국에 저항을 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느낀 것이 어쩜 저렇게 용감할 수 있을까? 그야 말로 브레이브 하트의 원동력은 뭘까. 그것은 저항정신이 아닐까.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했을 때 그 저항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항군이 영국군에 비하여 턱없이 수적으로 열악하고 무기도 열악했지만 그 저항정신만은 정말로 충천했습니다. 민중 반란군들이 대치되어있던 영국군을 향하여 모두 자신들의 엉덩이를 모두 까고,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하지만, 약 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든 반란군들이 일제히 그런 행동을 했는데 가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엉덩이로 화살이 날라들고, 그래도 처절히 저항을 합니다. 심지어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 있는데, 이 남자 주인공 민중지도자가 결국에는 반란에 실패하고 잡혀서 처형을 당합니다, 사지가 말에 묶여 사방으로 떨어져 나가는 그 상황에서도 이 주인공은 프리덤 이라는 말을 소리칩니다. 그 장면이 아직도 기억이 남을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남자 주인공의 저항정신, 그 브레이브 하트의 근본 동력은 그렇게 추구했던, 그렇게 가지고자 했던 자유에 있었던 것입니다. 자유에의 의지가 용기를 일으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 추구는 본능적인 것과도 같은 것이어서 이것을 억압했을 때 엄청난 저항정신이 나온다는 것을 이 영화가 증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또 한편의 영화는 자유를 찾아서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또 하나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결국 더 큰 자유, 진정한 자유를 얻는 주인공의 이야기인데 가슴속에 잔잔한 물결을 일게 한 영화입니다. 제목자체가 <프리덤>이라는 영화인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합니다.

1856년 아직 흑인 노예가 있던 시절, 흑인 노예인 사무엘 가족이 흑인들의 탈출을 돕는 백인비밀조직의 도움으로 캐나다로 도망을 치는 데 그 과정에서 악명 높은 노예사냥꾼의 추적으로 많은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 도망치는 중에 주인공 사무엘은 자기 어머니로부터 100년 전 자기 조상과 관련된 하나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사한 존 뉴턴이란 악명 높았던 흑인노예선장이야기입니다. 존 뉴턴은 다 아실 것입니다. 이 사람이 회심하여 흑인노예해방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자세한 줄거리를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 영화의 핵심만 말씀드리자면 사무엘이라는 흑인은 자유를 찾아 도망치지만 그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희망이 보이는 데도 바로 앞에 탈출구가 보이는데도 불안해하고, 도망에 성공하면 뭐하나 결국은 도망자 신세인데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백인을 증오합니다. 자유를 찾아 한발 한발가고 있었지만 더 가증되는 불안과 증오와 하나님에 대한 원망뿐이었습니다.

영화마지막에 사무엘과 그 가족은 거의 탈출 직전에 그들을 끈질기게 쫓아온 백인들과 마주치는데 그 백인들 중에서도 그들을 죽이려는 사람과 죽이지 않으려는 사람이 나뉘고 결국 백인끼리 총질이 일어나 사무엘과 가족을 살리려고 했던 백인은 끝내 죽고 맙니다. 그 때 이 주인공 사무엘이 눈물을 흘리면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릅니다. 그리고 사랑과 용서의 소망이 우리를 자유케 하고 라는 자막이 흘러나옵니다.

사무엘은 자신을 죽이지 않으려했던 백인의 죽음을 보고 진정 백인을 용서하게 되고 자기를 살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모든 불안, 원망, 증오에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한번은 자유란 말에 꽂혀 제가 열심히 자료를 찾고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우선 자유가 어떻게 정의되어 있을까 하고 백과사전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더 오리무중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자유의 정의, 개념, 원리만도 무수히 많았고 자유의 종류만 해도 법률적 자유,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사회적 자유 등 다양했습니다.

일단 백과사전에 맨 처음에 나온 자유의 정의를 말씀드리면 자유는 일반적으로 내·외부로부터의 구속이나 지배를 받지 않고 존재하는 그대로의 상태와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철학적으로는 이 자유가 무엇인지 단정할 수 없으며, 사르트르는 자유가 형벌에 가깝고, 결속·앙가주망(engagement-자기구속)을 참 자유라 하였다. 불가에선 죽음도 자유라 하였고, 도가에선 문명과 욕망의 자유를 거부하고 자연적으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한다.

이 정의만 들어도 자유라는 것은 참 다양한 개념이고 연구해 볼만한 재미있는 개념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학적으로 단정할 수도 없다, 자유가 형벌에 가깝다, 그리고 자기구속이 참자유다 이런 말은 언뜻 와 닿지 않습니다. 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구속의 반대개념을 보통 자유로 아는데 구속이 자유다 라고 했으니 뭔가 깊은 사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불가에선 죽음도 자유다 라고 했는데 내세에서는 아무 구속도 없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어서 이런 주장을 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흥미롭지 않으십니까. 연구해 볼만하지요.

각 사람마다 이런 자유, 내가 느낀 이 자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자유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책들을 조사해 본 것과 제가 본 영화를 토대로 자유에 대한 화두를 꺼내 볼까합니다.

 

 

실제 있었던 사건입니다. 어떤 흑인남자가 성폭행이라는 죄로 기소를 당해 재판을 받았습니다. 당한 여자는 백인여자이고 그 재판의 배심원들은 다 백인 남자였습니다. 흑인 여자 네 사람이 그 흑인 남자의 알리바이를 다 증명해주었는데도 배심원들은 그것을 묵살하고 무기징역이라는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흑인남자는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는 재판관 앞에서 마지막으로 진술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증인이십니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 나는 감옥에서라도 나의 억울함을 벗겨달라고 하나님께 날마다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가 감옥에 갇힌 지 16년 만에 DNA유전자 검사가 도입돼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는 무죄선고를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범죄자로 찍혀 감옥에서 보낸 세월 16년이 너무나 억울했을 텐데 그는 그에게 몰려든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를 범죄자로 찍은 판사와 배심원들을 증오하지 않습니다. 보복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분노와 증오는 나를 죽입니다. 나는 그들을 긍휼히 여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세월 억울하다고 보상해 달라고 미국 사법제도가 잘못되었다. 흑인 차별의 사회가 문제다 그렇게 들고 나와서 더 큰 사회적 이슈로, 문젯거리로 만들 수 있었었을 텐데, 그는 조용히 그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이 한 마디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이 성인 같습니다. 여러분은 무죄인 자신을 감옥에 넣은 사람까지 불쌍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16년의 기도가 그 사람을 성인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이겠죠.

 

우리안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 사회를 밝게 따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넘치는 사람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다 뺏고 옷을 벗기고 거의 때려 죽여 놓고 갔습니다. 그 때 마침 한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보고도 그냥 피해갔습니다. 또 한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그를 보고도 피하며 지나갔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 모두 유대인들이라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자기는 정결한 사람이고 종교행위를 해야 하는데 피를 묻히거나 시체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강도만난 사람을 피해갔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사람 같지도 않습니다. 자기 자식이었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때도 종교 찾겠습니까. 맹자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측은지심이 있다고 했는데 종교적인 선입견, 편견이 측은지심보다 더 타당한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종교적 위선, 우리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뒤집으십니다. 우리의 참된 이웃은 바로 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 유대인들에게 이방인 취급당하고 무시당하는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 쓰러진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상처를 싸매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봐주고 자기는 가야 하니까 주막주인에게 돈을 더 주며 이 사람 좀 돌봐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다 갚아주겠다 하면서 그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돌봐준 그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페이스북에서 이런 사연을 보았습니다. 며칠을 굶은 한 노숙자가 자기는 그만두고라도 자기랑 같이 있는 굶어서 지칠 대로 지친 강아지에게 먹을 것을 좀 주세요 라고 하면서 길거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비웃고 그냥 지나가지 아무도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노신사가 다가와 그 강아지에게도 먹을 것을 주고 이 사람에게도 먹을 것을 주며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 노숙자는 그 노신사의 도움으로 일거리를 찾고 강아지와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참 따뜻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강아지는 불쌍히 여기면서 노숙자는 벌레취급하진 않은지요. 버스나 공공장소에 노숙자가 타면 수군수군 거리고 극혐이다.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도움을 줄 처지가 못 된다면 무시나 정죄는 하지 말아야죠.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땅한 일, 그 당연한 일 우리가 하고 있지 못하는 것, 오늘 이 시간 반성해 보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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