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누구나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 능력의 한계를 느낄 때 생각지 않던 일이 벌어지게 될 때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을 걸어갈 때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두렵지 않다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두려운 게 정상입니다. 두려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대한 직시, 인정 그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 그것을 직시했을 때 더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특별히 신앙인의 경우 이런 예를 찾게 됩니다. 나는 신앙이 있는 사람인데 두려움을 표현한다면 믿음이 없다는 상태로 낙인찍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스스로 자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신앙인이라고 해도 역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명량>이라는 영화가 관객 1700만을 동원하며 화제를 낳았습니다. 저도 <명량>이라는 영화를 두 번 봤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화가 있습니다. 영화 중간 중간에 이순신 장군이 아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들이 아버지 이순신에게 어떻게 12척의 배를 가지고 330척이나 되는 왜군과 싸울 수 있습니까. 우리 수군들은 두려움에 질려 도망을 가고 있는 형편인데, '저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자 이순신이 대답합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은 적군도 아군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저는 이 대사가 참 인상 깊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대사도 인상 깊습니다. 이순신장군의 아들이 어떻게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하니까. 이순신 장군이 대답합니다.

죽어야겠지, 내가

죽음을 각오한 이 한마디에서 이순신장군의 필생즉사 필사즉생 이라는 말이 진정으로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도 이순신장군의 진정으로 죽을 기개로 전투에 참여하는 모습은 수많은 백성들에게, 부하들에게 감동과 용기를 주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제가 여기서 영화를 분석해드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두려움, 이 두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에게는 크고 작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명량>에서처럼 나보다 더 큰, 더 센 상대를 만났을 때 우리는 두렵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나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릴까.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가 대한 그런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어떤 사람에게 버림받는 것은 아닐까 라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너무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이 행복이 언젠가 사라져버리지는 아닐까 그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크고 작은 두려움들이 우리를 엄습해 오게 될 때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이순신장군의 말처럼,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참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들에게 공감하는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기독교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특징입니다. 이러한 참 하나님의 인성의 발로, 감성의 발로에서 기적은 시작되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결국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겐 너무나 신비인 죽음에서 부활하는 기적을 왁자지껄한 주문으로 요란한 몸동작으로 엄청나게 영향력 있는 기도문으로 이뤄내지 않으시고 조용히 눈물 흘리심으로 이루어내셨습니다. 우리는 기적을 이야기할 때, 능력 있는 기도, , 파워 등을 이야기하는데 오늘 본문 속에 예수님은 그런 모습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제가 보기엔 예수님은 이미 믿음과 확신이 있으셨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셨고 그 연약함이 하나님께 절실한 호소가 된 것 같습니다. 그것이 기적의 요인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외의 다른 종교들은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고 절제하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드러내었을 때는 실패한 것처럼 여깁니다. 눈물 흘리는 부처, 눈물 흘리는 마호메트는 들어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내려오셔서 인간이 갖고 있는 감성과 정서를 똑같이 갖고 계시고 그것을 이 땅에서 직접 체험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 연약한 감성을 드러내는 데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그 감성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러한 감성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의 눈물,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눈물의 간구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기도응답의 이전에는 눈물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야곱의 눈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야곱의 20년의 타향살이를 마치고 부인과 자기가 모은 재산을 가지고 형이 있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형 에서가 4백 명의 무리를 데리고 자기한테로 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이런 절대 절명의 순간에 야곱은 얍복강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그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어긋나게 합니다. 그래도 야곱은 끈질기게 자신을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그 사자를 붙들고 늘어집니다. 이 사건을 호세아(12:3-4)는 이렇게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야곱은 이겼으나 울었습니다. 울며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이 너무 힘이 세서 그 힘에 못 빠져 나간 것도 아니고 너무 붙들고 늘어져서 못 빠져 나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물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그 눈물을 보고 마음이 흔들려 그를 축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지 야곱의 눈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결국 눈물로 축복을 얻어냅니다. 하나님의 사자도 야곱의 눈물에 더 이상 겨루지 못하고 져주었던 것이겠죠.

또한 히스기야의 눈물도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로부터 죽을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15년이란 세월을 더 담보 받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열왕기하 20:5). 하나님은 네가 왕으로서 잘한 공로 때문이 아닌, 네 눈물을 보고, 너의 상한 심령에서 나온 눈물을 보고 내가 낫게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감성에서 나온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신성한 것입니다.

눈물은 우리의 영성을 성장시켜주고 인격을 성숙시켜주고 우리의 마음 밭을 길갈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눈물로 인해 하나님은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눈물이 바닥났다는 것은 아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있다는 것은 서로 공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성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 감성은 하나님의 사랑의 조건입니다.

요즘은 감성학 이라는 학문도 있습니다. 재미있어서 사서 읽었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감정보다 신성한 것은 없다. 감정의 성질은 현실적이나 그 힘은 사람을 초현실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성학적 힘은 신비스러운 것이며 초월적 세계, 종교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희로애락의 감정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 줍니다. 그러나 그 힘은 영성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교육에서도 감성지수다 뭐다해서 이젠 감성의 아름다움을 발휘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습니다.

이젠 <감성에서 영성으로>를 말해야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경시한 이 감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을 보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감성의 작용은 진정 신성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우리가 멸시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 예수님을 통해서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의 감성의 발로가 기적의 조건이 된다는 것, 감성에서 영성으로 간다는 이 단순한 이치를 가슴깊이 되새기게 됩니다.

 

 

 

우정의 눈물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는데, 그의 우정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현대에 있어서 관계는 중요시하나 우정이라는 단어는 고리타분한 언어가 되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예수님은 요즘 시대에 말하는 관계가 아닌 사랑에서 우러나온 우정을 간직하고 계신 분이었고, 그 우정을 위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가 있는 베다니 그 조용한 가정에서 쉬시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11:5)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더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더 확실히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친구처럼 사랑했던 것입니다.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가 다른 사람보다도 예수님에게는 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충만했던 예수님도 죽은 나사로를 보고 그 정에 마음이 흔들려 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정 우정이란 것이 무엇인지 아신 분이셨습니다.

 

 

공감의 눈물

 

예수님은 또한 공감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시고 또 그들 곁에서 함께 울고 있는 유대인들을 보시고 그 눈물에 마음이 동요되었습니다. 그 슬픔에 감정이입이 되어 같이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지만, 그 목적 때문에, 그 믿음 때문에 강한 모습을 애써 드러내보려고 하실 수 있었을 텐데,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하셨고 사람들의 슬픔과 질고도 아시고 또한 그것을 직접 겪으신 인간이셨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슬픔에 공감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있고 당신이 신성을 가진 존재임을 아셨지만 그의 인성의 연약함까지도 드러내는 것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남성들에게 눈물은 금지사항입니다. 그 때 당시도 물론 남성들은 그 연약함을 드러내면 안 되기 때문에, 눈물을 드러내는 것을, 특히 남성들은 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억제하지 않으셨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메시아로 여기는 상황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유대인들의 빌미가 되기에 적당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떤 유대인들은 이렇게 비웃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라는 자가, 심지어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가, 기적까지 베풀 수 있다고 하는 자가 지금 아이처럼 울고 있다하면서 그의 연약함을 조롱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연약함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에 대하여 모독할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요즘 정치인들이 잘 하는, 눈에 보이는 정치적인 액션을 그 당시 취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진실 된 감정을 그대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마음대로 말하며 예수님과 그의 하나님을 모독하며 야비하게 구실을 꾸밀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는 그의 인성의 연약함을, 그 진실을 그대로 흘러나오게 하였습니다.

 

 

 

 

 

 

 

 

 

감성의 부활, 이제는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되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감성적인 분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신성모독일까요? 실제로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세 번 우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고, 누가복음 19장에서 예루살렘 입성 후 그 성에 있을 앞으로의 심판을 내다보시고 우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잡히시기 그 바로 전에 기도하시면시 우셨습니다. 그 외에 예수님께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신 것은 무수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Compassion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감성과 예수님의 인격적 자질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Compassion란 말의 원뜻은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며 예수님의 무리를 향한 심정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합니다. , Compassion이란 다른 사람의 고통, 슬픔, 아픔에 대한 깊은 인식이나 공감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싶어 하는 강렬한 마음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님이 감성적인 분이셨다는 것을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시기 전에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이 본문은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셨다는 것에 포커스를 두어 예수님이 죽음도 이기시고 죽음도 주관하시는 신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어 해석이 되어왔습니다. 기적을 베푸시기 이전의 예수님의 마음의 동요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랑하는 마리아의 눈물에 그리고 함께 온 유대인들의 눈물에 마음이 애잔하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을 보고 유대인들은 얼마나 그를 사랑했길래라고 말합니다.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에 대한 우정과 사랑의 눈물, 사람들의 눈물을 보고 흘리신 공감의 눈물, 죽은 나사로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눈물. 그 눈물에 이제까지 우리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리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리라하고 몇 번이나 마르다 에게 확신을 주셨고, 마르다도 몇 번이나 믿음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 연약함을 드러내었습니다. 예수님도 또한 인성의 연약함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눈물에 공감하고 그 마음이 동요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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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경시되어 온 역사가 있듯, 눈물도, 눈물로 대변되는 감성도 경시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남자들은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21세기는 감성의 시대, 여성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감성, 소통, 힐링, 공감 이런 말들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인문학에서는 감성이 많이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여성들이 부각되고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아직도 감성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감성은 인성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에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되어 연구대상이 안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료도 별로 없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말이 있는데 감성에서 영성으로라는 말은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불경한 것일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감성적인 분이셨습니다. 눈물도 많이 흘리셨고 예수님의 베푼 기적은 예수님의 감성,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지성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감성이 영성과 통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메마르지 않은 따뜻한 마음, 연민의 마음, 동정의 마음 그리고 눈물, 여기에 진정한 영성의 발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감성의 시대라고 떠들지만 실제 감성이 부재한 현실을 실감합니다. 뉴스를 통해서 우리는 많은 인간성 파괴의 현실을 봅니다. 살인, 성폭력, 학교 폭력과 왕따, 묻지마 폭행, 군대에서의 집단 구타, 각종 혐오문화 등, 많은 사람들이 이 원인을 현대사회의 물질 만능의 추구, 효율성의 추구 그리고 SNS로 대표되는 감성이 배제된 인간관계 등, 이런 것들이 인간성을 파괴하고 있는 주요원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람다움은 감성의 부활에서 옵니다.

 

 

저는 많은 눈물들을 기억합니다. 저도 눈물을 많이 쏟았습니다. 한때 시를 썼는데, 눈물에 관한 시를 많이 썼습니다. 지금은 제가 흘린 눈물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목격한 나의 주변의 사람들이 흘린 눈물을 기억해 내려고 합니다. 자신에게 매몰차게 대한 어떤 교우에게 상처받고 제 품에 안겨 통곡하신 어느 권사님의 눈물을 기억합니다. 어머니를 하늘나라에 보내고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흑흑 흐느껴 우시는 어느 교우의 눈물을 기억합니다. 창조적이고 정말 멋지게 살고 싶은데 사람에게 매달리는 나 자신이 서글프다 라면서 우시는 어느 집사님의 눈물방울이 기억이 납니다. 암 투병으로 고생하시면서도 그 아픔을 참고 애써 웃음을 지으시는데 그 두 눈에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어 눈물이 아니라 눈 울음이 된 모습을 기억합니다. 기도회 때 하나님께 살려 달라 울부짖으며 흘리는 눈물, 체념한 듯 고개 숙인 채 말없이 흘리는 눈물, 수북이 눈물로 적셔진 티슈들이 기억이 납니다. 세족식 때, 자신의 더러운 발을 씻겨준 사람이 고마워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그 분의 빨개진 눈이 기억이 납니다. 대학원시절, 미국으로 찬양선교를 떠났는데 대학생들, 대학원생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찬양 선교사들의 찬양에 무슨 감동을 받았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기를 안고 있는 어느 엄마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또한 눈물 하면, 저의 엄마가 떠오릅니다. 엄마의 긍휼에 겨워 흘리신 눈물, 그것이 기억이 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외판원들 특히 책을 팔려는 외판원들이 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친척 중에 나이 들어 경제적 능력이 없는 분, 사업에 망한 분들이 자주 찾아왔습니다. 그때 엄마는 한참 같이 얘기하다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이 갈 때는 항상 돈을 쥐어주시는 걸 봤습니다. 그 돈이 큰지 안 큰지는 모르지만 조그만 액수라도 항상 쥐어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잊혀 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했습니다. 재수를 하고 합격여부를 보기 위해 해당대학에 가는 날, 아주 추웠습니다. 저는 담담한 마음으로 대학에 갔으나 불합격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를 제일먼저 보았습니다. 엄마는 저를 보시고 눈이 빨개지면서 우시는 거예요. 제가 아무 말도 안했는데. 제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예감 하셨나 봐요. 이 추운 날, 불합격이라는 통지서를 받고 저벅저벅 걸어오는 제가 그렇게 불쌍하게 보였는지. 제 마음을 읽으시고 보자마자 눈이 빨개지면서 우셨습니다. 그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반면 아버지한텐 떨어졌다고 혼이 났습니다(?). 제가 이 기억들을 말씀드리는 건 어머니로 대표되는 여자는 눈물이 많고 동정심이 많고, 아버지로 대표되는 남자는 눈물도 없고 동정심도 없다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는 속으로 울겠지요. 어쨌든 눈물은 여성의 전유물처럼 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도 그렇습니다. 스스로 죽임을 당하시는 바보 같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음해하고 죽이려고 하였는데도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귀신도 내쫓으시는 권세가 있으신 분이 그 사람들 혼내주시는 건 쉬웠을 텐데 왜 저항하지 않으시고 끝끝내 십자가의 길을 가셨을까요. 바보중의 바보입니다. 온갖 모욕과 멸시를 다 당하셨을 때 나 같으면 그런 인간들한테 침이라도 한번 뱉어 주었을 텐데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바보처럼 그렇게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엄청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구원을 펼쳐주신 이유를 차치하고라도 눈에 보이는 결과만으로도 엄청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생겨나고 교회는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몇 십억의 인구가 이제는 예수님을 찾습니다. 바로 약자의 힘, 바보의 힘, 십자가의 힘입니다.

 

순간의 이익, 눈앞의 유익을 쫓아서 약한 자를 짓밟고 권력에 아부하는 것, 그것이 세상을 잘살아가는 처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에 경종을 울리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정신이 우리의 삶에 녹아들어간다면 바보처세술이 정말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지 않을까요.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2005년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스티브 잡스의 이 평범한 말, 특히 foolish하게 살아라, 이 말이 저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인생에서 바보같이 살았다 라는 말이 적용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는 자신이 창업한 애플사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다시 그 회사의 최고경영자로 복귀하였고 혁신에 혁신을 거듭해 많은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발명품들을 내놓아, ‘혁신은 스티브 잡스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도 바보 같은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의 풀 스토리(full story)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났을 때 포기했더라면, 당장의 눈앞의 이익 때문에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는 그의 놀라운 업적을 이루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직하게 어쩌면 바보처럼 한 길을 간 것. 그것이 그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지 않았을까요. 그러고 보면 foolsih란 말이, 즉 바보란 말이 이젠 더 이상 욕이 아니라, 오히려 호감언어입니다.

그리고 바보는 이젠 사전적인 의미로서 쓰이기보다는 이 시대에는 어느 한 쪽의 전문가를 애칭으로 부르는 말이 된 것 같습니다. 이 바보라는 것을 희화화한 예능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인데, 201510월쯤, 제목은 바보전쟁, 부제목은 순수의 시대로 방영된 것으로 기억됩니다. 뇌순남(뇌가 순수한 남자), 뇌순녀(뇌가 순수한 여자)를 뽑고 웃기는 게임도하고 경기도 하는 그런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바보전쟁입니다. 이 단어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들리지 않고 프로그램이 재미있었습니다. 거기서 뇌순남, 뇌순녀로 뽑힌 연예인들은 미술이면 미술, 음악이면 음악, 연기면 연기, 어느 특정한 데에 있어서는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예능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상식은 꽝인 바보들이었는데 사자성어도 하나도 모르고 한글 받침법도 다 틀리고 쉬운 영어도 하나도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보가 아닌 바보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연예인들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그 모습들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바보가 이제는 더 이상 비하하는 단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한 쪽 면으로 너무 치우쳐, 다른 쪽은 모자라는 사람인데 그것이 오히려 더 매력적인 사람, 그런 사람을 바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바보가 되는 것이 전략일 수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제일 바보의 길을 간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보처세술의 대표자가 누구일까요. 단연 예수님을 꼽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진짜 바보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행동과 메시지는 바보스럽고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 파급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접근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로 나가서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라는 것이 우리가 그렇게 추구하고, 바라고, 못 가져서 안달인 것들이었습니다. 다 아실 텐데 첫째는 부였고, 둘째는 권력이었고, 셋째는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모두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남들은 못 가져서 안달인 이 큰 복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다니 바보중의 바보 아닙니까.

예수님의 메시지도 다 바보스러운 메시지였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은 누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내어주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면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 너에게 억울하게 대하거든 악에 악으로 대항하지 말고 져주라는 말입니다. 바보 아닙니까. 그러나 진짜 바보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은 오른쪽 뺨을 치거든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유대 당시 왼쪽 손을 사용하는 것은 불결한 일에만 사용했기 때문에,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오른손잡이였기 때문에, 오른손으로 뺨을 때립니다. 그럴 경우 그 맞은 뺨은 왼쪽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에 오른쪽 뺨을 치거든 이라고 했는데, 이때 왼손으로 뺨을 때릴 일은 없고, 이것은 오른손 손등으로 쳤다는 의미입니다. 손등으로 쳤다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아주 모욕적인 행동입니다. 힘이 있는 자가 힘이 없는 약자에게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오른쪽 뺨을 맞았다는 것은 힘이 없는 약자가 심한 모욕을 당한 경우인데 이때 예수님은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악에 받쳐 저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적하지 말라, 져주라는 것입니다. 바보입니다. 그러나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모욕을 당하고도 눈을 부릅뜨고 왼쪽 뺨마저 돌려대면서 그래, 더 모욕해보시지 이런 태도로 나온다면 이것이 바보 같은 메시지로 보이지만 실제 바보가 아니라 지극히 머리 좋은 저항전략이라는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모욕을 당해 벌겋게 오른 뺨, 그리고 이글거리는 두 눈을 가지고 왼쪽 뺨마저 때리라고 했을 때, 이 행동은 때린 사람을 천하의 나쁜 놈으로 만들어 버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나는 그렇게 자존심도, 자아존중감도 낮은 사람이 아니다. 즉 남을 짓밟는 너같이 짐승 같은 부류의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다라는 무언을 말을 담고 있는 행동입니다. 바보 같은 행동이 항거의 표현이 될 수 있고 저항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내어주라, 이 말씀 속에서도 누군가가 재판을 걸었는데 담보물로 속옷까지도 빼앗으려 한다면 그 재판을 건 사람은 언뜻 봐도 바늘로 찔러 피한방울도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겉옷까지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약자중의 약자입니다. 아무것도 없어 속옷까지 담보 잡혔습니다. 그런데 법정에서 속옷도, 겉옷도 다 발가벗겨진다면 벌거벗은 이가 부끄럽겠습니까. 벗긴 자가 부끄럽겠습니까. 또한 보는 이는 어떻겠습니까. 유대사회에서 율법에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담보물을 잡더라도 그 담보물을 해가 질 무렵에는 되돌려주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야만 그가 담보로 잡혔던 그 겉옷을 덮고 잠자리에 들것이며 도리어 담보 잡은 자의 복을 빌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조항이 신명기에 나와 있습니다(신명기 24:10-13, 17). 또한 유대사회에서는 벌거벗는 것이 금기였으며 그 수치는 벌거벗은 사람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를 벌거벗게 만든 사람이나 혹은 그 벌거벗은 몸을 본 사람에게 돌아갔다고 합니다(창세기 9:20-27). 그렇다면 속옷까지 담보 잡으려 했던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은 평생 고개를 못 들고 다닐 만큼 악을 행한 것입니다. 오히려 바보전략이 그를 만천하에 처벌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이 말씀 속에서 억지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당시 로마군인이 식민지인 유대 백성에게 강제적으로 자신의 군장을 지고 억지로 5 리를 가게 했던 경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군인이 억지로 군장을 지고 가게 할 수 있는 거리가 5 리로 한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상을 가면 위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과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엔 강압에 못 이겨 5 리를 가주었는데, 이젠 더 말하지 않고 5 리를 더 같이 가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공권력에 의해 강제 노역을 한 상태에서 분노를 품거나 포기를 하거나가 아니라 오히려 5 리를 더 가주겠다고 하면 우리는 이 사람을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로마 군인에게 자신을 강제하게 하고 억지로 하게 한 그 주도권을 이제 더 이상 빼앗기지 않겠다. 그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 내가 너를 위해 5 리를 더 가주겠다. 이렇게 했을 때 로마군인의 얼굴을 상상해 보십시오. 로마군인은 이 사람이 나를 약 올리나,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인가, 나는 군법을 어긴 것이 되는데... 이 사람은 이미 내 명령에서 벗어난 사람, 이 사람은 이미 주체적인 사람,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 이미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죠. 바보전략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바보스러운 방법이었지만 오히려 그 방법이 전략이 되어 상대방을 악한 자로 만인 천하에 드러나게 하고, 더 나아가 그로 인해 악한 자의 마음도, 그것을 보는 이들의 마음도 변화시킬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는 효과와 파급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폭력이 바보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은 가해한 상대자를 굴복시키는 창조적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떠돈 동영상이 생각이 납니다. 헝가리 여기자가 아이를 안고 기어가는 난민 남성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난민 어린이를 발로 차는 장면입니다. 이 여기자는 전 세계의 공분을 샀고 즉시 해고 되었습니다. 약자 중의 약자를 때린 것입니다. 오른쪽 손등의 모욕도 모자라 왼쪽 뺨까지 때린 것입니다. 이 여성은 변명 아닌 변명을 했지만 그 영향력과 파급력은 대단해서 그 여자는 평생 변명을 해야 하며 살게 될지도 모르고 얼굴 못 들고 다닐지도 모르고 집안 대대 망신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진짜 바보는 누구일까요? 강한 자? 아니면 약자? 가해자? 아니면 당한 자?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처세술이 필요합니다. 처세술이란 세상일 또는 사람과의 관계를 풀어가는 수단과 방법입니다. 능란한 처세술을 가진 사람이 출세를 한다고 말합니다. 처세술도 여러 가지가 있고 그것에 관련하여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적 처세술이 뭘까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대학원 시절 신약성서 마가복음수업을 들었는데, 이 수업시간에는 논문을 써서 발표하고 토론하고 평가를 받는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 제가 마가복음 7장의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논문을 썼습니다. 이 여인의 이야기를 다 아실 것입니다. 어느 한 여인이 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이 어땠는지 다 아시죠.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하고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이 여자를 개 취급하십니다. 저는 이 점이 그 때 당시 도무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반응 또한 도무지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 여자 왈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고 합니다. 즉 자신을 개라고 해도 좋다. 상아래 부스러기라도 먹겠다 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여성으로서인 저에게 그 때 당시 왜 그렇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자료를 찾아봐도 전통적인 해석들은 이 여자의 행동을 굴종이다, 겸손이다 그렇게 밖에 해석을 안 하는 거예요. 굴종이라는 말이 그렇게 거슬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이 이 여자는 절대로 자신을 개라고 인정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처세였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이라는 거대한 권력, 이렇게 표현해서 죄송하지만, 이 여자에게는 예수님이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 권력에 자신을 깎아 내림으로써 목적을 이루려고 한 것이다. 이 여자는 절대로 자존심을 버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언어유희다, 이러면서 프랑스 언어학자의 예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어쨌든 신선한 해석이라 해서 점수 짜기로 유명한 호랑이 교수님께 저는 좋은 점수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처세에 대해서 그 때 처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근데 이 여인에 대해서 나중에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딸 이민아씨를 아실 것입니다. 이 분의 기구한 인생에 대해 아실 것입니다. 이 여인이 간증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아들이 자폐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여성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였습니다. 개라고 하는 것이 무슨 큰 문제냐고, 개라고 해도 좋고 더 큰 욕을 먹어도 자신의 아들만 낳을 수 있다면 그깟 자존심이 무슨 문제냐고. 저는 그 때 그것이 모성이구나. 처세라는 말은 너무 경솔하구나. 개라고 취급하던, 벌레라고 취급하던 자식이 나을 수 만 있다면 하는 지극한 모성에서 나온 애절한 마음을 내가 읽지 못 했구나 라고 제가 아차 싶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처세라고 표현하든, 모성이라고 표현하든 제 의견이 정답과 진리는 아니더라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여성의 행동을 지극한 모성에서 나온 바보처세술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자신을 깎아 내리고 자존심을 버려도 어쩌면 어리석게 보이지만 꿋꿋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것. 이 시대에 필요한 처세술이 아닐까요. 이 시대는 스마트하고 자신의 이익에 밝은 사람,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어떻게든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서로 싸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처세술은 달라야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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