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이 착함이 경쟁능력입니다. 착한 사람 중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유재석 개그맨을 보더라도 그는 착한 사람, 겸손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만큼 성공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젠 착함이 경쟁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정직, 겸손, 자기희생 이러한 가치가 얼마나 중요해 졌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희소하기 때문에 훌륭함으로 인정받고 어느새 성공의 기준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젠 착함이 경쟁능력이 되어 너도 나도 착해지기 경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공부 공부만 한 이기적인 아이들이 성공하는 케이스보다 뛰어놀고 함께하고 공동체성을 기르고 봉사가 뭔지 희생이 뭔지 이것을 가르친 아이들이 더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례가 많습니다.

제 조카를 보면서 피부로 느낍니다. 저에게는 공부 잘하는 조카도 있고 공부를 못하는 조카도 있습니다. 어떤 조카는 전교에서 몇 등을 하는데, 저는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조카보다 더 끌리고 사랑스러운 것은 공부를 못하는 조카들입니다. 저지방우유를 하도 많이 먹어서 저 지방대학에 들어간 조카들입니다. 그래도 인간성하나는 끝내줍니다. 어른들 공경할 줄도 알고 정말 착합니다. 그런데 이 저 지방대학간 조카들이 보란 듯이 좋은데 취직이 다 된 거예요. 우리 사회에 학벌차별, SKY대학 나온 사람, 유학 갔다 온 사람들 차별 심하다고 하는데 어쨌든 우리 조카들은 취직이 다 되었습니다. 조카들이 알게 모르게 노력도 많이 했겠지요. 그런데 이제는 착함, 성실성, 인간성, 공동체성이 우대받는 것 같아요. 아무리 학벌 좋고 실력이 출중해도 인간성이 나쁘면 별 매력이 없어요. 그런 사람들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도 이젠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너무 너무 공부, 공부,실력, 실력, 하는데, 성실성, 인간성, 공동체성 이것도 어마어마한 실력입니다. 국영수 잘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만이 실력이 아닙니다. 성실한 인간성, 배려, 나눔, 공동체성 가지는 것, 이것 아무나 되는 것, 아무나 갖추는 것 아닙니다. 이젠 실력의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우리 조카들이 취직할 때 질문하는 것이 하나같이 이에 관련된 질문이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우수한 인재를 뽑는 것이 아니라 적합한 인재를 뽑는다고 합니다.

하버드대 인생학 명 강의를 책으로 묶은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라는 책에 나온 예화인데 수많은 세상의 성공했다는 사람들, 부자들도 하나같이 인성의 중요성을 이야기 합니다.

투자계의 대부 모건이라는 사람한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성공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그는 대답합니다. 인성입 니다. 기자는 다시 묻습니다. 그럼 자본과 자금 중 에서는 어느 것이 더 중요하죠. 그러자 모건이라는 사람은 자금보다는 자본이 더 중요하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인성입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세계적인 부호 워렌 버핏과 빌게이츠도 이와 같은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19985월 즘, 워싱턴 대학교에서 열린 초청강연에서 한 학생이 질문합니다. “부자가 된 비결을 알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버핏이 대답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비결은 좋은 머리가 아니라 인성입니다. 그러자 빌게이츠가 그의 말을 거들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도 버핏의 말에 100퍼센트 동의합니다.”

성공의 조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성이라는 것입니다. 착한 인성이 이제는 경쟁력입니다. 성공의 조건입니다.

 

오늘날 착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칭찬이기도 하지만 나쁘게 들리기도 합니다. 착한 사람이라는 말이 좋게만 들리지 않고 부정적으로만 들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 보통 자기 주관이 없는 사람, 개성이 없는 사람, 평범한 사람, 약한 사람,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극한 데까지 부정적인 사람은 착한사람을 위선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계발서 들을 보면 이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라, 자기를 마음껏 사랑하고 색깔이 있는 사람이 되라. 이기적이 되라, 이렇게 이야기들 합니다.

여러분은 착한여자에게 끌리십니까, 나쁜 여자에게 끌리십니까. 착한 여자가 좋다고 하면서도 나쁜 여자에게 끌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저도 착한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말하지만 막상 나쁜 남자한테 끌립니다.

그렇다면 보통 어떤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하나요. 예를 들어 버스에서 노약자,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거나 노숙자들을 위해 먹을 것, 입을 것을 준다거나, 분실한 물건을 굳이 주인에게 찾아주거나 돌려주거나 하는 사람, 누군가 아플 때 급히 달려들어 응급치료를 해주는 사람, 위급상황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알면서도 그 불길에 뛰어드는 사람, 어느 사회에서든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고 사과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자신에게 불이익이 온다는 것을 알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우리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그 착함이 나한테만 이고, 남한테는 좀 나쁜 이기적인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왜 그러냐면 자신을 희생하고 솔직하고 한 것이 어쩌면 바보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권선징악의 사상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 소설, 동화에서 주인공, 즉 착한 사람은 잘 되고 이 착한 사람을 괴롭히는 악한 사람은 벌을 받았으면 바라는 것이 우리의 인지상정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방금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 남한테 너무 착한 사람은 솔직히 인정을 못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자신한텐 착해도 남한텐 이기적이 되길 원하며 남한테 너무 착한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의 성공의 조건이 착한 품성, 인격, 성실성 같은 도덕적인 면보다는 일과 관련된 능력, 효율성, 자본의 소유여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통 착한 사람은 남에게 이용을 잘 당하고 그것이 불행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착한 사람은 천성 상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남을 부리는 것, 남 시키는 것 잘하지 못하고, 남의 요구도 잘 거절하지 못하고, 그래서 주눅 들고 자신의 의견을 잘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 불행해지는 사례도 많습니다. 양보와 희생정신 때문에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착함이 불행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착한 사람도 자신의 권리, 표현, 주장 등을 잘 할 수 있도록 강화되어야 할 인격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능력의 조건이 동등하다면 착한 사람이 더 많이 칭찬받고 더 크게 성공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겐 위로가 필요합니다. 멀쩡해 보여도 실패와 좌절 속에, 외로움 속에, 지독한 상처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디선가 눈물지으며 한탄하고, 한숨지으며, 욕지거리 한 사발에 세상을 원망하며 사는 사람들, 아니 극단으로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 중에는 있습니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을 말하며 지독한 평가와 차가운 냉대 속에서도 견뎌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철저히 현실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만 한다고 가르침을 받습니다. 세상에서는 마리아의 사랑의 행동을 돈으로 따졌던 남자 제자들, 특히 가롯 유다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철저히 계산하고 어디에 더 합리적인지 따지라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보기에는 마리아의 행동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를 칭찬하십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행동을 한 마리아를 온 천하 만민에게 기억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두부류인 것 같습니다. 철저히 현실 분석적이고 이성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하는 사람, 또 한 부류는 그래도 희망을 말하는 사람, 위로를 말하는 사람, 따뜻한 정을 말하는 사람.

제 어머니와 저의 체험담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80이 넘으셨는데 몸이 아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죽음이라는 공포가 밀려오셨나 봅니다. 어머니도 신앙인이시지만 하늘나라를 믿으시지만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아픔과 죽음이라는 공포가 엄습해 올 때는 어머니도 어린아이 같이 불안해 하셨습니다. 다니는 병원이 있었는데 그 병원의사선생님은 좀처럼 냉정하셔서 약만 처방해주시고 끝이었어요. 어머니는 어린아이 같이 제가 나을 수 있나요 하면서 애처롭게 물어보시는데도 그 의사 선생님은 냉담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다른 병원에 가보자 하면서 유명한 의사선생님이 있는 병원을 찾아가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소원이라 어머니 하자는 데로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병원을 가보아도 검사 이것저것 해보시고 약 처방해주시고 냉담한 반응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나을 수 있나요 하면서 의사선생님께 어린아이같이 매달리시며 불안해하시는 모습을 보이시는데 옆에서 안쓰러워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의사선생님들한테 서운했습니다. 괜찮아지실 거예요. 거짓말이라도 해주지 정말 가슴 아팠습니다. 의사선생님은 검사결과를 보고 이성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났습니다. 저는 기도를 했습니다. 거짓말하는 의사선생님 좀 만나게 해달라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병원한군데를 더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분은 어머니께 환하게 웃으면서 약 드시면 좋아지십니다. 괜찮아지십니다. 매일 30분 햇볕보시고 성경도 쓰시고 운동도 하세요.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면서 성경카드까지 주시는 거였어요. 그 의사선생님이 크리스천이었던 거예요. 그 날부터 어머니는 달라지기 시작하시는데. 매일 햇볕보시고 식사도 못하셨던 분이 식사도 잘하시고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안 좋은 눈으로 성경을 매일 보시고 쓰시고 너무 달라지셨어요. 아마 제가 보기에는 이러다가 100세까지 거뜬히 사실 것 같습니다.

약이 좋아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의사선생님의 위로의 말 한마디, 희망의 말 한마디로 달라지셨습니다.

 

내 힘으로 해보려고 했으니 얼마나 곤고하고 지치겠습니까. 그런데 지치고 지칠 때 찾아 의지 할 수 있는 한분이 있다는 것. 바로 하나님이 있다는 것. 그 하나님을 찾는 것, 그것이 신앙인과 자연인의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내려놓습니다. 기도한마디 하고 흐르는 눈물, 상한 심령 속에 흘러나오는 눈물. 그 눈물이 있어 다행이고 눈물을 보일 수 있는 곳이 있어 다행이고, 내가 찾아올 때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고, 내가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이 있다는 것이,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 곳이 엄마의 품 속 같은 하나님의 품이고 그때 말할 수 없는 평안을 느낍니다. 마음의 평안, 교만의 끝을 볼 때, 바닥을 칠 때, 두 손 두 발 들 때 가능합니다. 그럴 때 젖먹이가 어머니 품에 안기듯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평안을 느끼십니까. 저는 하나님 품에 안길 때 평안을 느낍니다. 그때는 잘해서 칭찬받을 때 안기는 것이 아니라 잘못해서 눈물 뚝뚝 흘릴 때입니다. 이 평안이 있어야 끝없이 악해지는 우리의 본성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이 이것의 반복인 것 같습니다. 교만하고 깨어지고 하나님 찾고.

그래도 우리는 다행입니다. 하나님 품이 있습니다.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는 방법을 압니다. 엄마의 품속 같은 하나님의 품, 우리가 교만하지 않을 때, 오만하지 않을 때, 큰일을 감당하려고 나서지 않을 때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그 비법, 그 비결을 모르셨다면 오늘 내가 교만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회개하고 얼른 하나님 품속으로 달려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늘나라에선 잔치가 벌어질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야, 하면서 내가 큰일을 이루면 내가 큰 성취를 이루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인양 생각하는데 이것이 교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큰 일, 대단한 일, 하나님보시기엔 아무 관심이 없는 것일 수 있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찮은 일, 작은 일, 하나님은 정말 소중하게 여기시고 귀하게 여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시고 어떤 한 여인이 열 은전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었을 때 온 집안에 불을 켜 찾아 낼 때까지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고 결국 찾아내고서 이웃을 불러 즐기는 비유가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여기서 잃은 양이나 잃은 은전은 죄인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은 그것으로 더 기뻐하고 잔치를 벌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에겐 몇 만 명 모이는 큰 교회 짓는 거, 성전 짓는 거 관심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죄인 한 명, 잃어버린 양 한 마리 그 한 사람 찾으려고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영적인 교만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도 때로 많은 영적인 교만을 짓습니다. 하나님 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일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만 들여다보면 내가 향상하려는 욕구 때문에 열심히 한 것입니다. 뭔가 열심히 저질러 일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도 좋아하시겠지 합리화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내 뜻을 이루려고 한 것이고 내 방식대로 이루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 묻지 않고 열심히 향상하면, 그래서 보다 더 위대해 지면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당연히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도리어 더 부정적으로 일이 돌아갑니다. 그런데도 회개치 않고 그 화살들을 주변 사람에게 돌립니다. 나는 옳은데 그들이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다른 사람들을 원망합니다. 결국 관계는 어그러지고 그렇게 바닥을 치게 될 때, 결국 그렇게까지 갈 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구나, 내가 내 힘으로 일을 하려고 하였구나, 회개하고 그 때서야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내 능력으로 내가 인정받으려고 했던 교만함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 두 손 두 발 들고 모든 걸 내려놓게 됩니다. 내 욕심 내 욕구 인정받으려고 했던 모든 욕구까지 모두 내려놓을 때 마음의 평안함이 찾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말씀과 사유로의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로의 사람  (0) 2020.01.06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0) 2020.01.04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범하는 교만의 예  (0) 2019.12.30
교만  (0) 2019.12.28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모습  (0) 2019.12.26

 

우리 신앙인이 특히 주의해야 할 교만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장한 교만,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하는 교만입니다. 소위 영적 교만인데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하면서 자기의 뜻을 이루고자, 자기의 욕심을 이루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는 목사님 얘기 좀 하겠습니다. 저도 신앙생활을 오래하면서 기도 좀 하신다는 분, 영적능력이 있다는 분을 찾거나 그 단체에 속해보기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별의 별 목사님들을 다 만나보았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어려운 시절을 겪어서 남달리 성공해서 잘 살아야 겠다는 욕구가 큰 분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다 공부가 되지 않아 기도원 부흥회에 갔다가 거기서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기도를 하고 주의 종이 되기 위해서 신학공부도 하고, 전도사 사역을 하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는 사역지마다 부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교역자로 7년을 했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떠나라고 하셨대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자신감 있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 그 당시 놀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 그렇게 기도하고 간구하고 하는 데도 방황할 때가 많고 나중에서야 신앙고백으로 그것이 하나님 뜻이었다라고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저는 매사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말하는 분을 보면 놀랍습니다. 어쨌든 이 목사님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곳을 예비해 두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계속 기도해도 사역의 길이 열리지 않았대요. 그래서 이 목사님이 40일 금식기도를 하셨답니다. 그리고 하루 17시간 기도에 매달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15개월 후 다른 사역지가 나타나지 않아 교회 개척을 했는데, 이 분은 1년 안에 500명이 모이고 여의도순복음 교회보다 더 큰 교회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합니다. 말씀에 네 입을 크게 열라그러셨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목사님은 확신에 차 있었다고 합니다. 아 그런데 그 교회가 5년 후 건물주의 사기로 문을 닫고 교회건물은 경매로 넘어간 것입니다. 5년 동안 고생만 실컷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이 자기를 분석하기를, 자신의 자기 확신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교만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금식기도를 하고 기도에 매달리면서 더욱더 영적 교만에 빠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재미있습니다. 자신의 실패의 원인을 교만이라고 말하고 다니며 나같이 하면 교회 문 닫는다 라고 간증하고 다닌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뒤부터 40일 금식기도를 몇 번이나 하셨다는 분, 기도를 너무 많이 해서 영적 능력이 있다는 분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자기의 능력을 크게 생각하는 것이 교만

우리는 보통 알고 있기를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는 원죄를 범한 것도 교만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의 원죄는 교만이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나친 자기애나 과도한 자기 과신, 혹은 자기에게 그 능력이 없는데 자기를 크게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보통 교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교만이 내포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일 것입니다. 어쨌든 보편적으로 교만이라는 개념은 자기 자신을 높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너무 높아서 다른 사람보다 내가 중요하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대접받고 높아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처럼까지 높아져야 하는 것, 그것이 교만입니다.

헬라에는 교만이라는 뜻으로 휴브리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Pride(교만)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우상 숭배적 교만과는 다르며 오히려 본성의 활력에서 나오는 지혜롭지 못한 자기 숭배에 가까운 말입니다. 휴브리스는 특히 위대하고 재능 있는 사람이 범하기 쉬운 죄를 말하는데, 그리스 비극에서도 보면 주인공이 멸망하는 것의 원인이 이 휴브리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휴브리스는 자신의 과거 경험이나 능력만을 절대적 진리로 믿고, 주변 사람들의 생각이야 어떻든, 또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든 상관없이 자신이 과거에 했던 방식대로 일을 밀어붙이다가 실패하는 사람들의 부질없는 오만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휴브리스란 말은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 쓰이던 말이었는데,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를 바꾸는데 성공한 창조적 소수가 그 성공으로 인해 교만해져서 남의 말에 귀를 막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다 판단력을 잃게 되는 것을 가리켜 휴브리스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모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엄마의 품에 안겨 잠든 아기의 모습, 그 모습을 보면 말할 수 없는 평화, 평안을 느낍니다. 영유아들을 보면 엄마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실제로 아기는 엄마 품에 있기만 하면 전쟁이 나도 지진이 나도 잠을 잔다고 합니다. 젖 뗀 아기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이가 자라서 이제 젖을 떼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배가 고팠던 아기가 엄마의 젖을 실컷 먹고 나서 배부르게 되어 엄마의 품에 안겨 그대로 잠이 든 모습을 말합니다. 배불리 먹고 엄마의 품에서 잠든 아이, 그야말로 평화와 평안 그 자체입니다. 이 엄마의 품은 그래서 신비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저는 페이스북에서 무호흡 상태인 미숙아가 엄마의 품에 안겨 심리적 안정을 취하자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위 캥거루 케어라고 하는데 이 엄마의 품이 아이한테는 좋은 환경의 인큐베이터보다 얼마나 좋은 치료제인지 그 효과가 참 신비스러웠습니다.

 

 

'말씀과 사유로의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범하는 교만의 예  (0) 2019.12.30
교만  (0) 2019.12.28
믿음위에 반석을 세우자  (0) 2019.12.23
착함과 믿음의 관계는...  (0) 2019.12.22
우울증  (0) 2019.12.18

염려,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이 두려움을 호흡하며 살아야 합니다. 수험생은 대학에 떨어질까 두렵고, 취업준비생은 이력서가 거절당할까 두렵고, 취업을 해도 쫓겨날까 두렵고, 사업가들은 부도가 날까 두렵고, 부모들은 자식의 방황이 두렵고, 가난한 사람은 매일매일 끼니를 어떻게 해결해야할까 두렵고, 어떤 사람은 나라일 걱정, 세계 경제까지 걱정하고 두려워합니다. 매일매일 재난이 날까 두렵고, 안전사고가 날까 두려워하며 걱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작은 것부터 큰일까지 두려움이 두려움을 부르고 급기야는 병적인 증상이 나타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대인이 우울증에 걸리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길은 믿음뿐입니다. 우울증은 감기 같은 것이니 약을 먹으면 치료가 된다고 현대의학은 말하는데 저는 우울증은 믿음 있는 설교한편 들으면 낫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설교가 아니라 증언을 들으면 낫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저의 간증이기도 합니다. 저는 약 먹기를 참 싫어합니다. 저는 기분이 우울해지면 은혜로운 말씀, 재미있는 목사님 설교를 찾아 듣습니다. 믿음을 잃지 않으려는 제 노력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저절로 충만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있는 간증을 들을 때, 은혜로운 말씀을 들을 때 재충전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움, 문제를 만났을 때, 두려워하느냐, 믿음으로 극복하느냐는 자신의 선택의 문제이고 무엇을 바라보느냐의 문제입니다.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문제를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믿음의 반석위에 집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으로 담대한 신앙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생의 어려움을 만날 때 담대하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담대한 믿음, 성경인물 속 인물들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가능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반석의 기초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위에 굳건히 서면 우리의 인생도 더욱 견고해지고 단단해질 것입니다.

 

 

 

'말씀과 사유로의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만  (0) 2019.12.28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모습  (0) 2019.12.26
착함과 믿음의 관계는...  (0) 2019.12.22
우울증  (0) 2019.12.18
내향성은 열등한 것인가?  (0) 2019.12.17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믿음이 좋은 사람하면 교회오빠, 교회언니를 떠올립니다. 세상에서는 순하디 순하고 착해서 별 매력이 없는 사람을 그렇게 부릅니다. 이미지가 그래요. 그런데 이것은 오해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믿음이 좋다는 이미지가 잘못되었어요. 성경에서 보면 믿음이 좋은 아브라함, 다윗, 야곱 등을 보세요. 착하다는 느낌보다는 참 담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믿음의 삶은 무모할 정도로 두려움이 없는 것, 담대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기의 독자도 바치는 믿음인데 어떻게 보면 무모하기까지 해 보입니다.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자기 제삿밥처럼 여겼어요. 너무너무 담대합니다. 야곱이 착합니까, 하나님의 사자와 단판 씨름을 벌인 오기의 사나이입니다.

 

그렇게 보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착한 것, 성실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없이 담대한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착한 것, 물론 그것도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지만 성경인물들을 분석해보면 그들이 믿음으로 한 행동들은 보면 고난, 도전이 다가와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행동하는 것이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말씀과 사유로의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모습  (0) 2019.12.26
믿음위에 반석을 세우자  (0) 2019.12.23
우울증  (0) 2019.12.18
내향성은 열등한 것인가?  (0) 2019.12.17
인생의 내리막길과 오르막길  (0) 2019.12.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