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와 느린 춤을>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의 여기자이기도하고 토크쇼 진행자이기도 했던 여자인데, 이 여자의 남편이 58세에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린 것입니다. 이 여성은 직장을 그만두고 20년 동안 남편을 간병한 것을 에세이식으로 써서 발표했는데 이것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건강에 대한, 특히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경각심보다는 이 여성이 사랑하는 남편을 간병하면서, 간병이라기보다는 전쟁 같은 삶을 살면서 그녀의 희생에 대해 감동을 느꼈습니다. 기억을 잃어가 소통도 불가능하고 때론 발작을 일으켜 자기를 공격하기도 하는 사람을 돌보면서 진작 자기는 10년 동안 건강진단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산 삶을 그녀는 어떤 낯선 이와 느린 춤을 추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남편 옆에서 남편 하비는 인생에서 중요한 모든 것, 사랑, 신뢰, 가족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이가 고맙다 라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희생의 가치에 대해 새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어느 날 같은 침대에 누워 자던 남편이 이 아내에게 왜 자기 침실에 누워있냐고 대뜸 그러는 행동을 합니다. 이 아내가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는 결혼한 사이라는 것을 그 남편에게 인식 시켜줘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 남편이 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아내의 희생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당신이 정말 내 아내라면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당신에게 너무 가혹해요

남편도 남편이지만 그 아내의 인생은 뭔가요. 그 간병하는 과정을 책을 통해 보면 가혹하다는 표현이 나올 만도 합니다. 어쨌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의 선택은 자기희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종말이 그 언제인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므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기다리는 동안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 때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이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박국에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까 욥의 이야기를 할 때 이미 제가 말했듯이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고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가 온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이 잘되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그 믿음으로, 그 기대감으로 꿋꿋이 살아가는 자, 이러한 믿음으로 현실을 헤쳐 나가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자, 그러한 사람이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악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할 지, 아까 잠간 언급했는데, 우리 각자가 믿음 안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항이든, 무저항이든, 망각이든 중요한 것은 각자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선하신 계획이 있다. 이것을 믿고 현실 속에서 당당히 살아갈 때 그것이 good 크리스천이 되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들은 하박국은 3장에서 이러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유명한 고백입니다. 저는 하박국에서 이 구절만 외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로 된 찬양이 있습니다. “무화가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리라

이 찬양을 하면 저절로 기뻐집니다. 나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기쁨을 솟게 합니다.

그래서 하박국도 하나님이 악인을 결국 패망하게 하시는 권선징악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믿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즉, 악에 형벌을 내리고 나에게 보상을 해 줄 것이라는 그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실은 달라진 것도 없고, 악은 여전히 흉흉하고 내가 비록 아무것도 없고 나의 환경은 열악하여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한분, 하나님 존재 자체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런 고백을 해보셨습니까. 저의 신앙고백을 하자면 저는 이러한 하박국의 신앙고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조금씩 이해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그 존재 자체로 기뻐하는 것. 이제 저한테 조금 가능해진 것 같습니다. 내 주변 환경이 다 말라죽어가고 흉흉하지만 구원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가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존재자체를 환경과 물질로 바꿀 수 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하나님이라는 분을 그 소중함으로 비교했을 때 나에게 천억의 보석의 가치보다 더 귀하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천억의 보석을 소유하고 있는 지금 내게 10만원 용돈이 없다고, 집 한 채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1억이라 했을 때, 그것을 날려버렸다 한들 내가 슬프겠습니까. 내 기쁨이 사라지겠습니까.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그 보석으로 인하여 나는 항상 부자이고 기쁜 것입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구원, 구원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 한 분으로 나는 어떠한 일을 당해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악한 세력이 나를 짓누르고 있습니까. 고난 중에 계십니까. 구원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향하여 선하신 계획을 갖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과 동행하십니다. 그 믿음을 갖고 우리의 현실을 당당히 꿋꿋이 그리고 기쁨으로 맞이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화 속에서 한 가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는데, 우리는 악인이 잘 되고 성공하는 것 같고, 착한 사람은 잘 못되고 비참하게 되는 결말을 보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영화 속에 이 생각이 좀 시원해지는 힌트가 있었습니다.

영화 속에 사회에서 출세한 못된 아들이 하나 나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냉정하냐면 자기 여자 친구가 암에 걸렸다고 고백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같이 아파하고 걱정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병원이라도 같이 가주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은 그동안 즐거웠어, 여기가 끝이야. 하면서 바이 바이하고 갑니다. 이 여자가 자기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했는데도 얼마나 냉정한지 매몰차게 돌아섭니다. 이 남자에겐 이 여자가 더 이상의 이용가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여자 친구가 배반감에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그런데 이 아들의 엄마가 치매에 걸려 병원에 있었습니다. 이 못된 아들은 병원에 가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악랄하게 산 나는 이렇게 출세해서 잘 나가고 있는데 그렇게 착하게 산 엄마는 치매에 걸려 이러한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엄마가 무의식중에 이런 말을 독백합니다.

가끔 악마는 사람들을 아무 어려움 없이 살게도 하지, 왜냐하면 악마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을 싫어하거든.”

, 악인을 그대로 놔두는 것은 악마는 그 악인이 하나님에게 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악마의 짓은 인간이 악행을 저질러도 잘 나가도록, 그래서 결국 하나님 찾지 않고 회개가 없도록 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악인이 잘 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에게 갈 수 없으니 망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 말이 정말 통쾌했습니다. 악마는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악인이 잘나가는 것 같이 보여도 그의 종말은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고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에서 내린 하나님의 응답, 결론도 이것입니다. 악인은 종말을 맞는다. 심판을 받는다. 그런데 기다리라.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 이것이 하박국에서 이야기하는 유명한 진리입니다. 악인은 영원히 잘되고 번창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성경에서도 악인은 하나님께 사용되기도 하지만 최후는 비참한 말로입니다. 사울, 자살하였습니다. 히틀러, 권총으로 자살하였습니다. 바로, 말로가 비참했습니다. 온갖 재앙에 장자까지 죽었습니다, 하박국에 나온 바벨론도, 거대한 재앙으로 망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까요. 어떤 신앙적인 답을 제시해 주어야 할까요. 여러분들 모두 답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의 답은 고리타분할지 모르지만 욥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 다 아시죠, 욥은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 잘 믿었습니다. 악마의 장난으로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자식을 잃은 것도 엄청난 상처인데 말로 표현할 수 가 없습니다. 인간으로 그러한 상처를 어떻게 감당해 내나 저는 생각만 해도 억울한 감정이 솟구칩니다. 그런데 결말은 어떻게 흘러갑니까. 욥이 회개합니다. 하나님도 인정한 의인이었고, 하나님 잘 믿었던 크리스천이 당하고, 당하고 별 비참한 꼴을 다 당했는데 그러한 하나님, 원망할 만도 한데 그런 하나님 앞에 무릎 꿇습니다.

욥이 이제는 절망스럽고 답답해서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괴로워 할 때, 마침내 하나님이 입을 여십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신 것이, 욥기 38장에 나오는데, 다 읽어드릴 순 없고 내용을 요약해 드리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한마디로, “너 이거 아니, 너 이거 할 줄 아니, 너가 감히 나의 영역을 나의 신비의 영역을 알기나 해,” 이런 것이었습니다. ,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어디 있었느냐, 바다를 가둔 자가 누군지 아냐, 새벽이 오고 아침이 오게 명령한 자가 누구냐. 네가 사망의 문을 아느냐, 광명과 흑암을 누가 정하는지 너 알고 있냐. 광야에 비를 내리는 사람이 누구이냐,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네가 번개를 치게 할 수 있느냐.”

욥은 이 말씀을 다 듣고 한마디로 옴매 기죽어 입니다. 욥은 이 물음들 앞에서 고개를 숙입니다. 온 우주 삼라만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광대한 섭리를 헤아리기에는 턱없이 작은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주제파악을 한 것입니다. 한치 앞도 모르고, 무엇이 선하며 무엇이 악한지를 판단할 능력도 없는 인간이 어떻게 감히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덧셈, 뺄셈, 산수 셈하는 초등학생이 고등수학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별똥별 왕자님, 공주님 그림을 그리는 유치원 아이가 유명한 화가와 조각가가 평생을 통해 완성해낸 정교하기가 이를 데 없는 명화와 조각품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젖을 물고 있는 갓난아기가 때론 젖을 떼며 혼을 내는 엄마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런 것처럼 욥도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는 너무 어리고 또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회개하고 나니 욥에게 축복이 쏟아집니다. 이것의 욥기의 결말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악한 사람을 그대로 놔두시는 하나님이 밉고 싫지만, 악을 왜 허용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하나님의 신비이고 우리가 판단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있으려니 그렇게 믿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방법을 섭섭해 하면, 어떻게 보면 악을 사용하시는 것이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그 섭섭함이 상처로 남고 쓴 뿌리가 되어서 우리 내면에 남게 되면 우리가 악마가 되는 것입니다. 악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에는 항상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섭섭함, 나의 내면의 상처, 쓴 뿌리가 아 정말 하나님 싫다, 그래 아니야 하나님은 본래부터 없는 거야로 변하는 것입니다.

<신은 죽지 않았다>(God's Not Dead)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크리스천 새내기 대학생 1학년과 철저히 무신론자인 철학과 교수가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가지고 멋진 승부를 벌이는 영화였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라는 측의 변호사는 크리스천 새내기, 검사는 철학과 교수, 배심원은 강의를 듣는 대학생들이었습니다. 영화 결말은 신은 죽지 않았다(God's not dead)였고 모두 기립박수였습니다. 이 한편의 영화에 중요한 신학적 주제에 대한 답이 다 나왔습니다. 자세히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 저는 거기서 철저히 냉정하고 못되게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그 철학과교수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이 철학자가 무신론자가 된 연유에는 아픈 상처가 있었습니다. 이 교수가 12살 때, 크리스천이었던 엄마가 암에 걸렸습니다. 이 어린 아들은 애절하게 엄마가 죽지 않게만 해주신다면 뭐든지 다하겠다고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부터 I hate God이 되었고, 이 교수에게 지식이 들어오면서, 이제는 하나님은 죽었다, 하나님은 없다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앞장서서 증명하는 철저하게 무신론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저도 제가 아시는 분 중의 딸이 시한부였는데, 이 딸을 고치기 위해서 사방팔방 애쓰시다가 이 분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서는 금식기도를 하면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말을 듣고 금식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루, 이틀, 삼일. 그렇게 20일을 금식 기도하다가 못 버티고 기도를 멈췄습니다. 그러나 딸은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런 하나님 믿기 싫다. 아 하나님 싫다. 결국 하나님은 본래 없었다 라면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러한 악을 허용하실까요. 이 주제에 대해 답을 하기 전에 우리는 이러한 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이것 또한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될 것입니다.

본회퍼라는 신학자이며 목사는 악에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히틀러라는 악마를 암살하는 계획에 가담하였습니다. 목사였는데도 폭력에는 폭력으로 끝까지 저항하고 싸우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또한 간디라는 지도자는 무저항, 비폭력으로 악에 대항했습니다. 평화주의로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 힘이 없는 약자들은 저항도 무저항도 힘겹습니다, 당하고 견디고 당하고 견디고. 그러다 바위에 계란을 치는 것이지하면서 자포자기한 채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이 악에 대항하는 방법은 망각입니다. 세월 속에, 시간 속에 묻혀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이 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하박국은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악한 세력마저도 그 분의 계획을 성취해 나가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 유다 백성 중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징계하기 위하여 거대한 세력 바벨론을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러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시는 과정에 있어서 악한 세력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보십시오, 형제들의 계략으로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간 뒤, 주인 아내의 음모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의 악행은 요셉을 더욱 연단시켜 마침내 하나님의 큰 계획을 이루게 됩니다.

다윗과 사울을 보십시오. 질투심으로 사울은 다윗을 몇 번이나 죽이려 합니다. 그 다윗의 살아남으려는 사투가 다윗의 세력을 키우고 지도자로서 단련시켜 결국 다윗은 왕이 되지 않습니까.

바로 왕을 잘 아실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몇 번의 기적과 재앙이 이집트에 내려졌는데도 바로는 마음이 더욱 완악해져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바로왕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애굽이라는 나라는 절대 권력을 지닌, 세계를 지배하던 나라였습니다. 그런 애굽의 왕에게 천하 만물의 모든 능력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고 그런 왕을 무릎 꿇게 한다면,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나라에 떨쳐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7:5).

하나님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악한 세력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신앙생활하면서 내가 부당하게 당한다고 생각했을 때, 사람들이 나를 조롱할 때 인내하고 이겨나가는 방법도 하나님이 나를 단련시키기 위한 것이겠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나의 수련의 한 방법이야 라고 나름 해석하면서 견뎌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습니다.

 

하박국 15절부터 11절을 보면, 이 악한 세력이 어떤 정도인지 그 표현이 나와 있는데, “사납고 성급한 백성, 두렵고 무서우며,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이리보다 사나우며,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 같으며, 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 이런 말들이 열거되는 데, 한마디로 짐승 같은 세력이며, 제일 중요한 말은 이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들의 힘을 믿는 자들, 이러한 사람들이 악한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 살면서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부주기수로 만나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 경험, 거의 모두 있으실 것입니다. 권력과 힘으로 제압하고 누르고 복종하지 않았을 때는 폭력을 휘두르고.

우리의 역사의 현실만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힘이 없을 때 일제로부터 강점당한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세계역사 속에서도 희대의 악마인 히틀러에 의해 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유대인이 죽었습니다. 뉴스에 보면 폭력, 살인, 사기 연일 보도 됩니다. 그렇다고 악이 나와 상관없는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터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상사, 일의 효율성만 가지고 판단하고 나를 인격적으로 모욕할 때, 악의 축으로 느껴집니다. 여자라고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을 일삼는 힘을 가진 남자들, 악의 축으로 느껴집니다. 나에게 가진 재산 전부를 사정이 딱해 빌려줬는데 오리발을 내밀고 값지 않을 때 그 사람도 악의 축으로 느껴집니다. 사회에서, 일터에서 심지어 교회에서도 힘을 가진 사람이 그 힘을 만용할 때, 그리고 그 힘에 붙어서 그 힘에 아부하고 나를 조롱하고 누르려할 때, 그 사람들 악의 축으로 느껴집니다.

 

 

우리의 도덕의식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권선징악에 대해 잠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도덕의식의 밑바탕에는 권선징악의 사고가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흥부전, 심청전, 콩쥐 팥쥐 같은 동화와 서양의 신데렐라,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소설은 착한 사람은 결국 잘되고, 나쁜 사람,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결과를 보여주는 내용들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드라마도 이 권선징악의 구조가 대부분입니다. 사람들이 이 구조를 갖고 있는 드라마에 열광하고 통쾌해 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나 지금이나 착한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고 악한 사람은 징벌을 받았으면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 우리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로 소원하는 것일 겁니다. 이것은 아이들의 교육에도 꼭 필요하며 그래야지 아이들이 삐뚤어지게 안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현실에서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권력을 가진 악한들,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들이 징벌 받는 것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얻게 됩니다.

어쨌든 인생이 힘들고 어려워도, 이 드라마들처럼 악인이 처벌받고 착한 사람이 헤피 엔딩만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니체라는 철학자는 이것을 비웃습니다. 니체는 우리의 도덕의식의 바탕에 보상과 형벌이 있다고 믿는 것조차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니체가 예를 든 것이 이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보상을 기대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도덕의식의 바탕에는 보상과 형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니체의 책을 독어원어로 읽고 있는데, 물론 번역서의 도움을 받지만, 여러분도 니체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반기독교적인 글을 쓴 철학자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반 기독교적이지만 니체의 생각은 우리의 현실을 잘 꼬집어 주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권선징악을 믿고 있지만 어떤 때는 니체처럼 보상과 형벌이 없다고 믿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그렇습니다. 악한 일을 행하고도 멀쩡히 잘 살며, 권력을 휘두르는 자가 더 떵떵거리며 잘 사는 것을 보면, 악한 자가 꼭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반면 선하게, 착하게 사는 사람은 가난과 질병으로 고난을 받으며 사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보상이 온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서두를 엉뚱하게 권선징악, 보상과 형벌이라는 키워드로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하박국 1장에서도 하박국이 하나님에게 질문하는 것이 왜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시냐는 것입니다. 악의 문제는 고난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으로 신학적으로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선 이런 질문이 나온 배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박국당시 시대상황은 요시야 왕의 부흥이후에 요시야 왕이 죽자 유다의 통치자들이 더욱 악해져 율법 책을 태우고 의인들이 큰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악한 시대에 보내진 하박국 선지자는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 하나님 앞에 탄식의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 중에 언급된 말이 간악, 패역, 겁탈, 강포, 변론, 분쟁, 불의 이러한 삭막한 말들이 나옵니다. 이러한 일들이 유다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2000년도 더 전인 옛날이나 지금이나 악하기 그지없는 것 같습니다. 하박국은 왜 이런 일들이 유다에 일어나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 탄식을 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하박국을 더욱 괴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답변은 갈대아인을 일으켜 악한 유다를 징벌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갈대아인은 바벨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 거대한 악한 세력을 일으켜 이 유다를 징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박국은 더 큰 고민을 호소합니다. “악인을 멸하기 위하여 더 큰 악인을 보내는 것이 옳으니이까?”하고 하나님께 반문합니다. 한 마디로 왜 더 큰 악을 허용하시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이 거대한 악을 허용하시고 악인이 의인을 삼키고 괴롭히는 것을 내버려 두시는 것, 이것에 대한 이유, 혹시 이것이 기도의 내용이었던 분이 우리들 중에 있지 않으십니까. 악에 의하여 고통당하신 분, 고난을 겪으신 분, 누구나 궁금해 할 질문입니다. 이 악한 세력이 나와는 상관없는 먼 존재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요셉은 고난이 왔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었습니다. 범인들은 그 꿈을 개꿈 정도로 취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요셉은 그 꿈에 자기만의 의미부여를 통해 품고 품고 또 품어 그 꿈이 실제화 되기까지 믿음으로 견디어 나간 것입니다. 그 꿈이 고난의 저 밑바닥을 헤맬 때 요셉을 붙잡아 준 정신적 끈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에 자신은 특별하다는 정체성을 키워나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깟 고난이 전혀 요셉에게는 힘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별함에 대한 자신의 정체성,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자아 존중감의 높이만큼 그는 고난에 대해 긍정적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마침내 꿈을 이루고 개인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귀한 일이 됩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은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밖에 주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신뢰가 우리를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이겨나가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가진 돈의 소유 정도, 학벌 정도, 외모의 수준 정도에서 찾으려고 할 때 우리는 항상 패배할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의 끈을 하나님과 연결시킬 때, 보다 더 높은 꿈을 향해,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기대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현실은 보잘 것 없더라도, 언젠가는 우리를 통해 이 땅위에 펼쳐질 위대한 일로 인해 우리의 정체성이 누구로부터 왔는지 증명되어질 것입니다.

 

 

 

성경의 고난을 당한 다른 인물들을 보면 모두 하나님께 한마디 합니다. 욥은 극심한 고난에 자신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성경에 보면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3:1-3). 이런 말들이 계속됩니다. 자신이 태어난 걸 저주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 나 죽여주세요. 살고 싶지 않아요이런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극심한 고난을 당하면 이런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전투적이었습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원수에게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소서.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구구절절이 하나님께 싸워달라고 호소하는 것이 나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와 직접 씨름했습니다. 대놓고 한마디 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보통 고난을 당하면, 고난을 이긴 성경인물들도 자신을 저주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아니면 원수를 갚아달라거나 아니면 호소하거나 매달리거나 여러 가지 반응들이 있습니다.

즉 이것은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고난은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그 어떠한 반응을 했다는 것이 성경에 안 나오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형통하였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고난의 특징입니다. 요셉은 정말 억울한 고난이었는데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신세한탄하거나 자신을 저주하지도 않고 그저 그는 적극적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고난에 대해 요셉의 태도는 긍정적이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인생의 고난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반응하는 것은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우리가 성숙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고난에 대한 반응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처럼 고난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고난 다 피하고 싶어 합니다. 견디다 못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자신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는 모든 고난을 그대로 맞닥뜨리고 성실히 긍정적으로 대처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 거고 그러니까 요셉이 형통하게 된 거고

그러니까 모든 것이 기회가 되어,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뤄

요셉이 마침내 애굽의 총리까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뿐만 아니라 기근에 허덕이는 애굽 나라와 이웃나라들까지도 구원하는 역사적인 일을 행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요셉의 성공신화가 남긴 첫 번째 요인을 꼽으라면 고난에 긍정적으로 대처하라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끝이 있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 이 힘든 것이 언제 끝나나 생각하고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기도 하는데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고난은 언젠가는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서 피하기보다 아예 고난을 적극적으로 받아버리면 훨씬 더 긍정적인 에너지가 나올 것 같습니다. 욥이 고난을 엄청나게 받았지만 그 고난의 끝은 있었습니다. 욥이 감당할 수 있는 고난을 다 받고나서 그 다음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의 고난의 량을 다 받고 나서 주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열매가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요셉도, 다윗도, 야곱도, 예수님도 고난을 이긴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 죽음을 맞이했고, 노년이 힘들었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을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 고난이라고 하는데 다르게 생각하면 어쩌면 축복입니다.

고난을 피하려 하지 말고 고난을 기쁘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 이것이 오늘 저의 증언의 핵심입니다. 피하면 똑같은 고난을 또 받습니다. 제 경우는 그렇습니다. 피하고 피했는데 똑같은 고난을 또 받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몰릴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기회로 삼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때도 피하면 자신없어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장성한 분량의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어쩌면 제가 말하는 고난의 의미는 아주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나에게 맡겨진 직무, 사명, 나에게 닥친 도전, 이 모든 것들도 고난의 의미 속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나의 사명, 도전 앞에서 피하고 피하기만 하면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할 말도 없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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