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고난을 당한 다른 인물들을 보면 모두 하나님께 한마디 합니다. 욥은 극심한 고난에 자신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성경에 보면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욥3:1-3). 이런 말들이 계속됩니다. 자신이 태어난 걸 저주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 나 죽여주세요. 살고 싶지 않아요” 이런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극심한 고난을 당하면 이런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전투적이었습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원수에게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소서.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구구절절이 하나님께 싸워달라고 호소하는 것이 나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와 직접 씨름했습니다. 대놓고 한마디 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보통 고난을 당하면, 고난을 이긴 성경인물들도 자신을 저주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아니면 원수를 갚아달라거나 아니면 호소하거나 매달리거나 여러 가지 반응들이 있습니다.
즉 이것은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고난은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그 어떠한 반응을 했다는 것이 성경에 안 나오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형통하였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고난의 특징입니다. 요셉은 정말 억울한 고난이었는데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신세한탄하거나 자신을 저주하지도 않고 그저 그는 적극적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고난에 대해 요셉의 태도는 긍정적이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인생의 고난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반응하는 것은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우리가 성숙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고난에 대한 반응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처럼 고난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고난 다 피하고 싶어 합니다. 견디다 못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자신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는 모든 고난을 그대로 맞닥뜨리고 성실히 긍정적으로 대처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 거고 그러니까 요셉이 형통하게 된 거고
그러니까 모든 것이 기회가 되어,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뤄
요셉이 마침내 애굽의 총리까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뿐만 아니라 기근에 허덕이는 애굽 나라와 이웃나라들까지도 구원하는 역사적인 일을 행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요셉의 성공신화가 남긴 첫 번째 요인을 꼽으라면 “고난에 긍정적으로 대처하라”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끝이 있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 이 힘든 것이 언제 끝나나 생각하고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기도 하는데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고난은 언젠가는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서 피하기보다 아예 고난을 적극적으로 받아버리면 훨씬 더 긍정적인 에너지가 나올 것 같습니다. 욥이 고난을 엄청나게 받았지만 그 고난의 끝은 있었습니다. 욥이 감당할 수 있는 고난을 다 받고나서 그 다음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의 고난의 량을 다 받고 나서 주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열매가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요셉도, 다윗도, 야곱도, 예수님도 고난을 이긴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 죽음을 맞이했고, 노년이 힘들었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을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 고난이라고 하는데 다르게 생각하면 어쩌면 축복입니다.
고난을 피하려 하지 말고 고난을 기쁘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 이것이 오늘 저의 증언의 핵심입니다. 피하면 똑같은 고난을 또 받습니다. 제 경우는 그렇습니다. 피하고 피했는데 똑같은 고난을 또 받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몰릴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기회로 삼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때도 피하면 자신없어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장성한 분량의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어쩌면 제가 말하는 고난의 의미는 아주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나에게 맡겨진 직무, 사명, 나에게 닥친 도전, 이 모든 것들도 고난의 의미 속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나의 사명, 도전 앞에서 피하고 피하기만 하면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할 말도 없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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