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런 정의 문화가 사라져가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 동정하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져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동정도 함부로 해서도 안 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MBA 과정을 통과한 동창이 동창회에 와서 자신이 대기업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동정을 표했습니다. 그 친구는 진심에서 표현했는데 그런데 그 친구는 지방대를 나오고 중소기업을 다니는 친구였습니다. 명문대를 나온 그 동창은 위로받기는커녕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방대도 간신히 졸업했고 영어도 못해서 변변찮은 중소기업에나 다니고 있는 친구가 동정을 보일 정도로 자신이 망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동창회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아무리 내가 실직자가 되어도 너희들의 위로나 받을 사람으로 보이니? 뭐 이런 거지같은 것들이 다 있어. 무능한 것들은 주제 파악도 못하지. 이제 아주 맞먹네.” 이러고 나갔답니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나 동정했다가 욕을 보는 일도 당합니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는 사람들은 충분히 우리와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만 동정을 표현해야 한다. 선의의 동정이 잘못했다가는 이처럼 예상치 못한 반발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런 사람은 더 동정해야 합니다. 그 영혼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긍휼은 현실의 가치를 따져서, 동일시 여겨졌을 때, 그때 동정심을 느끼는 동정이 아닙니다. 갑을 관계를 따져서 동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동창회를 박차고 나간 사람, 그 사람이 더 불쌍한 사람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사람은 긍휼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람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늘나라 가치를 모르면 대통령이라도 진정 불쌍한 사람입니다.
탈옥수 신창원을 아실 것입니다. 이 신창원이 교도소에 다시 수감되었을 때 이해인 수녀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창원이 잔인한 살인마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공과금 못 낼 정도로 가난했는데 하루는 공과금을 못 내었다고 선생님이 나가라고 망신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신창원은 삐뚤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선생님이 신창원의 가정형편을 알고 긍휼히 여겼다면 방법이 달랐을 텐데, 어쨌든 간에 선생님의 혐오를 드러낸 말이 신창원을 악마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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