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와 우정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관계, 친구는 어디까지 가능하고 어느 정도까지 거리를 두어야 하는 걸까요. 불교에서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불가원 불가근을 말합니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기독교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원형, 전형,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셨고 같이 먹고 마시셨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를 위해서 뜨거운 줄 알면서도 불길에 뛰어드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관간계에 있어서는 목숨도 버리는 희생과 헌신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급진적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이러한 기독교적 헌신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면 가정, 일터, 교회에서 그 누구와도 함께 어울릴 수 있고 그 누구와도 함께 먹고 마실 수 있고, 함께 고통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불편과 수고, 희생이 따라올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관계라는 말에 익숙할 것입니다. 관계와 공감이라는 말에 수긍하지만 그러나 우정이라는 말에는 왠지 낯설음을 느낍니다. 우정이라는 단어가 이미 고리타분한 언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런지요. 우정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맺는 관계가 더 이 시대에 맞는 세련된 언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SNS로 자신을 알려 관계망을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자신을 알려 그물망처럼 얻은 관계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지언정, 여기에는 정이라는 것이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갈 때 느끼는 정. 그 정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그러고 보면 진정한 인간관계는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식 방법에서 더 강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친구를 어찌 대면 불식하는 인터넷 관계망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을까요. 자신을 희생하면서 얻은 우정, 이젠 다시 이야기해야할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또한 본문 성경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들으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알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와 소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모든 것을 공유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삶을 공유하지 못합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친구는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신 비밀을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친구와의 관계에 있어서 소통하듯이 우리는 예수님과도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쌍방적인 관계입니다. 소통, 공유는 정말 중요합니다. 서로만 알고 있는 비밀이 있다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소통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이 소통이 결속력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 결속력의 매개체가 친구지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공유할 수 있는 비밀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서로 통하고 교회 교우들이 서로 통할 수 있는 것도 공유하는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뭔가가 우리를 결속시켜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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