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Fragment 이제는 21세기라, 21세기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드러내야 할 하나님의 이미지는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덕목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뭐가 있을까요.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성경의 인물 속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네 가지인데 바로 따뜻함, 착함, 당당함, 반듯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이미지를 좌우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이미지로 전도하면 전도도 잘되고 세상에 나가서도 승리하고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욕을 먹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이미지 전략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형상 닮은 이미지로 세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제가 성경에서 힌트를 얻은 인물은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이미지를 어떻게 드러내고 그들의 무엇이 하나님 닮은 것인지 그들의 비하인드 스토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 말고 잘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 느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의 이미지, 따뜻함 우선 아브라함은 대표적인 이미지가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훌륭하지만 물론 인간적인 실수도 했지요. 그러나 그는 참 따뜻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씨가 없자 엘리에셀이라는 자신의 종을 상속자로 삼으려 합니다. 요즘에 이런 일이 있으면 따뜻한 이야기 훈훈한 이야기하면서 신문에 나고 매스컴에 났을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었냐면 종을 고향땅으로 보내 아들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데려오게 합니다. 며느리를 구하는 일을 직접 나서지 않고 종에게 의뢰합니다. 자신이 부리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정말 단단합니다. 참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도 참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고향 아비집을 떠날 때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고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을 때 먼저 땅을 양보하고 또한 롯이 다른 족속의 왕에게 사로잡혔을 때 훈련된 자 삼백십팔명을 거느리고 가서 조카 롯을 구하고 결국은 조카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되자 하나님께 의인이 50명이 있으면 됩니까, 45명이 있으면 됩니까, 그러다가 10명만 있으면 됩니까, 이렇게 끝까지 타협하는 끈질긴 기도를 한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정말 깊습니다. 요즘에 피를 나눈 가족도 해체되고 있는 판에 자신의 종에게, 자신의 조카에게 이렇게 따뜻한 사람 찾기 드뭅니다. 이삭의 이미지, 착함 이삭은 어떻습니까? 그의 대표적 이미지는 온유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착함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삭은 참 착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사건, 정말 큰 트라우마였을 텐데 그런데도 아버지께 순종합니다. 아버지가 결혼하라는 리브가라는 여자와 아무 말 없이 결혼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그런 일 당하면 아버지 슬슬 피하거나 가출했을 것입니다. 그 때 당시 아버지의 믿음, 아버지의 이상한 행동을 다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착함은 우물 사건에서도 드러납니다. 이삭이 부자가 되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이삭이 우물만 파면 거기를 흙으로 메우는 얄미운 짓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삭이 아무 대응도 하지 않고 다른 데로 옮겨가서 파고 또 파고 그렇게 네 번을 양보하고 결국은 다섯 번째에 가서는 아무다툼이 일어나지 않아 이삭의 지경이 거기까지 넓어지게 된 사건이 있습니다. 이삭은 전쟁을 싫어했습니다. 평화하려고 했습니다. 이삭의 착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야곱의 이미지, 당당함 야곱은 보통 끈기의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보다 야곱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당당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창세기 47장에 보면 요셉이 애굽 총리가 되어 요셉의 형제에 이어 아버지까지 상봉하고 이제는 아버지 야곱을 바로 왕에게 대면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야곱이 얼마나 당당한지, 우리는 보통 왕이 지금 난민의 처지가 되어온 야곱을 축복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이 상식을 뒤엎습니다. 야곱이 바로를 두 번이나 축복을 합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내 나그네 길이 백삼십년인데 짧은 세월이었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면서 당당히 말합니다. 기근을 피해서 양식을 얻으러 온 가난한 이주민이요 난민의 입장인데 조금도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아들 요셉이 애굽의 2인자 총리대신이었다 하나 여전히 바로는 왕이었고 그 당시 왕은 신으로 떠받들던 시대였고 그의 아들의 생명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들 요셉을 위해서라도 바로에게 굽신거려야 할 텐데 그런 모습은 전혀 없고 오히려 바로를 당당히 축복합니다. 야곱은 베짱이 두둑했습니다. 비록 가난했을망정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품위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바로에게 구차하게 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아들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아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들 잘 부탁 드립니다. 굽신 굽신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고 오히려 바로에게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야곱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 모습 속에서도 이러한 당당함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크리스천이라도 고난을 오래당하면 주눅이 들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저는 체험을 통해 이것을 알았습니다. 크리스천은 죽어도 당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이 나에게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내 목을 쥐고 있는 것처럼 세상에 비굴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당당하고 배짱 두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야곱의 세상에 대한 당당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요셉의 이미지, 반듯함 또한 마지막으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 말고 저는 요셉의 반듯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요셉의 삶이 얼마나 기구했습니까. 형제들의 계략으로 노예로 팔려 갔는데 거기서 이젠 좀 인정받으려고 하니까 이제는 그 집의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을 받습니다. 요셉은 그 때 당시 성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인 젊은 남자였습니다. 성에 대해 흔들릴 수 있는 나이였기도 했지만 노예였기 때문에 힘 있는 주인 아내를 감히 거절을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얼마나 반듯한지 이 유혹을 뿌리쳤을 때 자신에게 얼마나 불이익이 온다는 것을 알고서도 유혹을 뿌리치고 억울하게 옥에 갇혀 고생을 합니다. 옥에 갇혀 고생을 하면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감옥에서도 최선을 다해 성실하여 인정받고 형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요셉에게 기회가 오게 됩니다. 요셉은 정말 반듯합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애굽 총리가 되어서도 자신을 팔았던 형제들을 용서하고 끌어안고 우는 요셉을 보면서 이것이 하나님 닮은 이미지지 라고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21세기를 사는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 닮은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람 되길 바랍니다. 저는 그 이미지를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서 찾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따뜻함, 이삭의 착함, 야곱의 당당함, 요셉의 반듯함. 우리가 이 이미지를 닮고 이 성품을 닮아 갈 때 훌륭한 크리스천이 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새 시대의 전도전략은 이미지 전략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 닮으면 우리의 외모도 하나님을 닮아지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이미지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닮아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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