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교회공동체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신앙이 매개가 되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부자나 가난한 자나 어른 아이 모두 예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자녀라는 공동체 의식이 있습니다. 신앙의 색깔은 다르긴 하나 모두가 예수를 찾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소통, 공감, 위로가 일어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가끔 스님이 예배에 참석하거나 성경공부에 오시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일원이 되진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지식은 얻어갈 수 있을지 모르나 일단 대화가 안 됩니다. 그와는 소통, 공감, 위로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교회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예수님 때문에 생긴 공동체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다양하게 체험하도록 돕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있고 성찬이 있고 세례가 있고 각종 프로그램이 존재합니다.

특히 중요한 공동체 의식인 예배는 신앙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의식입니다. 의식으로서 만의 예배가 아니라 예배는 삶과 신앙 체험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영역입니다. 교회에는 예배도 있고 기도가 있고 찬양이 있고 말씀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증언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공동체에는 예수님을 체험하며 나온 삶의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그것을 대표하여 증언하는 때가 예배 때이고 이를 통해 소통과 교제가 일어나고 신앙고백이 일어나고 회심도 일어나고 신앙이 생성되고 성장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설교가 아니라 증언을 해야 합니다, 설교는 목회자의 말을 일방적으로 받아 듣는 행위인데 이렇게 되면 예배가 목회자의 독점물이 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목회자도 평신도도 자신의 신앙체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할 때, 예배를 통하여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고 평신도도 참여할 수 있는 예배, 그럼으로써 예배가 축제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증언은 이야기인데 요즘에는 이야기 신학이 대세입니다. 이야기는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고 거기에 고백도 있고, 규범도 창출하고 덕과 윤리를 세우는 것이 이야기입니다. 더 고상한 말로 해서 도덕적 가치, 성품, 도덕적 이상이 이야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성품을 개도하는 도덕교육에 효과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경험에 동참할 수 있고 그래서 공동체에 속한 사람으로서 동질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눈 예수이야기가 살아있는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이러한 살아 있는 신앙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성장하게 되고 우리만의 특별함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만의 매력을 갖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는 살아 있는 신앙이 활동해야 하고 그 신앙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알고, 살아냄으로써 증언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세대가 조그만 권위에도 저항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기독교에서도 순종이라는 말 충성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느새 사장어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유교적 전통과 군사정권에서 쓰던 말 같아 순종이라는 말이 요즘세대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엄연한 기독교적 신앙의 양식, 덕입니다.

그런데 이 순종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 중의 하나가 교회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신명기적 신앙을 너무 강조합니다. 너무 단순한 교리로 하나님을 복도 주시지만 저주도 주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합니다. 복과 저주라는 말로 간단히 요약되는 이 신앙은 신명기에서 뚜렷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신명기적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신명기 28장에 그 복과 저주가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직접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은 신명기적 신앙을 통째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저주받은 사람이 당하는 벌인 십자가의 형벌을 메시아라는 예수님이 직접 지심으로 축복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저주를 직접 져주시고 담당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것은 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즉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우리 자아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살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주의 무서운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평생 잊혀 지지 않을 아름다운 일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하늘나라 맛을 본 것입니다. 제가 어느 날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얼굴을 들었는데 마치 내가 천국에 있는 듯, 사람들이 다 천사로 보였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아름다운 자연 경치, 나에게 베푼 친절한 사람들의 얼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때 본 경험만큼 아름다운 모습이 없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천사로 보였을까요. 알고 보면 내 욕이나 하고 다니는 친구들이고 그냥 보면 그렇게 이쁘지도 잘생기지도 않은 사람들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는지.

하나님께서 내 기도 후 그 응답으로 하늘나라 맛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하늘나라는 이렇게 아름답다하고 그 맛을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 처음 믿었을 때 아름다운 간증이 참 많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그렇게 기도응답을 잘해주셨어요. 수련회 기도회시간에 한 시간 두 시간을 기도했는데 기도응답이 되지 않아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 저를 만져주시면 제가 기도응답으로 알겠습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그 순간에 누가 다가와 내 등을 어루만지며 기도해주는데 그 기도소리가 너무 아름답게 들리면서 하나님이 기도응답해주셨구나 혼자 감격하여 눈물 흘린 적이 있습니다. 내 음성을 듣고 계시는 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소름이 끼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기도해준 자매가 성령의 음성을 듣고 나를 꼭 찍어 해준 것이 아니라 그냥 다 어루만지며 기도하고 다녔을 수도 있는데 나는 너무 감동받아 울음을 터뜨린 것입니다. 그런 순수한 신앙의 추억들이 지금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제가 다닌 교회 대학부에 셀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 그룹은 좀 특별해서 한 주간에 있었던 일들을 간증하고 두 명씩 짝지어서 전도를 하러 나갑니다. 저도 제 파트너와 전도를 하러 나갔는데 한 여자가 길거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에겐 복음이 전해질지도 모르겠다 생각하여 용기를 내어 다가갔습니다. 우리가 조용히 다가가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면 다시 살 수 있어요.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거예요. 자신은 실연당하고 너무나 외로워서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어주기를 바랬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고 복음이 뭔지도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가 말을 걸어주었다는 것만으로 눈물을 뚝뚝 흘린 것입니다. 그 후 자살을 했을까요. 당연히 아니죠. 교회 나왔습니다. 생명이 살아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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